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태조 주원장...
그 행적이 여러가지로 의문이라...가상의 인물은 아닐까란 의심을 사는 인물임에...
대륙조선 연구자님들은...명태조는 이성계를 카피한 가상인물이고...명나라는 조선의 조대명이거나...
명는 어쩜 조선의 제후국일거란 가설이 많은데...
저도 첨엔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그건 일단 보류하더라도...
명태조(홍무제)는 홍건적은 절대 아니란 정황이 사서에 증명됌을 열거해 봅니다.,.
고려말기... 조반"이란 사람이 ...
조선의 개국을 알리고자 명태조에게 입조하는데...
명태조가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꾸짖자...명나라도 그러지 않았냐...란 은근한 비유로 설득해 공을 세우고...
이후 조선에서 한모씨를 정식사절로 보내게 만들어... 조선이란 국호를 지정받아 온다하는데...
이 과정에...
조반이 중국어(漢語,또는 몽골어)를 유창하게 하여...명태조가 기이해서 물으니...
어려서부터 이모를 따라 중국에와서 공부해 그렇고...
탈탈(脫脫) 승상의 군영에서 폐하를 뵈온적이 있다 하여...
명태조가 그때 일들을 세세히 담소하다...용상에서 내려와 조반의 손을 잡고...감격해하며...
탈탈(脫脫)승상이 있었다면 오늘날 내가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거라 회상했단다.
후대 어떤 사가들은...
조반이 뭔 중국어를 하고...탈탈을 만나고...명태조를 볼 수 있었나...
그 당시 명태조는 곽자흥 밑의 일개 졸개였을 뿐이라 꺄우뚱한다.
그러나 전체 사서들을 보건데...
용제총화의 내용은 맞는다 보인다.
조반이 이모를 따라 중국(원나라)에 들어가고...어느 글엔 사촌누이가 공녀로 갈때 따라같다 하고...
12세부터 한자와 몽골글과 몽골말을 배워...탈탈승상이 신기해하여 신임을 받아 일도 했고...
그때 탈탈의 군영에서 명태조를 보았다 한 증언이다.
이게 뭔 소린가...?
정사가 말한 명태조 주원장은...
그 당시 탈탈승상이 토벌하던 장사성과 곽자흥등의 백련교도들인 홍건적에 졸병으로 있어야 하는데...?
그 탈탈승상의 군영에서...조반은 명태조를 보았다고 한다.
수 만명의 홍건적 포로중에 봤단 말인가...?
주원장이 원나라에 포로가 됐단 말도 없는데...?
그럼, 명태조는 홍건적이 아니라...그를 토벌하던 탈탈(脫脫)휘하의 군사였고...
그것도 조반이 기억할 정도로...80만 대군 중 일개 졸병도 아닌...눈에 뜨이던 중요한 장수였단 얘기가 됀다.
탈탈의 군대는 위치로 보아...타타르족들이 설치던 천산지역이다...연경지역에 있었단 거고...
이후, 명태조가 조반을 대면한 자린 남경(양자강?)이라니...
최소한 타클라마칸 남부 호탄등지나... 더 남부가 아닐지 싶다.
중요한건...
명태조는 탈탈의 휘하에 있던 홍건적 토벌하던 군사였던증거며...
이후 탈탈이 모함으로 원나라에서도 팽 당하면서...그 기회에 득세를 한 자란 반증이다.
명태조는 원나라 장수였던 것이며...
북원을 배신하고 탈탈승상을 몰아내고 한족들과 연합한 새로운 몽골제국을 만들었단 얘기다.
그럼,주원장이 장사성을 친단 얘기도...
같은 홍건적끼리가 아닌...몽골장수인 명태조가...이전부터의 적인 홍건적을 쳤단 얘기인 것이다.
좀더 공부를 보충해야 하겠으나...
분명한것 하나는...
탈탈승상이 고려군을 선봉으로 동원해 80만 대군으로 장사성등 홍건적을 칠 당시...
명태조는 분명 탈탈승상 군영에 있었기에...눈에뜨이던 중요한 위치였기에...고려인 조반이 기억을 하고 있고...
명태조는 그때를 회상하며 용상에서 내려와 조반의 손을 잡고...감격해 하며...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묵인해 줬단 얘기다.
이때 조반이 조선의 역성혁명을 ...명태조의 그것과 같은 명분아니냐 은근히 비유했다는데...
강단사학대로면...주원장은 이민족인 원나라를 무찌른 독립해방전쟁였지...신하가 군주를 친 역성혁명이 아니다
고로 명태조는...원나라장수로...북원을 배신하고 역성혁명을 했단 얘기다.
고로, 홍건적 주원장이 명태조란 얘기는...
짱께족들의 홍건적 두목늠 하나가...고려에 처들아가 전멸당할 당시...두목들이 죄다 죽고...
살아 돌아온 두목늠 중 하나를...
원나라장수 명태조에 꿰어마친 ...짱께족들의 사기극이란 얘기가 됀다.
아직 확실하지 않으니...좀더 공부를 보충해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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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잡록 4 본조(本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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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배천(白川)이다. 임견미(林堅味)ㆍ염흥방(廉興邦) 등이 자기 집 종을 풀어서 남의 땅을 빼앗았는데, 조반의 밭[田] 역시 염흥방의 종 조광(趙光)에게 빼앗겼다. 조반이 수십 기병(騎兵)으로 조광을 포위하여 베어 죽이니, 염흥방이 조반을 모반하였다고 무고하여 군옥(軍獄)에 가두어 죽이려 하였다. 신우(辛禑)가 마침내 임견미와 염흥방을 주살하니 나라 사람들이 대단히 기뻐하였다. 조반이 태조(太祖)를 보좌하여 개국공신(開國功臣)이 되고 벼슬은 문하부사(門下府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숙위(肅魏)라 하였다. ○ 홍무(洪武) 임신년에 주문사(奏聞使)로 북경에 갔을 때, 명 태조(明太祖)가 인견하고 꾸짖고 욕하니, 조반이 말하기를, “중국에서 생장하여 전에 탈탈(脫脫)의 군중(軍中)에서 폐하를 뵈었나이다.” 하니, 황제가 자리에서 내려와 손을 잡으면서, “경은 짐의 교우(交友)다.” 하고 예로 대하였다. 조반이 말하기를, “역대로 창업한 군주는 모두 하늘의 뜻에 따라 혁명한 것이요, 우리 나라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고, 은근히 명(明) 나라 일을 지적하였다. 명 태조가 칙서(勅書)를 내려, “국호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빨리 달려 와서 보고하라.” 하여, 곧 한상의(韓尙毅)를 파견하여 조선(朝鮮)과 화녕(和寧) 등의 칭호를 국호로 삼아 주기를 청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오직 조선이란 칭호가 좋으며 또 그 내력도 오래이니 그대로 따라 이름하는 것이 옮다.” 하고 조선(朝鮮)이란 두 자를 써서 내렸다. 화녕은 영흥(永興)의 별호이다. 응제시의 주(註)○ 조반의 누이 동생이 원(元) 나라에 뽑혀갈 때 조반이 누이를 따라가 그 집에 가 보니 그 집 종이 재색(才色)이 있고 극진히 정성을 다하였다. 명(明) 나라 군대가 와서 핍박하게 되자 원(元) 나라 황제가 북쪽으로 피난가고 공이 그 여자를 버리고 동쪽으로 돌아오니 여자가 따라오는데 두 발이 부르터졌다. 그때 강 위에 높은 누각(樓閣)이 있었는데 여자가 갑자기 누각에 올라가므로 고개를 돌려 누각을 보니 여자가 누각 아래 물속으로 투신하여 삽시간에 빠져버렸다. 공이 그 절개에 탄복하여 언제나 비통해 마지않았다. 《용재총화(慵齋叢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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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야언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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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봉(許篈) 찬(撰) ○ 당요(唐堯) 원년(元年) 갑진년 으로부터 홍무(洪武 명나라 태조의 연호) 원년 무신년까지는 모두 3천 7백 85년이 되며, 단군(檀君) 원년 무진년으로부터 태조 원년 임신년까지가 또한 3천 7백 85년이니, 우리나라의 역년(歷年)의 수는 대개 중국과 서로 같다. 제요(帝堯)가 일어날 때에 단군이 나라를 일으키고, 주무왕(周武王)이 즉위하자 기자(箕子)가 봉해 졌으며, 한(漢)이 천하를 평정할 때에 위만(衛滿)이 평양으로 왔고, 송태조(宋太祖)가 일어나려 할 때 고려 태조가 이미 일어났으며 우리 태조의 개국(開國)도 명태조 고황제(明太祖高皇帝)와 같은 때이다. 서거정(徐居正)의 《필원잡기(筆苑雜記》○ 태조가 개국하자, 재상 조반(趙胖)이 중국에서 생장하였으므로, 그를 주문사(奏聞使)로 삼아 명나라에 보냈는데, 고황제가 불러 들여 고려 왕조를 빼앗은 것을 꾸짖었다. 조반(趙胖)이 대답하기를, “역대로 창업하신 군주들은 거의 모두가 하늘의 뜻에 순응하여 혁명을 이룩한 이들이요, 유독 우리나라만은 아닙니다.” 하여, 은밀히 명나라가 개국한 일과 견주어 지적하였다. 말도 중국말을 썼으므로, 황제가 이르기를, “그대가 어찌하여 중국말을 할 줄 아는가.” 하니, 조반이 아뢰기를, “신(臣)이 중국에서 생장하였고, 일찍이 폐하를 원 나라 탈탈(脫脫) 의 군중(軍中)에서 뵌 적이 있습니다.” 하였다. 황제가 그 당시의 일들을 물으니 반이 일일이 다 말하므로, 황제가 용상에서 내려와 조반의 손을 잡고 이르기를, “만약 탈탈이 있었더라면 내가 여기에 이르지 못하였을 것이다. 경은 진실로 나의 친구이다.” 하고, 빈객의 예로써 그를 대접하고, ‘조선(朝鮮)’이란 두 글자를 써서 보내주었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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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해필담(紫海筆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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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총화(慵齋叢話)》에 이런 기록이 있다. 태조(太祖)가 나라를 세우고 재신(宰臣) 조반(趙胖)을 중원에서 생장하였다고 하여 사신으로 삼아 중국에 보내니, 고제(高帝)가 인견하고 태조의 건국한 일을 힐책하였다. 조반이 말하기를,
“역대의 왕업을 창건한 임금은 거의 다 천명에 응하고 인심에 순종하였으며 홀로 우리 나라만은 아닙니다.” 하고, 넌지시 명나라의 일을 지적하니, 황제는 이르기를,
“네가 어떻게 중국말을 아느냐?” 하였다. 조반이 말하기를,
“신이 중원에서 생장하였습니다. 일찍이 폐하를 탈탈( 脫脫 원나라 말기의 승상)의 군중에서 뵈었습니다.” 하니, 황제가 당시의 일을 물었다. 조반이 일일이 말하니, 황제는 자리에서 내려와 그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탈탈이 만일 있었다면 짐이 이렇게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경은 실로 짐의 옛 친구이다.” 하고, 이어 빈객을 대하는 예절로써 대우하고 ‘조선(朝鮮)’이라는 두 글자를 써서 보내었다는 것이다. 내가 일찍이 고증해 보니, 명나라의 고황제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황각사(皇覺寺)에 붙여 있다가, 곽자흥(郭子興) 등이 일어났을 때 고황제는 그의 군에 예속되어 있었고, 곽자흥이 저(滁) 땅에 웅거하여 왕이라고 일컬은 뒤에 이르러 탈탈( 脫脫)이 처음으로 장사성(張士誠)을 쳤다. 그런데 어떻게 고황제가 탈탈의 군중에 있었을 리가 있겠는가? 설령 고황제가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다가 혹시 그의 군중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다만 미미한 항오(行伍) 속에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니, 조반이 어떻게 물색해 낼 수가 있겠는가? 이것은 다 제나라 동쪽 야인(野人)의 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용재총화》에서 붓 가는 대로 써놓았으니 어찌된 일인가? 내가 서사가(徐四佳)가 지은 《필원잡기(筆苑雜記)》ㆍ《태평한화(太平閒話)》등의 글을 보니, 그 국가의 일을 기록하는데는 반드시 정중하게 써서 서로 어긋나고 맞지 않음이 이와 같은 것은 없었다. 이것으로 용재(慵齋)가 비록 널리 배웠다고는 하지만, 사가공(四佳公)에게 훨씬 미치지 못하다는 것을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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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총화 제3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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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조가 개국하자 재상 조반(趙胖)은 중국에서 자랐다 하여 주문사(奏聞使)로 삼아 보냈다. 고황제(高皇帝 명 나라 태조)가 불러보고 혁명을 꾸짖으니, 조반이 대답하기를, “역대의 창업한 임금은 거의가 하늘의 명에 따라 혁명을 하였으니 비단 우리나라뿐만이 아닙니다.” 하고, 은연중 명 나라 일을 빗대었다. 중국 말을 쓰니, 황제가 “너는 어찌 중국 말을 아느냐.” 하니, 조반이, “신은 중국에서 자랐고 전에 탈탈(脫脫)의 군중(軍中)에서 폐하를 뵌 일이 있습니다.” 하니, 황제가 당시의 일을 물었다. 조반이 자세히 말하니, 황제가 어탑에서 내려와 조반의 손을 잡고, “만약 탈탈군이 그대로 있었다면 짐(朕)이 오늘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니, 경은 실로 짐의 친구다.” 하면서, 빈객의 예로써 대접하고 ‘조선’이라는 두 글자를 써서 보냈다. ○ 명나라에서 우리나라가 올린 표문(表文)의 말씨가 공손하지 못하다 하여 표문을 지은 광산군(光山君) 김약항(金若恒)과 서원군(西原君) 정총(鄭摠)을 부르니, 김약항과 정총이 경사(京師 북경)로 떠났다. 광산군이 안주관(安州舘)에 이르러 시를 지었는데,
여관은 어찌 이리 쓸쓸하느냐 / 旅舘何寥落 풍연은 들 밖에서 저물었다 / 風煙野外昏 객지에서 회포는 사납고 / 客中懷抱惡 침상에서 꿈길마저 어지럽다 / 枕上夢魂翻 땅이 궁벽하니 거민도 적은데 / 地僻居民少 해 저무니 새소리만 시끄럽다 / 日斜飛鳥喧 타향의 봄은 쓸쓸하니 / 異鄕春寂寂 온갖 생각에 혼자 난간에 기대었노라 / 百慮獨憑軒 하였다. 남경(南京)에 도착하자 함께 잡혀 먼 곳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서원군이 무엇(원문이 빠진 듯)을 팔아 행량(行糧)을 마련하자고 청하였으나, 정탁(鄭擢)이 빼주지 않으니 사람들이 좋지 않게 여겼다. 나중에 황제가 노여움을 거두어 그들의 집안 사람으로 하여금 시체를 찾아 가게 하였으나, 끝내 찾아오지 못했다. 광산군의 딸은 나의 조모이시다. 늙은 여자종이 있었는데, 스스로 집안 사람이라 하고 남경으로 가서 한 항구에 도착하니, 양쪽 강 언덕에 높은 누각이 솟아 있고 누각 안에는 아름다운 여자들이 자수(刺繡)를 하거나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으며, 바가지만한 귤 껍질이 파도 위에 점점이 떠 있고, 버드나무 그늘이 수십 리나 뻗어 있었다고 한다. 늙은 종은 본시 어리석어 땅 이름을 자세히 묻지 못했으나, 지금 생각해 보니 양자강(楊子江)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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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언 제16권 원집 중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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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祠) 《설문(說文)》에, 사(祠)란 복을 갚는 것이라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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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誌 《동국여지승람》을 말함)에 ‘홍주(洪州) 삼봉산(三峯山)에 최영(崔瑩)의 사당이 있다.’라고 씌어 있다. 고려 우왕(禑王) 14년(1388) 우리 태상왕(太上王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이 위화도에서 회군하자, 우왕이 폐위되고 그 길로 최영도 죽었다. 후에 그의 신이 가장 영험이 있어서 화복(禍福)과 경앙(慶殃)을 조정하였는데, 업신여겨 공경하지 않은 자는 그 자리에서 죽기도 한다. 이에 이 고장 사람들이 겁에 질려 엄숙히 제사하고 또 영신사(迎神祠)와 망신사(望神祠)를 세웠다. 《고려사》 열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최영은 사공(司空) 유청(惟淸)의 5세손이며, 모습이 헌칠하고 힘이 세어서 젊은 나이에 양광군(楊廣軍)에 열사(列士)로 편입되었다. 공민왕(恭愍王) 원년(1352) 조일신(趙日新)이 난을 일으키자, 최영은 안우(安祐)ㆍ최원(崔源)과 함께 그를 쳐서 죽이고 호군(護軍)에 제배되었다. 3년(1354) 원(元) 나라 승상 탈탈( 脫脫)을 따라 고우(高郵)를 토벌하는데 37번을 싸워 승리하였고, 또 회안(淮安)ㆍ화사(和泗) 사이에서 적을 방어할 적에도 격전을 벌여 목베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 이듬해 귀국하여 서해의 왜구를 쳐서 크게 무찔렀다. 8년(1359)에 홍두(紅頭 홍건적)가 서경(西京 평양)을 함락하자, 최영은 서북변 병마사(西北邊兵馬使)가 되어, 적을 토벌한 공으로 서경 윤(西京尹)에 제배되었다. 11년(1362)에는 장병 20만을 모아 사유(似劉)ㆍ관 선생(關先生)을 쳐 죽였는데, 적의 전사자가 10여 만이었으며, 드디어 경성(京城)을 수복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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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 제1권 |
첫댓글 연려실기술에서 말하기를, <만약 탈탈이 있었더라면 내가(명태조 자신을 말함) 여기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를 먼저 이해를 해야 합니다. 또 "하담파적론"에서는 주원장이 탈탈의 군중에 있을 수 없다고 하였으니, 당연히 "하담파적록"의 원문을 보고 검토해야 되는 것 같습니다.
내..두가지입니다.
용제총화의 기록들 하난 명태조를 조반이 틀림없이 탈탈군영에 있을때 봤다.
후대 사가들은...그럴 개연석이적다...조반은 탈탈군영에 있을 수도 없다...이 두갠데...
많은 야사들에도 조반의 생에에 대한게 여러가지로 묘사돼어 있으니...전 진실같단 예상입니다.
그리고 제 글의 원 취지는...주원장은 그 명태조가 아닌...홍건적 두목일 뿐이다란 얘기니...
두 인물은 다름을 이를거란 가능성을 얘기한 글입니다.
조선의 개국자인 "태조"는 홍건적을 격파한 장수중의 하나이고, 명 태조 주원장은 곽자홍의 딸(양녀)와 결혼하여 곽자흥의 뒤를 이어 우두머리로 성장합니다. 위의 본문 글에서 말하는 것에 대해 <그렇지 않다 또는 그럴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당 시대의 의견이 함께 대두되고 실정이고, 야사에 전하는 내용이란 점입니다. <<만약 탈탈이 있었더라면 내가(명태조 자신을 말함) 여기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라는 말을 깊이 인식하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야사의 신뢰도는 문제지만...조반이란 인물에 대한 개별기록에도 많이 나오는 대목이라...
전 오히려 가능성이 많다 본겁니다.
전 이런 생각을 합니다.
왕조조실록이니 대표적 사서들은 일제와 친일파들의 왜곡을 탓을 확률이 많다.
고로,야사들엔 허황됀 얘기들도 많으나...
경우에 따라선...조선사의 감춰진 진실들은 야사들에 많이 보존됐을 개연성 많다...이게 제 소견입니다.
전 주원장을,,,절대 이태조가 사대한 그 홍무제로 보지않습니다.
홍무제와 주원장은 다른 인물이란게 제 예상입니다.
탈탈이 있었으면...내가(명태조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없다...
이 얘긴...명태조가 탈탈과 같은 군영에 있지 않았단 얘기라기 보단...
당대 탈탈이란 제상은...후대에도 존경받았던 명제상으로...원나라를 위해 헌신했으며...
숙부인 발안첩목아가 원대칸을 핍박 국정을 독단할 때...조카이면서도 그를 제압하고 원조정을 복원했단 잡니다.
명태조가 북원의 혼란과 홍건적의 발로를 틈타...무공으로 세력을 키우다...
탈탈승상이 무고죄로 제거돼면서 명태조가 권력을 줠 수 있었단 얘기로 전 해석합니다.
같은 문장에...조반과 그때 일들을 회고하며 감동해서 용상에서 내려와 손을 잡았단 구절이..
그걸 반증한다 봅니다.
그건 동지이자 상관였면서도...어느시기부턴 정적였던...개인적으론 존경스러웠던 탈탈에 대한 기억을...
그 밑에서 일했단 조반이 다시 기억나게 했고...그에 옛 일들을 다시 논하며 회상하며...
니가 내 친구로다하며...용상에서 내려와 손을 잡았단 기록으로 전 해석해 봅니다.
물론 문무님이 지적하신...
아예 탈탈승상과 내가 같이 있지 않았단 말 뜻이란 것도 가능성은 두겠습니다.
사대주의가 식민 사관인데 그런 사관을 주구 장창 주장하는건 어떤 세력이 님 뒤에 있기에 그런 배짱이 있다. 아니면 제 정신이 아닌자이던지.. 제 정신인자가 식민사관을 본 카페에서 주장 할 수 있나요, 님의 행위는 용기도 학문의 도리도 아니고 그저 아집일 뿐이다.
내 주장은 이러하다. 그리고 사서를 단순 나열,.. 그 사서의 정확한 어떤 부분들이 어떻게 되서라는 6하 원칙의 부연 설명이 너무 미약 하기게 님의 학설의 근거를 이해 하기 힘들다.. 본인이 아니라 해도 근거가 미약함으로서 당신의 사관 자체가 식민사관으로 오해를 받지여... 근세 조선이 사대나 하는 나라면 명조보다 훨신 오래 500년 절대 갈 수 없습니다.
당연한거 아닌가요 왕이나 신료들이 그렇게 나약하고 중궈나 빠는데 그런 나라가 반란으로 망하지 않고 500년 간다고요,.. 그런 일은 가능성이 희박한 애기입니다. 역사는 공상과학 소설이 아닙니다..
제가 사서구절의 한 문장씩을 따서 설명치 않고...돼도록 전체 문장을 한꺼번에 올림은...
같는 사서에도...이건 사실과 다르다...전대 사가들의 오기같다..이렇게 다른 인용문장도 함께 나오니...
한 구절만 따서 설명하면 객관성이 오히려 떨어져서 입니다.
이게 제 능력한계의 허접한 방식입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강역의 한계와 거리도 그렇습니다...
같은 사서 같은 본문임에도...참고해 인용한 그 이전의 사서들마다...시기마다...
그 영토한계와 거리가 천차 만별이니...
다 같이 올리지 않곤...한 시대의 강역과 거리만 주장하게 돼는 고로...
돼도록 특정 주제분분에 대한 기록들은 본문글을 다 올리는 방법을 취하고 있습니다.
대동야승이란 야사를 묶어 놓은 책입니다. 그 속에 여러 야사들의 책이 들어 있는데, 이곳에 있는 글을 인용한 것에 대해 뭐라 하는 것이 아니라, 연결된 문장에서 "그럴 수 없다"는 것이 있으니, 양 쪽 모두를 왜 그런 것일까?를 설명해 주셔야 글을 보는 분들이 이해가 된다는 뜻입니다. 같은 글 속에 서로 배치되는 내용이 있다는 것은 확인이 필요한 것이지요. 또 현재까지 밝혀진 대륙사나 조선사에서(야사제외) "주원장"이 "원나라 장수 휘하"였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원장은 홍건적의 우두머리 곽자홍의 딸과 결혼하는데 이 여인이 바로 훗날 마황후입니다. 물론 정사기준이기 때문에 다소 왜곡된 측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주원장은 홍무제가 아니라 주장하는 겁니다.
홍무제가 명나라 천자요 조선의 상국였냐 아니였냐를 떠나서...
나름,홍무제와 주원장이란 두 인물은 분명 다른 인물이란 걸 증명하려 한 글입니다.
단순히 왕조가 수명이 오래 갔다고 천자국이란 중요단서 됄수 없다 봅니다.
대륙조선같이...유라시아대륙의 동부에 치우치면서...그 동쪽에 일본빼곤 패권을 타툴 강국이 없던 지리적 요건...
북쪽으론 황하와 고비사막같은 천해의 장애막이 있어 대규모 침략에 안전했던 지리적 요건...
특히 중요한건...천자국에 버금가는 영토와 국력을 가졌음에도...
궂이 내가 천자라 나대면서 마찰을 만들지 않고...평화를 유지하려한 평화주의적 동이문화...
이런게 복합돼어...주변 강국들과의 자존심쌈을 유발치 않은것도 수명이 오래가게한 주 요인였다 봅니다.
물론 기본적 국력이 신흥황제국들 버금가게 강했기에 가능한 것이였겠지만여..
인류의 역사를 그렇게 한가한 소리 하지 마세요..먹고 먹히는데 평화주의라서 힘이 있으나 그냥 있었다. 그건 등신이란 애기지. 등신 같은 국가를 그냥 둔다니여. 그게 식민사관이지요... 조선은 평화를 사랑해서 침략을 하지 않았다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궐한님, 이것은 님의 오판이라고 지적하고 싶습니다. 대륙사를 예로 보면 수년, 수십년 겨우 유지하는 왕조가 부지기수입니다. 천자니 황제니 하는 왕조는 주위의 여러 국가들이 이것을 인정해 주기 때문에 수백년, 일천년을 이어올 수 있는 것입니다. 도 정사를 보면 소위 선양이란 말이 나오는 이것은 정식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봉건왕조에서 평화주의란 인정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외적의 침입때문입니다. 대륙조선은 북쪽과 서북쪽과 서쪽에서 수없는 영토전쟁을 벌였습니다. 좀 더 구체적인 글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도 단지 몇십년 간 중국 왕조는 절대 천자국 아니였다 봅니다.
그러나 돌궐은...고구려와 비슷한 시기에도 있었고...고구려보다 훨 오래 존속하며 당나라도 굽신거리게 했습니다.
기원 전후에서...거의 천년입니다.
그래도 돌궐을 천자국이라 하지 않습니다.
거란도 걸사비우나 죽지...이후도 내내 유지하다...
발해를 굴복시키고 요제국을 만들었다 금나라에 깨질때 까지...
근 천년을 갑니다.
이는 전엔 오랑케고...사서에도 잠시 마지막 최 전성기에나 천자국이라 대우받았다 합니다.
역사가 천년인 돌궐왕조...천자를 자처했단 당태종도 굽신거리게 만든 돌궐도...
어느 사서에 천자란 말도 없습니다.
거란도...내내 고구려에 속령이다가...고구려 망할 쯔음 고구려 배반하고 당나라에 귀속하다...
돌궐에 귀속돼다...다시 당나라 망할즈음 부흥해...고구려의 부활국인 발해를 제압한곤...
잠시 요제국 천자국을 선포합니다.
천자국였을때는 최 전성기인 갸오 1,2백년...그 이전은 분명 천자국이 아니라 나옵니다.
천자국은 개국부터 마지막까지 내내 천자국인게 아니라...
유라시아의 대표적 강국들중...당대 가장 강력한 국력과 문화력...주변국들의 동의...
이게 있을때 천자국이 돼는 고로...연대가 오래돼었고 강국였어도...
천자국을 자타공히 내세우던 시절은 극히 짧은 기간일수 밖엔 없었단 이치입니다.
일본(倭?)의 왕조역사는...왕은 비록 집안이 수시로 바뀌었어도...
그 천박한 전통과 강역은 국명(족명?)은 근 1,800년이나 유지했습니다.
자칭 천황(天皇)이란 세계 최고의 극존칭으로 왜왕늠을 호칭하고...
왜왕성을 경도라 하고...그 주변 영토를 기내(畿內)라 하는 주나라제도도 죄 숭내냈습니다.
그래도 주변국 어느나라 하나...그 왜놈들을 천자국으로 대우해 주지 않았습니다.
왕으로도 대우해 주지 않고...그저 추장정도로 대우할때가 많았습니다.
이런 경우들도 참고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저도 분명하게 인정하는 건...
짱께들 25사인지에 나온단 그 고대짱께들의 왕조는 절대 천자국이 아닌...
저 티벳오지와 아프칸 넘어 아랍등지에서 지들끼리 설치던 수 많던 소수민족들의 추장들역사의 과장이라 봅니다.
그 당대엔 분명 배달국 단군나라가 천자국이고...동이의 치우천왕나라가 천자국이고
이를 이은 부여와 고구려가 분명 유라시아의 천자국이라 전 봅니다.
궐한님의 방식을 뭐라 할 수는 없으나, 같은 문장내역에 "그렇다. 아니다"라는 배치되는 글이 있을 때는 "제목에 ?를 붙여야 합니다." 제목은 기정사실화하고 내용은 아니다라도 할 수 없는 것이니 말입니다. 조반이란 인물의 평가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 카페 회원님에게서 오는 메일을 보면, "확정되지 않은 것을 확정된 것처럼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주장한다>는 것은 사견이기 때문에 왈가불가할 필요가 없는 부분이나, 진실인 것 처럼 호도하는 것은 안된다는 취지로 보입니다. 이 점을 참고하시고,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늘 지적 하던거 아닌가요 내용을 보면 확정된게 없는데 제목은 확정이니 어찌 그 글을 신뢰하나요
네.돼도록 그렇게 글을 쓰겠습니다.
전에 김홍필님께도 늘상 지적받던 사항였는데...제가 또 버릇이 도졌나 봅니다.
자꾸 글을 길게 쓰다보면...문장 구절구절마다 일일이...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이런 가능성도 있다 봅니다.
이렇게 쓰기보단...구찮아서...이거입니다.로 쓰게 돼는데서...
자꾸 확신에찬 확정으로 들리게 만드는 재주를 부린거로...저도 반성합니다.
십분 참고해 시정하겠습니다.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타이틀을 쓸때...짧게 쓰지 않고...이런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렇게 쓰면...타이틀 글이 길어져 두 줄이 돼고...게시판메뉴판 번잡스러워져...
다른 분들께 피해를 준다 보고...
돼도록 글을 줄여 타이틀을 올리려 말을 짧게 쓰는 경우도 있었음도 감안해 주십시요...
어쨋든 제 불찰임은 백번 인정하니...
앞으론 타이틀도 제목이 좀 길어 지더라도 그렇게 쓰겠습니다.
야인여진은 신장성이 아닌 동북삼성에 있던게 맞을 것이다.- 야인여진은 동북삼성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하면 가정이 되는 것이지요 내용에 신장성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쓰면 제목이 길어 노출이 다 안될 걱정은 안해도 됩니다.
네.
김규형님!
누구를 신뢰하고 안하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 회원님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이해해 주셔야 합니다.
카페지기와 회원인 저의 입장이 다르지요,.. 님의 입장은 이해 하나. 확정되지 않은걸 확정된건 처럼 제목을 다는건 저는 신뢰할 수 없습니다.
위에 타이틀을 고쳐 봤습니다.
위와 같은 식이면 돼겠죠...?
본문내용은 일일히 다 고치려면...독수리타법인 저는...또 밤패야하니...
다음부턴 그렇게 쓰겠다로 대신하겠습니다...ㅡ. .ㅡ
서로 서로 조금씩 양보, 이해하면 즐거운 공간이 될 수 있습니다. 해무님의 말씀중에 <쭝궈 구라설에 호의적이고 외려 조장하는듯한 >이란 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대륙+ 북방삼성+반도+열도가 조선왕조의 영역이였다는 것이 카페에서 지향하는 것입니다. 또 궐한님의 댓 글 중에 "천황"이란 말, 기내라는 말등등은 18세기 말과 19세기초에 명명된 것입니다. 이것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면 그 선대의 역사를 맞추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또 왜란 종족은 조선을 구성하던 한 일부였으며, 특정집단이 이지저리로 이동(중조의 압력때문에)하여, 기존세력을 정복 또는 회유등으로 뭉친 자들을 말한다고 보아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인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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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무님! 외노자문제는 우리 카페와는 전혀 다른 문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나 역시 일개 서민입니다. 먹고사는 문제에 매달리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처지입니다. 외노자를 우리카페가 들여왔습니까? 정도를 지키세요. 그런 문제는 정치적이며, 정책적인 면이란 것을 아셔야 하고, 정권을 쥔 분들이 하는 일입니다. 님의 말씀대로 구라인지 아닌지는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다 알게 됩니다. 척박해서 살 수 없는 땅이란 말은 님의 생각일 뿐입니다. 왜, 무엇 때문에 강요를 하시는 겁니까? 대륙조선을 주장하는 곳은 이곳 뿐이 아니며 그들 역시 고전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요. 이곳에서 외노자문제는 더 이상 거론하지 마시길 부탁드립니다.
천자는 혈통을 아주 중요시 했습니다. 후대의 황제와 조금 다른 뜻입니다만, 천자란 혈통으로 내려오는 것이며, 다른 성(姓)이 천자가 될 수 있으려면 "선양"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조선왕조는 이러한 혈통으로 내려왔기 때문에 "천자의 나라"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왜곡된 대륙사에서도 그 혈통을 기록해 놓고 있는데 이것을 깊이 연구해 보면 금새 알 수 있습니다. 참고해 주시면 고맙겠구요. 조선사는 일만년을 이어오는 왕조이기 때문에 아주 복잡하고 다양한 면이 많아 어려운 공부이긴 하나 알면 알수록 그에 대한 흥미가 절로 납니다. 진전과 발전을 기대해 봅니다.
1만년이란건 환단고기류를 인정하신단 말씀같습니다...?
저도 실은 1만년이 아니라...한단고기에 나오는 몇만년이란 설을 심정적으로 인정하나...
그늠의 사서증거들이...당대엔 없는게 당연한 고로...세계 학계에 증명해내기 불가하단 점이 안타깝습니다.
또 이런 의문도 있습니다...
환인의 제국때인 환국(桓國)때에도...신시배달국때도...국명이 조선(朝鮮)였겠느냔 의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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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무님! 억지는 그만 부리세요. 분명하게 우리 카페에서는 북위등과 같은 왕조들은 조선의 제후 역사를 뻥튀기하여 이동되어 비어버린 공간을 채운 것이라는 주장을 했습니다. 조선왕조에서도 왕권을 둘러싸고 별 희한한 일들이 수없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근대에 가까워지면서 더욱 심해졌구요. 서구의 천자나 황제가 아닌 그저 군주나 영주들의 쟁탈전은 조선의 것보다 살육전이 더더욱 심했다고 합니다. 별의별 짓을 다했다고 전합니다.
한단고기를 꼭 인정하고 안하고 문제가 아니라 삼국유사에도 단군왕검이전의 환인이 존재했다는 것은 이미 존재해 있었다는 것이기 대문입니다. 다만 이러한 사실을 고증할 수 있는 기록이 없다는 것에 강력한 주장을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황제 헌원씨 이전의 역사도 존재하나 기록이 없어 파헤치지 못하는 이유와 똑같습니다. 정말 아쉬운 대목입니다.
해무님!
이제야 해무님의 정체가 아닌 정체를 말씀하시네요. 그 말이 듣고 싶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댓 글을 올리실 때부터.........<아시아조선>설은 님들이 열심히 연구를 하십시요. 뭐라는 사람 없을 것입니다. 계속 연구하다보면, 아시아조선이 잘못된 것인지, 대륙조선이 잘못된 것인지 스스로 서로를 인정할 때가 분명 올 것입니다. 우리 카페에서 "아시아조선"을 비난한다거나 비하하는 글이 있을 땐 삭제하겟습니다. 따라서 해무님께서도 지금 이 순간부터 외노자문제, 진보와 보수문제, 우리 카페의 주장에 대해 폄하하는 발언을 하지 마십시요. 이것은 우리카페에서 지킬 것이며, 해무님께서도 지켜주세요.
어디를 조선상영역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해무님"이 이래라, 저래라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님은 님의 것에 연구를 하시면 됩니다. 우리 카페는 우리가 알아서 할 것이니까요.
지금 이 순간부터입니다. 공지를 올리겠습니다. 해무님께서 곡 지켜주셔야 합니다.
"궐한"님!
지금부터는 "아시아조선"을 주장하는 카페, 그에 관계되는 개인등에 관하여, "비난, 비방, 비하"등의 내용이 들어간 글을 올리지 마십시요. 특히 실명을 들먹이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점을 꼭 참고하시고 확인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개에도 떵을 참으라시니...난감하오나...고려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