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승당(制勝堂)
2018. 12. 23.
한산도 이충무공(李忠武公)유적(遺蹟)
사적 제113호
이곳은 충무공(忠武公)이순신장군께서 1592년 임진왜란때 세계 해전사상 길이 빛나는 한산대첩을 치르신 후 운주당(運籌堂)을 지으시고, 1593년부터 1597년까지 삼도수군의 본영(本營)으로 삼으시고 제해권을 장악하시고, 국난(國難)을 극복하신 유서깊은 사적지(史蹟地)이다. 운주당은 1597년 폐진되어 142년 후인 1739년 통제사 조경(趙儆)이 중건하고 유허비를 세운 이래 1959년 정부가 사적(事蹟)으로 지정하고 여러차례 보수하여 왔으나 민족의 성웅(聖雄)을 모시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하였다. 1975년 박정희대통령께서 이곳을 둘러보신 후 공(公)의 위업을(偉業)을 기리고, 殺身救國의 높으신 뜻을 후손만대에 전하도록 지시함에 따라 경역을 확장하고 보수하여 1976년 오늘의 모습으로 단장되었다. 이곳에는 公이 생전에 삼도수군을 지휘하시던 제승당을 비롯하여 公의 존영을 모신 충무사, 유허비를 비롯한 많은 송덕비, 활터, 수루(戍樓)등 부속 건물들이 만끔히 정화되어 수려한 주변경관과 더불어 당시 조선수군 본영의 면모를 되찾아 볼 수있다. 公은 가셨어도 나라 사랑하시던 마음은 출렁이는 푸른바다와 함께 언제까지나 살아남아 조국수호의 영원한 햇불이 되고 있다. 이곳을 찾는 우리는 다같이 옷깃을 여미고 공의 훈업(勳業)을 가슴깊이 되새겨 영광된 통일조국의 초석(楚石)이 되기를 다짐하자
한산도가(閑山島歌)
閑山島 月明夜 上戍樓撫大刀 深愁時 何處 一聲羌笛更添愁
제승당(制勝堂)
제107대 조경 통제사가 운주당(運籌堂)자리에 현 건물을 복원하면서 제승당이라 이름한 이곳은 현대의 해군작전사령관실과 같은 곳이다. 이충무공은 1593년 7월 15일부터 1597년 2월 26일(음력) 한양(漢陽)으로 붙잡혀 가기까지 3년 8개월 동안 진영(陣營)을 여기에 설치하였다. 승리(勝利)를 만드는 건물의 이름과 같이 왜적(倭賊)을 물리치기 위한 작전도 짜고, 총통(銃筒)과 같은 신무기의 제작과 보급에 힘쓰는 등 모든 군무(軍務)를 관장하던 곳이었다. 총 1,491일 분의 난중일기(亂中日記) 중 1,029일의 일기(日記)가 여기에서 쓰여 졌고 많은 시(時)를 남기기도 했던 곳이다. 현재의 제승당(制勝堂)은 이충무공이 통제사에서 파직되고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대패하면서 폐허가 되었다가 1739년(영조 15)에 통제사(統制使) 조경(趙儆)이 중건(重建)한 것을 1976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제승당 유허비(制勝堂 遺墟碑)
왼쪽 비석ㅇㄴ 1739년에 제107대 통제사(統制使) 조경(趙儆)이 제승당을 다시 세운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제승당은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이충무공이 작전지휘본부로 세웠던 곳으로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때 불에 타 없어졌으며, 무른 사암(砂巖)으로 제작되어 마모가 심하다. 오른쪽 비석은 이충무공의 후손으로 제198대 통제사를 지낸 이규석(李圭奭)이 새로 세운 것으로 전에 있었던 비석을 묻은 곳이라는 표지석이 있으며, 비석은 오른쪽 비석의 뒷면을 한글로 풀어 새겨 놓은 것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忠武公李舜臣將軍)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덕수(德水) 이씨(李氏)로 1545년 3월 8일(음력) 새벽에 한성(漢城) 건천동(乾川洞)에서 부친 이정(李貞)과 모친 초계(草溪) 변씨(卞氏)의 3남으로 태어났다. 1576년 32세에 과거시험의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함경도 동구비보권관을 시작으로 무관직을 수행하여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 발포수군만호(發捕水軍萬戶),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 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 등을 거쳤다. 1589년 45세에는 정읍현감(井邑縣監)을 지냈고, 1591년에는 전라좌수(全羅左水使)에 임명되었다. 1592년 48세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5월 7일(음력) 제1차 옥포해전(玉浦海戰)에서 왜적을 무찌르기 시작하여 해전에서 연전 연승하였다. 1598년 11월 19일(음력)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였으니 이충무공의 나이 54세였다. 전란에서 나라와 민족을 구했던 우리 민족사의 영웅 이충무공의 3대 정신은 아래와 같다.
나 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정신, 거북선과 조총을 새로이 만든 창의개척(創意開拓)의 정신, 미리 전쟁에 대비해 적을 물리쳤던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정신.
이충무공의 묘(墓)는 충남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에 있다. 이충무공이 돌아가자 인조(仁祖)는 충무라는 시호를 내렸고, 정조(正祖)가 다시 영의정(領議政)으로 올려 모셨다. 부인은 상주(尙州) 방씨(方氏)로, 3남 1녀의 자제를 두었다.
한산정(漢山停)
한산정(漢山停)은 이충무공이 부하 장졸(將卒)들과 함께 활쏘기를 연마하던 곳이다. 여기에서 과녁까지의 거리는 145m정도로 활터와 과녁 사이에 바다가 있는 곳은 이곳 뿐이다. 이충무공이 이곳에 활터를 만든 것은 밀물과 썰물의 교차를 이용해 해전에 필요한 실전거리의 적응훈련을 시키기 위해서였다. 난중일기(亂中日記)에는 이곳에서 활쏘기 내기를 하고, 진편에서는 꺽과 막걸리를 내어와 모두가 배불리 먹었음이 여러 차례 기록되어 있다. 이는 활쏘기 훈련의 흥미와 장졸들의 시기진작을 위한 이충무공의 지혜였을 것이다. 함께 활쏘기를 연마하던 장졸들은 이충무공이 1594년에 건의했던 무과특별시럼에서 선발된 하삼도(下三道: 경상, 전라, 충청) 출신의 사람들이었다.
수루(戍樓)
이 수루(戍樓)는 일종의 망루로서 임진왜란 당시 이충무공께서 이곳에 자주 올라 왜적의 동태를 파악하였고, 왜적을 물리쳐 나라를 구하여 달라고 기도하며, 우국충정(憂國衷情)의 시(時)를 읊기도 하던 곧이다. 또 이곳에서 오른쪽의 고동산, 왼쪽의 미륵산, 뒤쪽의 망산을 연결하여 봉화, 고동, 연 등을 이용하여 남해안의 왜적 동태를 파악하였다. 그리고 이 수루는 1976년 정화사업때 한산만을 내려다 볼 수 있는 현 위치에 고증(考證)을 거쳐 신축허였으며, 2014년에 목조로 전면 개축하였다.
이충무공 후손 삼도수군통제사 功德碑
이 비(碑)들은 이충무공의 후손으로서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했던 분들중 선정(善政)을 배풀어서 칭송을 받은 여섯분에 대하여 약 250년~130년전에 한산도와 거제도의 주민들이 이를 기리기 위하여 세웠던 공덕비(功德碑)를 한자리에 모아 놓은 것이다. 오른쪽부터 제121대 통제사 이태상(李泰相, 5대손), 제138대 통제사 이한창(李漢昌, 6대손), 제168대 이태권(李泰權, 8대손), 제172대 이승권(李昇權, 8대손), 제199대 통제사 이규석(李圭奭, 10대손), 제203대 통제사 이규안(李奎顏, 10대손), 의 공덕비가 늘어서 있다. 비석에는 대부분 撫恤島民, 千秋不忘(무휼도민, 천추불망) 즉 “섬사람들을 따뜻하게 돌보아 준 功德을 영원히 잊지 목하겠다”는 내용으로 새겨져 있다.
한산만(閑山灣)
한산만은 통영의 미륵도(彌勒島)와 한산도(閑山島)사이의 내륙 쪽에 있는 만 지형의 바다이다. 한산만의 남쪽은 통영만(統營灣)으로 불리고 있다. 한산만은 입구가 좁고 안쪽이 넓은 모양으로 남서쪽에는 두억포(頭億浦)가 있고, 남동쪽에는 고포(羔浦)가 있다. 한산만의 수심은 입구가 12~14m, 안쪽이 6~9m로 소형 선박의 출입이 가능하다. 한산만 남쪽의 통영만도 비슷한 지형이지만, 입구의 폭이 1.2㎞로 더 넓고 수심이 10m이상으로 대형선박의 출입도 가능하다. 임진왜란 때에는 두억포에 삼도수군(三道水軍)의 본영(本營)이 설치되었는데 전함(戰艦)인 판옥선(板屋船)과 정탐선(偵探船)인 척후선(斥候船) 100여척과 740여명의 조선 수군이 주둔했다. 이충무공은 이러한 지형을 유리하게 이용하여 한산대첩의 승리를 거두었다. 작은만과 포구들, 크고 작은 섬들이 곳곳에 있은 한산만의 지형에 익숙하지 못했던 돼군의 참패는 당연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