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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르르르르르- 일어나, 아침이다. 이 자식아 일어나 일...삑"
"버얼써 일어나서 다 씻었거든. 큭큭."
오늘부턴 고등학생이다. 그냥 고등학생이 아닌 제국고등학교 학생.
"이야-드디어 내가 이 교복을 입는구나, 으히힛. 크아~이 환상적인 핏 봐라. 크하하하하!!"
"태랑이 일어났니? 내려와서 밥 먹어."
"넷, 마마님!! 하하하하하"
설레는 마음에 잠도 자는 둥 마는 둥 했지만 전혀 피곤하지 않다. 입학식 할 때만 해도 꿈꾸는 줄 알았던 태랑이었다. 그랬던 그가 지금, 당당히 제국고 교복을 입었다. 사실 태랑은 스스로가 제국고에 갈 수 있으리라곤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제국고는 공부를 뛰어나게 잘 하거나, 아니면 돈이 엄청나게 많아서 기부입학이 가능한 아이들만이 갈 수 있는 특수고등학교이기 때문이었다.
제국고에 들어가면 원하는 대학은 거의 무조건 합격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기에 '제국고 입학'은 대부분 학생과 학부모들의 꿈이었다. 그런데 될 놈은 되는 것인지, 작년부터 제국고에 체육 특기생 제도가 생긴 것이다. 7년 동안 유도라는 한 우물만 팠던 태랑에겐 정말 하늘이 내린 기회였다.
"크크큭, 원창이 자식, 내가 제국고 간 거 알면 기절초풍 할 텐데. 크크큭."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태랑이 부엌에 내려왔다. 밥을 먹으려고 식탁에 다가선 순간, 태랑은 눈앞에 펼쳐진 놀라운 광경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우와, 이게 웬 진수성찬이야?"
식탁위에는 바늘 하나 꽂을 자리 없이 빽빽이 놓인 반찬들과 그 가운데 평소엔 한 번 구경하기도 힘든 특대갈비찜이 떡 하니 자리 잡고는 태랑을 향해 유혹의 손짓을 하고 있었다. 수박만 해진 눈으로 입을 쩍 벌린 채 넋 놓고 있던 태랑을 그 옆에서 정성스레 국을 퍼 담던 엄마가 촉촉한 눈빛으로 반겼다.
"우리 아들, 왔어? 엄마가 간만에 실력 발휘 좀 해봤어."
엄마가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로 말했다.
"강 씨 집안의 자랑, 강태랑! 어서 앉아서 많이 먹어."
어느 새 다가온 아빠가 태랑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촉촉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오빠, 여기 앉아."
올해 중2가 된 깍쟁이 여동생마저 촉촉하기 그지없는 눈망울로 태랑을 바라보며 직접 태랑의 의자까지 빼주었다.
"엄마, 아빠, 그리고 가영이까지......."
"많이 먹어, 제국고 학생 강태랑."
"크으-우리 아들이 제국고에 다 들어가고..."
"오빠, 진심 존경해."
감동의 쓰나미가 태랑네를 휩쓸었다.
"크으윽-다들.....정말 고마워. 열심히 학교 다닐게요."
사나이 태랑의 눈가엔 어느 새 그렁그렁 눈물방울이 달렸다.
"좋아, 오늘 저녁은 외식이다!!!!" 아빠가 벌떡 일어나 감격스럽게 외쳤다.
"우와-!!!!!!!!!!!"
*
"잘 갔다 와-!!!!!!!!!"
"사랑해, 우리 아들!!"
"장하다, 강태랑!! 화이팅!!!"
가족의 과한 배웅을 받으며 태랑은 발걸음도 가볍게 학교로 향했다. 흥흐응~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태랑만 쳐다보는 것 같았다. 제국고 마크가 잘 보이도록 태랑은 저도 모르게 가슴을 앞으로 쭈욱 내밀며 날듯이 걸었다.
남자새끼들만 버글버글 하다는 게 흠이지만, 뭐 어때. 이제부턴 타 학교 여학생들이 줄을 설 텐데. 큭큭
김칫국 사발로 들이마시며 상상의 나래를 펴다보니 어느 덧 저 멀리 제국고가 보이기 시작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태랑처럼 들뜬 표정으로 제국고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학생들이 보였다. 태랑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하긴, 제국고에 붙었는데 어떤 놈이 안 좋아하겠.....
순간 태랑은 입학식 날 본 한 녀석을 떠올렸다.
하얗고 유달리 곱상한 얼굴에 눈길이 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태랑의 시선을 잡아끈 건 녀석의 표정이었다. 주위 사람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좋아하는데 오직 그 녀석 혼자만 얼굴에 그늘이 진 채 전혀 기쁘지 않아 보였다. 엄마인 듯한 사람이 쳐다볼 때만 간간이 미소를 지었는데 태랑의 눈에는 그 미소가 마치 울기 직전의 모습 같았다.
".....이상한 녀석이었어."
중얼거리는 태랑 옆으로 번쩍거리는 고급 외제차 한 대가 지나갔다. 그리고 잠시 뒤 또 한 대, 또 한 대. 그렇게 하나 둘 지나간 외제차들은 줄지어 올라가 제국고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쳇, 보나마나 기부입학 한 놈들이구만. 찌질이들."
태랑은 1학년 6반이었다. 어떤 놈들이 같은 반이 됐으려나?
교실에 도착한 태랑은 흥분되는 마음으로 힘차게 뒷문을 열었다. 드르르륵!!!
순식간에 반에 있던 아이들의 시선이 태랑에게 꽂혔다. 7년간의 유도로 단련된 단단한 체격에 185의 키, 까무잡잡한 피부에 활동성 좋게 짧게 깎은 머리. 체격부터가 남다른 태랑의 모습은 반 아이들에게 가히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태랑이 교실 문을 열고 한 발짝 들어서는 그 찰나의 순간, 이미 학급의 서열은 정해진 듯 시끄럽게 떠들던 아이들은 입을 다물고 저마다 태랑과 눈이라도 마주칠 새라 얼른 고개를 숙이기 바빴다.
이런 일에 익숙한 태랑은 주위를 한번 크게 둘러보고는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창가 쪽 맨 뒷자리로 향했다. 그런데... 어라? 이미 누군가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때 그 녀석 이었다.
뭐야..., 같은 반 이었나...? 녀석은 태랑을 의식조차 하지 않고 시선을 창 밖에 고정한 채 몸을 비스듬히 기울이고 있었다. 뭔가 알 수없는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녀석이었다. 태랑은 잠시 머뭇거리다 그냥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에이, 봐줬다. 첫날부터 소란을 일으킬 순 없으니까.
그렇게 자위하며 주변을 둘러보던 태랑은 문득 다른 녀석들의 시선이 모두 녀석을 향해 있음을 알았다. 뭐야? 왜 다들....아, 하긴.
남자들만 버글거리는 칙칙한 교실에서 녀석은 단연 빛나고 있었다. 막 짜낸 우유의 표면처럼 뽀얗고 하얀 피부, 바람에 파르르 떨리는 긴 속눈썹, 하늘하늘한 체구......녀석은....예뻤다.
하....군대가면 비누 많이 주울 녀석이네...
괜시리 안쓰러운 마음에 태랑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드르르륵. 그 때 앞문이 열리고 중키에 마른 체구, 네모난 안경을 쓴 남자가 들어와 교탁 앞에 섰다.
"자, 주목. 오늘부터 너희들을 맡게 된 이창영이다. 내가 이 반을 맡은 이상, 다른 건 몰라도 수학만큼은 무조-건 1등이어야 한다. 내가 수학 담당이니까. 알겠냐?"
"에~~~~~~"
"자자, 시끄럽고, 도현수 있나?"
"네."
창가 쪽 세 번째 자리에서 한 녀석이 대답하며 일어났다. 약간 마른 체격에 제법 큰 키를 가진 녀석이었다.
"네가 오늘부터 이번학기 반장이다. 인사하자."
순간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차렷, 경례."
"감사합니다."
"그래, 그럼 수업 준비해라."
선생님이 나가고 학생들은 저마다 잡담을 하기 시작했다. 태랑은 바로 앞에 앉은 아이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야, 쟤 뭐냐?"
"어,어? 아, 쟤. 그 입학식에서 입학생 대표로 나갔던 애잖아. 뭐 수석으로 들어왔다던데."
"수석?"
제국고에 수석으로?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난다. 입학생 대표로 앞에 나가 글 읽던 아이. 그때는 마냥 들떠서 듣는 둥 마는 둥 했었지만. 길게 찢어진 눈이 인상적인 아이였다. 글을 읽다 가끔씩 미소를 지었는데 그럴 때면 정말 눈이 완벽한 반달이 되면서 눈동자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지금도 웃고 있네. 실없는 놈.
시간이 지나자 아이들은 꽤 서로 친해졌다. 성격 좋고 남자다운 태랑의 곁에는 어느 새 많은 무리들이 모여 있었다. 도현수도 주위 녀석들과 웃으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성격도 좋은가보네...쳇. 태랑은 눈을 돌려 창가 쪽을 바라봤다. 녀석은 여전히 혼자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묘한 분위기 탓인지 모두들 녀석을 힐끔힐끔 바라만 볼 뿐 선뜻 먼저 다가가 말을 걸지는 않았다.
흐-음, 말을 걸어볼까....?
원체 오지랖이 넓기도 했지만 태랑은 왠지 모를 호기심이 생겼다. 어떤 녀석일까나....? 태랑은 잠시 생각하다 용기를 내어 녀석에게 다가갔다.
"흠흠, 저기....."
"야, 그 자리 내가 좀 앉자."
엥? 웬 녀석들이 태랑의 앞을 가로막고 창가에 앉은 녀석의 주위를 에워쌌다. 한 명은 덩치가 크지만 작달막하고 다른 한 명은 상대적으로 길쭉하고 마른 편이었는데 어쩐지 감자와 고구마를 연상케 했다.
"야, 안들려? 여기 아까부터 내가 찍은 자리라고. 비켜."
감자처럼 생긴 녀석이 위압적으로 말했다. 가만히 창밖만 바라보던 녀석은 놈들을 한번 흘깃 쳐다보고는 다시 관심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저놈이 미쳤나, 뭔 배짱이야;;;;
태랑은 괜히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거 내가 나서, 말어?
싸움이 날 것 같았는지 어느 새 반 녀석들이 주위로 하나 둘 몰려들었다. 반 아이들의 시선을 의식한 듯, 감자는 좀 더 큰 목소리로 녀석에게 소리쳤다.
"이자식이 뜨거운 맛 좀 봐야 정신을-큭!!!!!!!!"
"??!!!"
순식간이었다. 창밖만 바라보고 앉아있던 녀석이 번개처럼 일어나 자기보다 덩치가 두 배는 더 큰 감자의 목을 정확히 가격했다. 실로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아름다운 발차기였다.
우당탕탕탕-
감자는 저 뒷문까지 굴러갔고 충격에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했다. 감자의 옆에 서있던 고구마 같은 녀석은 믿을 수없는 광경에 입이 떡 벌어진 채 굴러간 감자를 쳐다보며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있었다. 그 순간엔 태랑도, 반 아이들도 일동 정지한 채 고구마와 같은 표정으로 굳어버렸다.
".....시끄러워..."
약간 미성이었다. 일어서니 녀석은 생각보다 키가 꽤 컸다. 178정도? 태랑은 혼란스러운 가운데서도 녀석에 대한 관찰을 멈추지 않는 자신을 발견했다. 녀석은 고구마에게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
"....볼일 더 남았냐?"
차갑게 내뱉는 녀석의 말에 고구마는 최면에서 막 깨어난 듯"어, 어? 아, 아니, 아니야. 미안."
하며 후다닥 감자에게 달려가 아직도 정신 못 차리는 감자를 일으켜 교실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나가자, 녀석은 다시 제자리에 앉으며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다시 평화롭게 시선을 창밖으로 향하고 몸을 비스듬히 기댔다.
상황이 정리된 후에도 아이들은 마치 외계인이라도 본 듯이 한동안 정지 상태였다. 때마침 수업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아이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웅성거리며 자리로 향했다. 태랑도 자리에 앉았지만 혼란스러움은 정리가 되지 않았다. 뭐야....저 자식 완전 고수잖아? 뭔지 모를 안도감과 억울함, 배신감이 한 데 뒤섞여 태랑의 머리를 휘젓고 있을 때 앞자리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태랑의 귀를 잡아챘다.
"우와....저 자식 언제 저렇게 변한거야?"
엥? 태랑은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진원지를 찾았다. 얼굴에 주근깨가 있는 녀석이었다.
"야, 너 저 자식 알아?"
"어?" 주근깨가 놀라 되물었다.
"저 자식 아냐고."
"아....중학교 때 같은 반이었어. 그 때만 해도 완전 약골이었는데..."
"에?"
"진짜야. 중 2때 같은 반이었는데 저 자식 별명이 공주였어. 이쁘장한데다 혼자선 할 줄 아는 게 없는 애였거든."
미친...저 발차기를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냐...
"야, 저 녀석 이름이 뭐냐?"
"어? 어, 류 현."
류 현? 외자구만. 그래, 류 현이란 말이지.....어쩐지 재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
첫댓글 이거 먼가 예사롭지않은 소설이네영!!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여주도 아직 등장안한 ㅋㅋㅋㅋㅋ 기대됩니다!!
윗분의 말에 동감입니다ㅋㅋ 예사롭지 않은 듯! ㅋㅋㅋㅋㅋ 저도 기대합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