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을 뛰어넘는 (벧전 5; 1- 9)
어려서 많이 들었던 이야기 중에 거부감이 드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 라는 말입니다.
아주 소극적인 그리고 보편적인 모습입니다.
중간 못가고 꼴찌를 하더라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성경은 오늘의 모습에 만족하고 머무르라고 말하고 있지 않고
내일 향한 꿈을 꾸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내일을 향한 꿈을 이루기 위해 비현실적인 요청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비현실적인 허점을 사단이 노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의 이야기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어느날 니고데모 라고 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 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구합니다.
“영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라고 질문합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네가 계명을 다 지키었느냐?” 고 말입니다.
이 청년이 대답합니다. “네 다 지켰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이야기 하십니다.
그러면 “네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라오라.” 고 말씀 하십니다. 그 말에 이 청년이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는 단계가 있지요?
첫 번째는 상식적인 단계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이야기 하면서 종종 이런 객곽적 사실을 무시하는 모습을 봅니다. 아니지요. 그것은 너무 소중하게 여겨져야 합니다.
저는 양문교회에 오기를 간절히 기도 했습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런 방식에 대한 회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너무나 비윤리적인 야합들로 인하여서 오히려 질서를 깨뜨리는 일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청빙 방식에
오히려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지나갔던 그 공고를 기도 중에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확인해 보니까 우리 교회의 청빙 공고 였습니다.
그런데 내용이 믿을 수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교회의 모습을 공개한 것이나
그 과정에서 되어지는 과정을 잘 설명한 것이나,
최대한 인격적이고 많이 긍정할 수 있는 상태 였습니다. 그리고 질서 정연하게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수반 되는 아주 좋은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좋은 대안이겠다고 여겼습니다.
제가 뒤늦게 연락을 받고 비디오 촬영 분을 보낼 때 배 장로님에게도 편지에 썼지만 정말 오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탈윤리가 판을 치고 자기의 이익이라면 친구도 가족도 배신하는 사회에서 빛이 되는 모습 이라고 보여 졌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더해져야 할 것을 제가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보편성에 머무르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역사는 그런 보편성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를 세워가는 기초일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났다고 해서 모두 가나안땅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훈련의 의미를 알고 이해하고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들어갔습니다.
두 번째는 그 상식을 뛰어 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니고데모에게 이것을 이야기 합니다.
거듭나는 것을 말입니다. 그것은 죽어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경험이 죽어야 합니다. 내 계산이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죽어야 사는 원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사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 상식을 뛰어 넘는 원리가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살게 합니다.
오늘 본문은 취임하는 장로님들에게 목사님들이 많이 설교하시는 분문입니다. 1절에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라는 문구 때문일까요?
하지만 초대교회는 장로와 사제의 경계가 모호합니다. 미국 연합 감리교회가 안수를 이야기 할때 ‘니컨’ 이라는 말고 ‘엘더’ 라는 말을 쓰면서 안수의 격을 달리합니다. 그 ‘엘더’ 라는 말이 바로 장로님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즉 장로 같은 목사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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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본문을 많이 읽으면서 새겨봅니다.
그리고 상식 너머의 세계를 꿈꿉니다.
첫 번째는 자세입니다.
함께 위임 받은 자요, 고난을 받을 자요. 그리고 영광에 참여할 자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귀한 직임을 위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저 혼자가 아니라 이웃한 모든 목사님들과 장로님들과 함께 말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함께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감리교회를 사랑합니다. 많은 선교 단체의 일도 했지만 감리교회의 정신만큼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커넥팅입니다. 연결주의 라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연결 되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당회 구역회 지방회, 연회 총회 들이 연결 되어지는 역할을 하는 가교지요.
교회 안에서도 이런 연결이 중요합니다. 목사와 교우간의 연결. 어른 세대와 어린 세대의 연결, 남자와 여자의 연결
이런 연결의 이면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자기인식과 성찰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그리고 어떻게 연결 되어져야 하는가?
그리고 이 말에는 신뢰가 있는 것입니다. 나와 같이 가는 사람들에 대한 신뢰, 즉 하나님이 위임해서 같은 길을 가게 하는 것에 대한 신뢰 말입니다. 목사가 교우들을 신뢰하고, 교우들이 목사를 신뢰하는 모습이 있는 교회를 말하는 것이지요.
미국의 문화는 슈퍼맨 문화입니다. 한 사람의 힘에 의해서 무언가 이루어져 가는 역사를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성경도 예수 그리스도 그 한 분에게 모든 포커스를 맞추려고 합니다. (슈퍼스타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은 그 상식을 뛰어 넘어 제자들을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도
상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이 제자들을 세우신 것도 당연히 상식을 넘어선 파격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양 무리를 치는 자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부득이함이 아니라 자원함으로
저는 이 말을 사무적이 아니라 전인격적으로 라고 표현합니다.
그저 직분자이기에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 전체를 표현하는 교제로
이어져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저 만남이 아니라 관계로 이어져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 하나님과의 만남의 지속성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즐거움으로 하여야 한다.
얻는 것보다 얻어지는 것이 더 많아야 합니다.
그런데 눈앞의 작은 것에 연연하면 더 큰 것을 놓칩니다.
이 세상에 가장 위력적인 것이 돈입니다.
하지만 돈만큼 작은 것도 없습니다. 돈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가장 작은 것만 얻은 것입니다.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말씀합니다.
주장한다고 하는 것은 내 것을 가지고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이 된다 고 하는 것은 공동체적 생각 즉 그 공동체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생 각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내리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광의 면류관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은 후에 받는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도 영광의 면류관이지요.
겸손하면 높이시는 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의 면류관 이지요.
염려를 맡겼을 때 권고 하시는 것도 면류관입니다.
적을 대적할 수 있는 힘도 면류관입니다.
내가 수고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면 모든 것은 죽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만 살아 있습니다.
예) 애굽의 장자들의 사건
동일한 고난을 당한다.
이전에 고난을 당할 때 나 혼자만의 고난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나 혼자만이 아니라 모두가 고난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주님이 고난을 당하셨고, 수많은 선지자들과 예언자들이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시대에도 수많은 이들이 이 고난의 자리에 있습니다.
예) 대적할 힘을 가지기 위해 고난
추가) 요점 노트
요한복음 3장의 이야기
비상식적인 단어
이 청년의 삶은 아주 상식적이었다.
그리고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삶 이었다.
거듭남 가난한 자들에게
오늘 본문도 비상식적이지 않은가?
어떻게 일을 억지로 하지 않을 수 있는가?
어떻게 댓가없는 일들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주장하는 자세가 아닌 모습으로 설 수 있을까?
그런데 그것은 비상식이 아니라 상식을 넘어서는 것이다.
주님의 구원은 상식 너머의 열매이다.
우리 교회가 이제 상식 너머의 일들을 꿈꾸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장로님들에게 하는 설교를 목사가 자기 스스로에게 하는 것조차 상식 너머의 표본이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