엎질러진 물을 다시 컵에 담을 수 있을까. 현실에서는 불가능하지만, 디지털 세계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바로 리셋(reset)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된다. 리셋 버튼을 누르는 순간, 엎질러졌던 물은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 가기 때문이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한 모(19) 군은 이 같은 리셋 버튼을 평소에 즐겨 사용한다. 게임을 할 때 자신이 불리하거나 인터넷 속도가 느려지게 되면 거리낌없이 리셋 버튼을 눌러 초기 상태로 되돌려 버린다. 게임을 하는 상대방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 지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가상의 세계에 빠져 현실을 혼동하는 리셋증후군 환자들이 증가하고 있다 ⓒ 연합뉴스
그런 한 군이 얼마 전 금은방에서 물건을 훔치다가 경찰에 붙잡혀 구속됐다. 가짜 총기로 금은방 주인을 위협하다가 근처를 지나가던 행인이 신고하는 바람에 붙잡히게 된 것.
경찰서에서 한 군을 심문했던 경찰 관계자는 그를 “리셋증후군을 앓고 있는 중증의 컴퓨터 게임 중독자”라고 밝히며 “수중에 돈이 떨어지자 마치 컴퓨터 게임을 하듯이 금은방을 노린 것 같다”라고 말했다.
게임처럼 쉽게 포기하고 되돌리는 현상 급증
온라인 게임처럼 가상의 세계에 빠져 현실을 혼동하는 ‘리셋증후군(Reset Syndrome)’ 환자들이 최근 들어 청소년층을 중심으로 급증하고 있어 우려를 낳고 있다.
리셋증후군이란 현실에서도 리셋이 가능하다고 착각하는 현상을 말한다. 컴퓨터를 사용하다 보면 가끔씩 먹통이 되거나 오작동을 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리셋 버튼을 눌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행위를 현실 세계에도 그대로 적용한다는 것이다.
한 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수중에 돈이 떨어진 것은 그에게 있어 컴퓨터가 먹통이 된 상황이다. 따라서 이를 다시 돈이 있었던 처음의 상황으로 되돌리기 위해 범죄행위라는 리셋 버튼을 누른 것이다.

리셋증후군이란 현실에서도 리셋이 가능하다고 착각하는 현상을 말한다 ⓒ Health-Review.org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정신과 분야의 전문가들은 “리셋증후군을 앓고 있는 환자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지적하며 “현실과 가상의 세계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고도 단지 게임의 일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르면 리셋증후군 환자들이 늘어날 경우 심각한 사회적 병리현상을 유발할 수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만나거나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경우 이를 다시 되돌리려고 누르는 리셋 버튼이 엄청난 사고나 끔찍한 사건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지난 2005년에 발생했던 경기도 연천의 군부대 총기난사 사건도 컴퓨터 게임에 중독됐던 병사가 저지른 사건으로 알려지면서 관심이 모아진 바 있다. 그 병사가 리셋증후군 환자였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컴퓨터 게임에 중독됐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의심할만한 정황이 마련됐다고 볼 수 있다.
문제 발생 때마다 리셋 누르는 디지털식 해결 지양해야
리셋증후군이란 용어는 지난 1997년 일본 고베시에서 벌어졌던 끔찍한 사건으로 인해 탄생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범인은 초등학생을 토막내어 살해하며 일본 전국에 충격을 주었는데, 범인이 리셋 버튼을 밥먹듯이 누르며 컴퓨터 게임을 했던 것으로 밝혀지면서 이 같은 용어가 탄생하게 됐다.
이 같은 영향때문인지 우리나라에서도 1990년대 말부터 리셋증후군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 이후 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 수사대에서는 리셋증후군을 게임 중독이나 음란물 중독과 같은 인터넷 중독의 한 유형으로 분류하고 있다.
경찰청 관계자는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사망 원인 1위가 자살로 알려지면서, 현실의 삶을 게임처럼 쉽게 포기하는 성향의 리셋증후군도 그 원인 중 하나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라고 언급하며 “현재 청소년들의 심리 상태와 사고방식을 올바르게 분석하여 자살이나 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방안들을 다각도로 마련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물론 컴퓨터 게임에 중독됐다고 해서 리셋증후군이 항상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나치는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라는 고사성어처럼 평소 인터넷이나 게임을 할 때에도 지나치게 시간을 할애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스마트쉼센터 홈페이지의 초기화면 ⓒ 정보화진흥원
그렇다면 리셋 증후군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자신이 컴퓨터 중독이 되어 있는지를 인지하여 스스로 점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또한 어떤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참을성없이 리셋 버튼을 누르는 디지털식 해결방법보다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신중하게 생각하고 노력하는 아날로그적 자세를 길러야 한다고 덧붙인다.
그래도 혼자 힘으로 리셋증후군을 극복하기가 어렵다면 국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한국정보화진흥원에서 운영 중인 ‘스마트쉼센터’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
스마트쉼센터에서는 지역별 인터넷중독예방상담센터를 운영하고 전문 상담사를 배치해 디지털 중독 상담과 치유를 돕고 있다. 센터 홈페이지를 통해 인터넷 중독에 대한 자가진단을 해볼 수도 있기 때문에 수시로 방문하면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스마트쉼센터의 관계자는 “리셋증후군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발생하는 사회적 현상”이라고 정의하며 “요즘과 같은 스마트 시대에는 너무 온라인의 삶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늘 자각해야 하고 게임처럼 쉽게 리셋하는 일에 익숙해지지 않고, 현실을 마주하고 살아 가야한다는 점을 기억해야만 한다”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