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은 산세 좋기로 이름이 나 있다. 전북 남원에서 여원재를 굽이굽이 돌아 올라가다 보면 지리산 천왕봉으로 가는 길인데, 어느새 확 트인 운봉읍이 나타난다.
동으로는 학생교육원이 있는 세걸산과 남으로는 지리산 정령치가 자리하고, 북으로는 고려말 이성계 장군이 왜군을 무찌른 황산이 우뚝 솟아 사방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 고원지대이다.
운봉읍에서 남으로 2㎞ 정도 가면 삼산부락이 나오는데 여기에 노송이 부락을 둘러싸고 솔숲을 이룬 군락지가 있다. 지리산 자락은 전통적으로 제기ㆍ목기를 깎고 다듬는 일에 종사하는 나무쟁이들이 많이 사는 동네이기도 하다. 또 ‘동편제’가 생겨나 소리(唱)를 닦으러 오는 사람들이 거치는 고장이기도 하다.
운봉읍 산등리 삼산부락 어귀에 형성된 숲은 자세한 연대는 모르나, 옛날 진사 벼슬을 한 최씨 부자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양반이 만석꾼이었던 모양인데, 자연히 집안에 일꾼이 많아 엄하면서도 더불어 살기에 힘썼다고 한다.
그는 유력한 집안임에도 불구하고 정자 하나 짓지 않고 소나무 숲을 살리는 무척 열심이었다. 그래서 최 진사 사후에 공덕비가 ‘행정리’란 동네에 세워졌다.
해방 후 우익 좌익으로 사회가 혼탁할 때 이 공덕비가 훼손돼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그 후 시간이 흘러 마을사람들이 어느 밭도랑 켠에 묻힌 공덕비의 일부를 발견해서 지금의 솔 숲으로 옮겨 놓았단다. 글씨가 판독이 잘 안되나 최씨의 공적이 띄엄띄엄 연결되는 걸 풍상 속에서도 알려준다. 인생 유전(流轉)이라 그 시대에 이 마을 선조가 쏟은 솔 숲 보존의 애정이 시퍼렇게 살아 움직이고 있다.
소나무 모양을 볼 것 같으면, 학처럼 목들을 빼올리다가 지축으로 휘어져 내려 누웠는가 하면, 어떤 놈은 흙에 묻혀 조그만 개울을 건너 마치 다리(橋) 모양으로 엎드려 있다가 다시 고개를 솟구치며 살아나 있다.
이처럼 제 멋대로 큰 데는 무슨 이유가 있을까? 해발 470m 고지의 추운 지방에 방풍림으로서 동남풍을 막은 웃숲, 서풍을 막은 중간숲, 북풍을 막은 아랫숲으로 길이 보전되고 있다는 말을 접할 때, 바람받이 역할을 톡톡히 해내면서 혹시 일어났을 홍수에도 버티며 자라왔기에 저토록 멋진 숲을 가진 게 아닌가 한다.
솔 숲 가운데 지금 어린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자라고 있다. 최 진사의 뜻이 담겨진 나무일까? 훗날 정자나무로 자라나서 굽은 소나무를 어루만져 주고 마을사람들에게 쉼터를 제공할량인지… 마을로 들어가는 켠에는 도랑에 맑고 차거운 물이 찰랑찰랑 흘러가는 것을 보면서 언젠가 유럽 산간도시에서 흑녹색 빛으로 잔잔히 흐르던 물, 그리고 조그만 아치 돌다리에서 한 중년남자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던 풍경이 문득 생각났다.
이렇듯 지리산 운봉 마을에 얽힌 온갖 사연을 솔 숲은 그냥 제 몸으로 침묵으로 말해주고 있다. 그 숱한 세월속에서도 꿋꿋이 꺾이지 않고 자란 기품이며, 그걸 지켜낸 이 마을 대대로의 정성이 복잡한 세태의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깨우쳐 주는 듯해서 더욱 갸륵하다.
/서진석ㆍ 국립산림과학원 연구관 JSSUH@fo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