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은 둑을 만들고 그 둑에 갇혀 흐른다.
“자기 습은 떼지 않은 채
걸리지 않는 여여한 법 도리만 따지고 있으면 될 일인가.
먼저 자기를 알지도 못한 채, 배우지도 않으면서
그것이 무엇일까 하거나 공(空)이겠거니 하고만 있다면
천 년 만 년을 그렇게 해도 아무 소득이 없다.
세상에 어떤 감옥보다도 무서운 감옥이 바로 관념의 감옥이다.
그 벽은 가장 넘기 어려운 은산철벽이다.
수행이란 어떤 측면에서 보면
바로 이 벽을 깨는 것, 그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사실 벽이란 본래 없으나 스스로 벽을 쌓아 올린 것이다.
뜻으로 짓고 입으로 짓고, 몸으로 지어 놓은 것이다.
고로 본래 벽이 없음을 알려면 마음을 알아야 한다.”
나무 껍질에 글자를 새겨 놓으면 나무가 크는 대로 글자도 커진다.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하면 그 행위는 우리 마음에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은 다시 새로운 행위에 제약을 가하게 된다.
걸림 없는 행이 아닌 한, 마음의 심층에 남겨진 흔적은 지워지지 않는다.
마치 나무에 흠집을 내 놓은 것처럼.
그러나 우리는 그런 흔적이 남는지를 잘 알아채지 못한다.
심한 충격이나 깊은 슬픔,
거듭되는 회한의 경우는 흔적이 뚜렷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한이 맺힌 상태라고 표현하지만
대개의 경우는 그저 흘러가 버린 일로 알게 된다.
그러나 느끼지 못한다고 혹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여리다고 해서
흔적이 남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한번 일어난 것은 반드시 입력이 되고 입력된 것은
어느 때든 다시 나타나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식세계는 종 문서로 가득 차있다고 한다.
경전 말씀으로는 ‘마음에 남은 습기를 원동력으로 하여
온갖 것이 생겨난다.’고 되어 있다.
속담에 ‘고기 덩이를 먹어 본 개’라는 말이 있다.
한 번 맛을 보고 나니까 자꾸 먹고 싶어 안달을 하게 된다는 뜻이다.
습기의 무서움을 빗댄 말이다.
이런 얘기도 있다. 어느 불면증 환자가 늘 수면제를 복용해오다가
어느 날엔 약을 먹지 않은 상태에서 스르르 잠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깜짝 놀라 깨어나서 하는 말이
‘하마터면 수면제를 안 먹고 잘 뻔했군.’했다.
습관이란 그렇듯 무서운 것이다.
그래서 동·서를 막론하고 습기를 두려워하는 표현은 다양하다.
‘그것은 느낄 수 없을 정도의 가는 사슬이나
알았을 때는 끊기 어려운 사슬이 된다.’
‘습기는 내부의 전제 권력자이다.’
‘우리는 매일 습관이라는 노끈을 꼬며 살고 있다.’
‘습기는 노비문서이다.’
신·구·의로 짓는 일이 우리를 구속하는 한 우리는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래서 누구나 관념의 감옥에 갇힌 꼴이 되고
우리의 삶은 앞뒤로 은산철벽이 꽉 막아선 형국이 된다.
그럼에도 우리들의 대부분은 그런 상태를 갑갑하게 느끼기는커녕
애지중지 하면서 하루, 하루 순간, 순간마다 벽을 더 높이 쌓아 올리고 있다.
내 생각 내 느낌 나의 관념을 고수하며 산다.
그것이 되돌아 와 나를 더욱 꽁꽁 묶는 줄을 모르고 산다.
어리석은 우상 숭배자인 셈이다.
내 마음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자유롭게 살려고 한다면
무엇보다도 오래 쌓이고 쌓인 벽을 허물어야 한다.
마음에 각인된 흔적을 지워야 한다. 그것이 닦음이요 수행이다.
또 나아가서는 일상 생활 속에서 더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의 헐떡임을 쉬는 것, 놓고 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자면 자기를 되비쳐보고 그 짓는 마음의 뿌리를 캐내야 한다.
습기가 남지 않도록 그렇게 수행하기가 어렵다면
대신 좋은 습이 되도록 해야 한다.
악업을 피하고 선업을 쌓는 일이 그것이다.
경전 말씀엔 나쁜 지식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
의식주 돈 권력 명예 따위를 탐하지 않는 것,
정법을 비방하지 않는 것, 바른 길을 가는 벗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되어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한 번 길이 나면 그 길을 따르기 십상이다.
『강물은 강둑을 만들고 그 강둑을 따라 물이 흐른다.』
출처 : 염화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