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읍의 연지아트홀에서 열린 '남 명창뎐' 이라는 제목의 공연을 계기로 새롭게 알게된 정읍의 인물이 있어 소개합니다.
다음 내용은 인공지능(AI) 중 똘똘하다고 알려진 '퍼플렉시티'에 의뢰하여 만들어진 자료임을 밝혀드립니다.
차~암 편리한 세상이 되었네요. ^^
| 항목 | 내용 |
| 이름 | 박만순(朴萬順) |
| 생몰년 | 1830 ~ 1898 |
| 출신지 | 전라북도 고부군 수금리 (현 정읍시 정우면 수금리) |
| 활동 시기 | 헌종·철종·고종 연간 (19세기 후반) |
| 호칭 | 조선 후기 8명창, 동편제 판소리 거장 |
소리의 시작: 아버지의 결단
박만순은 어려서부터 음악에 천부적인 재질을 보였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는 아들을 당대 최고의 명창인 가왕(歌王) 송흥록(宋興祿, 1801~1863)에게 사사시키기로 결심한다. 송흥록이 살고 있던 남원 운봉은 고부 수금리에서 직선거리 약 68킬로미터, 당시 걸어서 이틀에서 사흘이 걸리는 거리였다. 아버지는 아들의 소리 재질을 위해 가족 전체를 운봉으로 이주시켰다.
박만순은 송흥록의 문하에 들어가 그림자처럼 스승을 따라다니며 10여 년간 소리를 배웠다. 스승의 기예와 표현 수법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이후 송흥록이 의정부 좌찬성 김병기의 부름을 받고 한양으로 올라가자, 박만순은 절에 들어가 1년간 독공에 정진했다.
일설에 따르면, 박만순은 임실군의 어느 폭포에서 수련하다 피를 토한 끝에 득음했다고 전한다. 그의 소리는 바로 가까이에서 들어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한 소리부터, 산봉우리와 골짜기를 울리는 장대한 소리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세상에 나온 박만순은 스승 송흥록에 버금가는 대명창으로 이름을 빠르게 떨쳤으며, 전주대사습을 통해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명창의 풍모
박만순의 소리는 양성(陽性)으로 맑고 밝은 성음이었으며, 우조(羽調)를 주로 하여 짧고 진중하면서 정대한 소리를 했다. 진중한 저음의 음역부터 매우 높은 음역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했고, 점잖으면서도 구수하게 꾸미는 발림 등의 기량도 뛰어났다. 그가 소리하는 모습을 실제로 보고 듣지 않은 사람은 그 빼어난 멋을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춘향가 중 '사랑가'와 '옥중가', 적벽가 중 '장판교 대전'과 '화룡도'를 잘 불렀으며, 춘향가 중 춘향이 옥중에서 몽유하는 대목이 그의 더늠(특기 대목)으로 전해진다.
키가 작고 체구가 볼품없었으며 늘 검소한 옷차림이었지만, 성격은 호탕하고 자부심이 강했다. 다른 명창을 만나면 선생이 학생을 훈계하듯 그들의 소리를 일일이 비판했으며, 박만순이 소리를 할 때에는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고 한다.
흥선대원군과의 인연
박만순의 명성은 마침내 흥선대원군의 귀에까지 닿았다. 대원군의 부름을 받은 박만순은 서울로 향했고, 그 여정에는 드라마틱한 일화들이 전해진다.
청주에서의 거절
서울로 올라가던 길에 박만순은 청주를 지나게 되었다. 당시 충청감사는 포악하기로 유명한 조병식이었는데, 박만순에게 소리를 들려달라고 요청했다. 박만순은 이를 거절하며 말했다.
"소리 입을 봉하고 오라시는 대원위 대감의 분부시오."
대원군이 소리 입을 봉하고 오라고 명했기에 소리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포악한 조병식이었으나 상대가 대원군이었기에 분을 참으며 그를 서울로 보냈다.
운현궁에서의 1년
박만순은 운현궁에서 1년여 머물며 수만 냥을 벌었다. 대원군은 그에게 무과 선달(先達)이라는 명예직을 하사했다. 대원군의 총애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주는 두 가지 일화가 전한다.
어느 날 박만순이 대원군 앞에서 쉴 새 없이 노래를 부르다 지쳐 잠이 들자, 대원군이 자신의 무릎으로 베개를 해주었다. 또한 대원군이 가장 아끼던 말을 박만순에게 상으로 주었다고 한다.
돌아오는 길: 서간과 옥중가
귀향길에 박만순은 다시 청주에 들렀고, 대원군의 서간을 조병식에게 전달했다. 서간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두말할 것 없이 박만순의 행한 바는 죽여 마땅하므로 임의로 조치하되, 다만 그 실제적 창극조를 한번 들어보고 죽임이 가할지라."
글자 그대로는 '죽이되 소리를 먼저 들어보라'는 내용이었으나, 실제로는 대원군이 박만순의 소리를 들으면 결코 죽이지 못할 것을 알고 그의 목숨을 보호하려는 배려였다.
조병식이 소리를 청하자 박만순은 자신의 특기인 춘향가 중 '옥중가'를 불렀다. 조병식은 소리에 완전히 심취했고, 소리가 끝나자 버선발로 뛰어내려 박만순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과연 천하의 명창이다. 그대야말로 국가의 보배! 내 어찌 박만순을 해칠 수 있겠는가."
소리의 전승
박만순의 소리는 후대 명창들에게 이어졌다. 유공렬, 김찬업, 전도성, 신명학, 송만갑, 정정렬 등이 박만순에게서 소리를 전수받았으며, 특히 김찬업의 수궁가 중 '토끼 화상 그리는 대목'은 박만순의 소리제로 전해진다. 전도성은 박만순을 3년간 따라다니며 소리를 익혔고, 그의 증언에 바탕하여 정노식의 『조선창극사』가 저술되었다.
동편제 판소리는 송흥록으로부터 시작되어 박만순에게로, 다시 송만갑·전도성·유성준 등으로 이어지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박만순은 그 계보의 핵심에 자리한 인물이다.
정읍과 판소리
정읍 지역의 판소리 전통은 박만순으로까지 소급될 수 있다. 박만순이 활동하던 시대에 정읍은 판소리가 활발하게 소비되던 지역이었으며, 정읍예기조합과 정읍국악원을 매개로 전국의 소리꾼들이 정읍 지역으로 모여들었다. 고부군 수금리에서 태어난 한 소년이 아버지의 헌신과 스승의 가르침, 그리고 자신의 피땀 어린 수련을 통해 조선 판소리 역사상 가장 빛나는 별 중 하나가 된 것이다.
참고문헌
정노식, 『조선창극사』(1917~196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만순"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0672)
한국국악협회, "후기 8명창" (https://koreamusic.org/KoreaSoriFile/TxtImg/PDF/D3E-ZAA-00004467.pdf)
전북일보, "[판소리의 땅과 사람들] (2)전북의 옛 명창-2" (https://www.jjan.kr/article/20031124106666)
전북투데이, "조선 후기 8대 명창 '박만순' 정읍시 이달의 역사인물 선정" (https://www.jtnews.kr/news/articleView.html?idxno=59300)
정읍문화대전, "판소리" (https://jeongeup.grandculture.net/jeongeup/index/GC09300572)
위키백과, "박만순" (https://ko.wikipedia.org/wiki/박만순)
위키백과, "송흥록" (https://ko.wikipedia.org/wiki/송흥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