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구한말 조선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나 사진으로 밖에 알 수 없는 당시 사회상을
기록사진으로 과거로의 여행을 시작 하세요*^.^*
(1)
▶여인가리개(원산), 1900 년 여인이 왕골로 짠 가리개를 쓰고 나들이 하다가 양손으로 가리개를 바쳐 외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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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신 장수, 1910년 짚신을 만들어 지게에 싣고 장날 팔러가는 농부 부자.
(3)
▶절구질, 1890년 절구는 곡식을 빻는 도구로 일반 가정집에서 널리 사용 했다. 맨발로 고된 절구질을 하고 는 왼쪽 소녀는 이미 쪽을 찐 걸로 보아 그 당시 풍속인 민며느리인 것 같다.
(4)
▶태형, 1900년 이 형벌은 고려 때부터 실시되었는데, 조선시대에는 면포나 돈을 바치고 형의 집행을 면제 받을 수 있었다. 죄의 종류에 따라 10대에서 100대까지 때렸다.
(5)
▶명동성당 원경, 1902년 남대문 쪽에서 바라본 명동성당(상단 중앙)이며, 거리는 남대문통이다.
도로 양측에는 초가집이 보이지 않고 기와집이 즐비한 것으로 보아 그 당시에도 번화한 거리였음을 알 수 있다.
(6)
▶구한말 서당, 1890년 사진사가 눈을 감지 말라는 당부가 있었는지 한결같이 놀란 듯 눈에 힘이 들어있다.
(7)
▶개다리 소반, 1890년 한 나그네가 주막에서 개다리 소반을 받고 점심을 먹고 있는 모습.
(8)
▶선비 나들이, 1900년 먼 여행길을 떠나기 위해 말을 타고 마부꾼과 함께 길을 떠나고 있다.
말탄 양반은 신식문물인 선그라스를 끼고 있는 모습이 특이하다.
(9)
▶널뛰기, 1920년 한말 때 여자가 바깥구경 할 때는 널을 뛰어 담장 밖 세상을 구경했었다고 한다.
(10)
▶원각사탑(탑골 공원탑), 1904년 대리석에 양각으로된 석가설법상 등의 부처를 정교하게 새겨 조선시대 석조미술의 탁월함을 보여 주고 있다. 왼쪽 작은 탑조각은 일본인들이 일본으로 운반하기 위해 탑신을 뜯어 놓은 것이다(죽일 놈들!).
(11)
▶명동성당 계단공사, 1898년 명동성당은 한국 카톨릭 교회의 상징이다. 1898년 5월 29일 준공되었는데, 성당이 궁궐을 내려다 본다는 이유로 조선 정부와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12)
▶종로 거리, 1888년대 밭과 초가집이 어울려 있어서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거리 모습이다.
(13)
▶남대문안 주변, 1900년 당시 남대문에는 초가집이 있었다. 누각계단에 사람들이 휴시하고 있었으며, 전주가 보인다. 왼편 산은 만리동 고개길이다.
(14)
▶용산 나루터, 1904년 이곳은 나룻배를 건조하던 장소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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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한 평양기생, 19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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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마기와 장옷, 19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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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기장수 부산, 1903년 부산의 옹기장수들이 옹기를 선착장으로 운반하고 있다.
(18)
▶친위대, 1895년 친위대는 궁성 및 서울 도성을 수비하였다. 육조(六曹) 앞에서 러시아 군사교관으로부터 군사 훈련을 받고 있다. 당시 총은 러시아의 베르당 총기였다.
(19)
▶초헌을 탄 구한국군 장군, 1904년 한 한국군 장군이 초헌을 타고 있다. 초헌은 종 2품 이상의 고관들이 타고 다니던 외바퀴 수레이다.
(20)
▶장승, 1903년 장승은 마을 어귀에 세워 놓고 수호신으로 삼았으며, 동시에 이정표 역할을 했다. 장승 앞에서 병의 치유를 빌던 민간 신앙이 있었다.
(21)
▶장승, 1903년 장승이 7개 사람도 7명으로 각자 기원하고 있다. 간절한 소망과 소원을 얻기 위해선 굽어진 소나무로 된 것이 효험이 있다고 한다.
(22)
▶장▶신행길(1890년) 방금 시집으로 가려는 가마를 잡고 친정어머니는 딸에게 무엇인가 자상하게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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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궁도대회(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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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소릿꾼(1900년) 지금의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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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의 나들이(1903년) 전속 가마꾼과 함께 기념촬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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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 신부의 상면(1903) 신랑의 가족들이 호기심으로 신부를 보고 있으나 신부의 가족들은 근심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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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으로 가는 신부(1903) 가마를 탄 신부가 신랑 집으로 들어서고 있다.
(28)
▶구한말 결혼식(1903) 떠구지 머리를 얹고 큰머리를 튼 후, 떠구지 댕기를 드리우고 큰 비녀를 꽂은 다음, 원삼을 받쳐 입고 혼례를 올리고 있다. 이 부부는 자식을 낳은 후 미국 선교사에 의해 결혼식을 거행하고 있다.
(29)
▶마을 장승(1900) 장승은 2개 세우는 법인데 마을 입구에 장승하나가 외로이 서있고 마을로 통과하는 전신주가 보인다.
(30)
▶다리미질(1900) 다리미질하는 이 여인은 의도적으로 젖가슴을 내놓고 있다. 이는 아들을 낳은 것을 자랑하기 위한 풍속이다.
(31)
▶다듬이질 하는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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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질과 체질(1890) 우리여인들의 생활은 노동에 시달렸으며 곡식을 찧고 키로 까부리며 체질하여 밥과 죽을 쑤었다.
(33)
▶연자매(1900) 연자매는 맷돌을 소가 끌어 돌리게 하는 정미시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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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맷돌(1904) 콩이나 메밀등을 넣어 갈아주는 수동식 믹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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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돗자리 짜는 노인(1900) 돗자리 짜기란 많은 고르랫돌을 매달아 한 가닥씩 엮어 나가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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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녀위문(1905) 노일전쟁 당시 기녀들이 일본군 막사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뒤쪽 천막에 일장기와 태극기가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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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담쌓기(1905) 나무틀에 돌과 진흙을 혼합해서 쌓고, 사진촬영을 위해 잠시 휴식하고 있다.
(38)
▶김개남(1894) 전봉준과 함께 동학농민을 이끌고 봉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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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중기 도구(1900) 무거운 물체를 끌어올리기 위한 도구로 성벽을 쌓는 돌 운반 역시 이런 방식으로 작업했다.
(40)
▶여인의 가리개(1900) 여인이 왕골로 짠 가리개를 쓰고 나들이하다가 양손으로 가리개를 받쳐 외면하고 있다.
(41)
▶널뛰기(1920) 한말 때 여자가 바깥구경을 할 때에는 널을 뛰어 담장밖 세상을 구경했다.
(42)
▶장기(1890) 어린 소년처럼 보이나 초립을 쓴 것으로 보아 이미 장가든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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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여객선(1910) (44)
▶남대문 전차 대기소(1919) 서울에 전차가 들어오면서 단발령 시행에 실패한 일본은 전차회사 직원들에게 상투를 자르게 했다. 서양식 모자를 쓰게 하므로서 전차가 몰고 온 개혁 바람은 한국의 전통 문화를 바꾸어 놓고, 운전수는 강제로 일본식 제복을 입혔다. 백립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순헌(엄비)왕비 국상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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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전차(1903) 미국인 콜브란과 보스워크의 한성전기회사에 의해 1898년 12월 전기궤도 부설공사가 완공되었다. 준공 직후 소아 사고로 전차를 불태운 사건이 있었지만 각지로부터 전차를 타보기 위해 서울로 몰려왔다. 정원은 40명이고, 중앙에는 양반이 이용하던 특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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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님나들이(1907) 가마꾼이 마님을 태우고 포목점 거리를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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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 나루터(1910) 많은 새우젖 장수가 있고 상권이 모여있는 선착장 주변이다. 서울도성까지 얼마 안떨어져 항상 많은 물량이 거래되고 인천으로 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용산-인천 배삯은 상등은 2원 하등은 70전이며 증기선이 운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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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선 기차(1910) 기차를 타보기 위해 승객들이 객차에 오르느라 소란을 빚고 있다. 기차를 처음타본 승객들은 기차가 정지하기 전 뛰어내려 사고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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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대 발족(1920) 왼쪽 높은 망루에 서울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고, 긴급을 알리는 종이 매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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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개화기의 졸업식 도포를 입고 갓을 쓴 두 훈장(선생님)을 중심으로 학생들이 서있다. 언더우드가 설립한 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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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 풍경(1900) 장죽(긴 담뱃대)을 문 근엄한 훈장이 학생들과 함께 기념촬영하고 있다. 사진 왼쪽에 공부를 못해 광에 갇힌 한 학생을 친구가 돌아 앉아 위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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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일어학교(1894) 한국인 교사와 도포입은 학생중앙에 일본인 교사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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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동들의 야외학습(1904) 서당밖에 나와 야외학습을 하고 있는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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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풍경(1909) 훈장이 회초리를 들고 청마루에서 붓글씨를 감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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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 서당(1905) 어두운 방에서 플레쉬 없이 촬영한 것이 신기하고 모두 한결같이 눈을 크게 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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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학당(1910) 이화학당을 설립한 "서클랜드 부인"은 오른쪽에서 가사실습을 감독하고 있다. 앞줄에 신발이 잘 정돈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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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교 실습(1910) 대구 동산 언덕에 있는 선교사 저택에서 실습 나온 신명여학생들이 소년들에게 주먹밥을 나눠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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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운동부(1930) 대구 덕산초등학교 학생들이 일본식 씨름대회에서 우승한 뒤 기념 촬영중.
첫댓글 희귀한 사진 잘 보았네. 개다리 소반위의 커다란 밥, 국그릇이 인상적이네. 이완용의 부인도 잘 생겼네. 부인을 탓할 순 없겠지.
영욱아. 잘 봤다. 우리네 조상님들..
앞으로 100년 뒤,, 영욱이 자손은 무었을 올릴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