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다 (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본문은 율법으로 구원 받을 수 없고,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원인은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신 주님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해 십자가에서 구원하신 십자가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변해있었습니다. 해서“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하고 묻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전도를 통해 확실히 알았고 또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이단의 꾐에 빠져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해서 바울은 이런 그들을 어리석다고 책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질문을 하고 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2-3). 그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믿고 성령을 받아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믿고 성령을 받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습니다(고전 12:3). 그들은 믿고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들은 믿고 성령을 받아 고난과 핍박도 이겼습니다(갈 3:4-5). 그런데 어리석은 자리에 놓인 것입니다.
1. 믿음으로 구원 받은 사실을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설명했습니다(갈3:6).
하나님은 자식 하나 없어 낙심 중에 있는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상속자가 이와 같으리라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5하-6). 말씀하시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현재 자식 하나 없습니다. 그는 늙은 할아버지였습니다. 그의 아내 사라는 경수가 끊겼습니다. 이성적으로 자녀를 낳는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네가 낳은 상속자를 통해 뭇별과 같은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말씀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는 믿음을 보시고 감동하여 의로 여기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9절에서 믿음이란 단어가 7번 나옵니다. 이를 볼 때 의란 행위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 능력과 내 의지와 내 의를 포기하고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자신의 인간 조건을 넘어서서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구원 받은 것은내가 잘 나서 구원을 받고, 내가 도덕적으로 좀 의로워서 구원 받고, 내가 좀 훌륭해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을 만한 조건이 하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입니다. 우리는 행위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 받았습니다. 우리는 과거 죄의 노예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율법의 매임에서 풀려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정죄의식, 완전주의, 유교적인 체면에서 벗어나 믿음으로 자유와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율법에서 속량하셨습니다(갈3:10-14).
인생을 진지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선행을 통해 구원을 받고자 합니다. 이것이 지상 모든 종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사람을 향해 말씀합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니라”(갈 3:10).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받고자 수고하는 사람은 저주 아래 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율법을 행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십계명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십계명을 읽을 때마다 누가 감히 십계명을 다 지켰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 중에 그래도 최선을 다해 지켰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네가 최선을 다했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다”고 했습니다. 또 우리는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헤매지만 그래도 한 때는 잘 지킨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아홉 번 잘 하다가 한번 잘 못한 것, 인정하지 않습니다. 항상 지켜야 합니다. 10가지 중에 한 가지를 지키지 못해도 저주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100%를 요구합니다. 100 아니면 99.99점이나 0점이나 다 똑같이 처리합니다. 누구도 율법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은 양심을 통해 저주를 받습니다. 율법으로는 하나님 앞에 온전히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해서 갈3:11에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했습니다. 우리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없지만 믿음으로 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구원을 받고자 했을 때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진노의 관계, 원수의 관계, 심판의 관계, 저주의 관계였습니다. 율법의 요구는 “율법을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입니다(갈 3:12). 그런데 위에서 살펴본 대로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 없었기 때문에 인간은 심판을 받고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운명입니다.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인간을 속량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본문 갈3:13은 신명기21:23절을 인용한 구절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기록하고 있습니다.
‘속량’(엑세고라센) 이란 노예시장에서 사용되는 단어로, 몸값을 지불하고 되찾는다는 뜻으로 돈을 대신 값아 주고 노예를 해방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노예의 일정한 몸값을 지불하면 노예의 이마에 찍힌 종의 마크가 없어지고 자유인이 됩니다. 성경은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하)고 했습니다. 그런데 내게 내린 저주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끊어집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나는 저주의 근원이 아니라 복의 근원, 복의 통로가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것, 새로운 존재,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3. 예수님을 믿으면 내 저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저주로 옮겨집니다. (갈3:13)
나무에 매달아 죽이는 십자가형은 카르타고에서 민족반역자에게 사용하는 사형도구였습니다. 십자가형이 얼마나 참혹하지 1,000번 까무러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십자가형은 1,000번의 죽음의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십자가형틀에 못을 박을 때에도 손바닥이 아니라 신경이 다 모여 있는 손뼈에다 박습니다. 십자가형은 이렇게 잔인합니다. 십자가형이 너무 잔인하기 때문에 로마가 이 사형 제도를 받아들일 때 “아무리 극악무도해도 로마시민은 십자가형으로 죽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치욕, 저주, 패배, 어둠이기 때문에 십자가 문양은 로마 사람들과는 영원히 아무 상관없다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패배와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그 저주는 그냥 저주가 아니라 참혹한 저주였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아니 만민을 위하여 참혹하게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저주 받을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주님께서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실 때 로마 군인들의 무서운 채찍이 예수님의 등을 후려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손과 발목에 못을 박았습니다. 머리 위에는 가시관이 씌워졌습니다. 옆구리에 창에 찔려 피가 흘렀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의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이는 죄 아래 있는 인간을 속량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생명의 대속으로 우리를 구속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가계에 저주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제 저주는 나와 상관없습니다. 모든 저주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신 것입니다. 주께서 나의 저주가 되셨습니다. 내 저주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옮겨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 받으셨습니다. 14절에서는 이 저주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누리게 되는 복을 기록합니다. “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이신득의)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약속의 성취를 확증)
내 열심과 선행으로 죄 문제를 해결하고자 어리석음을 버리고 십자가 구속을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의 임함으로 내 저주가 주님께 전가되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는 내 저주는 주님께로 옮겨졌고 이제는 내 저주는 끝났습니다.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신 주님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