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은 예전에도 그랬었지만 지금도 경상북도에 들어가는 관문이다.
옛 과거길이라고 불리우는 새재길은
한 번 가 볼 수 있으려나 하는 생각 뿐 실현될 가능성이 없는 일이 될 공산이 크다.
뿌리가 안동에 있는 만큼 오래전부터 이화령 고갯길을 드나들었다.
달구지 길의 이화령에 신작로가 들어선 것은 일제 강점기인 1925년의 일이다.
참 오랫동안 그리고 많이도 이용되었던 길이다.
길이 좁고 험해서
짐을 많이 실은 화물차라도 만나게되면,
30~40분 동안 거북이 걸음으로 문경까지 꼼짝없이 뒤따라가야만 하는
편도 1차선의 꼬부랑길이다.
10여년 전 이화령터널이 처음 생겼을 때
4~5분만에 이화령을 통과하여
시원하게 뚫린 도로에 감탄하던 일은
벌써 옛날 일이 되어버렸고,
이제 중부내륙고속도로의 개통으로
나에게는 이화령터널을 지나는 3번 국도가
또 다시 옛길이 되어 버렸다.
수안보에서 연풍을 지나면서 올라가는
이화령 옛길은 휴게소를 정점으로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고속도로 휴게소에는 잘 들리지 않아도 이화령휴게소처럼 경관 좋은 시골의 휴게소에는 꼭 들리곤 했었다.
구절양장( 九折羊腸) 고갯길을
올라 오느라고 고생한 차를 쉬게하는 동안 ,
차에서 내려 멀리 아득한 곳,
연풍면의 들판과 조그마한 집들을 보면서 상동의 삼둥산 금정재를 머리에 떠올리곤 했었다.
지나 온 옛일은 시간이 지나면서 추억으로 남게 되고 그리워지듯,
나에게 문경길은
젊은 시절 이곳에서 근무하셨던 아버지에게 들은 옛이야기가 더해져
아름다운 추억이 남아 있는 길이다.
조령천을 따라 난 길은 영강(穎江)으로 이어지고 점촌에서 낙동강과 만난다.
문경도 예전에는 석탄 광업소와 시멘트 공장이 번성했던 곳이었다.
해방 이전에 남한의 시멘트 공장은 삼척 한 곳에만 있었는데 해방 후 처음 시멘트공장이 설립된 곳이 석회석이 풍부한 문경이었다.
1957년에 문경의 대한양회가 완공되고 난 후
제천, 단양, 영월에는 그로부터 몇 년 후에 생겼다.
마지막까지 남았던 석탄 광산 은성광업소가 폐광된지도 20년이 넘었다.
그자리에 석탄박물관이 들어섰다.
당시의 광업소 사택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고 한다.
사택(社宅)이라 하면 우리만큼 익숙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칠량리와 단양촌의 골목들을 누비었던 우리가 아닌가.
상동광업소가 번성할 때
문경의 광산들 역시 한창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폐업되었을 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제 상동은 그 흔적이 스러져 가고 있으나 문경은 박물관을 만들어 추억의 현장을 남겼으니 부러운 마음이다.
이번 달 여행일정은 완전히 실패다.
처음에는 문경 대승사 묘적암의 저물어가는 가을 모습만을 염두에 두었다.
주변을 검색하다 보니 가보고 싶은 곳이 자꾸 생겨난다.
대승사, 김룡사, 용문사, 초간정 그리고 우리나라 십승지의 한 곳인 금당실마을까지 계획으로 잡았다.
욕심을 한껏 부렸다.
모두 한 시간 안쪽 거리인지라 어느곳 하나 빼놓기 아쉬워서,
1박2일 일정에 지나친 것을 알고도 무리를 하여,
결국 시간에 쫒기는 여행이 되고 말았다.
여행수칙 1번을 어겼으니...
문경새재 제1관문인 주흘관에는 점심도 할 겸 들린 곳이다.
점심식사를 하면서 오늘 일정인 대승사와 김룡사를 보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모자랄 것 같아 걱정스러웠는데,
결국 대승사와 두 곳의 암자 묘적암과 윤필암을 둘러보는데 벌써 어두워지려 한다.
서둘러 지척에 있는 김룡사에 갔다.
채 보지도 못했는데 어둠이 내려 결국 내일 다시 오기로 하고 숙소인 예천으로 향했다.
금당실 마을의 한옥에서 하룻밤 민박을 하면서 조용하고 공기 좋은 농촌의 자연부락에서의 밤과 아침을 경험하고 싶었는데,
동행인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해서 아쉬웠다.
다음날 아침 일정에 대한 욕심으로
아침 7시부터 움직였으나 잘못된 계획 때문에 망가진 여행의 즐거움을 회복할 수는 없었다.
문경, 예천 지역은 생각보다 볼거리가 많다.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선택할 여지도 있어 누구나 한 번쯤 가 볼 만한 여행지로 추천하고 싶다.
윤필암이다.
좌측으로 묘적암으로 길이 나고 우측으로 가면 대승사이다.
윤필암 선방이다.
어느 절이나 조용하고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사불전에서 본 윤필암 전경.
사불전.
사불전에는 부처를 따로 모시지 않고
전면에 유리창을 통해 건너편 산꼭대기 바위 위에 있는 사면석불로 대신하고 있다.
산 능선 꼭대기에 하얀부분이 사면석불이다.
사불산이란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일주문.
일주문 뒷면의 "불이문" 편액에 "貳"자가 이채롭다.
대부분 "二"자를 사용한다.
만세루(萬歲樓)
대웅전하고 마주하는 누각으로 보제루(普濟樓),
우화루(雨花樓) 등으로 불리운다.
중요한 법회나 법요식을 하는 장소로 이용된다.
누각 아래는 대부분 누하진입(樓下進入)의 통로로 이용되어 이곳에서는 "액자 속의 대웅전" 모습을 볼 수 있다.
대웅전의 빗꽃살문.
사찰에서 문(門)은 단순히 공간의 경계와 출입을 위한 시설이 아니다.
무심코 지나 다니던 일주문을 보고 어느날 "어째 문짝이 없지 ?"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문짝이 있는 일주문을 본 적이 없으니 으레 그러려니 했었다.
사천왕문, 금강문, 사천왕문, 불이문 역시 문짝도 없고 담장도 없다.
이러한 문들은 모두 제각기 뜻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천년을 넘는 세월 동안 전통적으로 지켜온 사찰의 모든 구조물들이 각각 나름의 의미가 없을리가 있겠는가 ?
불문(佛門), 선문(禪門), 법문(法門) 등 불교에서 문(門)이란 너무나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인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문으로 상징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장엄(莊嚴)이라 함은 아름다운 것으로 정성스럽게 부처님과 불국토를 꾸미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께 바치는 여섯가지 공양물 중에 하나가 꽃이다.
영취산에서 부처님께서 꽃 한 송이를 들어 보여
가섭존자의 깨달음을 보신 이래,
꽃은 "깨달음" 그 자체가 되어 사찰에서는 꽃으로 단청, 탱화, 불단, 문살 등을 장엄해왔다.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에는 "꽃으로 장엄된 문"으로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석가여래와 좌우의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모신 삼존불 뒷부분에는 일반적인 불화 대신 목각후불탱을 배치하였다.
두꺼운 판목에 조각을 하여 잇대어 붙여 만든 것으로 전국에 대여섯 곳에만 있으며 그나마 대부분 경상도 북부지역에 있다고 한다.
옹기로 구워 만든 굴뚝.
용이 감고 있는데 얼굴상은 어째 분위기가 동떨어졌다.
지대석을 새로 깔고 세운 오층석탑.
고려시대 양식으로 보이는데 아무런 안내문이 없다.
인근의 출처를 알 수 없는 석탑을 옮겨놓았나 보다.
노주석.
이 또한 경상도 북부지역에서만 보이는 시설물이다.
야간 법회 때 윗쪽에 불을 지펴 횃불 역할을 했던 것이다. 좌우에 2기가 설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