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말씀사랑 교회사랑 책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우크~
<2005년 11월 16일 고려신학대학원 수요기도회 설교>
진노 중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
본문 : 룻기 1장 1-5절, 16절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본문입니다. 많이 읽었으며 설교를 통해서 익히 들어온 말씀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이 본문을 설교하면서 주로 “룻의 신앙”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룻의 신앙을 본받자’ 라는 식의 설교들을 많이 들어왔을 것입니다. 사실 맞습니다. 룻의 신앙, 룻의 회심을 우리는 본받아야 합니다. 룻의 아름다운 신앙은 우리가 반드시 본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이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이 본문 뒤에 숨어계시는 하나님을 찾아보기를 원합니다. 과연 엘리멜렉의 가정과 룻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진노 중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대로 이 본문의 시대적 배경은 사사시대입니다. 그것은 룻기가 사사기 바로 뒤에 나오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BHS의 경우만 보더라도 룻기는 잠언 뒤에 나오기 때문에 단순히 순서만으로 사사 시대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본문의 1장 1절에서 시대적 배경을 잘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어떤 시대냐 하면 바로 사사시대입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입니다. 이 시대의 특성에 대하여 사사기서는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라고 사사기는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왕이신 하나님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을 왕으로 여기지 않고 살던 시대입니다. 어쩌면 오늘날의 우리 시대와 흡사한지 모릅니다.
본문에 나오는 엘리멜렉의 가정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름없이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엘리멜렉 가정은 과연 어떻게 자기 소견을 따라 행했습니까? 본문에 보니 “흉년”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흉년이 든 곳이 어딥니까? 일차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약속의 땅 가나안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입니다. 그런데 그 약속의 땅에 흉년이 들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겠다고 했던 땅에 흉년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어쩐 일입니까? 게다가 엘리멜렉 가정이 살던 곳은 “베들레헴”이라고 하는 곳입니다. 이 도시의 이름의 뜻은 히브리어로 “베이트 레헴”, 바로 “떡 집”(place of bread)이라는 뜻을 가진 지명입니다. 일반적으로 도시의 이름에는 다 의미가 있습니다. 서울의 유명한 동네인 압구정동, 그곳의 이름이 압구정동인 이유는 조선시대 영의정을 지낸 한명회의 호를 딴 정자인 압구정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압구정이라고 부릅니다. 대전의 경우 왜 대전입니까? 예전에 큰 밭이 있었기 때문에 “한밭”이라고 불렀고 그것을 한자로 바꾸어 “대전”으로 부른다는 것은 아마 다들 아시는 바일 것입니다. 이와 동일하게 떡집이라는 뜻을 가진 베들레헴은 풍요로운 도시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뜻을 가진 이름의 도시에 흉년이 닥쳤습니다. 과연 이 흉년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바로 하나님의 진노하심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으로 인해 내리신 하나님의 징계였던 것입니다. 갈렙처럼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는 고백을 하지 않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온전히 정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던 그들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진노하심이었습니다. 이러한 진노 가운데 엘리멜렉의 가정은 어떠합니까? 모압으로 도망을 갑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을 버리고 이방땅으로 도망을 가버리는 것입니다. 1절 하반부를 보면 한글 성경에는 “우거하였는데” 라고 표현하는데 NIV에는 “to live for a while"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2절 하반부에 보니까 ”거기 유하더니“ 라고 말합니다. NIV는 ”live there"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들은 이제 아예 그곳에 정착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버리고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징계를 피하는 것이 옳습니까?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우리가 받듯이 하나님의 저주도 받아야 합니다. 독일의 경건주의 신학자 필립 슈패너는 그의 저서 “경건한 열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성경에 따르면,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이러한 재앙들 가운데서 당신의 진노를 나타내고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재앙을 최악의 사태로 보지 않습니다. 실제로 나는 이 재앙들을 하나의 복으로 간주합니다. 왜냐하면 이 재앙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많은 자녀들을 보존하셨고 악한 것을 막아 주셨기 때문입니다.”1) 필립 슈패너의 견해는 매우 성경적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징계를 받음으로 징계 가운데 담겨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진노하심을 통하여 “나에게 돌아오라”고 하시는 주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엘리멜렉의 가정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징계를 피하여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진노하심은 더욱 가중해 집니다. 과연 어떻게 나타납니까? 3절을 한번 읽어봅시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 두 아들이 남았으며”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가족의 가장을 죽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하박국 2장 9절에서 말하기를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높은데 깃들이려 하며 자기 집을 위하여 불의의 의를 취하는 자에게 화 있을찐저” 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려는 자에게는 오히려 화를 내리실 뿐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진노 가운데에 그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하지만 엘리멜렉의 가정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또 다시 범죄하게 되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두 아들의 결혼입니다. 두 아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아내를 취하게 되는데 이는 신명기 23장 3절에서 모압과 암몬 족속은 이스라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말씀을 어긴 사건입니다. 그들은 결혼을 통하여 모압 여인을 그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버렸습니다. 엘리멜렉의 가정은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노 중에 당신의 영광을 위해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엘리멜렉의 가정 가운데 또 한번의 징계를 베푸시는데 그것은 바로 “태를 막으신 사건”입니다. 4절과 5절 사이를 잘 보시기 바랍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한번 보십시오. 나오미의 두 아들이 결혼하고도 10년이나 지났는데 아직 아이가 없습니다. 왜 아이가 없겠습니까? 그들이 부부관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성생활을 즐기기 위해서 피임을 하고 있었을까요? 자녀를 많이 낳던 시절에 왜 10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없었을까요?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진노 중에 드러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말론과 기룐을 죽이십니다. 이제 그 가정에 기업무를 자를 사라지게 만드십니다. 그리고는 나오미 만이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습니다.
사랑하는 원우 여러분~! 하나님은 진노 중에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신 분이기 때문에 진노 중에 그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우리가 보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그 영광을 위해 찬찬히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일이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많은 인간은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바로 엘리멜렉의 가정처럼 말입니다. 단 한번만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노하기를 더디하시는(욘 4:2; 나 1:3) 그분께서는 여러 가지 표징들을 통하여 당신의 진노하심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마치 이스라엘에게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우둔한 인간은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고 계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모습입니다. “불러도 대답없는 너”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진노 가운데 은혜를 베푸시고 계십니다. 진노 중의 은혜라뇨? 과연 정말입니까? 한번 보십시다. 과연 하나님께서 진노 가운데 은혜를 베풀고 계신지~!
사실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엘리멜렉의 가정에 나오미를 남겨두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노 중의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무엘상 2장 6절의 한나의 고백처럼 하나님께서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 분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엘리멜렉의 모든 가정을 다 죽이실 수도 있으셨지만, 나오미를 남겨두셨습니다. 5절의 말씀처럼 그 여인을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겨 두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기에서 그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더 큰 은혜를 그 가정에 베푸셨는데, 그것은 바로 한 사람의 회심입니다. 은혜 위의 은혜입니다. 룻의 회심이 바로 진노 중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 한번 1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오호라~! 어찌 이런 고백이 있을 수 있습니까? 룻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모압 족속의 여인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가 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사랑의 하나님입니까? 은혜의 하나님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룻이 본 하나님은 진노 중에 징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룻이 본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셨습니다. 진노하는 가운데에 그 시아버지를 죽이셨을 뿐 아니라 자기의 남편의 목숨마저도 가져 가신 분입니다. 룻이 본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입니다. 룻은 이것 이외에 본 것이 없습니다. 엘리멜렉의 가정을 통해서 신앙을 보았겠습니까? 천부당 만부당입니다. 엘리멜렉 가정이 하는 것을 보면 그들의 신앙생활이 뻔히 보입니다. 룻이 본 것은 신앙이 형편없는 엘리멜렉의 가정입니다. 이러한 가운데에 과연 회심이 가능합니까?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고 하는 신앙고백이 가능합니까? 가능합니다. 죄인을 회심케 하시는 하나님의 강권적이고 주권적인 역사와 은혜를 통해서 충분히 가능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 ‘축복’만 전하는데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저주도 함께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통해서도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이름을 위하여 지금도 구원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시 106:8). 하나님께서는 룻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노만이 아니라 진노 중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심으로 그녀의 입술을 통하여서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라는 놀라운 고백을 이끌어 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노 중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나오미가 남은 것과 룻과 같은 회심자를 허락하신 것이 바로 진노 중에 여전히 임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원우 여러분~!
이제 우리의 모습을 좀더 자세히 돌아보기 원합니다. 특별히 오늘은 우리 고신교회의 모습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우리는 엘리멜렉의 가정과 같지 않습니까? 진노 중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대학교 3학년 때이던 2002년 봄, 이른바 학교법인 고려학원의 부도사태를 맞이했습니다. 당시 저는 개인적으로 7월 경에 부산 서면교회당에서 있었던 전국장로회연합회에서 주최하는 공청회에도 참석해 보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부터 물론 대충 예상했습니다. 고신교단의 대응방식이 어떠할 지를 말입니다. 엘리멜렉의 가정과 똑같은 대응을 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금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는 것은 김해복음병원 직원들이 앞에 나와서 생계를 호소하는데 뒤에 앉은 장로님들은 욕을 하면서 “끌어내~!” 라고 외치는 소리를 제 귀로 직접 들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2002년 당시 저는 전국 SFC를 향하여 회개운동의 촉구를 외친 적이 있습니다. 전국 SFC의 서기에게 메일을 보내서 회개운동의 촉구를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50년전 교회의 죄악을 회개하자는 운동으로 시작했다고 늘 자부하던 SFC가 요즘에는 그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있어서 저는 이 시점을 통해 그 정체성을 회복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요청했지만, 결과는 별로였습니다. 그 당시의 전국위원장님께서도 이 학교에 다니고 계신 걸로 압니다. SFC마저도 침묵하는 것을 보고 어느 정도 감을 잡았습니다. 희망을 많이 버렸습니다. 지금도 전국 SFC 홈페이지에 가면 저의 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제 고려학원 사태가 일어난지 벌써 3년이 흘러 4년째를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진노 중에 그 영광을 드러내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 고신교단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제는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진노 중에 영광을 나타내고 계십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칼부림이 일어나고, 어떤 노회에서는 목사가 장례식장에서 절을 했다는 것으로 어수선했고, 곳곳에서 목사들이 성도들로부터 쫓겨나고 있고, 곳곳에서 전권위원회가 소집되고 있습니다. 안수하다가 사람이 죽는 일이 일어나는 가 하면, 총회장을 지냈던 분들이 오랫동안 봉사한 교회로부터 홀대받고 쫓겨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들은 이제 교단탈퇴를 선언하기도 합니다. 더나아가 심지어는 총회장소에 똥이 뿌려집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하나님께서 진노하고 계십니다. 마지막 보루인 이곳 신학교마저도 그 진노가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까? 신학교에 대한 갖가지 문제로 씨끄럽습니다. 이미 신문지상에 오르내리고 있음을 잘 아실 것입니다.
이제는 고신교단이 그 갈 바를 알지 못하여 기독교 대학에 신급제를 폐지하는 어이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고신대학교의 “학생”들은 신급제 폐지 철회를 주장하며 1인 시위까지 벌이고 있다고 하는데 오히려 고신대학교의 교수들은 신급제의 탄력적 운영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외치는 데 어른들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진노의 범위는 계속 넓어져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엘리멜렉 가정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인 흉년을 피하여 모압으로 갔습니다. 사실 그들이 가야 할 곳은 모압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피난처이시므로 엘리멜렉 가정은 환난 날에 도움되시는 하나님께로 피해야 했습니다. 나의 하나님은 왕이십니다 라고 하는 엘리멜렉의 이름에 나타난 것처럼 그들은 왕이신 하나님께로 피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멜렉 가정은 하나님께로가 아닌 모압으로 피하였습니다.
우리 고신교단은 어떠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2002년에 고려학원의 부도를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진노하고 계심을 드러내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진노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은혜입니다. 우상숭배를 거부하였던 자들이 오히려 하나님 위에 또 다른 신을 두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교회를 치시기 전에 병원을 치시면서 우리에게 각성할 기회를 허락하셨습니다. 교회를 치지 않으시고 병원을 치신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그러나 우리네 교단은 여전히 왕이 살아계심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신교단에 30억이 없어서 이 모양입니까? 고신교단에 30억 가진 분이 없겠습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30억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신교단은 하나님께로 피하기보다는 맘몬신에게 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오바댜 1장 4절에 말하는 것처럼 제아무리 도망가도 하나님은 끌어내리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분이시지만, 그 더디하심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 그 영광을 위하여 완전한 진노를 내리실지도 모릅니다. 나오미를 남겨두신 분이시지만, 나오미를 죽이실 수도 있었던 분입니다. 그러한 하나님께서 지금까지는 마지막 보루인 신학교를 남겨두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찌 알겠습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계신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이 학교를 어떻게 하실지 어떻게 압니까? 두렵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원우 여러분~!
이러한 가운데 하나님은 룻과 같은 자를 남겨놓으실 것입니다. 룻과 같은 회심자를 남겨두실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니라 돈을 섬길지라도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칠 자를 남겨두실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따라 산다고 하면서도 교회성장을 위하여 이상한 프로그램, 인위적이고 사람의 감정을 조장하는 프로그램을 통하여 목회를 꿈꾸는 사람들이 많은 가운데에도 정말로 역사적 정통 개혁주의 신학의 본을 받아 그 본대로 목회를 하려는 자를 찾고 계신 것입니다. 저마다 목회성공을 꿈꾸고, “부름받아 나선 이 몸 대형교회 가오리다” 라고 노래하는 이들 속에서도 오직 주의 나라와 주의 영광만을 위하여 일하고자 하는 자를 찾고 계신 것입니다. 룻의 회심은 단순한 회심이 아닙니다. 그의 회심은 자기가 그동안 살아왔던 모압 땅을 버리고 약속의 땅으로 가겠다는 엄청난 결단이며, 자기의 친족과 부모를 버리고 떠나야만 하는 엄청난 결단입니다. 이는 전인격적인 회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를 통하여 교회를 회복하셨습니다. 그러한 자를 통하여서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이때에 나오미와 같은 타락한 자는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라고 함으로써 여전히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하나님의 진노하심 중에 나타나고 있는 영광을 보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어찌해야 겠습니까? 룻과 같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모든 고신인들이 돈을 우상으로 섬기고, 개혁주의 신앙보다 인본주의 신앙을 따르려고 하는 순간에도 룻과 같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모두가 거짓 부흥을 꿈꾸고, 허황된 욕망을 향하여 간다고 할 지라도 참된 부흥과 참된 욕망을 따라 가시는 여러분 되기를 원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룻과 같은 여러분을 통하여서 고신교회를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룻을 통하여 다윗의 왕국을 이루신 하나님께서 룻과 같은 여러분들을 통하여서 새 예루살렘을 회복하실 것입니다.
저는 요즘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망할 자를 망하게 하시고, 흥할 자를 흥하게 하심으로 주의 영광을 드러내소서” 라고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박국 3장 2절의 하반부를 읽어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진노 중에 긍휼을 구하기 바랍니다. 진노 중에 영광을 나타내고 계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고신교회를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아멘.
찬송가 79장 “피난처 있으니”
1) 필립 슈패너, 경건한 열망,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2, p. 50.
첫댓글 이 글(설교)에 대한 비평문을 '이런 말 저런 말'에 올렸습니다.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장동관님, 우크~님의 발가락 때만큼이라도 닮아보십시오. 제가 형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