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시 구성면의 모성정(慕聖亭)과 경덕사(景德祠)와 방초정(芳草亭) 2015. 9. 5
소요유적답사화원들이 들러볼 곳은 모두 황해도 연안(延安)을 관향으로 한 연안 이(延安 李)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모성정과 경덕사는 김천시 구성면 상좌원리에, 방초정은 상원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두 마을은 서로 경쟁하면서 인재를 키워온 유서 깊은 마을이다. 연안 이 씨의 시조는 이무(李茂)이다. 그는 원래 중국 출신이며 노자(老子)의 후손이라고 한다. 태종무열왕 7년(660년) 나당(羅唐) 연합군이 백제를 정벌할 때 소정방(蘇定方)의 부장(副將)으로 와서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한 후 신라에 귀화했다고 한다. 무열왕이 신하가 아닌 제후로 봉하고 연안을 식읍(食邑)으로 주어 창씨(創氏)되었다. 구성면에 연안 이 씨들이 세거하게 된 것은 1451년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이말정(李末丁)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낙남(落南)하여 지금의 상원리 맞은 편 지품(知品)이라는 곳에 은거(隱居)하면서부터 김천에 연안 이 씨의 세거가 시작되었다. 이 두 마을은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사회적으로 훌륭한 인물을 배출하였다. 상원리에서는 이의조(李宜朝)와 같은 대학자가 나오고, 상좌원리에서는 이장원(李長源)과 같은 큰 효자를 배출하였다. 두 마을 간의 인물 배출 경쟁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앞 다투어 항일지사(抗日志士)를 배출하였으며, 그들은 조상에 대한 긍지가 대단하다. 근현대사에서 배출된 가장 유명한 분들로는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 선생과 독립운동가 이동녕(李東寧) 선생이 있다. 구성면 상좌원리 모성정(慕聖亭) 위치도
<상좌원리의 모성정 (慕聖亭)>
모성정은 1929년 이곳 상좌원 출신 이장원(李長源 : 1560~1649)을 기리기 위해 바위 위에 후손이 세운 정자다. 모성정은 이장원이 글을 외우고, 목욕하고, 바람을 쐬면서 거닐던 곳으로 주변에는 비석군(碑石群)과 함께 바위에 음각(陰刻)된 글씨가 숱하다. 옛날 선인들은 바위에 글을 새기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고 가문의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여겼던 같다. 오늘날 잣대로 보면 자연 훼손(毁損)과 환경파괴(環境破壞)이다. 선생의 장손인 회산(晦山) 이진영(李震英 : 1621~1701)이 1679년에 굴암(屈巖)을 모성암 이라 고쳐부르고 친필로 그 바위에 크게 써서 새겼고 후손인 학산(鶴山) 이현기(李鉉璣)가 1929년에 초당이선생장구지소(草堂李先生杖屨之所)와 경앙대(景仰臺) 등을 주위의 암석에 새겼다. 초당선생이 지은 시 월롱한수연롱안(月籠寒樹烟籠岸) 화만강성수만탄(花滿江城水滿灘)과 같이 모성정에서 내려다본 4가지 풍경이 전해진다. 즉 소나무 사이로 비치는 달빛, 물결처럼 보이는 자욱한 안개, 낮게 드리운 저녁 놀, 나뭇가지 흔드는 솔바람과 냇가의 소리 내어 흐르는 여울물. 모성정에서 잡힌 풍광을 멋지게 표현했다. 지금은 풍광이 많이 변하였지만 뒷산과 앞을 흐르는 내, 한가로운 전원의 풍광이 한 눈에 들어오는 위치로 초당 이장원은 이곳에서 글을 읽고 시를 지었다. 도로에서 올려다 본 모성정 (慕聖亭) 측면에서 본 모성정 모성정 상량문 구명 굴암을 모성암으로 개칭 바위에 각자한 경앙대 초당이선생장구지소 월롱한수연롱안(月籠寒樹烟籠岸) 화만강성수만탄(花滿江城水滿灘)의 시 학자이자 효자로 소문난 초당 이장원은 7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묘 옆의 여막(廬幕)에서 기거하며, 3년간 흰죽만 먹으며 시묘(侍墓)를 할 만큼 효성이 지극했고, 또 예절이 어른보다 나았다고 전한다. 가난하였지만 아버지의 식성에 맞는 음식을 끊이지 않게 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아버지를 업고 삼성암으로 피난을 갔었는데, 호랑이 두 마리가 따르며 이들 부자를 호위했다는 전설도 있다. 부친상을 당하여 시묘를 할 때는 이장원의 효행에 감동받아 묘역의 소나무가 3년간 잎이 나지 않다가 탈상을 하고서야 잎이 났다고 한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효성이 금수(禽獸)와 초목(草木)에까지 미쳤다고 탄복하였다고 한다. 상좌원리에 있는 방초 이장원(李長源)이 공부하였던 충효당
<경덕사(景德祠)와 이숭원(李崇元)의 초상화>
모성정 답사를 마치고 김천시 구성면 상좌원리에 위치한 ‘사우(祠宇 신주를 모시기 위해 따로 지은 집·사당)’ 경덕사를 찾았다. 경덕사는 관리가 안되어 경내 안팎에 잡초가 무성하다. 답사를 온 회원들도 민망할 정도이다. 여기에는 조선 성종(成宗 1457~94) 때의 공신 초상화가 한 점 보관돼 있다. 상좌원리 마을 어귀에 있는 경덕사의 남쪽 문을 통과해 들어가면 사찰의 산신각 규모의 영당(影堂)이 나온다. 관선서당의 당장님이 미리 교섭을 하여 이숭원의 초상화를 볼 수 있었다. 관리후손이 보여주는 초상화는 가로 1m, 세로 2m 크기의 비단 교위에 앉은 사모관대(紗帽冠帶)와 관복차림의 채색(彩色) 초상화로 400년이 지나는 동안 좀먹고 퇴색(退色)이 심하여 훼손되고 있다. 이 초상화는 명종 대 이숭원에게 내린 충간(忠簡)이란 시호와 함께 내린 하사품이라고 한다. 이 초상화의 특징은 얼굴을 약간 좌측으로 돌린 좌안팔분면(左顔八分面) 전신교의상(全身交椅像)으로 그려졌다. 이숭원은 본관이 연안이고, 1428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이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나중에 순성명량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이 되고 연원군(延原君)에 봉록 되었다. 64세로 죽으니 청백리로 천록된 위인이다. 그는 문장과 도덕이 뛰어나고 이도(吏道)에 어긋남이 없어 죽은 뒤에 시호(諡號)와 영정(影幀)이 하사(下賜)된 것이다. 영정을 경덕사에 모시고 후손들이 이곳에서 제사를 드린다. 1974년에 지방 유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되어 경덕사가 있는 대지와 건물이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연안이씨 문중에서 보호하고 있다. 이숭원 초상화 안내문 경덕사(景德祠)의 출입문인 상레문 1 경덕사(景德祠) 상례문의 현판 경덕사(景德祠) 1 경덕사(景德祠) 2 경덕사 안에 보관된 이숭원(李崇元)의 초상화 관리가 안된 경덕사
<사방의 조망(眺望)이 뛰어난 방초정(芳草亭)>
구성면 상원리 연안이씨(延安李氏) 집성촌에 위치한 아름다운 정자 방초정(芳草亭)은 1625년(인조3년)에 원터 마을에서 태어난 유학자 부호군(副護軍) 이정복(李廷馥)이 선조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누정(樓亭)이다. 1689년(숙종15년) 건물이 퇴락(頹落)하여 그의 손자 이해(李亥)가 중건하고 다시 1727년에 보수했는데, 이듬해 이인좌가 일으킨 무신란(戊申亂) 때 파손되고 말았다, 부서진 채 방치되다가 1737년에 일어난 홍수로 인해 유실된 누정을, 1788년에 5대 후손인 이의조(李宜朝)가 현재의 위치로 이건(移建)하여 세웠다. 구성면 상원리 방초정(芳草亭) 위치도
방초정 안내문 방초정 현판과 눈꼽창 방초정 누각 전경 2층 가운데에 배치한 온돌방과 1층 부엌 아궁이 방초정 2층의 마루와 창살문 방초정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2층 다락집으로, 2층 가운데 1칸을 방으로 만들어 꾸민 것이 특이하다. 가운데 부분에 사이기둥을 세우고 벽을 쳐서 문짝을 달았는데, 뒷날 몇 가지 구조물들이 첨가되어 구조상 어색한 점도 없지 않으나 일반정자와는 달리 온돌구조인 것은 방초정의 타 누정과 다른 특징이라 하겠다. 이 누정은 일반 누정과 다르게 사방을 조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방의 둘레는 벽이 아니라 세 짝의 들문으로 되어 있으니, 들문을 위로 올려 걸어두면 사방으로 확 트인 공간이 된다. 이는 방초정의 입지조건이 평지라는 데서 기인하지만, 이러한 구조에서는 방초정에 오른 사람은 마을의 집과 오가는 사람들에게 눈길을 주고 마을 주변에 있는 논밭의 사정에도 관심을 가질 수 있다. 한 편 들문은 내려 닫더라도 문 한가운데, 즉 작은 살창(눈꼽창) 쌍여닫이문이 있어 밖과 소통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추울 때는 1층 아궁이에 불을 넣어 따뜻하게 하고, 더울 때는 사방의 들창문을 모두 들어 올릴 수 있도록 하였다. 탁 트인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특히 여름철엔 시원하기 그지없다. 방초정의 기둥
경북 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된 방초정은 ‘방초정(方草亭)‘ 편액뿐만 아니라 20개나 넘는 시판(詩板)이 걸려 있다. 그 만큼 방초정에서 조망(眺望)되는 경치가 뛰어났다는 뜻이다. 많은 시인 묵객(墨客)들이 방초정에 올랐을 때 끓어오르는 시상(詩想)을 시로 나타냈음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작자를 알 수 없는 ’방초정십경(方草亭十景)‘이 유명하단다. 방초정 2층 루에 걸려있는 시판 1 방초정 2층 루에 걸려있는 시판 2 방초정 앞에는 정방형(正方形)의 연못이 있고 연못에는 원형의 섬이 두 개 있으니. 이른바 방지원도(方地圓島)로서 이는 우리나라전통적인 인공정원의 일반적인 형태이다. 방초정의 연못은 마을의 생활하수와 빗물을 정화하는 기능을 가졌다고 한다. 그리고 방초정은 전면의 아름다운 연못과 땅버들의 울창한 초록을 훤하게 볼 수 있게끔 하였는데, 방초정의 건물·연못·나무의 배치 등은 조선시대 정원의 양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
방초정과 방지원도(方地圓島) 형의 연못 방초정 연못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유교적 우주관을 나타내는 방지원도임은 같은데, 두 섬을 보노라면 두 가지를 떠올릴 수 있다. 한가지는, 섬은 하늘을 나타내므로 두 섬은 아마 각기 해와 달을 상징하는듯하다는 점이다. 다른 한 가지는, 이 두 개의 섬에는 슬픈 사연이 간직되어 있다는 점이다. 방초정 옆에는 두 기의 정려각(旌閭閣)이 있는 데 방초정 가까이 있는 정여각은 이정복의 부인 화순최씨(和順崔氏)의 것으로 인조 임금이 1632년(인조 10) 내린 어필 정려각이다. 이 정려각의 사연은 화순최씨 이정복 부인은 17세에 이정복과 혼인하고 신행하기 전까지 친정에서 머무를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시댁으로 오던 중 왜군을 만나게 되자 못에 몸을 던져 정절을 지켰다. 화순최씨(和順崔氏)는 자기를 따르던 몸종 석이(石伊)에게 옷을 벗어 부모님께 전해 주기를 당부하고 자신은 명의(明衣:염습할 때 맨 먼저 입히는 옷)로 갈아입고 투신하자, 몸종도 따라 뛰어들어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연못을 최씨담(崔氏潭)이라고도 불린다. 방초정 연못에서 1975년 준설공사 때 부인을 따라 죽은 노비를 기리는 충노비석(忠奴碑石)인 ‘충노석이지비(忠奴石伊之碑)’라고 새겨진 비석이 발견되었다. 현재 마치 주인 앞에서 길을 안내하듯 최씨의 정려각 앞에 세워져 있다. 지금의 잣대로 보았을 때 주인과 노비(奴婢)의 관계를 이해 할 수 없다. 하나뿐인 고귀한 생명을 주인이 죽으니까 자기도 따라 죽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우리 조상들의 인권관을 비판하고 싶다. 1632년(인조 10) 내린 어필 정려각의 글 \ 화순최씨(和順崔氏)의 정려각(旌閭閣 화순최씨(和順崔氏)의 정려비(旌閭碑) 방초정 옆에 화순최씨 정려각 옆에 풍기 진씨(豊基 秦氏) 열행비(烈行碑)가 있다. 풍기 진씨(1912~1934)는 18세에 연안 이씨 집안의 이기영(李丌永)에게 시집을 왔다. 그녀는 남편이 병들자 하늘에 자기 목숨과 바꾸어 주기를 빌었으나, 차도가 없어 대구에 있는 병원으로 갔다. 하지만 너무 늦게 병원을 찾은 탓에 늑막염이 복막염으로 확대되어 있는 상태가 되었다. 이 사실을 알고 진씨는“남편은 내가 죽인 것이다.”라며 땅을 치고 통곡하였다. 살릴 수 있는 남편을 무지로 인하여 죽였다는 생각과 남편에 대한 죄스러움으로 죽을 결심을 하였다. 그녀는 손수 남편의 장례준비를 한 뒤, ‘남편이 찬방에 홀로 누웠는데, 내가 어찌 더운 방에서 자랴!’하는 마음에서 눈이 오는 뒤뜰에서 잠을 청하였다. 얼어 죽을 각오였으나 집안사람들에게 발각되어 남편의 뒤를 따르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 녀는 모든 음식을 거절한 채 10여일을 단식하다 남편의 뒤를 따르고 말았다. 당시 진씨의 나이가 23세였다. 답사를 다니다 보면 동네 어귀에 정려각∙열여비∙열행비 등을 대하면 그 당시에는 동네나 가문의 자랑일지언정 여자를 남자의 종속물처럼 생각한 시대사조를 읽을 수 있다. 참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저버리는 행위를 조장한 사회 풍토가 원망스럽다. 풍기 진씨(豊基 秦氏) 열행비각(烈行碑閣) 풍기 진씨(豊基 秦氏) 열행비(烈行碑)
또 상원리에는 방초정과 관련된 곳이 하나 더 있으니 숭례각(崇禮閣)이다. 바로 구성초등학교 앞에 위치하고 있다. 숭례각에는 <가례증해(家禮增解)> 판목(版木)이 <소학증해(小學增解)> 판목 241장과 함께 보존되어 있다. 경북 유형문화재 제67호인 <가례증해> 판목은 조선 예학(禮學)의 발달을 보여주는 유산으로서, 이 마을에서 태어난 이윤적(李胤績)∙이의조(李宜朝) 부자가 2대에 걸쳐 관혼상제의 예를 해설한 책의 판목이다.
가례증해판목 안내문 소학집주증해판목 안내문 방초정이 건축유산이라면 <가례증해> 판목은 기록유산이다. <가례증해>는 475매의 방대한 양이고 보존상태도 좋아서 정밀한 각판(刻版) 기술로 새겨져 있다. 이윤적 부자는 주자가례를 중립적 시각에서 우리의 실정에 맞게 해설을 붙였다. <소학증해>는 판목은 이의조의 4종질되는 진암(進庵) 이수호(李遂浩)가 소학을 해설하고 사견을 붙여 저술한 것인데 <가례증해>와 함께 각판한 것으로 241매의 판목 양면에 새겨진 것이다. 판목 수장고를 들여다보니 판목을 보관하기 위해 통풍∙채광 등을 고려한 수장각인 숭례각을 만들었다고 하나 개인이나 한 문중에서 관리하기에는 벅찬 것 같다. 예기치 못한 화재나 도난 등에 무방비한 상태다. 타문중과 같이 <안동국학진흥원>에 의뢰하여 귀중한 유산이 과학적으로 관리 보존되고 멸실되지 않도록 이관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숭례각(崇禮閣) 전경 숭례각(崇禮閣) 숭례각(崇禮閣) 현판 숭례각(崇禮閣) 안에 보관 중인 판목 1 숭례각(崇禮閣) 안에 보관 중인 판목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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