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01. 30. (월)
오늘은 오래전에 기획했던 러브 스토리
“길상사” & 한용운 선생 “심우장”등 서울
성북구에 대하여 포스팅 하고자 한다
►길상사 소재지 :
서울 성북구 선잠로5길 68 길상사(조계종)
►길상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
송광사의 말사이다
►서울 인왕산-북악산 산행할 때 마다
삼청공원 방향 하산 길 북악산 기슭
성북동에 큰 건물이 보이는데 山友들에게
제3,5공화국 시절 대한민국 밀실정치의
대명사인 3대 요정(삼청각, 대원각. 청운가)
이라 소개하곤 했다
▷성북동 소재 :
삼청각→(現)한식집, 대원각→(現)길상사
▷우이동 소재
청운각→(現) 사라짐
►길상사는 1997년에 세워졌으므로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당대 유명한 최고의 요정
대원각(大苑閣) 주인이었던
故 김영한(1916~1999, 법명 길상화)이
법정 스님에게 자신이 소유한 요정
부지를 시주하여 사찰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1970-80년대
군사정권 시절은 '요정정치'라고 불릴 만큼
요정은 큰 영향력을 가진 곳이었다.
그중에서 3대 요정으로 불리던
대원각(大苑閣)은 박정희 시절 고위급
인사들과 재벌들의 비밀 회동 장소로
자주 이용됐다.
►제3공화국, 제5공화국과 관련된
드라마와 영화들을 보면 대형 기와집에
가야금 소리가 들리고 기생이 나오는
요정을 배경으로 나오는데 대부분
대원각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김영한은 이처럼 요정문화를 대표하는
대원각을 통해 엄청난 부(富)를 이뤘다.
►1970-80년대,
한국은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
대원각과 같은 시설을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기생관광의 무대로 활용했다.
1973년에는 정부 기관인
국제관광공사 산하에 요정과라는 부서를
설치하고 이 업무를 관리하도록 했다.
대원각은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해서
관광유흥음식점으로 지정하여 지방세
감면 등의 특별한 세금 혜택을
주었다고 한다.
또한 일본인의 입국제한도 풀어주었고
통금제한도 예외적으로 무시할 수 있도록
했고, 성매매 단속법에도 적용을 받지
않도록 해주는 등의 특혜를 주었다.
접객 여성들에게는 관광 종사원 등록증을
발급해주었는데 이들 또한 통금제한을
무시할 수 있는 특혜가 있었다고 한다
<인터넷 발췌>
▶요정 대원각(大苑閣)이 김영한의 시주로
사찰로 탈바꿈한 길상사(吉祥寺)
►길상사(吉祥寺)는
백석 시인과 기생 김영한의
러브 스토리가 잔잔하게 흐르고 있다
시인 백석과 기생 김영한의 발자취를
거슬러 올라가 본다
▶백석(본명 백기행)시인 (1912~1996)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
오산고보에 입학했는데 조만식이 선생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학교 졸업후 일본 유학길에 올라
도쿄 아오야마가쿠 영어사범과에 입학
어학공부에 집중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로 대화하고
문학서를 번역할 정도로 능통했다고 한다
백석은 당대 “천재” 시인으로
부르고 있는 이유다.
1935년 귀국하여 고향 정주로 내려가
창작활동을 시작한다 초기 시들은
향토색 짙은 서정시였으나 이후 모더니즘
경향의 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분단이전 시기 최고의 모던보이로
평가 받기도 하였다
해방후 북한 체제하에서 숙청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남한 사회에까지 널이
알려졌으며 분단이전 남북한 양쪽에서
모두 사랑받는 시인이다
1935년 조선일보에 “정주성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함흥 영생교보 영어 교사 시절,
기생 김진향(본명 김영한)을 만나
사랑에 빠져 본인이 좋아하는 이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에서 따온
“자야”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나오는
화자 ”나타샤“가 김영한 이라는
설이 있다
▶김영한(1916~1999, 법명 길상화)
김영한은 어릴 때 부친이 사망하자
가난에 시달리던 어머니와 할머니가
거의 팔다시피 15살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갔으나 남편이 우물에 빠져
사망하는 사고를 당한다
이후 시댁에서의 구박을 견디다 못해
집을 나와 기생이 되었고 기명은
진향이다
►김영한은 16살 때
조선권번(일제 강점기 기생조합)
정악전습소에서 궁중아악과 가무를
가르친 금하 하규일의 문하에 들어가
진향(眞香)이라는 이름의 기생이
됐다.
“삼천리”라는 문학지에 수필을 발표하여
문학기생이라는 유명세를 얻기도 했다
가무와 시. 그림에 재능이 뛰어난
기생 김영한은 1936년 23살 때
함흥권번 신분으로 함흥관(대형 요리집)에
나갔던 첫날 함흥 영생 여고보 교사들
회식장소에 나갔다가 영어 교사로
근무하던 시인 백석(본명 백기행)과
운명적으로 만난다
►백석은
첫눈에 그녀에게 반했고
그녀 손을 꼭 잡고 “오늘부터 당신은
영원한 내 마누라다. 죽기전 우리 사이
이별은 없다” 라고 속삭인다
김영한이 서울로 돌아가자
백석은 아예 그녀 때문에 학교에
사표를 내고 서울로 올라와 조선일보에
근무한다. 조선일보에 “정주성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한다
백석은 청진동에 살림을 차리고
서울과 함흥을 오가며 3년간의
동거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백석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 마땅하게 생각했고 강제로
다른 여자와 결혼 시켰으나
신혼 첫날밤부터 도망치기를 여러번
하면서 부모에 대한 효심과 여인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이를
벗어나기 위해 김영한에게 만주로
도피하자고 제의한다
그러나 그녀는
백석의 장래를 걱정하여
함흥에 남아 있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결국 백석은 홀로 만주로 떠난다
백석은 만주를 유랑한 후 광복이 되자
함흥으로 돌아왔으나 김영한은 이미
서울로 떠난 후였다
그후 남북이 분단되면서
백석은 북한에...
김영한은 남한에서...
영원히 이별을 맞게 된다
►당대 최고의 시인 백석 에게는
여자들의 구애가 끊이질 않았는데
그는 맘에 드는 여인에게 자기가
맘에 드는 이름을 붙여 주곤 하였다
김영한에게는 본인이 좋아하는
이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에서
따온 “자야”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사랑하는 자야를 위해 시를 한편
남겼는데 그 시가 유명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시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 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서울로 내려온 김영한은
지금의 길상사 자리를 사들여
청암장이라는 한식당을 운영했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 삼청각, 청운각과
더불어 대형 요정인 대원각으로 키웠다.
►크게 성공한 김영한은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감명깊게 읽고 불심에 깊게
빠졌다고 한다.
►故 김영한은
1997년 그 당시 2억원을 들여
백석 문학상을 제정하였으며 그해 7천평의
대원각 대지와 건물 40여동 등 당시
시가 1천억원 이상의 부동산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하여 “길상사”를 설립한다
법정스님은 그녀에게 “길상화”라는 법명과
108 염주 한 벌을 내려 주었다
►故 김영한은 1999년
KAIST에 340억 원의 발전기금을 기탁했고.
그해 11월 13일 오후경 길상사를 산책하던
김영한은 “내가 죽으면 화장하여
눈 내리는 날 길상사에 뿌려주세요” 말하고
다음날인 1999년 11월 14일 108 염주를
목에 건채 83세 나이로 운명한다
한달 후 12월 14일 길상사에 눈이 내리자
스님들은 그녀의 재를 길상사 앞마당에
뿌린다
▶법정스님은
처음 1985년 김영한으로 부터
자신의 재산을 희사해 절을 짓게 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를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김영한은 10년 가까이
법정을 찾아와 끈질기게 부탁했고
이에 법정 또한 이를 받아들여,
1995년 6월 13일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 말사인 '대법사'로 등록하여
처음 사찰이 되었고,
초대 주지로 현문이 취임하였다.
1997년에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어 재등록되었고
같은 해 2월 14일에 초대 주지로
청학이 취임하였다.
►김영한은 평생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에는 종일 식사를 하지 않았다.
길상사에 기부된 김영한의 대원각 재산은
당시 시가 1,000억원이 넘었고 '그 많은
재산이 아깝지 않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1000억은 그 사람의 시 한 줄만 못하다'고
대답했다고 할 정도로 백석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사찰의 창건주였던 법정은
불문에 귀의한 김영한에게 길상화라는
법명을 주었고, 김영한 사후에도
길상사에서 정기법회를 열었으며,
길상사의 개원법회가 열리던
1997년 12월 14일 故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법회에 참석해 법정과 함께
나란히 축사를 했고 법정 또한 이에
답하여 1998년 2월 24일에 명동성당을
찾아 법문을 설법하였다.
►법정스님은 2010년 3월 11일 길상사에서
78세(법랍 54세) 로 입적하였다.
▶길상사 경내에는 공덕주 김영한의
공덕비와 함께, 법정의 영정과
그 생전 유품들을 전시한 기념관도
함께 마련되어 있다
►경내에는 극락전, 지장전, 설법전 등의
전각이 있으며 행지실, 청향당,
길상헌 등의 요사가 존재한다.
2011년 이후 덕운이 주지로 취임하였으며,
불교 자선재단 “맑고 향기롭게”의
근본도량으로써 여러 가지 사회사업을
펼치고 있다.
또한 경내에 있는 관음보살 석상은
천주교 신자이자 가톨릭 예술가인
최종태가 건립한 것으로,
같은 조각가가 혜화동 성당에 건립한
성모 마리아 석상과 닮아 있다.
▶오늘의 스케치.....
Naked we come into the world,
and naked we leave it.
사람은 빈손으로 태어나서, 빈손으로 돌아간다.
(空手來 空手去)
고로
맑고 향기롭게 사는 것은
인간으로서
가장 행복한 삶이다~~~~
▲김영한 (1916-1999)
▲백 석(1912-1996)
►만해 한용운 심우장
►주소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로
29길 24 (성북동)
►이 집은 3.1운동 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자 님의 침묵의 시인인
만해 한용운 선생이 1933년부터
1944년까지 살았던 곳이다.
동쪽으로 난 대문을 들어가면
북쪽으로 향한 기와집인 심우장과
양옥의 관리사 그리고 만해가 직접
심었다는 향나무 등이 있다.
심우장은 전체 규모가 5칸에 불과한
작은 집으로, 이곳에는 가운데
대칭을 중심으로 왼쪽에 온돌방,
오른쪽에 부엌이 있다.
부엌 뒤로는 식사 준비는 하는
공간인 천마루방이 있다.
한용운의 서재였던 온돌방에는
심우장이라는 현관이 걸려있는데,
이는 근대의 대표적인 서화가인
위창 오세창이 쓴 것이다.
이 이름은 깨우침을 찾아 수행하는
과정을 소를 찾는 일에 비유한
불교 설화에서 따온 것이다.
심우장이 있는 성북동 일대는
1930년대 서울이 확장되면서
주거지로 개발되었는데,
이 집은 당시의 여느 집과는 다르게
검소하고 소박한 구성을 보여준다.
한용운은 조선의 불교를 개혁하려고
했던 승려이자 조국의 독립에 힘쓴
독립운동가이며 근대 문학에 큰
업적을 남긴 시인이었다.
한용운이 만년을 보낸 심우장은
그의 이 같은 면모를 살필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출처 : 대한민국 구석구석>
▶성북구 북정마을
성북동은 1970년대 후반부터
부촌으로 변모 서울에서 가장 부자들이
모여사는 집단촌을 형성하고 있으나
같은 동네에서도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울에서 유일한 달동네 북정마을이
존재한다
북정마을은 조선 중기 무렵부터
대궐이 가깝고 볕이 좋은 점 때문에
궁에서 사용할 메주를 만들어 공급하는
마을이어서 늘 사람들이 북적이는
동네였다고 한다
북적북적하는 동네라서 북적동 그러다가
북정동으로 부르게 됐다고 한다
▼최순우 옛집
▼북악 스카이웨이 (팔각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