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이발사에게 맡기고 앉았다. 때가 때인 만큼 설에 관한 이야기가 이발사와 종업원들 사이에 오가기 시작했다.
이발사가 “옛날이 좋았지!”했다. 그 말에 한 종업원은 동조를 했다. 그러나 다른 종업원 한 사람이 “옛날이 뭐가 좋았냐! 난 지금이 좋다.” 의견은 2대 1로 갈렸다. 세 사람이 일하고 있는 이발소 안에는 의견이 갈린 채 서로 입장을 주장하는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이발사는 자신의 추억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떡과 엿을 해서 집집마다 나눠 먹은 일, 동네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세배하던 일, 온 가족과 친척들이 함께 모이고 서로 찾아보던 일 등등 너무나 좋았다고 했다.
게다가 직업이 직업인만큼 설이 다가오면 이발소에서 머리 한 번 깎으려고 줄을 서서 기다렸다는 이야기부터, 그때는 여자아이들도 이발소에서 단발머리를 깎았다는 이야기까지 신이 난 듯 이어갔다. 지금이 더 좋다는 입장의 사람이 “왜 여자아이 머리를 미장원에서 깎지 않고 이발소에서 깎았나?”고 되물었다. 요즘 사람들로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리라.
이야기는 신나게 옛날로 달려갔다. 젊은 직원은 “그랬어요?” 그러면서도 마음에 와 닿지 않는 표정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신세대인 사람이 불과 몇 십 년 전의 일이긴 하지만 수긍이 가지 않은 만큼 아득한 옛날에 있었던 일로 밖에는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발사는 무엇이 좋았다는 이야기일까? 옛날이 좋았다는 주장은 가난이 좋았다는 것도, 추웠던 것이 좋았다는 것도 아닐 것이다. 비록 가난했고 추웠지만 여유가 있었고, 인정이 있었으며, 사람과 사람의 나눔이 있었다는 것이 아닐까. 떡국을 끓이든, 만두를 하든, 이웃과 나누는 일이 좋았다는 것이리라. 같은 시대, 비슷한 경제수준과 같은 문화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것이기에 대부분 비슷한 음식들이었다. 어쩌면 내가 이웃에 전했던 것이 빙 돌아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만큼 이웃을 향한 나눔과 살핌은 참으로 정겨운 것이었다.
비록 가난했지만 넉넉했고, 이웃집이 멀었지만 가까웠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옆집과의 거리가 불과 아파트 벽두께, 곧 15cm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벽을 넘어 이웃까지의 거리는 천리나 되는 것 같다. 경제적으로나 이동 수단으로나 요즘이 훨씬 유리함에도 불구하고 살핌도 나눔도 없다. 이웃과의 정겨운 관계도 없다. 동네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세배하던 추억은 아득한 옛날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과거에는 설날이면 세배하러 하루 종일 동네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한 이웃과의 관계가 없다. 사람이 산다는 것이 이런 것은 아닌데 하면서도 주어진 환경에 묻히거나 편승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니런가.
“그래도 그때가 좋았어!”라는 이발사의 독백은 자신만을 향한 것일까. 그때보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 환경이 훨씬 좋아진 것이 분명하건만 왜 그는 그때가 좋았다고 하는가. 분명 그의 독백엔 현재에 대한 아쉬움이 담긴 것이리라. 아니 인간이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잃어버리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리라. 아무리 환경적으로 좋아 진다 한들 근본을 잃어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귀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해서 그는 “그때가 좋았다.”고 하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그가 단지 과거로의 회귀를 원하는 것은 아니리라. 맹목적으로 과거를 동경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도 아니리라. 다만 잃어버린 것이 너무나 아쉬운 것이고, 잃어서는 안 될 것인데, 그것을 소홀하게 여기는 현실에 대한 못마땅함 때문이 아닐까. 비록 보잘 것 없는 먹을거리였지만 나눌 수 있는 여유가 있고, 이웃이 있었으니 좋았고, 충분한 것은 아니지만 나눔으로 기쁨이 몇 배나 더해지는 것을 체험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어 좋았던 것이리라.
넘치기 때문에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때론 부족하기 때문에 그 가치를 느끼고, 어렵지만 나눌 수 있는 여유와 기쁨이 있어 좋다. 그것이 인간과 동물의 차이라고 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닐까.
단지 많이 소유하는 것만을 기뻐한다면 그것으로 인한 역기능이 어려움을 자초할 수 있을 것이다. 소유는 그것이 무엇이든 삶의 도구 내지는 수단이지 목적이나 궁극적 목적일 수는 없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 동안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를 외치면서 앞만 보라보고 달려온 우리네 현대사는 그것을 목적과 가치로 여겨왔던 것이 잃지 말아야 할 것까지 잃게 했던 것이 아닐까.
“그때가 좋았어!”
이발사의 독백은 자신도 모르게 현실에 동화되어가는 내 모습을 깨우는 소리였다.
(이종전 님의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