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金煥基 (1913 ~ 1974)】 "민족 정서와 조형 詩’
한국 추상 회화의 선구자"
김환기 Kim Whan Ki, 1913 ~ 1974
김환기는 한국적인 정취를 선명하게 드러내면서도 세계인이 공감하는 조형미와 색감을 지닌 작품세계를 통해 보는 이로 하여금 감동과 명상의 세계로 이끈는 화가로 전통미를 현대화한 세련된 화면구성으로 민족정서와 자연을 추구한 ‘조형 시詩’를 창조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한국 추상 회화의 선구자이다. 그는 1930년대부터 가장 전위적인 활동의 하나였던 추상미술을 시도, 한국의 모더니즘을 리드하였으며, 1950년대에 이르러 산, 강, 달 등 자연을 주소재로 밀도 높고 풍요로운 표현으로 한국적 정서를 아름답게 조형화 하였다.
김환기의 예술은 1956년부터 1959년까지 약 3년여의 파리시대와 아울러 상파울로 비엔날레에서 수상한 1963년에서 작고한 1974년에 이르는 뉴욕시대에 더욱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는데, 파리시대와 서울시대를 포함한 1950년대까지 그의 예술은 엄격하고 절제된 조형성 속에 한국의 고유한 서정의 세계를 구현하였으며, 1960년대 후반 뉴욕시대에는 점, 선, 면 등 순수한 조형적 요소로 보다 보편적이고 내밀한 서정의 세계를 심화시켜 전면점화 全面點畵라고 불리는 명상적인 시詩적 공간으로 숭고한 추상의 세계를 남겼다. 한국의 서양화가이자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서구 모더니즘을 한국화 했다는 평가를 받는 김환기 작가의 전면추상 작품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김환기 예술세계의 근저에 흐르는 한국적 풍류의 표현과 우리 민족의 정서와 감흥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청년시대
동경/서울시대 1933-1955
청년 김환기는 1933년 일본대학 예술과 미술부에 입학하여 이듬해인 1934년, 일본 화단 내에서 전위를 표방하는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에 연구생으로 참여합니다. 그는 당시 유럽에서 귀국한 후지타 츠구하루(藤田嗣治), 도고 세이지(東鄉靑兒) 등에 의해 유럽을 풍미했던 입체주의, 구성주의, 미래파 등의 미술사조롤 통해 추상회화에 대한 열의를 키워나가게 되며, ‘이과회’, ‘백일회’, ‘광풍회’, ‘자유미술가협회’ 등의 전위적인 미술단체에서 몇 차례의 입선과 전시회를 개최하게 됩니다. 동경시대를 대표하는 <종달새 노래할 때(1935)>는 당시의 복합적인 화풍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고향의 누이동생을 생각하며 한복을 입은 여인상을 화면 중심에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여인의 몸체나 팔의 경우 구체적인 묘사를 지양하고 머리에 올린 바구니 안은 그대로 투명하게 노출하면서 대담하고 실험성 강한 표현주의적 경향을 보이는 한편 작품의 제목이나 화면의 모티브들은 한국적 서정성이 담겨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습니다.
담백한 청색 주조 화면, 평면적인 면의 구성과 장식성
그리고 두터운 질감으로 구성된 서정적이고 시흥이 넘치는 조형세계
파리/서울시대 1956-1962
“한국 예술가들의 최대의 불행은 넓은 세계를 알 수 있는 기회가 없어 예술적 도약이 제한되어 있는 것이고 나는 한국의 화가일지는 몰라도 아직 세계의 화가는 아니다. “
산과 달 그리고 사슴, 매화, 둥근 백자 항아리는 김환기의 1950년대 작업에서 등장하는 주요 소재들로 정물과 풍경의 구분 없이 한 화면에 한국의 자연을 표상하는 조형요소로서 구성됩니다.김환기는 일찍이 한국고미술에 대한 애착과 수집열이 대단하였는데, 소장품 중에서도 가장 애완한 것은 품에 넘치도록 크고 둥근 유백색과 청백색의 달항아리였습니다. 그는 때때로 항아리들을 마당에 내다가 초석 위에 올려놓고 감상하였고, 백자 항아리를 기물 이상의 자연 그 자체로 살아있는 생명체로 귀하게 여겼습니다. 조선 백자 항아리는 본래 절제와 지조, 규범을 중요시하고 자연 안에 내재되어 있는 미적 가치를 볼 줄 알았던 당대 지성인의 격조와 품위를 가장 잘 반영하는 조형물입니다. 작가는 일찍이 문명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자연과 그러한 자연의 반영물인 백자 항아리에 대한 뛰어난 감식안을 발휘하여 담백하고 무심한 듯 절제된 아름다움에 대한 시감을 50년대 회화의 중심 모티브로 승화시켰습니다. 김환기가 백자 항아리와 함께 즐겨 그렸던 소재인 산월풍경은 1950년대 초부터 지속적으로 그려지고 있어서 그의 예술관과 회화의 양식적 변화를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작가는 단순하고 절제된 형태로 산봉우리와 우거진 숲, 둥근 일월, 일렁이는 구름, 흘러가는 강과 바다 등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전면점화 全面點畵 로 표현된 점,선,면의 내밀한 서정의 세계
뉴욕시대 1963-1974
미국으로 건너간 1963년부터 작고한 1974년에 이르는 뉴욕시대를 통해 1950년대 후반부터 산, 달, 강, 새, 나무 등이 있는 자연 풍경을 순수한 점, 선, 면의 조형적 요소로써 내밀한 서정의 세계로 심화시켰습니다. 김광섭의 시 한 구절에서 제목을 붙인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로 잘 알려진 전면점화 시리즈는 작가가 태어나고 자란 기좌도의 그 넓고 아득한 바다와 하늘 풍경을 연상시킵니다. 아교 칠한 발 고운 생면에 테레핀을 풀어 묽게 만든 유채물감으로 선을 긋고 담채를 연상시키는 점을 찍음으로써 무한히 확장되어 가는 우주적 공간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작가는 고착되지 않고 안으로 스며드는 점을 반복해서 찍음으로써 점이 선이 되고, 그것이 모여 하나의 면이 되는 서로가 개별적인 요소로서보다는 융합된 하나의 조화로 완성합니다. 또한 점은 화면에서 번지고 얼룩지면서 하나하나가 개성을 지니면서 풍부하고도 다양한 짜임과 리듬을 만들어 냅니다. 이는 일정한 계획을 통해 만들어지는 구성이 아니라 예기치 않는 잠재성을 드러내면서 태어나는 유기체이며, 이러한 특성이 보는 이로 하여금 마치 화면이 숨을 쉬는 듯한 생명감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셀루리안 블루, 울트라마린, 프러시안 블루, 로즈 레드, 로즈 매더 등의 깊고 신비한 색감을 사용하여 그려낸 그 우주적 공간, 미세한 색점의 음영은 예전처럼 산과 달, 하늘과 같은 구체적인 형상은 없지만 머나먼 이국땅에서 작가가 느끼는 오만가지 희노애락을 색점 하나하나에 담음으로써 오히려 무한세계로 열려진 시적 조형언어를 창출하였습니다. 그것은 무심코 찍어가는 점이 아니라 점 하나에 그가 만난 인연과 자연, 음악 등 작가가 살아온 시간을 새긴 것입니다. 친구의 편지를 읽고, 그는 편지 구절에, “이른 아침부터 뻐꾸기가 울어댄다고 했다. 뻐꾸기의 노래를 생각하며 종을 푸른 점을 찍었다. 앞바다 돗섬에 보리가 누르렀다고 한다. 생각나는 것이 많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김환기의 색점은 바로 자연과의 은밀한 대화이자, 자연과의 근원적인 교감이 이루어짐으로써 가능한 세계였습니다.
전면점화(全面點畵), 환기불패의 절정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 김환기는 한국적 정서를 서양미술과 접목시켜 표현해 한국 모더니즘을 구축한 대표적인 화가입니다. 초창기에는 한국적 정서로 표현한 달항아리, 해, 달, 구름, 나무, 사슴, 학, 매화, 한국 여인 등의 반추상 작품에서 1970년부터 후반기에는 수많은 점이 전체 화면을 가득 채운 ‘전면점화 全面點畵’ 의 완전 추상 작품으로 그의 작품의 절정을 이룹니다. 한국 미술 경매에서 가장 비싼 Top 10 작품 중, 9개 작품이 그의 작품으로 유명한데 ‘환기불패’ 라고 불릴 만큼, 그의 작품은 구매 후 손해보지 않는 걸로 유명하며, 매번 새롭게 갱신되는 비싼 거래의 가격으로 김환기 작품을 이기는 작품은 다시 김환기 작품! 이라고 회자되기도 합니다. 가격이 그 작품의 절대 가치 평가의 기준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만큼 공감한다는 점에서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산울림이 동심원을 그리면서 퍼져나간다. 동심원이 겹쳐지면서 퍼져나간다. 사각틀 안에서는 더 큰 울림이 느껴진다. 더 깊은 울림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사각틀 밖에서는 점을 찍으면서 번진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옅은 진동을 내며 사라지는 듯하다. 중간의 하얀 선은 하얀 선을 그린 게 아니고 그리지 않고 남겨둠으로써 만들어진 선이다. 얼마나 집중해서 그려야 저렇게 그릴 수 있단 말인가? 산울림, 나의 마음에도 울림이 퍼져 나간다. - 이건희 컬렉션 도슨트북 발췌 - 김환기의 전면점화 작업을 지켜보던 부인 김향안은 이렇게 회상한다.
"
큰 점, 작은 점, 굵은 점, 가는 점, 작가의 무드에
따라 마음의 점을 죽 찍는다. 붓에 담 긴 물감이 다 해질 때까지 주욱 찍는다.
그렇게 주욱 찍은 작업으로 화폭을 메운다.
그다음 점과 다른 빛깔로 점들을 하나하나 둘러싼다.
꽤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다시 다른 빛깔로 하나하나 둘러싼 사각형을 다시 둘러싼다.
전 화폭을 둘러싼 다음, 다시 또 다른 빛깔로 네모꼴을 둘러싼다.
세 번 네모꼴을 그리는 셈이다.
중첩된 빛깔들이 창조하는 신비스러운 빛깔의 세계, 이것이 이 작가의 개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