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밑에 찾아온 동장군의 기세가 꺾이지 않은 정초였다. 신정 하루 휴무였으니 기관이나 공장에서는 초이틀이 사실상 한 해 업무가 시작하는 날이다. 쌀쌀한 날씨는 좀체 풀리지 않아 목도리를 두르고 장갑을 끼고 나섰다. 나는 연말 방학을 맞아 좀 여유가 있어 용추계곡에 들어가 보려는 참이다. 평일임에도 입구 주차장엔 차들이 더러 있었고 먼저 산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사람들도 더러 보였다.
경전선복선화공사와 25호국도 대체도로 공사로 물을 뺀 용추저수지는 좌우에 터널굴착이 한창이었다. 내가 추운 날 용추계곡으로 든 까닭은 건강관리를 위함도 있겠지만 다른 이유가 더 있다. 겨울 한복판 용추계곡 응달에 자생하고 있는 상록풀잎은 어떻게 지낼까 궁금해서다. 잎이 지고 맨살로 버티는 계곡의 겨울나무들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기도 해서다. 천천히 계곡을 따라 걸어 올랐다.
계곡 따라 암반에 고인 물은 얼어 있었다. 비탈에 군데군데 선 소나무를 제외한 초목은 모두 시들어 움츠려 있었다. 그 가운데도 길섶의 맥문동은 영하권 날씨에도 여전히 푸름은 잃지 않고 있었다. 푸른 맥문동 곁에 뒹굴고 있는 가랑잎과는 분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사계절 청청한 모습을 간직한 맥문동이었다. 나는 용추계곡 겨울 맥문동을 보면서 생명은 참 모질고 질긴 거로구나를 느끼게 한다.
출렁다리를 지나면서 마삭넝쿨을 찾아보았다. 겨울 용추계곡에서 푸름을 간직한 또 다른 풀잎으로 꼽힌다. 주로 바위에 붙어 넝쿨로 자란다만 때로는 자갈이나 거친 흙바닥에서도 잘 자란다. 마삭넝쿨은 양달에서도 자라나 겨울 응달에서도 잎이 시들지 않는다. 마삭넝쿨 잎은 겨울이면 색깔이 살짝 변한다. 녹색에서 짙어져 암녹색으로 바뀜은 영하로 내려간 기온에 수액이 얼어 그런가 보았다.
개울바닥은 빙판을 이루어도 갯버들 잎눈은 연방 올 봄의 신호를 준비하고 있었다. 용추10교부터 물이 말라버린 계곡바닥을 걸었다. 백악기 공룡발자국 화석을 만나려고 암반 따라 걸었다. 고성 진주 함안 등지에서 발견된 공룡이나 새의 발자국화석은 자연사유적으로 가치를 인정받는다. 최근 창원의 용추계곡에서 발견된 공룡발자국 화석도 마찬가지다. 공룡발자국에다 내 신발을 맞추어 보았다.
용추11교를 지나 포곡정에 닿았다. 예전 산성 안의 주거지로 추정되는 곳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산성에서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적과 맞서 버텨야 한다. 식량이야 비축한다지만 식수가 빠져서는 안 된다. 산성은 아무리 높은 곳에 위치해도 샘이 있어야 한다. 진례산성도 마찬가지로 포곡정 부근은 여름이면 산중 늪지처럼 수생식물이 자란다. 수령이 오래된 여러 그루 수양버들은 봄이 오길 기다렸다.
비음산의 사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태는 청명한식 무렵 꽃구름으로 피어나는 진달래다. 진달래 역시 응달의 척박한 땅을 좋아하는 나무다. 진달래가 피는 봄 한 철엔 많은 사람들이 비음산에 오른다. 나는 발길 뜸한 겨울에 와서 봄에 필 진달래꽃을 그려 보았다. 지난 가을 잎이 지면서 이듬해 꽃눈을 점지해 둔 진달래였다. 비음산 진달래 군락은 봄날 붉게 토하려고 겨우내 내공을 쌓고 있었다.
진례산성 동문에서 진달래 탐방로를 올라 비음산 정상에 섰다. 불모산과 장복산을 바라보면서 공단과 시가지를 굽어보았다. 봉암 갯벌과 무학산 아래 마산시가지도 일부 보였다. 발아래는 사파동 법원이고 오른쪽으론 도청을 비롯한 관공서들이었다. 공장과 기관은 한 해 업무를 개시하면서 국리민복을 다짐했지 싶다. 나는 산성 남문을 내려서서 괴산약수터에서 재치고개를 넘어 용동저수지로 나왔다.
도청광장으로 와서 새롭게 꾸민 연못을 둘러보았다. 투명한 얼음장 아래는 비단잉어가 유유히 놀고 있었다. 수련, 가시연, 노랑어리연, 창포, 꽃창포, 노랑꽃창포, 부들, 부레옥잠, 자라풀 등이 자라던 생태연못이었다. 겨울이라 물속뿌리만 살아 있을 것이다. 이들 수생식물 역시 머지않아 올 봄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연못가 자연석에 새겨 놓은 남명 선생이 읊은 시를 음미하다 날이 저물었다.
경상대 남명학연구소에서 세운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고결한 지조를 지키는 연꽃을 찬미한 시였다. 화개정정취만당(花盖亭亭翠滿塘) 꽃봉오리 늘씬하고 푸른 잎 연못에 가득한데 / 덕형수여차생향(德馨誰與此生香) 덕스런 향기를 누가 이처럼 뛰어나게 했는가 / 청간묵묵어니재(請看黙黙於泥在) 보게나! 아무 말 없이 뻘 속에 있으련만 / 불시규화향일광(不啻葵花向日光) 해바라기 햇빛 따르는 것 정도만은 아니라네. 09.01.02
첫댓글 오늘 다녀 오셨군요. 내가 매주 일요일이면 다니는 코스가 바로 거기랍니다. 1교에서 11교 - 포곡적 - 동문 - 비음산 - 남문- 괴산약수터 - 재치고개 - 용동못 - 도청. 또는 남문에서 날개봉- 용동못. 그 길 역으로 우리 초림이 대금을 들고 오시는 모습 못 보셨나요? 괴산 약수터에서 남문까지 길 옆에 차나무를 심어 놓았는데, 그것 아마 우리 초림이 그랬을 겁니다. 오늘 참 좋은 데 다녀오셨습니다. 매운 날씨에 어디 가셔서 막걸리 한 잔 할 데도 요샌 없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