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글은 부천개혁교회에서 2024년 겨울사경회를 부천개혁성경신학교의 '종교개혁사' 강의를 병행하여 '종교개혁시대의 신학과 신앙 : 종교개혁 이야기' 주제로 1월 13일(토요일)-14일(주일)에 가지며 강의한 내용입니다. 강사는 고경태 목사님(주님의 교회, 조직신학 교수)입니다. 마지막인 열두 번째 시간 12강은 '웨스트민스터 총회'입니다.
.................................................................................
종교개혁시대의 신학과 신앙
- 종교개혁 이야기 -
목 차
1. 우리가 생각하는 종교개혁 진영이란
2.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들
3. 종교개혁 대략
4. 때가 찬 종교개혁
5. 루터의 종교개혁
6. 칼빈의 종교개혁
7. 잉글랜드의 종교개혁
8.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
9. 재세례파와 신령주의(신비주의)
10. 로마 카톨릭주의와 세르베투스주의(소시니안)
11. 도르트 총회
12. 웨스트민스터 총회
※ 주일설교
........................................................................................
- 겨울사경회 둘째 날 : 열두 번째 시간 -
12강 웨스트민스터 총회(Westminster Assembly of Divines)
1485 – 헨리 7세, 튜더 왕가 시작, 절대주의정권 기초확립
1488 - 디아스, 희망봉 발견
1492 -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
1498 - 바스코 다 가마, 인도 항로 개척
1500 – 로마 교황청, 면죄부 판매
1509 – 헨리 8세, 즉위 / 연산군 시대, 1476-1506
1511 – 에라스무스, <우신예찬>
1514 – 마키아벨리, <군주론>
1516 - 토마스 모어, <유토피아>
1517 - 루터, 독일 종교개혁
1519 - 마젤란, 세계일주 항해 / 1519 조광조, 기묘사화(己卯士禍)
1534 - 잉글랜드 국교회 성립(수장령), 헨리 8세의 캐서린과 이혼 문제
1536 - 칼빈, 기독교강요 초판 출판
1543 - 코페르니쿠스, 지동설 주장
1545 – 트렌트 공의회 -> 1565까지
1547 – 에드워드 6세
1553 – 메리 여왕, 교황과 화해, 카톨릭으로 돌아감, 수장령 폐지, 신교도박해
1558 – 엘리자베스 여왕, 잉글랜드 교회 기초확립(39개 신조)
1560 - 존 낙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작성
1570 - 교황이 엘리자베스 여왕을 출교함
1582 - 갈릴레이, 존 뉴톤 중력의 법칙 발견
1588 - 스페인의 무적함대 잉글랜드가 격파함
1590 - 토요토미 히데요시, 일본 통일
1592 - 임진왜란
1600- 영국, 동인도회사 설립
1603 – 스코틀랜드 제임스 6세, 잉글랜드 제임스 1세 즉위, 왕권신수설
1611 - 킹 제임스 성경 번역 출판
1618 - 도르트 총회에서 알미니안주의 배격함
1620 - 영국의 청교도 신대륙으로 이주, 베이컨,<신기관>
1624 - 리처드 몬태규의 반칼뱅주의 논문으로 알미니안주의 득세
1625 - 찰스 1세 즉위
1628 - 의회는 공채나 조세는 의회의 찬성을 요한다는 것, 시민 체포, 투옥하지 못한다는 것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권리청원(權利 請願, Petition of Rights)
1629 - 11년간 의회 없이 통치함
1632 - 갈릴레이, 지동설 주장 / 1627 정묘호란(丁卯胡亂), 1636 병자호란(丙子胡亂)
1637 – 데카르트 <방법서설> : 대주교 로드가 스코틀랜드 지방에 영국 국교회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했고, 스코틀랜드 언약도가 형 성됨. 스코틀랜드의 귀족, 시민, 농민들은 국민언약에 충성을 바치겠다는 언약함(언약도).
1640 – 찰스 1세는 전쟁 재원 조달을 위해 의회를 소집했으나 선출된 청교도가 이를 반대 곧 해산함, 이를 단기의회라고 함. 주교 전쟁의 전쟁배상금 확보 때문에 재차 의회가 소집했는데 뜻데로 되지 않자 해산 명령을 내렸고, 의회가 거부함으로 내전
으 로 확산되었다. 이를 장기의회라고 함.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의회의 요청에 의해 소집됨.
1642 - 시민전쟁, 의회파와 왕당파 간의 전쟁
1643.7.1. - 웨스트민스터 총회 개최
1643 –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아일랜드 세 왕국이 엄숙한 동맹과 언약 체결.
1644 - 크롬웰의 철기대, 왕당군 격파, 청교도는 곧 온건주의 장로파와 급진주의 독립파 및 평등파로 분열
1645 - 윌리엄 로드 대주교 처형
1647.4.29.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완성
1647.11.5. -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서 완성
1648.4.14. -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서 완성
1648 - 베스트팔렌 조약 체결
1649.2.22. - 웨스트민스터 총회 해산(5년 6개월 22일간의 회의 기간에 1163회 회합 또는 위원회 가짐)
1649 - 2차 내전에서 독립파와 평등파가 승리, 공화정 수립, 찰스 1세 처형
1651 – 올리버 크롬웰(호국경), 토마스 홈스, <리바이어던>
1658 – 크롬웰 사망(3월), 사보이 선언(9-10월깢, 120 회중교회 200명 대표, 6명의 위원 중 5명이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참석한 자).
존 오웬, 토마스 굿윈, 필립 나이, 윌리엄 브릿지, 조셉 카릴, 윌리엄 그린힐
1660 – 찰스 2세 왕정복고
1662 - “일치령”
1685 – 프랑스 퐁텐블로 칙령(Edict of Fontainebleau), 1800년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 등장
1688 – 명예혁명
왕당파와 의회파로 대치되던 1643년 7월 1일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예배당에서 개최된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5년 6개월 22일 동안 1,163회 이상의 정규모임을 가졌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에는 151명의 대표가 참석했는데, 처음 호명된 30명은 평신도 사정관들로 10명의 상원의원들과 20명의 하원의원들이었고, 나머지 121명은 각 지역에서 선출된 성직자(Westminster Divines)들이었다. 1643년 8월 17일에 체결된 엄숙한 동맹과 언약에 의해서 스코틀랜드 사역자들이 업저버로 참석해서 함께 신앙고백서 작성 과정에 참여했다.
당시 로마 카톨릭주의의 성직자들은 절반 정도가 문자를 읽지 못한 상태였는데, 총회 대표들 중 85%는 학사, 석사 학위를 취득한 연구자들이었다. 청년 때에 총회를 목격한 청교도 목회자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는 “총회의 대표들은 모두 학식이 뛰어나고 경건하며 능력 있는 목회자들로 사도시대 이후부터 이렇게 탁월한 성직자들이 모인 회의는 이전에 없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151명의 대표들 명단 중에 25명은 한 번도 총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한두 명은 총회 때에 세상을 떠났고, 다른 이들은 총회를 반대한 찰스 1세를 두려워했거나, 혹은 감독제도를 좋아했기에 참석하지 않았다. 의회는 부족한 위원들을 채우기 위해, 21명의 위원들을 추가로 선정했다. 총회 첫날에는 69명만 참석했다. 대개 평소 회의 참석자는 60명에서 80명 사이였다. 출판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102명의 성직자 이름이 나오는데 모두가 모든 일정에 참여한 것은 아니다. 대표 가운데 적어도 80%는 지역 교회를 돌보는 목회자들이었기 때문에 5년간에 걸친 긴 회의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회의 중에 자주 발언한 성직자는 12명 정도였고, 그 중에서도 독립파 대표인 토머스 굿윈은 127차 회의에서 무려 357회 발언해서 1위였다. 많은 이들이 학식과 능력은 있었지만, 듣고 생각하고 투표하는 것에 만족했다. 마지막까지 첨예한 신학 논쟁은 에라스투주의였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 소시니안, 알미니안을 배격하는 것에는 일치를 보았다. 에라스투주의는 거부되었지만 실제로 에라스투주의를 분별하기 쉽지 않았다. 1643년 엄숙한 동맹과 언약에서 ‘왕’을 중심으로 개혁을 추구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한 교파를 이루기 위한 총회가 아니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가 한 믿음 고백으로 한 왕국을 세우기 위한 총회였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로마 카톨릭주의를 개혁하고 새로운 교회질서를 세우기 위한 총회였는데, 다른 교회질서에 대한 의견들이 있었다. 많은 토론과 협의 끝에 최종 문장이 결정되어 신앙고백서로 작성되었다. 즉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장로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작성된 문서가 아니다. 그런데 장로교회만 채택하는 표준문서가 되었다.
※신조, 신앙고백서
신조(信條)는 영, Creed, 라, Credo(Credomus)에 대한 번역이다. 신조는 증표, 상징이라는 의미로서 영, Symbol, 라 Symbolum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신조는 신경(信經)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우리는 ‘사도신조’보다 ‘신도신경’이라는 용어를 더 일상적으로 사용한다. 니케아 신조 혹은 니케아 신경으로 사용한다. 신조는 교리와 동의어이다.
그런데 사도신경은 교리보다 신앙고백이라고 사용하기도 한다. 그것은 교리가 결정되기 전부터 있었던 문장이기 때문이다. 교리는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조항(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이다. 기독교 교리는 삼위일체(동일실체, homoouison)과 그리스도 양성교리(theotokos, Dei Genetrix)이다. 또 한 문장은 아타나시우스 신조(Quicumque, Symbolum Athanasianum, Athanasian Creed)이다. 아타나시우스 신조의 문제점이 있는데, 그것은 공교회(에큐메니칼 회의)에서 결정한 문서가 아니라는 것이며, 또 문서 작성자를 알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내용만 좋으면 됐지 저자가 중요한가?라고 질문할 수 있겠다. 그러나 공교회 문서는 저자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사도신경은 공교회 문서가 작성되기 전부터 교회에서 사용되었기 때문에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필자는 아타나시우스 신조와 니케야 신조와 권위를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로마 교회를 시작해서 아타나시우스 신조를 절대문서에 포함시키고 있는데 바람직하지 않다.
신앙고백서(信仰告白書)는 신도게요서(信徒揭要書)라고 사용한다. 게요(揭要)의 ‘게(揭)’는 ‘게양(揭揚)’에 사용되는 어휘로, 높이 든다는 의미이다. ‘요(要)’는 중요(重要), 요약(要約), 긴요(緊要) 등의 의미이다. 게요는 “믿음의 문장을 높이 든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군대(軍隊)의 군기(軍旗)가 될 것이다. 우리는 ‘신도게요’라는 말은 잘 사용하지 않지만 의미를 알면 좀 더 명확한 어휘이다. 장로파 신도게요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이다. 그것은 장로파 군대의 군기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신앙고백서는 영, Confession, 라, Confessio에 대한 번역이다. 루터파와 칼빈파는 신앙고백서를 작성했다. 루터(M. Luther, 1483-1546)는 1529년 대,소요리문답을 집필했다. 그리고 1530년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멜랑톤(Philipp Melanchthon,1497-1560)이 작성했고 루터가 인준했다. 루터파(Gnesio-Lutherans)는 멜랑톤(the Philippists) 사후 20년이 지난 1577년, 1580년에 서로 화해와 일치를 위해 새로운 신앙고백, 일치신조(Formula of Concord)을 채택했다. 칼빈파는 스위스, 프랑스, 네덜란드, 스코틀랜드에서 정착했다. 칼빈파는 각 지역마다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을 작성했다.
신앙고백서는 믿음 문장으로 표준문서(standard text)를 작성한 것이고, 요리문답(要理問答, Catechism)은 믿음 문장을 훈련하기 위한 방편이다. 칼빈은 제네바로 귀환하여 1542년 제네바 요리문답을 작성했다. 루터와 칼빈은 신앙고백서가 작성되기 전 요리문답을 작성했다. 이들의 요리문답은 사도신경, 십계명, 주기도문을 기본 골격으로 구성했다.
그러나 칼빈파는 신앙고백서를 작성하고 그에 문서를 교육하기 위해서 요리문답을 구성했다. 1563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The Heidelberg Catechism)를 작성했는데, 팔즈에서 2차 헬베틱 신앙고백서를 근본으로 작성했다고 볼 수 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2세가 아우구스부르크 협약(The Peace of Augsburg, 1555년)을 근거해서 구교도 루터파도 아닌 팔츠에 개혁신학(칼빈파)을 제거하려고 할 때, 선제후 프리드리히(Friedrich III, 1515-1576)가 불링거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불링거는 '참된 기독교를 위한 바른 신앙과 보편타당한 교리', 2차 헬베틱 신앙고백서를 지원했다.
네덜란드 개혁파는 벨직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그리고 도르트 신경을 일치신조(Three Forms of Unity)로 채택했다. 프랑스신앙고백서(Gallic or French Confession of Faith, 1599년)은 요리문답을 작성하지 못하고 소산되었다. 벨직신앙고백서(Belgic Confession, 1561년)도 그렇지만 네덜란드 교회가 표준문서로 채택해서 보존되었다. 이러한 문서는 칼빈(John Calvin, 1509-1564)이 생존할 때 작성된 문서라는 것이 특징이다. 이들 과정에는 트렌트 종교회의(Concilium Tridentinum. 1545-1563)가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신앙고백서’를 ‘신조’라고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아마도 그것은 도르트 신조의 영향이 있을 것이다. 1618년에 개최된 도르트 공의회이다. 도르트 회의는 국제회의이고 유럽의 모든 개신교 사역자들이 참가한 유일한 국제, 공적 회의이다. 그런 의미에서 도르트는 공회의적 성격이 있지만, 칼빈파의 공회의이다. 한 교회(the Holy Catholic Church, The Universal Church)의 공회의(The Council)는 아니다. 트렌트 종교회의도 교황주의의 종교회의이다. 보편교회의 회의는 1054년 이후에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개혁교회는 454년 칼게돈 공교회(칼케돈 신경)까지는 보편교회의 신조로 인준한다. 7회 공회의에서 4회 문서만 바른 문서로 채택한다. 도르트 신경은 개혁파(칼빈파)의 문서이다.
325년 니케야 신경, 381년 콘스탄티노플 신경, 431년 에베소 신경, 451년 칼케돈 신경이 에큐메니칼 신조이다. 신조는 기독교의 문서이다. 개신교는 루터가 선언한 “이신칭의”를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조항(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으로 신봉한다. 개신교 안에도 신인협력(Synergism) 요소를 용인하는 진영과 거부하는 진영으로 현격하게 구분된다. 루터파나 칼빈파는 신인협력을 전혀 용인하지 않는다. 루터파나 칼빈파에서 작성한 문서는 신앙고백서로서, 각 진영의 표준문서이다. 다른 개신교 종파들도 각각 신앙고백서를 작성했다. 그 신앙고백서가 자기 믿음의 기본 신앙 정체성이다.
한국 장로교는 1907년 독노회에서 12신조를 표준문서로 채택했다. 2012년 김길성 박사와 최성헌 박사는 공통으로 “합동과 통합 등 4개 장로 교단 신앙고백서 분석”했다. 합동 교단은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와 대소요리문답 그대로 수용했고(1963년), 고신 교단은 성령과 선교 관련해서 첨가된 2 장(35장)이 있는 문서를 수용했고(1969년, 1975년), 통합 교단은 교회의 일치와 연합 위해 ‘21세기 신앙고백서’ 채택했고(1986년, 1997년), 기장 교단은 웨스트민스터 버리고 진보적 성향의 신앙고백서 작성했다(1972년)고 발표했다.
교단은 자기 표준 문서를 밝히는 것이 교단의 기본이다. 신앙고백서를 바르게 밝히고 탐구하는 것이 교단 신학자와 목사의 기본 훈련이다. 그것은 곧 고대 신조와 성경으로 믿음을 일치시키는 한 방법이다. 믿음 훈련은 곧 믿음의 주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당신은 누구를 믿는가? 그 믿음의 주께서 세상에서 자기를 누구라고 말하는가?를 질문하신다. 그 때 우리는 다시 믿음 고백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