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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원문보기 글쓴이: 이장희
경주 옥산서원(慶州 玉山書院)
사적 제154호
▣답사일자 : 2015년 8월 23일(일)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7
1572년(선조5년) 경주 부윤 이제민(李齊閔, 1528∼1608)과 도내 유림들의 공의로 이언적(李彦迪)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서원 자리를 정하고 묘우(廟宇)를 건립하였다.
다음 해 1573년 2월 16일에 인근 서악서원(西岳書院)에 봉안되어 있던 이언적의 위판(位版)을 옮기고 처음 향사를(享祀)를 행하였으며, 1574년(선조7년) 12월에 경상도 관찰사 김계휘(金繼輝, 1526∼1582, 김장생의 부친)의 제청에 따라 선조로부터 ‘옥산(玉山)’이라고 사액(賜額) 되었다.
이때 편액은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산해(李山海)가 교서를 받들어 썼으며, 1839년 불에 타버린 구인당을 새로 지으면서 김정희(金正喜)가 다시 썼다.
1572년 2월에 시작하여 8월에 총 40칸의 건물이 완성되었는데, 경내 건물로는 체인묘(體仁廟)로 현액 된 묘우(廟宇)를 비롯하여, 구인당(求仁堂)·암수재(闇修齋)·민구재(敏求齋)·무변루(無邊樓)·역락문(亦樂門)·신도비각(神道碑閣)·경각(經閣)·판각(板閣)·제기실(祭器室)·포사(庖舍)·체인문(體仁門) 등이 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毁撤) 되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1967년 사적으로 지정된 이 서원은 전면에 강학처소(講學處所)를 두고 뒤편에 사당(祠堂)을 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취하고 있다.
서향의 정문인 역락문(亦樂門)을 들어서면 누문(樓門)인 무변루(無邊樓)에 이르게 되며, 이 무변루 밑으로 계단을 딛고 오르면 구인당의 안마당에 이르도록 되어 있다. 구인당 좌우로는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자리 잡고 있어, 구인당과 함께 강학처소를 이루고 있다.
구인당 뒤쪽에는 내삼문(內三門)인 체인문(體仁門)이 있고, 체인문을 둘러싼 담장 안에 체인묘(體仁廟)와 제기실(祭器室)이 자리 잡고 있다. 체인묘 밖 남측에 경각(經閣), 북측에 신도비각(神道碑閣)이 있고, 서원의 중심부 남측에는 부대시설인 고직사(庫直舍)·문집판각(文集板閣) 등이 있다.
유물로는 필연(筆硯)·연수병(硯水甁)·관대(冠帶)·사모(紗帽)·마상배(馬上坏)·관영(冠纓)·옥적(玉笛)·직인(職印)·유서통(遺書筒)·옥관자·금관자·옥죽(玉竹) 2본과 『회재선생문집』 외 1,000여 권의 문집과 책이 보관되어 있다.
현재 유물전시관이 서원 남쪽 주차장 옆에 있으나 '공사중'을 붙이고 공사중이지 않은 채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문화해설사의 말을 빌리면 유물이 너무 많아 모두 전시 하지 못해 개방하지 않고 있다는데 예산을 들여 지은 것이면 전시할 수 있는 만큼이라도 개방해야 하는 것이 회재선생을 찾는이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싶은데 조금은 의아하다.
또 보물로 지정 된 1970년 김부식(金富軾) 원저 『삼국사기』 완본 9책(보물 제525호), 국내 최고의 활자본인 『정덕계유사마방목(正德癸酉司馬榜目)』 1책(보물 제524호), 『해동명적(海東名蹟)』 2책(보물 제526호)이 있고, 이언적 수필 고본(古本)은 1975년 보물 제586호로 지정되었다. 재산은 전답 2만 600평, 대지 3500평, 임야 35정보가 있다.
▲옥산서원 안내도
▲역락문(亦樂門)
서원의 정문은 역락문(亦樂門)이다. 이 역락문은 논어에 있는 ‘有朋而自遠方來 不亦樂乎(유붕이자원방래 불역낙호)’의 ‘亦樂’에서 취한 것이라 한다. 역락문은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이 명명하고, 현판은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의 글씨다.
▲역락문과 무변루 사이
역락문을 들어서면 문변루를 지나기전 이렇게 물을 흐르게 만들어 두었는데 다른 서원에서는 보기 어려운 것이다. 이것은 왕릉이나 사찰입구에 만들어 흐르거나 시내를 지나는 다리가 있는 것처럼 깨끗한 마음으로 들어서라는 의미와 속계(俗界)와 신계(神界)를 구분하는 의미도 있는 것이기도 하다.
▲무변루(無邊樓)
이층으로 된 누각으로 정면 7칸, 측면 2칸의 중층 맞배기와 집이며, 1층의 어간(御間)에 대문을 달고, 양측은 2층 온돌방의 구들과 아궁이를 두었다. 2층의 중앙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청을 두고, 양측에 정면 1칸 측면 2칸의 온돌방을 하나씩 두었다.
대청과 온돌방 둘레에는 툇마루를 두고 계자 난간을 둘러 개방하였다. 구조는 초익공식으로 5량가구(五樑架構)를 이루고 있다.
무변(無邊)은 주돈이(周敦頤)가 지은 주염계찬(周廉溪贊) 가운데 풍월무변(風月無邊)에서 취한 것이라 한다. ‘무변루(無邊樓) ’ 편액은 전형적인 한석봉의 글씨다.
편액 좌측에 작은 글씨로 ‘모자람도 남은도 없고 끝도 시작도 없다. 빛이여! 맑음이여! 태허에 노닐도다.’[靡欠靡餘 罔終罔初 光歟濟歟 游于太虛(미흠미여 망종망초 광여제여 유우태허)]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노수신(盧守愼)이 나중에 추가한 것으로 무변루 이름의 의미에 대한 주석이다.
처음 문루 이름을 납청루(納淸樓)라 하였으나 노수신이 선생이 남긴 업적과 생애에 맞지 않다고 하여 무변루로 고쳤다고 한다.
무변루를 마주보는 건물이 옥산서원의 주 건물로서 강당인 구인당(求仁堂)이다.
▲'無邊樓' 한석봉의 글씨
▲구인당쪽에서 본 무변루
▲옥산서원의 주 건물인 구인당(求仁堂)
▲옥산서원(玉山書院) 편액
그리고 옥산서원의 편액 글씨는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가기 직전인 54세 (1839년)에 쓴 것이다.
편액 왼쪽에 ‘만력갑술사액후 이백육십년기해실화개서 선양(萬曆甲戌賜額後 二百六十年己亥失火改書 宣揚)이라고 작은 글씨로 그 연유를 써 놨다. 구인당이 260년 후 기해년(1839년)에 화재로 소실되어 중건하면서 다시 써서 왕이 하사한 편액이라는 내용이다.
▲이산해(李山海)가 쓴 ‘옥산서원’ 현판
추사글씨의 현판 뒤에는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 1539∼1609)가 쓴 ‘옥산서원’ 현판이 걸려 있다.
이산해(1539-1609)는 토정비결의 저자인 토정 이지함(李之菡, 1517-1578)선생의 친조카로 영의정을 지냈고, 명필로도 유명하다.
어릴 때 명종에게 불려가 그 앞에서 글씨를 쓰기도 했다고 한다. 왼쪽에 보면 옛날 편액 글씨를 베껴서 만들어 걸었다는 의미의 ‘구액모게(舊額摹揭)’글이 새겨져 있으니 모조품이란 뜻이니 원본은 어디로 사라졌 가.
옥산서원이 화재로 소실되자 현판도 불타버린 줄 알고 선조가 다시 내려주었는데 사실은 원래의 현판을 잘 보관하였기 때문에 사액 받은 현판이 두 기가 된 것이라고도 하고, 창건 당시 사액 현판이 화재로 소실되자 아마 모조해서 새로 서각한 것 같다고도 한다.
아계 이산해가 쓴 현판은 신을 벗고 구인당 마루에 올라서야 보인다.
선조가 옥산서원을 사액할 때 누구에게 글씨를 맡길 것인가를 두고 어전회의를 했다. 당시 석봉이 글씨로 이름을 날릴 때라서 다들 그를 암묵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석봉이 나이가 너무 젊어서 선조 본인도 그의 글씨를 좋아하지만 예의상 대신들에게 글씨를 쓰고 싶은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의외로 아계가 자신이 쓰겠다고 나서니 그래서 이산해에게 쓰게 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한석봉 다른 ‘역락문, 무변루, 구인당’ 편액을 썼다. 임진왜란 당시 이산해는 정치적으로는 어떤 역할을 했던가?
선조임금이 아계에게 명하여 쓰게 한 이 현판은 1838년(헌종4년)에 구인당이 소실되어 새로 지으면서 아계의 편액은 구인당 내벽에 달게 하고, 헌종은 추사에게 다시 현판을 쓰게 하여 전면에 달게 했다하니 이것 또한 왕명에 의해 이렇게 된 것이다. 이 옥산서원은 회재의 상징적 의미때문인지 흔적을 남기고 해서인지 명필들의 전시장을 보는 듯하다.
한편 두 개의 옥산서원 편액은 보통 편액과 달리 흰 바탕에 검은 글씨가 되어 있는데 이는 임금이 하사한 편액이라서 그렇다고 한다.
▲구인당(求仁堂)
구인의 뜻은 ‘성현의 학문이 다만 인(仁)을 구하는 데 있다’는 선생의 저서 가운데 유배생활 중에 남긴 구인록(求仁錄)에서 취한 것이라 한다.
선생은 인(仁)의 본체와 실현방법에 관한 유학의 근본정신을 확인하고자 많은 노력을 경주 하였는데 이러한 회재선생의 뜻을 안 후학들이 그의 뜻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붙인 것으로 보여진다고 한다. 구인당(求仁堂)의 편액 글씨도 역시 한석봉의 글씨다.
구인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다듬은 돌로 바른 층 쌓기의 기단을 구성하고 있다. 기단 위에는 주좌(柱座)를 둥글게 솟아오르도록 만든 초석들을 놓고, 약한 배흘림이 있는 원주(圓柱)들을 세웠다.
기둥 위에는 굽면이 사면으로 끊긴 주두(柱頭)를 놓고, 끝이 위로 향한 소 혀 모양 장식인 앙서(仰舌)가 뻗은 부재를 기둥 윗몸에서 내었다. 안쪽으로는 기둥과 보 사이를 보강해 주는 보아지 형태로 하여 주두와 보머리를 결구하여 이익공(二翼工)처럼 보이지만, 부재의 구성 방법은 초익공식(初翼工式)이다.
가구(架構)는 5량(五樑)으로 대들보를 앞뒤 평주(平柱) 위에 걸고, 그 위에 파련각(波蓮刻)으로 된 동자주(童子柱)를 세워 종보(宗樑)를 받친 후, 여기에 꾸밈새인 첨차(檐遮)와 소호로 이루어진 파련대공(波蓮臺工)을 놓아 종도리를 받쳤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중앙이 우물마루로 된 대청과 좌우는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인당 앞쪽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는 정면 5칸, 측면 1칸의 단층 맞배기와집으로, 민도리집 계통의 건축물이다.
좌측에 작은 글씨로 心德何損 放而曰遠 一念知反卽 此是本(심덕하손 방이왈원 일념지반즉 차시본)라고 쓰여 있는데 역시 노수신(盧守愼)이 추가 한 것이다.
▲양진재(兩進齋)
또 노수신은 양진재를 액찬하였는데, 양진(兩進)은 “명과 성을 다 갖추어 明으로 도덕을 밝히고, 誠으로 의지를 성실하게 한다(擇善惟明 反身惟誠 孰重孰輕 聖賢同行 택선유명 반신유성 숙중숙경 성현동행)”라 하였다.
▲해립재(偕立齋)
해립재 편액도 노수신이 액찬(額贊)하였는데, 그 액찬의 뜻을 살펴보면 “경은 바르고 의는 방정하니 안과 밖이 서로 교섭한다. 오직 이것을 붙잡아서 잊지 않으면 천덕이 빛나리라(敬直義方 內外交相 惟操弗忘 天德之光 경직의방 내외교상 유조불망 천덕지광).”라고 되어 있다.
이것으로 그가 내적 규범으로서의 경을 중시함과 똑같은 비중으로 외적 규범으로서의 의를 중시하여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옥산서원기(玉山書院記)
▲원규(院規)
▲백록동규(白鹿洞規)
▲동재(東齋) 민구재(敏求齋)
민구재의 민구(敏求)는 호고민이구지(好古敏以求之)란 뜻이라고 한다. 이는 어질고 착한 마음을 마음속에 간직하는데 그쳐서는 아무런 의의가 없으며 학문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민첩하게 잠시도 머무름 없이 실천궁행(實踐躬行)하여 사회에 공헌하는 데 있음을 밝힌 것이라고 한다.
▲서재(西齋) 암수재(闇修齋)
암수재(闇修齋)의 암수(闇修)는 주자자찬(朱子自贊) 가운데 암연자수(闇然自修)의 뜻에서 취한 것이라 한다. 闇은 숨을 암이고 修는 닦을 수이니 이는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 나날이 새롭게 밝게 펼쳐져 나감을 뜻한다.
▲비각(碑閣)
▲신도비(神道碑)
신도비각은 1577년에 이언적의 신도비를 모셨으며, 경각과 판각에는 각종 판각 및 어서를 보관하였다.
당대 이황과 이기논쟁으로 그 이름이 잘 알려진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이 쓴 신도문이 새겨진 신도비이다.
당대 학자로 이름을 날렸던 기대승도 이황과 함께 역시 이언적의 학문을 인정하고 그를 존경했던 듯 이언적의 묘와 이언적이 배향된 서원에 이렇게 신도비를 남기고 있다.
신도비문의 내용
신도비문의 회재 이언적의 생애를 다루고 있지만 그 중에서 윤원형에게 탄핵받아 벼슬에서 물러나 유배되어 학문정진에 뜻을 두게 되는 대목의 일부를 보자.
"윤원형(尹元衡)은 윤임(尹任)과 원구(怨仇)가 이미 깊어졌는데 임백령(林百齡)과 이기(李芑)는 그 심복(心腹)이 되어 사림(士林)을 경함(傾陷)하여 그 간사(奸邪)를 성취시키고자 하였다. 윤원형은 밀지(密旨)라 핑계하고 대간(臺諫)을 꾀어서 윤임을 치게하니 대간이 따르지 않거늘 이기(李芑)등은 합문(閤門)에 나아가서 아뢰고자 하였다. 양전(兩殿-문정왕후와 명종)께서 즉시 충순당(忠順堂)에 함께 임어(臨御)하고 재신(宰臣) 추신(樞臣)을 들어오게 하여 장차 윤임 등의 죄를 가(加)하려 했는데, 이 때 임금의 위엄이 대단했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조금도 그 뜻을 거스리지 못 하였다.
공은 조용히 말하기를「신하의 의리는 마땅히 제가 섬기는 데에 전심(專心)할 것이니 그 때에 있어서 대행왕(인종)에게 전심(專心)한 것을 어찌 큰 죄를 주겠습니까. 또 일을 거행하려면 마땅히 현명(顯明)하게 해야 할 것이니 그렇치않으면 사림(士林)들이 부당(不當)하게 화(禍)를 당할 사람이 많아질 것입니다」하였다. 이 말을 들은 이는 목을 움추렸으나 공은 기색(氣色)이 두려워하지 않았다.
조금 뒤에 이기 등은 공(功)을 록(錄)하고 위사공신(衛社功臣)이라 칭호했으며, 그 날에 입시(入侍)한 재신(宰臣) 추신(樞臣)을 아울러 록공(錄功)했으므로 공도 또한 참여하게 되었다. 공은 굳이 사양하면서,「어찌 공(功)이 없으면서 공신칭호를 부당하게 받아 국전(國典-국법)을 문란하리오」하였으나 들어 주지않았다. 병오년(명종원년) 봄에 차자(箚子)를 올리되,「선현의 말에 군주의 덕을 성취시킴은 그 책임이 경연(經筵)에 있다 하니 신(臣)은 이 직책을 외람히 맡았으므로 책임을 감내하지 못할까 걱정했습니다.
삼가 선현의 격언(格言) 지론(至論)이 성덕(聖德-군주의덕)에 도움이 있고, 금일에 시행할만한 것을 취하여 조목별로 기록하여 드리오니 전하께서 진실로 능히 깊이 믿으시고 힘써 이를 행하신다면 그 성공(聖功-군주의 공부)에 도움됨이 어찌 작다고 하겠읍니까」하였다.
조금 뒤에 장차 모부인을 뵈오러 갈 새 또 차자(箚子)를 올려「학문을 강구(講究)하고 의리를 밝히며, 현인(賢人)을 친근(親近)하고 사녕(邪?)을 멀리 하도록」청하였으니 그가 군부(君父)에게 기대한 것이 더욱 심절(深切)하였지만 그러나 빙탄(氷炭)같은 형세(形勢)는 실로 서로 용납하기 어려운 것이 있었다."
▲비각과 사당 체인묘(體仁廟)
▲체인묘(體仁廟)
체인묘(體仁廟)
사당으로 ‘사람은 인(仁)을 체(體)로 삼아 성장한다’는 뜻의 生物之春 在我而仁 體之以身 何不長人(생물지춘 재아이인 체지이신 하불장인)에서 따왔다.
인을 체득한 사람 회재 이언적, 비록 죄인의 신분으로 유배지에서 죽은 바 되었으나 이렇게 죽은 지 20년 만에 임금의 명령으로 서원에 배향됨으로써 명예회복을 이루지만 서인 중의 주류였던 노론과 기호학파 출신이 아니라 남인이며, 영남학파란 이유에서 그는 온전하게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문원공의 시호와 영의정 추증은 당대 사회가 그를 높이 평가했음을 부정할 수 없게 한다.
매년 2월과 8월 중정(中丁)에 향사(享祀)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7변(籩) 7두(豆)이다.
▲경각(經閣)
[문화재]
1)이언적 수필 고본일괄: 보물 제586호(1975.05.01지정)
조선 중종 때의 유학자이며 정치가인 이언적이 1547년(명종 2)에서 1553년(명종 8) 사이에 직접 쓴 저술이다.
지정된유물들은 속대학혹문1책, 대학장구보유1책, 봉선잡의1책, 중용구경연의9책, 진수팔규1책 등 모두 13책이다. 특히 중용구경연의는 정조가 친필로 쓴 ‘제선정회재속대학혹문권수’를 붙이고 있어 그 가치를 더욱 높게 하였다. 현재 이것들은 옥산서원 어서각에서 보관하고 있다.
2)삼국사기<권50>: 보물 제525호(1970.12.30지정)
삼국사기는 1145년(인종 23)경 김부식이 신라·고구려·백제 3국의 정치적인 흥망과 변천을 중심으로 편찬한 역사서이다.
인종의 명에 따라 김부식의 주도하에 11명이 참여하여 편찬되었다. 이 책이 만들어진 12세기 전반의 상황은 고려 건국 후 200여년이 흘렀고 문벌귀족문화가 절정기에 이르렀으며, 유교와 불교가 서로 어우러져 고려 왕조가 안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자기 역사의 확인 작업으로 전 시대의 역사정리가 필요하였다. 조정에서는 거란을 물리친 후 자신감에 차 있었고 여진의 위협에 대한 강렬한 국가의식이 고조되어 있었다. 또 한편 문벌귀족간의 갈등과 대립이 심각했는데, 분열과 갈등을 국가가 망할 수 있는 원인으로 강조함으로써 현실비판의 뜻과 역사의 교훈을 후세에 알리려 하였다.
현재 전하고 있는 이 책은 옥산서원 청분각에 보관되어 있는데 전 9책 50권이며, 종이의 질은 한지이다. 가로 22.4㎝, 세로 31.5㎝ 크기로 장마다 9행 18자로 짜여져 있다.
이 책은 자체와 판식이 완연히 다른 3종의 판이 혼합되어 있다. 고려시대부터 삼국유사와 함께 경주부에 전해오던 것을 1394년(태조 3)에 마멸된 것만을 골라 다시 새겼고, 1512년(중종 7)에 와서는 고판 가운데에서 전혀 볼 수 없는 것만을 보완해서 새겼다.
삼국사기는 사료가 가장 미약한 부분인 삼국시대를 다루었으며, 현재까지 남아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관찬사서이다. 또한 후대에 편찬된 역사서의 모범이 되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이 책은 통일신라시대를 포함한 한국고대사를 연구함에 있어 일연의 삼국유사와 더불어 최고의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된다.
3)정덕계유사마방목(正德癸酉司馬榜目): 보물 제524호(1970.12.30지정)
이 방목은 1513년(중종 8)에 실시한 사마시의 합격자 명단이다. 사마시는 생원시와 진사시로 구분되는데, 생원시 합격자 가운데 조선 전기의 대학자인 이언적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이것은 바로 그가 지니고 있던 것으로 책장머리에 ‘여성이씨’, ‘회재복고’의 두 도장이 찍혀있다. 구성을 보면 합격한 사람들의 자와 본관, 주소, 부의 이름을 적어놓았으며, 을해자 활자본이다.
이 사마방목은 조선시대 과거제도 및 주요 인물들의 전기를 연구하는데 도움이 되며, 또한 1469년(예종 1)에 실시한 사마방목을 1476년(성종 7)에 갑인자로 찍어낸 것에 이어 2번째로 오래된 것이다.
4) 해동명적(海東名蹟): 보물 제526-1호(1970.12.30지정)
이 책은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인 신공제(申公濟)가 우리나라 역대 명필의 글씨가 돌에 새겨 있는 것을 탁본하여 상하 2책으로 묶은 것이다.
상권에는 조선시대 문종과 성종의 어필을 앞에 따로 놓고 다음에 신라시대 최치원, 김생, 영업의 3인과 고려시대 탄연, 이암, 신덕린 등의 3인을 합한 6인의 글씨를 모아 놓았다. 하권에는 이강, 승려 혜근, 성석린, 박초, 권근, 이첨, 정도전, 정총, 민자복, 신색 등 12인의 글씨가 실려 있다.
이 책은 탁본이라 하더라도 고대의 서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한 비문에 나타나지 않은 필적을 많이 수집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고직사(庫直舍)
옛날에는 서원이나 향교를 지키는 관리인들이 관리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이렇게 고직사를 두어 머물게 하였다. 서원에 딸린 고직사는 병산서원과 이렇게 옥산서원에도 남아 있다.
▲포사(庖舍,공사중)
▲관리사
▲문집팍각(文集板閣)
이언적(李彦迪, 1491∼1553)
경상북도 경주 출신. 본관은 여주(驪州). 초명은 적(迪)이었으나 중종의 명으로 언(彦)자를 더하였다.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회재라는 호는 회암(晦菴: 주희의 호)의 학문을 따른다는 견해를 보여준 것이다.
할아버지는 참군 수회(壽會)이고, 아버지는 생원 번(蕃)이며, 어머니는 경주 손씨(慶州孫氏)로 계천군(鷄川君) 소(昭)의 딸이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인물로서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주희(朱熹)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여 이황(李滉)에게 전해주었다.
[생애와 활동사항]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사헌부장령·밀양부사를 거쳐 1530년사간이 되었다. 이때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경주의 자옥산에 들어가서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1537년김안로 일당이 몰락하자 종부시첨정으로 불려나와 홍문관교리·응교·직제학이 되었고, 전주부윤에 나가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세워졌다. 이때 조정에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를 올려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이조·예조·형조의 판서를 거쳐 1545년(명종 즉위년)좌찬성이 되었다. 이때 윤원형(尹元衡)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선비들을 심문하는 추관(推官)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7년(명종 2)윤원형 일당이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많은 저술을 남긴 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사화가 거듭되는 사림의 시련기에 살았던 선비로서, 을사사화 때는 좌찬성·판의금부사의 중요한 직책으로 사림과 권력층 간신 사이에서 억울한 사림의 희생을 막으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사화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후에 이이(李珥)는 그가 을사사화에 곧은 말로 항거하며 절개를 지키지 못했다고 비판하였으나, 오히려 그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온건한 해결책을 추구하였던 인물이다.
[학문세계와 저서]
그는 1517년 영남지방의 선배학자인 손숙돈(孫叔暾)과 조한보(曺漢輔) 사이에 토론되었던 성리학의 기본쟁점인 무극태극논쟁(無極太極論爭)에 뛰어들었고, 주희의 주리론적 견해를 바탕으로 두 학자의 견해를 모두 비판하여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밝혔다.
그가 벌인 태극의 개념에 관한 논쟁은 조선조 성리학사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개념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논쟁에서 이기론(理氣論)의 주리론적 견해로서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이우위설(理優位說)은 이황(李滉)에게로 계승되는 영남학파의 성리설에 선구가 되었다.
그는 만년에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구인록(求仁錄)』(1550)·『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1549)·『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1553)·『봉선잡의(奉先雜儀)』(1550) 등의 중요한 저술을 남겼다.
『구인록』(4권)은 유교 경전의 핵심 개념인 인(仁)에 대한 그의 집중적인 관심을 보여준다. 그는 유교의 여러 경전과 송대 도학자들의 설을 통해 인의 본체와 실현 방법에 관한 유학의 근본정신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대학장구보유』(1권)와 『속대학혹문』(1권)은 주희의 『대학장구』와 『대학혹문』의 범위를 넘어서려는 그의 독자적인 학문세계를 보여준다. 그는 주희가 『대학장구』에서 제시한 체계를 개편했고, 특히 주희가 역점을 두었던 격물치지보망장(格物致知補亡章)을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대학장구』의 경1장에 들어 있는 두 구절을 격물치지장으로 옮겼으며, 이런 개편에 대해서 주희가 다시 나오더라도 이것을 따를 것이라는 확신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주희의 한 글자 한 구절을 금과옥조로 삼아 존숭하는 후기 도학자들의 학문 태도에 비해 훨씬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학문 정신을 보여준다.
『중용구경연의』(29권)는 미완성 저술로 주희의 『중용장구』와 『중용혹문』의 체계를 벗어나 천하국가를 통치하는 방법인 9경(九經: 수신(修身)·존현(尊賢)·친친(親親)·경대신(敬大臣)·체군신(體群臣)·자서민(子庶民)·내백공(來百工)·유원인(柔遠人)·회제후(懷諸侯))을 중심으로 『중용』의 정신을 밝히려는 독창적인 저술이다. 이는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가 『대학』 체계를 통치 원리의 구체적 실현 방법에 응용했던 것에 상응하며, 후에 이현일(李玄逸)이 『홍범연의(洪範衍義)』를 저술한 것에 선행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주희가 『대학』과 『중용』을 표출시킨 의도를 계승하면서도 『대학』과 『중용』의 정신을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의 양면으로 파악함으로써 도학의 통치 원리를 선명하게 제시하는 창의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봉선잡의』(2권)는 도학의 실천적 규범인 예서를 제시한 것으로서 조선 후기 예학파의 선구가 되고 있다. 주희의 『가례(家禮)』가 조선조 사회에 미친 영향을 주목한다면, 이언적의 예학 저술은 그의 학문적 관심이 얼마나 광범위했는지를 보여준다.
그가 왕에게 올렸던 상소문인 「일강십목소」와 「진수팔규(進修八規)」는 군주 사회의 통치 원리를 제시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하늘의 도리에 순응하고 백성의 마음을 바로잡으며 나라의 근본을 배양해야 한다는 왕도정치의 기본 이념을 추구했으며, 도학적 경세론의 압축된 체계를 제시하고 있다.
「일강십목소」에서는 ‘임금의 마음씀[人主之心術]’을 근본강령으로 규정하고, 가정 법도의 엄숙, 국가 근본의 배양, 조정 기강의 정대, 인재 취사의 신중, 하늘 도리에 순응, 언로를 넓힘, 사치 욕심의 경계, 군자의 길을 닦음, 일의 기미를 살핌을 도모하도록 요구하였다.
또한 1517년 저술한 「오잠(五箴)」에서도 하늘을 두려워함[畏天], 마음을 배양함[養心], 공경하는 마음[敬心], 허물을 고침[改過], 의지를 독실하게 함[篤志]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그는 하늘[天道·天心]과 백성[人心]에 순응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수양[養心·敬心]에 힘쓸 것을 중요시하는 도학적 수양론을 경세의 근본으로 삼고 있다.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종사되었고, 경주의 옥산서원(玉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남명과 이언적
이언적은(1491-1553) 1538년 남명(1501-1592)을 천거하여 헌릉참봉이 제수된 적이 있었다. 이 때 남명은 나가지 않았다.
회재 이언적은 배움이 바르며 조예가 깊고 성리학을 연구하여 본격적인 저술을 남긴 대 학자이며 의정부 참찬, 이조, 형조, 예조의 판서를 거쳐 정2품 정헌대부에 이른 조정의 중신이었다. 또한 사례 깊고 노모의 봉양에 힘써 늘 벼슬을 그만 두려하였으나 여의하지 않았다. 1543년에는 고향 안강에 가까운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내려와 자신이 천거한 바도 있는 학자 남명을 보고자 청한 적이 있었다.
남명은 답서를 보내고 만나지 않았다.
‘자기를 중매하는 처녀가 없듯 자진해서 윗사람에게 보이는 선비가 있겠습니까. 옛사람 가운데 사대의 임금에게 벼슬 했으면서도 실제 조정에 근무한 날수는 겨우 40일밖에 안 되는 선비(주자)가 있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나으리께서 벼슬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실 날이 멀지 않은 줄 압니다. 그 때 갓건을 쓰고 안강리로 찾아뵈어도 늦지 않을 줄 압니다.‘
회재 이언적은 나중에 간신 이기의 모함에 걸려 강계에 귀양 가 죽었다.(1553) 소위 문정황후를 몰아내려는 양재벽서사건으로 이는 윤원형이 윤임을 몰아내기 위한 조작이라 알려져 있다.
관서문답록(關西問答錄)
조선 중기의 유학자인 이언적(李彦迪)과 아들 이전인(李全仁)이 문답한 내용을 기록한 책이다. 이언적이 서요(西?)에서 귀양살이할 때 전인(全仁)이 따라와서 학문에 관한 질문을 하였고 언적은 답하였는데 후에 전인이 그 내용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전인의 3세손인 홍기(弘?)에 이르러 처음으로 간행되었다. 원래 《관서문답록》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남명유집(南冥遺集)》가운데 「해관서문답(解關西問答)」한편이 실려 있을 뿐이었다. 《관서문답록》 초간본의 발문을 쓴 이단상(李端相)에 의하면 그는 《남명유집》속의 「해관서문답」에 관하여 두 가지 의문점을 지니고 있었다고 하는데 하나는 이언적과 이황, 그리고 조식(曺植)의 인간관계에 관한 문제였으며, 또 하나는 이언적의 《대학장구보유》와 이황이 이중구(李仲久)와 논의한 《대학장구유서》의 청송일절(聽訟一節)이 서로 다른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이단상이 성동(城東)에서 병을 치료하고 있을 때 이언적의 현손 홍기의 방문을 받고 비로소 《관서문답록》을 보게 되었고 그 의문을 풀 수 있었다고 한다.
이단상은 《관서문답록》이 마치 공자와 그의 아들 백어(伯魚)를 연상케 하는 부자간의 문답록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관서문답록》은 그 내용의 대부분이 학문에 관한 것이지만 그 안에 이언적이 조식에 관한 인물평을 한 부분이 두고두고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초간본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판본이 훼손당하게 되어 50여 년 후에 중간본이 후손 학년(鶴年)에 의해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중간본이 낡아지자 중간본이 나온 지 92년 만에 학년의 후손인 욱(昱)에 의하여 다시 중간되었다. 이 책은 이언적의 사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임은 물론이고 지금도 문제가 되는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과 조식(曺植)의 관계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1549(명종 4)년에 이언적(李彦迪)이 저술한 것으로 주자의 대학장구의 문맥이 잘 통하지 않는 점을 지적하고 정자(程子)의 뜻을 따라 경(經)과 전(傳)에 편장(編章)의 서차(序次)를 바꾸고 뜻을 새롭게 해석한 책이다. 대학의 구성은 주자장구(朱子章句)를 비롯하여 경(經) 1장과 전(傳) 10장으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경(經) 1장에 전(傳) 9장으로 하고 경(經)과 전(傳)의 구절의 서차를 바꾸어 뜻이 통하도록 하고 주자의 대학장구에 잘못된 점을 보(補)하였다고 하여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라고 이름한 것이다. 그리고 본 책 후반에 「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이 실려 있는데 이것은 이언적이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구인록(求仁錄)》과 함께 강계(江界) 유배 때 저술한 것이며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의 뜻을 구체적으로 밝힌 것이다.
본서는 주자장구(朱子章句)의 본말을 해석한 전(傳) 4장을 뽑아다 경문(經文) 하단에 놓아 경문의 결어(結語)로 삼고 주자장구에서 망실되었다고 한 「격물치지장(格物致知章)」은 경문(經文) 중에서 지지이후(知止而后) 이하와 물유본말(物有本末) 이하의 2절을 뽑아다가 전(傳) 4장으로 삼고 주자장구의 전(傳) 6장을 여기서는 5장으로, 7장은 6장으로, 8장은 7장으로, 9장은 8장으로, 10장은 9장으로 삼고 전(傳) 10장은 없이 하였다.
장구(章句)의 해석에서는 「여(慮)」자(字)를 「사(思)」자(字)로, 지선(至善)을 중(中)으로, 치국(治國)의 본(本)을 인(仁)으로 풀이한 것과 《우서(虞書)》의 「명준덕…여민어변시옹(明俊德…黎民於變時雍)」이라고 한 문장을 명덕(明德), 신민(新民)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리고 본 책 후반부에 실린 「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은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에서 주자의 대학장구와 서차나 해석을 다르게 한 이유를 6개조의 문답식으로 간명하게 밝히고 있는데 6개조는 1)정자(程子)의 뜻을 좇아 차서(次序)를 바로 하는 이유, 2)청송이하(聽訟以下)의 1절을 정현(鄭玄)은 고본대학(古本大學)에서 지어신(止於信) 아래에, 정자(程子)는 경문(經文) 끝에, 주자(朱子)는 장구(章句)에서 전사장(傳四章)에 놓았던 것인데 다시 경문(經文) 아래에 놓아야 된다는 이유, 3)격물치지장(格物致知章)을 주자(朱子)는 망실되었다고 하였던 것이나 여기서는 경문(經文) 중의 2절을 취하여 보(補)하는 이유를 밝히고 주자가 다시 나도 이 뜻을 따를 것이라고 하였다. 4)여자(廬字)를 사자(思字)로 풀이하는 이유, 5)우서(虞書)의 명준덕…여민어변시옹(明俊德……黎民於變時雍)을 명명덕(明明德) 신민(新民)으로, 윤집궐중(允執厥中)을 지지선(止至善)으로 풀이하는 이유, 6)인(仁)을 치국 평천하의 본(本)이라고 하는 이유를 차례로 밝히고 있다.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나 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은 모두 대학(大學)의 원의(原義)를 바르게 이해하고 전하려는데 저술의 목적이 있었다고 보겠다.
그러나 그의 이론이 모두 옳다고는 볼 수 없을지 모르겠으나 그 예리하고 날카로운 견해는 주자의 미흡한 점을 바로 하였다고 보겠으며 그 후의 주자를 맹신하는 학자들에게는 경종이 되었으리라고 믿어지며 또한 우리나라 학자로 당시에 주자의 잘못을 대담하게 바로잡은 데 큰 의의가 있다고 보겠다.
[출처 : 검색조합인용, 사진-청현]
출처 : 청현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