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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 1 - 베트남 남북 통일 총선거는 거부되고 월남전쟁이 시작되다!
20세기 후반에 최악의 전쟁으로 베트남전(1960~1975년) 이 있으니 수백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미군도 5만 8,000명이 전사했으며 종전후 보트피플이나 미군과 베트남
여성 간의 혼혈인 부이도이 (Bui Doi) 같이 베트남전에서 파생된 문제도 있으니
베트남 엄마와 어린 아들의 생이별 장면이 뮤지컬‘미스 사이공’ 으로 재연되기도 했습니다.
주월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장군은 6·25전쟁 때 ‘백골병단’ 이란 게릴라 부대를 이끌고 북한에
침투해 김일성의 오른팔로 북한 유격대 길원팔 중장 일행을 몰살시킨 인물입니다.
회고록에는 1965년 3월 청와대에 불려가 박정희 대통령의 전투부대 파병 의중에 반대하는게
나오니, ‘게릴라전에 정규군이 승리하려면 큰 희생이 따르며, 상대는 20년 실전경험으로
세계 최강의 게릴라로 성장했고 호치민은 베트남의 독립전쟁 국민영웅’ 이라는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한국군은 1965년에 파병되어 1973년까지 연 32만명의 대규모 병력을 파병했는데 해병대
청룡 부대 3대대 11중대가 치른 ‘짜빈동 전투’ 는 전쟁사에 남을 신화라고 일컬어집니다.
1967년 2월 14일 오후 11시 30분 부터 다음 날 오전 7시 24분 사이 월맹군 연대 규모의
야간기습에 맞서 고작 1개 중대로 백병전 까지 벌이며 승리를 거두었으나 전사에 길이 남을 전투라?
그러나 한국군은 총 5천명이 죽고 1만 1천명이 부상당했는데, 우리 기업들은 "전쟁에서 돈을 벌어 국민소득"
을 높였고 한국군은 매일의 전투 수당을 미군으로 부터 달러화로 받아 용병이란 소리를 듣지만 저 달러가
국내로 들어와 경제개발에 사용되었으니..... 1등 공신은 한일 수교로 일본에서 들어온 큰 목돈이겠지만,
중동 건설과 독일 간호사에 더해 오늘날 우리가 이만큼 잘 먹고 사는 것은 베트남전 참전 덕분인가 합니다?
또한 미군은 적군의 은신처인 밀림을 없애기 위해 다량의 고엽제를 뿌렸으니 현재 한국에는 고엽제
후유증 환자가 4만 6천명이고 고엽제 의심증 환자는 8만 8천명에 달한다는데....
그 중에 1만 6천500명이 미국의 고엽제 제조회사를 상대로 한국 법원에 손해배상을
청구했으나 39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법원에서 인과관계를 입증할수 없다는 이유로 패소했습니다.
최근에 베트남과 관련해 2가지 뉴스가 있었으니, 첫째는 역대 한국의 최대 수출국은 중국
이었으나 2022년 베트남이 중국을 제치고 우리나라의 최대 수출국으로 떠올랐으니
우리나라는 원유와 철광석등 원자재 수입에 막대한 무역 적자를 내지만.... 중국에
대해 수출과 흑자로 이를 상쇄해 왔는데 이제 베트남이 수출 효자국가로 떠오른 것입니다.
두 번째는 1968년 베트남 꽝남성에서 민간인 74명이 목숨을 잃은 학살사건에서 당시 8살로
살아남은 탄씨가 2021년 11월 낸 손해배상 재판에서 한국 법원은 2023년 2월 7일
한국군 청룡부대에 의해 자행됐다고 인정하고 탄씨에게 4천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으며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63세의 탄씨는‘진실’(Thật·턱)을 15차례나 입에 올렸습니다.
월남전쟁은 공산세력으로 부터 "자유세계와 평화를 수호" 하기 위한 "의로운 전쟁" 이라고 말하는
데..... 반면에 제1차 세계대전 처럼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던 전쟁이니, 북베트남과
프랑스 가 맺은 제네바협정에 따른 남북 통일선거를 예정대로 실시했다면 전쟁은 없었을 것입니다.
북쪽의 호치민이 독립전쟁 영웅인데 비해 월남정부 입장에서 보면 이 사람들은 베트남
독립전쟁에서 1도 역할을 한게 없으며, 그 태생이 프랑스가 북베트남에 대응
하기 위해 만든 괴뢰정권인데다가 부정부패와 국민 탄압이 심했으니 통일정부
가 세워지면 감옥에 가야할 사람들이라..... 남북 베트남 통일선거는 한사코 반대합니다.
훗날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제네바 협정에 따른 총선거가 열리면“아마도 인구의 80 퍼센트
가량이 공산주의자 호찌민에게 투표하였을 것”이라고 말했으니..... 미국으로서는
베트남이 자유롭고 평화적인 선거로 베트남에 합법적인 공산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도저히 묵과할수 없었으니..... 어떻게 자유 선거로 공산 국가가 세워지는걸 봐야 해?
미국은 프랑스가 세운 괴뢰정권 월남 정부를 지원해 남북통일선거를 거부하니 평화통일아 무산
되자 베트콩이 결성됐으며... 또한 미국이 전쟁에 참가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통킹만사건을
조작해 하노이에 대규모 무차별 폭격으로 전쟁을 일으켰으니... 월남전쟁은 부패한 괴뢰 정권
인 월남 정부를 앞세워서 네이팜탄과 고엽제로 얼룩진 부도덕한 더러운 전쟁 이라고도 합니다.
인도차이나전쟁 2인 월남전을 이야기 하자면 인도차이나전쟁 1인 프랑스 식민지당국
과의 독립전쟁에서 시작해야 하니.... 2차 세계대전 중인 1940년에 드골 장군이
영국으로 망명한후 비시 프랑스의 페탱 정권이 나치 독일에 항복하자 일본제국
은 이 기회를 틈타서 북베트남에 진주해서는 "프랑스군과 기묘한 동거" 에 들어갑니다.
프랑스 식민지인 인도차이나에 프랑스 총독부와 일본군 사령부간 이중권력이 생긴 것이니 베트남인
들은 이제 2명의 상전에게 각기 세금을 납부해야 하고 쌀과 물자를 강탈당하니 2중으로
시달리는 중에, 1944년에 프랑스 총독부가 비시정권 대신 드골의 자유 프랑스 쪽으로 갈아타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일본군이 공격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부를 폐지하고 행정권 까지 장악합니다.
베트남 독립운동은 호치민과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중심이 된 가운데 그 전위조직, 베트남 문화
강경지지파, 베트남 국민당(VNQDD)의 일부세력, 군소집단 및 중국으로 망명한 소수의
개인들이 참가했으며 이후 모든 정치활동은 베트민의 이름으로 행하여지고 군대 조직도
완성해 월맹군으로 발전하였고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에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
이 봉기하면서 일시적으로는 베트남을 해방시켜..... "베트남 민주공화국" 이 성립하게 됩니다.
2차대전후 전후처리를 위해 한반도 북부에 소련군, 남부에 미군이 진주했듯이 북위 16도선 베트남
북부에는 중화민국군이, 남부에는 영국군이 진주했지만 그후 중화민국군은 국공내전 발발로
인해 1946년 2월 프랑스에 북베트남을 넘기고 철수했고.... 남부의 영국군도 프랑스에게
인계하고 철수하니 1946년 3월 26일, 프랑스는 남부에 괴뢰국인 "코친차이나 공화국" 을 만듭니다.
1946년 11월 20일, 하이퐁 항구에서 밀수선 단속으로 인한 충돌을 기회로 프랑스군은
하이퐁 항구를 공격했으며, 1946년 12월 19일 부터 프랑스군은 통킹만 삼각주 일대
의 요새와 하노이의 호치민 관저 및 요충지를 습격했고 1947년 2월 중부 다낭과 후에
에 상륙했으니 프랑스와 베트민 사이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프랑스는 다시 베트남을 잠령해 식민지로 직점 다스리려고 했다가 국제 여론의 비난을
받자.... 1946년에 마카오로 도주해 방탕한 생활을 하던 옛 바오다이 황제를
1949년에 불러와 북쪽에 수립된 베트민이 장악하지 못한 남부 베트남을
베트남국(월남) 으로 형식적으로 독립시켰으나.... 사실상 프랑스의 괴뢰 국가 였습니다.
1946년 11월 20일 프랑스가 함포사격으로 베트민군을 공격하면서 수많은 시민들을 학살하는 하이퐁
사건이 터지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되는데... 베트민은 1949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원까지 받으면서 프랑스를 몰아붙였으니, 프랑스의 재식민지화 정책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는 베트민군의 대반격과 재정적인 문제에 국제여론마저 악화되면서 결국 포기할수밖에 없었습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1946년 12월 ~ 1954년 8월) 때 사이공에서 시민들이 무차별 학살되는 것을 목격한
베트남인들은 게릴라전을 통해 프랑스군과 전면전을 벌이기 시작했으니,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미국은 1954년까지 총 80% 나 되는 전쟁 비용을 프랑스를 대신해서 지불했고 베트남 게릴라들은
엄청난 열세였지만 제국주의에 반감을 가진 시민들과 농민들의 지지를 업고 전세를 역전하기 시작합니다.
초기에는 자본과 무기 등에서 뒤진 베트남 게릴라들이 엄청난 열세에 놓였지만 제국주의에 반감을 가진
시민들과 농민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전세를 역전하기 시작했으니... 베트남 게릴라들은 뛰어난 전략,
전술을 통해 소총과 권총만 갖고서 전차, 장갑차, 대포 등을 동원한 프랑스군을 제압하기 시작
했으니.... 1953년 총반격을 개시한 베트남군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궤멸시킵니다.
디엔비엔푸 전투서 지압 장군의 베트민군에게 프랑스군은 대패해 병력을 상실하니 1954년 8월 1일부로
전쟁은 끝났고... 10월에 프랑스군이 철군하면서 정전선 설정 논란이 벌어지니 프랑스는 18도선을
고집했고, 베트민은 13~14도선을 그리고 주은래가 16도선을, 몰로토프가 17도선을 중재하여 베트남
은 북위 17도를 군사 경계선으로 하여 베트남에는 남북으로 2개의 정부가 들어서니 제네바 협정 입니다.
1955년 10월 26일 남베트남에 국민투표로 왕정이 축출되고 응오딘지엠 정부가 수립되니 베트남 공화국
(월남)의 건국이었으며.... 그 다음달 1월 내전은 다시 시작되었으니 호치민 대통령은 17도선을 휴전선
이라고 보며 남베트남이 제네바협정대로 1956년 남북통합 총선거를 받아들여 줄것을 간절히 원했습니다.
남북베트남 총선거를 하면 베트남에 합법적 공산국가가 들어서는 것을 두려워한 미국이 개입해 남베트남이
선거에 응하지 않는지라 베트남이 평화적으로 통일될 기회를 놓치게 되자, 남베트남 내 공산주의자들은
테러공격을 감행하였고 1960년 12월, '남베트남 해방민족전선' 이란 이른바 '비엣콩(베트콩)' 빨치산을
결성하니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 민주공화국(북베트남)' 과 중국, 소련의 원조를 받아 세력을 확장합니다.
제네바 협정 의장국이었던 영국의 외무장관은 "회의 최종 선언" 을 발표하여 통일된 베트남을 수립하기
위해 1956년 7월 이내에 보통선거를 진행한다고 규정하였지만 프랑스는 제네바협정을 제대로 이행
하지 않고 군대만 철수시켰으니.... 베트남 전국 총선거가 결국 이뤄지지 못하는데 이 틈을 타 미국이
반공을 명분으로 남부 베트남에 개입해서 1955년 남베트남에 부정선거를 통해 "친미 정부" 를 세웁니다.
프랑스가 세운 괴뢰정권인 바오다이의 남베트남(월남) 정부는 미국이 개입해 1955년 10월 26일 남베트남에
국민투표로 왕정이 축출되고 친미정권으로 바뀌니 응오딘 지엠 정권하에서 부정과 부패가 더 심해졌고,
정부가 가톨릭 교도들로 구성된 테러조직을 만들어 불교를 심하게 탄압하는 등 인권탄압이 심각해
지면서 혁명세력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결성하고 분노한 시민들과 함께 전면적인 무장투쟁에 나섭니다.
응오딘 지엠은 동생 응오딘 누를 비밀경찰 책임자로 세웠고, 독신이었던 지엠은 국가 의전
에서 누의 아내 마담 누를 퍼스트 레이디로 삼았으며, 마담 누의 아버지는 미국 대사로,
어머니는 유엔 참관인으로 보냈고 자신의 친형은 후에의 추기경으로, 다른 2명의 형제
들은 지방의 권력자로 임명하였으며.... 사촌과 일가친척 역시 주요 요직에 등용하였습니다.
1964년 통킹만에서 북베트남 해군의 어뢰정 3척이 미 해군 구축함인 USS 매독스함을 선제공격해 양국
함대가 교전한게 통킹만 사건인데, 1971년 다니엘 엘즈버그는 미 국방부 펜타곤 보고서를 공개하며
이때 북베트남 측의 두번째 공격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베트남전 개입을 위해 조작한 것
이라고 폭로하였고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도 1995년 회고록에서 유사한 내용을 고백 했습니다.
베트남으로 부터 1차 공격후 2차 공격이 있었다고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발표했고... 미국 의회는
'통킹만 결의' 를 의결해 1965년 2월 B-52 폭격기로 하노이 북폭에 나섰으며 지상군도 파견되는데
북베트남 당국은 훗날, 공격한 이유를 '당시 전쟁 중이던 남베트남 함선으로 오인했기 때문' 이라고
발표했으니 그럼 1875년 운양호의 강화도 침범 사건과 유사하니 미국 군함이 왜 하이퐁에 접근했느냐?
이 교전의 결과로 북베트남 해군은 어뢰정 3척이 손상을 입었고, 4명의 사망자와 6명의 부상자를
남겼으며.... 미해군은 구축함 1척과 항공기 1대에 아주 경미한 피해를 입었고, 전사자는
없었는데 다음날인 8월 3일 매독스함이 재차 북베트남에 의해 공격당하는 일명 제2통킹만
사건이 벌어졌으나, 1971년 6월 뉴욕 타임즈는 두번째 교전은 자작극이라는 폭로가 있었습니다.
2차 인도차이나전쟁은 베트남(월남) 전쟁이라고도 하는데 1955년 11월 1일부터 1975년 4월 30일
까지 사이에 벌어졌으니, 분단된 남북 베트남 사이의 내전임과 동시에 냉전시대에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이 대립한 대리전쟁 양상을 띠었고...... 1964년 8월부터 1973년 3월
까지는 미국등 외국군대가 개입하고 캄보디아·라오스로 전선이 확대되어 국제전으로 치러졌습니다.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 게릴라전과 북베트남 베트남인민군 정규전이 동시에 전개되었는데
1964년 8월에 미국이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개입함으로써 국제전으로 확대되었고, 1965년에
미국, 대한민국, 오스트레일리아 등이 지상군을 파병하였으며 8년간의 전쟁 끝에 1973년 1월에
프랑스 파리에서 평화 협정이 체결되어 3월말까지 미군이 전부 철수하였고, 1975년 4월 30일에
사이공 함락으로 북베트남이 무력통일을 이뤄 1976년에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선포되었습니다.
제공권을 장악한 압도적 군사력의 미군이 폭격과 공습, 포격, 수색섬멸 작전과정에서 네이팜탄
과 같은 대량살상 무기를 투하하고 고엽제등 화학무기를 사용하여 무차별적으로 민간인
들을 희생시킴으로써, 미국 내에서 반전운동을 촉발시켰을 뿐만아니라.... 미국의 국제적
군사개입에 대한 정당성에 큰 타격을 입혔으니 3백만에서 5백만명의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응오딘지엠은 가톨릭 엘리트였고 식민지 정부 관리였으니 베트남인들은 그를 프랑스 지배의 연장으로
인식했는데... 불교를 탄압하는데다가 공산주의자뿐만 아니라 다른 반정부인사들을 체포, 구금하고
고문하거나 처형했으니 정치적 박해로 죽은 사람은 1955년에서 1957년 사이 12,000명에 달했고,
1958년까지 정치범으로 감옥에 수감된 사람의 수는 4만명이나 되었으니 반공을 앞세운 독재는 민심
이반을 불러 대다수의 베트남인들이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을 지지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응오딘지엠의 가장 큰 실책중 하나는 토지개혁 실패니 메콩강 삼각주를 비롯한 농지는 프랑스 식민지
이래 지역 인구의 2% 인 지주가 전체 토지의 45% 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1956년 미국의 압력으로
발표한 토지개혁은 지주의 토지 보유 면적을 1.15 Km²로 제한하였으나 지주들이 가족에게 토지를
이양하는 것을 허용하여 사실상 토지 개혁 자체가 무용지물이 되었으니 “눈감고 아옹” 한다는 식이라!
응오딘지엠 정권의 친 가톨릭 정책과 불교 탄압은 불교계의 저항을 불렀으니 1963년 6월 11일 베트남
사이공 한복판에서 티엔무 사원의 틱꽝득(釋廣德) 스님이 분신자살을 시도했으니, 이 충격적인 장면
은 AP통신 사진기자에 의해 해외로 타전되어 서구 사회에 경종을 울리며 전국적인 저항의 신호탄이
되는데 이 기회를 틈타 1963년 11월 즈엉반민 장군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니 역시 친미정권 입니다.
지엠 정권은 1954년부터 1960년 사이 체포한 5만여명의 사람들을 정치범 수용소에
구금했는데..... “펜타곤 페이퍼” 는 수인(囚人)들이 “정부가 반대세력을 격리
시키기 위한 수용소” 에서 공산주의자건 아니건 고문을 받고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1960년 12월 20일 떠이닝성 떤비엔현 떤럽사에서 계급, 종교, 민족 대표들로 구성된 남베트남 민족
해방전선(베트콩)이 결성되었는데... 제국주의 미국과 응오딘지엠 정권을 타도하여 독립, 민주,
평화, 중립의 정부를 세워 통일된 조국을 세우자는 것이니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지지하는
세력은 1961년 33개 국가 10개 국제조직에서 1964년 63개 국가 400개 국제조직으로 늘어납니다.
1961년 2월 15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은 각지에 나뉘어 있던 전투 부대를 남베트남 해방군으로
통합하였고... 같은 해 9월 2일 남베트남해방군 보병 1대대가 설립되었는데, 베트콩이란 낱말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결성되기 이전인 1958년 1월 응오딘지엠이 농민 게릴라를 베트콩이라
비난하면서 처음 썼는데 지엠은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을 모두 공산주의자로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베트남 공산당은 레주언을 제1서기로 선출하였으며 남베트남의 무장 투쟁을“인민 전쟁” 으로
규정하고, 5월부터 호찌민 통로의 정비와 향상을 위한 559 단을 발족했으니 559단은
6개월에 걸쳐 라오스 산악지역에 통로를 개척하였고, 호찌민 통로가 정비된 첫 해에
500여명의 “재편성” 인원이 남부로 향했으니..... 군대의 첫 이동은 1959년 8월에 있었습니다.
북베트남은 1959년부터 1961년까지 3만명의 병력을 라오스로 보내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지나는 호찌민
통로를 만들었으니.... 4만여명의 병력이 1961년에서 1963년까지 이 통로를 통해 이동했으며 1964년에
베트남 인민군 1만여명이 호찌민 루트를 통해 남베트남을 공격하였고, 1965년에는 10만명에 달했습니다.
1962년 4월 존 케네스 갈브레이스는 케네디에게 “우리가 프랑스 군을 대체한 식민지 점령군이 되면
프랑스군 처럼 피를 흘리게 될 위험이 있다” 고 경고하였으니... 1963년에 남베트남에는 16,000
명의 미군 병사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는 아이젠하워가 권고한 900명을 훨씬 웃도는 것이었습니다.
전략촌은 1961년부터 세워졌으니 미국과 남베트남은 농촌 인구를 일정 지역으로 이주시켜 게릴라와
주민을 분리하고 지방에 대한 정부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전략촌이 세워진뒤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활동가들이 전략촌에 잠입하기 시작하였으니, 팜응옥타오는 공산
주의자들이 가톨릭 교인으로 위장 침투하여 베트남 공화국을 안쪽부터 파괴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1963년 1월 2일 압박 전투에서 350명의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게릴라 부대가 1,500명의 남베트남군
을 상대하여 승리하니 미군은 8대의 APC 장갑차와 15대의 헬기를 지원해줬는데... 후인반 까오 장군이
지휘하는 베트남 4군은 패하였으니 남베트남군 측에서는 83명 이상이 전사하고, 미군 헬기 5대와
APC 장갑차 3대가 파괴됐던 데에 비해 베트콩측의 전사자는 18명이었으며 까오는 도망다니기 바빴습니다.
1963년 5월 8일, 석가탄신일을 맞아 후에에서 불교 신자들이 불교기를 들고 지엠정권의 불교 탄압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자 남베트남군이 군중들을 향해 총을 쏘았고, 9명이 사망하였으니 불교계의
분노가 폭발하였는데... 지엠의 형 응오딘툭은 후에의 가톨릭 대주교였기 때문에 후에에서는
종교와 국가가 분리되지 않는 상황이라 가톨릭에 의해 사찰과 석탑이 파괴되는 일이 빈번하였습니다.
1963년 6월 11일 베트남의 승려 틱꽝득이 불교 탄압에 항의하여 분신하자 지엠의 동생 응오딘
누의 부인 이자 퍼스트 레이디의 역할을 하던 마담 누는 이를 “땡중의 바베큐 쇼” 라고
비하하였고, 이로 인해 분노한 불교 신자들은 지엠 정권에 저항하게 되었으며 레꾸앙뚱
대령이 이끄는 베트남공화국 특전부대는 수백군데의 사찰을 습격하여 석탑을 파괴하였습니다.
미국은 1963년 중반부터 지엠 정권의 종교 정책 변화를 요구했으나 가톨릭 교도인 지엠이 거부하자 CIA 는
지엠정권을 제거하기로 한후... 베트남 군부에 지엠이 하야하더라도 미국은 이에 대한 책임을 묻지않을
것이고 원조를 줄이지도 않을 것이라고 전하니, 군부는 1963년 11월 2일 쿠데타를 일으켜 지엠과 그의
형제들을 체포해 죽였으며 주베트남 미국대사는 쿠데타 지휘자를 대사관으로 초청하여 성공을 축하합니다.
1963년 11월 24일 존슨은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전투에 합류할 것을 강력히 결심하였습니다.”
라고 말했으니 존슨의 이러한 공약은 지엠 정권을 퇴출시킨 쿠데타 이후 메콩강 삼각주를
중심으로 남베트남 측의 상황이 악화일로에 있었기에 나온 것이니, 존슨은 11월 26일
국가 안보 조치 각서 273호를 통해 소규모 특수전을 위주로 대응하였던 케네디의
정책을 뒤집고 1963년말 까지 1만여명의 병력을 남베트남에 배치하여 전쟁을 확대시킵니다.
통킹만 사건 뒤 몇일이 지난 1964년 8월 7일 미국은 보복을 명분으로 북베트남에 폭격을
감행했으니.... 선전포고 없이 진행된 이 B-66 폭격은 대통령 존슨이 동남아시아에
주둔 중인 미군에 직접 명령한 것으로, 미국 하원은 통킹만 사건이 전면전으로 확대
되는 것을 거부했지만..... 존슨은 이미 대통령 독단으로 전면전을 개시하고 있었습니다.
통킹만 사건 당시 미국의 주장과는 달리, 2005년 기밀해제된 미국 국가 안전국의 보고서에서는 8월 4일
어뢰정의 공격은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북베트남은 8월 4일에 있었다는 어뢰정 공격에 대해
통킹만 사건 직후부터 부인하고 있었으며, 미국 내에서도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지적이 있어왔습니다.
“1959년 당시에 5천여명에 불과하였던 베트콩의 수는 1964년 말에는 10만여명 으로
추정되었다. 반면에 남베트남군의 수는 1백만명에서 85만여명으로 감소해 있었다."
그리고 베트남 주둔 미군의 수는 1961년 2천여명에서 16,500 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는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을 3단계로 격상시켰으니 1965년 3월 2일, 미국
해병대는 전략 요충지 쁠래이꾸를 공격하였는데... 소련 수상 알렉세이 코시긴이 북베트남을
국빈 방문한 동안 전개된 플래밍 다트 작전과, 롤링 선더작전, 그리고 아크 라이트작전이
진행되었으니 롤링선더작전에서만 북베트남에는 일백만톤에 달하는 폭탄과 미사일,
로켓이 퍼부어졌으니...... 베트남 전쟁 기간에 미군이 사용한 폭탄은 700 만톤에 달합니다.
미국 공군이 주둔한 비행장이 몇차례 공격을 받게 되자, 미국은 약체인 남베트남군 대신 직접 공군기지
를 방어한다는 이유로 지상 전투부대를 파병하였으니... 1965년 3월 8일 3,500 명의 미국 해병대가
베트남 다낭에 상륙한 것을 시작으로 지상군을 파병하였고 여론은 압도적으로 파병을 지지하였습니다.
3,500 명으로 시작된 미국 해병대의 파병은 그해 12월 200,000 명으로 늘었고 애초에 천명한
파병의 목표는 방어 임무였지만.... 미군은 오랫동안 공격적인 전쟁에 익숙해
있었고, 미군 사령부 역시 정치적 지침에 따라 방어 임무에 치중하는 것은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12월, 빈지아 전투에서 남베트남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으니 남베트남군이 소수의 베트콩에게 대패
하자 호치민 이에 대해 '작은 디엔비엔푸(Little Dien Bien Phu)' 라고 극찬했는데....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게릴라들이 치고 빠지기 작전을 유효하게 사용하여 강력한 남베트남군을
패퇴시킨 것으로 이로써 6월 동써아이전투 이후 남베트남군은 연이어 큰 전투에서 패배하게 됩니다.
웨스트모어랜드는 전쟁 승리를 위한 세 단계 계획을 수립였다으니 1 단계: 1965년 말까지
미국과 “자유 세계”군대가 위수 지역에서 영토를 잃는 경향을 멈출 필요가 있음.
2 단계: 미국과 동맹국의 군대가 게릴라와 적군을 포위 섬멸하는 대규모 공세를 시작. 이 단계
는 적군이 지역 방어를 포기하고 패퇴할 때까지 계속하여 대부분의 지역을 회복할 때까지 계속.
3 단계: 2단계 작전 수행 후 12 개월 내지 18개월이 지났을 때 적군이 계속하여 저항할 경우, 남아
있는 적군의 이동 기지 지역을 최종적으로 섬멸. 존슨 정부가 승인한 이 계획은 남베트남 정부
가 게릴라를 억제할 책임이 있다고 하였던 케네디 정부의 구상과는 배치되는 것이었으니......
총사령관 웨스트모어랜드는 1967년 말까지는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 예측했습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미군의 의무 복무기간은 1년이었으니 한 병사는 “우리가 베트남에 10년동안
있지는 않겠지만, 1년씩 열번은 있을 것” 이라 자조했으며 남베트남에는 물자가 넘쳐나는데,
스탠리 카노우는 “사이공의 PX 규모는 뉴욕의 백화점 블루밍데일즈에 맞먹을 정도” 였다고
기록했으며 미국의 변화는 남베트남 사회의 경제에도 영향을 주었으니 부정부패가 만연하였습니다.
미국은 동남아시아조약기구에 파병을 요청하였으니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대한민국, 태국,
그리고 필리핀이 베트남 전쟁에 파병하였는데 그러나, 북대서양 조약 기구의 회원국
이었던 캐나다와 영국은 파병을 거부하였으며 미군은 파병된 동맹국 군대와 연합작전을 합니다.
남베트남의 정치 상황은 매우 불안정해 쿠데타 시도가 빈발하였으니 공군 총사령관이었던 응우엔
까오 끼와 국무장관이었던 응우엔 번 티에우 등이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1967년 티에우는
키와 연합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했고 티에우 정부는 표면상으로는 민간정부를
표방하였으나, 티에우가 군부를 장악한 상태에서 실권을 차지한 사실상 군사 정권이었습니다.
웨스트모어랜드 총사령관은 전쟁의 판도를 바꾸기 위해 꽝찌성에서 케산전투를 벌이는데.... 1968년 들어
서서 존슨 대통령은 말하곤 했죠, "무슨 일이 있어도 프랑스군의 디엔비엔푸 꼴은 나지 않겠어." 전력
을 집중해 케산 자체는 지켜냈지만 결국에는 그 요새를 우리 손으로 해체하고 철수했죠. 베트남전
전체를 상징하는 소우주(microcosm)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미군 전역자 켄 번즈 10부작 다큐멘터리 중
케산 전투는 1968년 1월에 벌어진 포위전으로 구정공세 이전에 시작됐는데 디엔비엔푸와 마찬가지로
원래는 프랑스군의 요새였던 케산(Khe Sahn)은 해발고도 450m 가량의 고지대로 남베트남 지역의
최상단에 위치한 곳으로 북베트남과 접경 DMZ 및 라오스 국경과 매우 근접한 최전방 지역이었습니다.
케산의 험한 지형 때문에 라오스 국경-케산-꽝찌를 통하는 9번 국도가 사실상 유일한 연결 도로였으며,
캠프 캐롤이 설치된 동하 지역으로부터 63km 가 떨어져 있었는데 지역 자체가 매우 험하고 인적이
드물며, 곧 안개가 끼는 울창한 숲이 펼쳐져 있기에 대규모 군대가 매복하기에 이상적인 지역이었습니다.
미 해병대와 남베트남군은 케산에 1962년부터 기지를 구축하고 주둔했으니 케산에 대해 북베트남군이
포위 공격을 한 것으로 미국 해병대 3,500명과 남베트남군 2,100명을 월맹 정규군 2개 사단이 포위한
상태로 진행되었으니 애초에 월맹군 부대 부터가 14년 전 디엔비엔푸 전투에 참전했던 사단이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군의 디엔비엔푸 당시 베트민을 지휘했던 보응우옌잡 북베트남 국방 장관이 이 케산 전투
를 직접 지휘하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서방 기자단 사이에서 나올 정도로 디엔비엔푸와 상황이
유사했는데 지압 장관은 "우리는 야전 지휘관들의 능력을 신뢰한다" 며 자신의 참가설을 일축했습니다.
충돌은 1967년부터 이미 시작되었으니 2월부터 기지 주변에서 북베트남군의 활동이 늘어난다는 보고
가 있었고 북베트남군이 기지 인근 일부 고지를 점령한채 간헐적으로 비행장에 박격포 공격이나
저격을 가해오곤 했으니 미군은 4월부터 케산 인근의 북베트남군이 장악하고 있던 861등 세 고지
를 공격해 점령하였고 북베트남군 610명을 사살했으나 미군 역시 157명의 전사자를 기록했습니다.
5월 중순부터 방어태세를 굳히기 위해 크로켓 작전을 실시해 점령한 고지의 방어태세를 강화
하고 기지 인근 4.2km까지 수색 및 제압영역을 확대시키는 중에 미 해병대는 52명이 전사
하였고, 북베트남군은 200명이 죽었는데 1967년 7월에 크로켓 작전이 종료할 때는
북베트남군과의 접촉이 소강상태가 되니 평정에 성공했다는 평가가 미군 내부에서 나왔습니다.
1968년 들어 북베트남군의 활동이 늘어나기 시작했으니 1월 부터 산발적인 교전이 시작되었는데 1월
20일, 한 북베트남군 중위가 미 해병대 전초기지에 항복해 오면서 오늘 밤에 대규모 공격이 시작될
것이라고 털어놓았고 20일 밤에 대대 규모의 북베트남군이 공격해왔으나 미 해병대가 격퇴하였습니다.
1월 21일 새벽, 북베트남군의 케산 기지에 대한 전면 포격이 시작된 동시에 탄약고가 피격되어
박살났고 기지 인근 케산 마을 역시 북베트남군의 공세에 노출되었고 얼마 못가 점령
되었고 1월 30일에 마침내 구정 공세가 시작되어 남베트남 전역이 아수라장이 되었으나,
북베트남군은 거점들을 점령하고 케산 기지에 포격은 하되 전면공세에는 돌입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앞서 미군이 1967년에 점령했던 케산 기지 근처의 고지에는 1월부터 북베트남군이 지속적으로
공격해오고 있었는데... 사실 이들 고지에서 펼쳐진 전투들도 백병전이 펼쳐질 정도로 대단히
격렬했으니 미군이 모두 힘겹게나마 방어에 성공하여 북베트남군은 감제고지 장악에 실패합니다.
북베트남군은 1968년 2월 7일 새벽에 11대의 PT-76을 앞세워 케산으로 부터 9km 가량 떨어진 특수부대
기지 '랑베이(Lang Vei)' 를 공격햇으니 그린베레, 라오스군, 몽족 민병대, 남베트남군으로 구성된 랑베이
병력들은 맹렬히 응전하였고 대전차조를 조직하여 M72 LAW와 M40 무반동포로 전차 3대 이상을 격파
했지만, 북베트남군의 물량공세에 밀려 대부분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히고 250명만이 케산으로 탈출합니다.
랑베이기지를 제압해 측방위협을 제거한후 2월 8일 새벽에 북베트남군은 1개대대 병력으로 미해병대
중대기지를 공격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하니 급습에 당황한 미 해병대는 전초기지를
빼앗기고 소대장이 전사하는 불운이 겹쳤지만 전열을 가다듬어 포병과 항공지원을 받아가며 반격
에 나서 최루가스 살포, 육박전까지 불사하며 싸운 결과 아침에 북베트남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합니다.
전황이 급박해서 미군과 북베트남군이 뒤섞인 참호에 포격이 떨어지는 데인저 클로즈 상황도 일어나
양측이 피해를 입었지만 같은 파편에 맞아도 방서모와 군복만 입은 허술한 북베트남군은 죽어
나갔지만 철모와 방편복을 착용한 미군들은 부상으로 끝나는게 대부분, 생존률이 월등히 높았습니다.
북베트남군은 전략을 수정하여 무작정 돌격 보다는 참호전을 통한 장기 공략을 시도하였으니
이는 디엔비엔푸 전투 때와 매우 유사한 방법으로, 적의 최정예 부대를 결정적 전투를
통해 꺾음으로써 미국의 전쟁수행의지를 잃게 만들려던 것이었지만 문제는 프랑스는
한정된 자원으로 싸웠지만 미군은 네이팜탄등 가공할만한 공중 폭격 전력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미군은 케산 기지 내의 자체 포병전력과 근처 '캠프 캐롤' 의 포병화력, 그리고 다낭, 냐짱 떤선녓,
괌, 항공모함 등 각지에서 이륙한 항공기들의 공중지원 등을 위시한 나이아가라 작전을
통해, 말 그대로 폭탄을 나이아가라 폭포수 처럼 쏟아부어서 월맹군을 화력으로 압도해 버립니다.
이 기간 동안 쏟아부은 폭탄의 양이 12만톤이었으니 좁은 케산 인근에 이렇게 많은 양의 폭탄
이 떨어진 결과, 기지 주변 2마일 반경은 아무것도 없는 평지가 되어버렸는데 2차대전
영국 본토 항공전 기간 동안 독일의 루프트바페가 영국 전역에 퍼부은 폭탄이
12만톤이었으니 독일에 수년간 영국에 퍼부은 총 폭탄량을 미군은 며칠간에 다 퍼부었다는....
죽을 작정을 하고 덤비는 북베트남군도 만만치 않았으니 보병들은 저 엄청난 폭격을 뒤집어쓰고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도 미군진지 코 앞까지 참호를 파고 들어오는 근성을 보였으니 북베트남군은 미군
방어선 가까이 다가와 박격포를 쏴댔는데, 이는 상대 측과 너무 가까이 붙으면 포격과 폭격 요청을
쉽게 내릴수 없는 데인저 클로즈를 염두에 두고 한 행위였으니 미군은 참호가 너무 가까워지자
특공대를 투입하여 각개 격파하려 했으나, 북베트남 포병대가 계속 방해포격을 가했기 때문에 중지합니다.
북베트남군도 포병전력이 있었으니 케산 기지를 두들겨댔는데 공세기간 중 월맹군이 발사한 포탄과
로켓탄은 10,900발에 이르는데 월맹 수뇌부가 재현하려고 했던 디엔비엔푸도 포병으로 이겼으니....
미군 측에서도 빠르게 배치와 방열을 하고 포격을 가한 다음 신속하게 사라지는 월맹 측 포병
전력을 위험하고 숙련된 전력으로 고평가했으니 이 포대들은 디엔비엔푸에서 처럼 땅굴을
파서 분산 배치한후, 몇발 쏘고 숨는 전법을 발휘했기 때문에 육안으로 관측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러자 미군은 진동을 감지하는 센서를 사방에 뿌려서 포대의 위치를 찾아내는 이글루 화이트
작전을 펼쳤으니 이 센서는 본래 석유 시추기술에서 비롯된 것으로, 포사격으로 인해 땅이
울릴 때 센서에 내장된 내진 감지기가 작동해서 무선으로 중앙에 신호를 보내고
이를 데이터화한 후, 센서들의 신호를 삼각측량하여 적 포병대의 좌표를 알아내는 원리였습니다.
1960년대로서는 오버 테크놀로지라고 불러도 되는 수준이었는데 대신 센서 하나하나가 엄청나게
비싸서 제일 싼 공중투하용은 600달러, 사람이 짊어지고 가서 설치하는건 2,000달러
가 넘었는데 당시 베트남에 파병된 미군 부사관의 월급이 500달러를 넘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또 군용치고는 내구성이 좋지 못해서 한번 살포시 20% 정도는 망가졌으며 내장배터리도 당시
기술력의 한계로 30일정도 밖에 못 갔고 게다가 북베트남군도 바보가 아니어서 이걸
발견하면 부수거나 미군이 있는 곳으로 옮겨서 팀킬을 유도했으니 이렇게 여기저기
허점투성이인 장비였으나....... 돈이 많았던 미군은 이걸 밭에 비료 주듯 마구 뿌렸습니다.
또한 방어진지를 대충 구축했다가 큰 피해를 본 디엔비엔푸의 프랑스군과 달리, 미군은 기지
전체를 활주로 건설용 플레이트와 모래포대로 만든 방공호로 도배해버렸으니 북베트남군
은 어지간한 포격으로는 미군에게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없었는데 북베트남군에도 이런
벙커를파괴할 수 있는 대구경 야포나 로켓이 있었으나 그 수가 적었고 명중률도 낮았습니다.
디엔비엔푸는 제일 가까운 보급기지가 200km나 떨어져 있을 정도로 고립 상태였지만, 미군은 수십 km
이내에 다른 기지들이 있었으며 또한 프랑스군이 주변 고지대의 중요성을 경시해 빼앗긴 것에 반해
미 해병대는 전초전 당시 케산기지 주변의 881 과 861 고지를 이미 확보했고, 포위기간 내내 틀어쥐고
있었으니 북베트남군도 고지 중요성을 알아 공세기간 내 고지에 대한 공격을 실시했으나 저지당했습니다.
케산 기지는 하루에 120톤 이상의 물자를 필요로 해서, 북베트남은 일단 포위만 하면 미군을 말려죽일수
있을거라 했지만 미군은 하루 300회의 공중 보급으로 유지했으니 북베트남군은 37mm 대공포를
설치해서 응전했으나, 미 항공 전력을 상대하기엔 빈약했고 안개와 대공포화 때문에 낙하산 공수를
통한 보급이 어렵긴 했지만 케산기지 내 지상관제 레이더의 도움을 받아 상당수를 회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나마 전개됐던 북베트남군 대공포들도 거의 대부분 미군의 폭격에 박살나 버렸는데 디엔비엔푸
전투에서는 비슷한 화력을 가지고도 프랑스군의 SBD 돈틀리스와 F8F 베어캣을 상대로 선전
하였으나 미군은 프랑스군과 달리 항공기들이 숫자도 훨씬 많았고 제트 전투기의
호위까지 겹쳤기 때문에 미군 항공전력을 저지하기란 북베트남군으로선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프랑스군이 167일 포위기간 동안 10400 소티의 항공지원을 했던 대 비해 미군은 하루에만 2500 소티를
기록할 정도였으니 북베트남군 대공포들은 상대적으로 느린 헬리콥터나 수송기를 노릴수 밖에 없었고
이에 미군이 아예 수송대에 전폭기들을 호위로 붙여서, 북베트남군이 '있을 것 같은 곳' 에는 무조건
네이팜과 항공폭탄, 최루가스를 도배해 버리는 전술로 대응하여 북베트남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은 미군이라고 해도, 최전선의 보병들은 열악한 환경에 노출될 수 밖에 없었으니
케산 지역은 비가 자주 와서 방공호는 습기를 잔뜩 머금어 축축했고, 물은 심하면 하루에 반컵
정도만 배급되었기 때문에 목욕은 고사하고 면도조차 할 수 없었으며 빨래는 가끔씩 빗물을
받은 드럼통에 대충 헹구는 걸로 해결하는 등 위생은 엉망이었고 참호에는 쥐들이 들끓었으며,
시체를 갉아먹거나 자는 사람도 물어뜯어서 권총으로 쥐를 잡는 보직 까지 생겼을 정도였습니다.
케산은 고지대라서 추웠는데 미군은 야상 같은 건 보급 받지 못해서 판초우의만 입고 버텨야 했으며 설상
가상으로 북베트남군의 포격 때문에 미 해병대는 방공호 밖으로 나갈수가 없었으니 부상병들도 심각한
중상이 아니면 치료후 원대복귀를 시켰고, 중상자들도 후방으로 후송하기가 여의치 않았으니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전을 방불케 하는 전장에서 미 해병대는 PTSD(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환자가 급증합니다.
항공 보급도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으니 초기에는 수송기가 비행장에 착륙한후 화물을 하역시켰으나
북베트남군이 수송기의 이착륙 때를 노려 공격을 해댄데다가, 포격 덕에 활주로에는 온갖 위험한
잔해들이 뒹굴고 있었기 때문에 활주로를 달리는 상태에서 화물을 내던지고 다시 이륙하는 걸로
바뀌었으니 현대의 미군이 사용하는 저공 낙하산 사출법이 이때 경험을 바탕으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마저도 피해가 커지자 아예 공중투하로 변경되거나 심지어 보급이 오지 않는 날도 있었는데 물론
북베트남군의 대공화력이 미 항공세력을 저지하기에 부족했던 건 사실이지만, 툭하면 안개가 끼던 당시
케산의 상황상 수송기들도 전폭기들의 호위 없이 무리하게 접근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으며, C-130
수송기들의 손실이 누적되자 2월 12일자로 운영을 일시 중지하고 2주간 C-123으로 대체하기까지 합니다.
거지꼴의 미군들은 화물이 내려지거나 북베트남군의 근접 포격으로 활주로가 손상될 때마다
벙커나 진지에서 튀어나와 북베트남군의 포탄이 날아오기 전에 부리나케 일을 끝마쳐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북베트남군의 포격에 부상당하거나 사망한 미군 병사들도 상당했습니다.
게다가 유사시를 위해 배치된 헬리콥터 상당수도 파괴되었으며 공세 초기 미군의 탄약고가
포탄에 피격되어 1,500톤 중에 1,100톤의 탄약을 잃어버리기까지 하였으며 특히
유일한 지상 보급로인 9번 도로는 진작에 북베트남군에 의해 차단되었기 때문에
미군 입장에서는 기지를 사수하기 위해서는 "항공 보급은 생명줄" 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그래도 부자나라 미군은 나았으니 가진건 사람밖에 없었던 북베트남군의 상황은 말그대로 생지옥이었는데
디엔비엔푸 전투에 참전했던 북베트남군의 베테랑 장교와 병사들도 그때보다 더 지독하다고 할 정도로
사정은 열악하기 그지없었으니 견고한 방공호에서 몸을 피할 수 있었던 미군들에 비해 북베트남군
병사들은 대충 판 참호 속에서 저 무시무시한 불바다로 만드는 엄청난 폭격을 맞고 계속 죽어나갔습니다.
전투 직후 후방으로 돌려진 북베트남군 사단들 중에는 사상률이 80% 나 되는 부대도 있었으니 저 정도면
재충원은 고사하고 그냥 부대가 사라진 수준이니.... 그래서 북베트남군 역시 PTSD 에 걸린 병사들이
많았으며 이 당시 참전했던 북베트남 노병들은 하나같이 미군의 가공할 폭격에 대해 치를 떨었습니다.
양측의 상황이 엉망이다보니, 나중에는 양측이 오히려 전투를 기피하는 현상도 발생했는데 북베트남
측은 포격뿐만 아니라 저격수들을 배치하여 눈에 띄는 미군들을 사살하는 전법을 썼고, 미군은
역저격을 하거나 아예 무반동포를 이용한 정밀 포격으로 대응했는데 물론 저격수를 사살해도 그
자리는 다른 저격수가 배치되어서 다시 미군을 공격하는 끝도 없이 반복되는 상황의 연속이었습니다.
존슨 대통령과 미국 정부는 어떻게든 케산이 '제2의 디엔비엔푸' 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백악관 상황실에
케산 기지의 모형판을 가져다 두고 매일마다 전황을 체크했는데 하지만 구정 공세 내내 최후방이었던
미 대사관까지 공격당하는 등 남베트남 전역이 난장판 상황이어서 케산 구출 작전은 계속 지연되었습니다.
미군의 손실도 적지는 않았지만 북베트남군이 이렇게 악을 써도 미군의 방어선은 뚫리지 않았으며
1월 30일~ 2월 말까지 안개가 지속적으로 끼어 미군 항공작전의 효율이 매우 떨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3월부터 날씨가 풀리면서 항공작전의 효율이 크게 올라가고, 기지와 항공기에 설치된
레이더를 이용한 근접항공지원의 정밀유도가 가능해지면서 북베트남군 많사상자가
엄청나자 4월 1일부터는 미군은 1기병사단을 앞세워 케산 구원 페가수스 작전을 실행합니다.
북베트남군 지휘부는 피해가 너무 크며 더 이상 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보고는 4월 15일부로
포위를 풀고 철수하니 미군은 77일의 포위를 버틴 것인데 북베트남군이 철수했기 때문에
1기병사단은 별 다른 전투 한번없이 케산기지까지 당도하였으며 물론 그 기간에도 케산기지
및 기지 인근에서는 여전히 산발적인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고, 4월 1일부터 페가수스
작전이 종료되는 시점인 15일까지 연합군은 미군 93명, 남베트남 33명의 전사를 기록합니다.
7월, 미군은 수많은 피를 흘려가며 지켜낸 케산기지를 해체하고 물러나서는 수킬로미터 뒤에 새로운 기지
를 건설했는데 북베트남 포병 사정권밖이었으며 이후 케산 지역은 베트콩과 북베트남 세력이 통제하는
지역이 됐으니 미국이 구상한 맥나마라 라인은 실패로 돌아갔는데 전사가들은 미군의 결정은 북베트남
정규군과의 마찰을 피하려는 작전 반경 축소와 전쟁에서 발을 빼기 위한 예비단계 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케산 전투를 '미합중국의 승리' 라며 선전했지만, 미국인들은 정부가 외치는
승리라는 말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으니.... 민심은 오히려 "도대체 왜 미국의 아들들이 저 이역
만리 이름 없는 고지를 지키기 위해 죽어야 하느냐?" 라며 반전여론이 더 거세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68년까지만 해도 미국 여론은 베트남전에 대해 말이 많기는 했지만, 주전파도 어느정도 입지가 있었지만
구정 공세를 계기로 반전파가 압도적인 득세를 보이기 시작했으니 매스 미디어의 발달과 집마다 보급된
텔레비전에서 방송되는 전쟁의 더러운 모습들은 미국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징집 연령층은
그에 대한 저항으로 마약과 히피문화에 빠져들었으며 파월 미군들의 사기는 현저하게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오기 싫은 곳에 강제로 끌려왔으니 군기는 엉망진창이었고, 프래깅(상관 살해)과 탈영이 성행했으며,
1년 의무복무 기간을 마치면 전역할수 있었으나, 그렇게 돌아온 고향에서도 '살인마', '베이비킬러'
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살아야만 했으며 거기다 PTSD(외상후 스트래스 장애)를 극복하지 못한
수십만명의 전역군인들은 노숙자나 폐인, 범죄자로 전락했고 미국 사회의 암적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과적으로 북베트남은 엄청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처음에 계획했던 대로 미국의 전쟁수행 의지를 꺾는데
성공하여, 당장의 전술적 결과로는 패배했지만 정치적이나 전략적으로는 성공한 모양이 되었으니 마이클
매클리어의 저서에 나온 표현에는, "케산 전투는 정치적으로는 미국의 디엔비엔푸 전투" 나 다름없었던
셈이지만, 군사적으로는 1개 사단이 넘는 프랑스군이 포위섬멸당한 디엔비엔푸에 비견할 수준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