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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행복한학교으뜸교육 원문보기 글쓴이: 백한진
황연옥 작가 ‘화진포의 성’ 소설연재/부제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8
‘화진포의 성’ 1~33회까지
황연옥 작가 ‘화진포의 성’ 소설연재/부제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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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며 아동문학가이신 황연옥 권사님은 강원고성신문에 전기소설 <화진포의 성>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이어서 올려둡니다.^^(‘화진포의 성’ 34~37회까지)
샘병원 미션 박상은 원장님은 로제타 홀에 대한 이야기를 설교 중에 언급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륜교회 금요기도회 설교] 아버지의 꿈 나의 꿈 2021-12-10
화진포의 성 [34]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황연옥 작가의 전기소설(傳記小說) 연재 [34] / 삽화 윤광자 화가
2021년 10월 08일(금) 09:43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산에서 나무를 하던 사람이 호랑이한테 습격을 당했다. 호랑이는 가만히 내 버려두면 대개는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그러나 배가 고프거나 부상을 당하면 쉽게 먹이를 찾기 위해 사람을 해치는 야수로 변한다. 다행히 그 환자는 공격을 당했을 때 부근에 나무를 하던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비명을 듣고 뛰어와 그를 구했다. 하지만 이미 호랑이 발톱에 할퀴어 눈알이 빠지고 상처를 심하게 입은 후였다. 상처를 치료하고 병균이 감염되지 않도록 적절한 처치를 했다.
독사에 물려온 환자들도 많았다. 장결핵, 간염, 만성 말라리아 증세로 비장이 팽창하여 복부가 아주 심하게 부른 환자들도 많았다. 간염 환자에게는 런던의 의학교에서 배운 대로 흡출법을 써서 치료할 수 있었다. 이 치료법은 대단히 만족할 만한 결과를 보였다.
시일이 지나면서 청진기로 진단해 볼 때 호흡기 환자의 두 명 중의 한 명은 결핵 환자였다. 이들 중 대부분은 이미 병세가 상당히 진전되어 입원시켜 치료하지 않으면 희망이 없는 상태였다. 이런 환자들을 위해서 우선 일차적인 처방은 했으나 더 시급한 일은 감염되지 않은 가족들과 어린이 환자들과의 접촉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격리 요청은 대가족 생활을 하는 조선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가족들은 환자들과 헤어지지 않고 의술만으로 완치시켜 주기를 기대했다.
무엇보다도 결핵요양소의 설립이 시급하였다. 환자를 격리해서 치료해야 한다는 의사말에도 가족들의 무관심과 고집스러운 태도를 보며 셔우드는 의기소침해졌고 결핵 환자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좌절에 빠졌다.
이처럼 우울한 날이 계속되는 중에도 희망을 주는 일도 있었다. 한 환자가 출혈도 있고 청진기를 통해서 들리는 소리도 거칠었지만 증세에 비해 병세는 그다지 심해 보이지 않았다. 가끔 밝은 색의 거품 있는 피를 토했다. 다행히 이 환자는 디스토마 때문에 결핵과 비슷한 증상을 보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런 경우에는 에메틴 치료법(emetin treatment)을 써서 고칠 수 있었다. 환자들이 부끄러워하는 폐병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 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이었던지.
메리언의 그녀 나름대로 바쁜 의료 일정을 보내고 있었다. 쌍둥이를 임신한 임산부의 출산을 돕고 자궁종양 환자를 치료하는 일도 빈번했다.
어느 날 메리언이 비장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내일 난소종양 환자의 수술을 하는데 이 수술은 반드시 성공해야 해요. 비록 수술실의 조명도 밝지 않고, 수술기구도 충분하지 못하고, 조수하고 한 번도 수술을 해보지는 않았지만 이 수술은 절대로 실패하면 안 됩니다.”
조선에서 첫 번째로 수술을 집도하는 자신을 향한 다짐과 격려일지도 모른다.
수술 전 날, 메리언은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렸다. 펄(pearl) 런드 간호 원장과 간호사들은 꿀벌처럼 바빴다. 수술복, 환자의 가운, 고무장갑, 수술기구들을 몇 번씩 소독하였고 남자 간호보조원을 수술실 밖에 파리채를 들고 서 있게 하여 곤충이 날아 들어오는 것을 잡고 필요 없는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은 막도록 조처했다.
메리언은 해주에서 첫 번째 수술 환자인 이 처녀를 사소한 점까지 세밀하게 살폈다. 환자는 난소종양이라는 병소만 제외하면 건강 상태가 좋았다. 환자는 침착했다. 수술받기 위해 가운은 입고 의사와 간호사도 마스크를 썼다. 의사의 지시에 따라 마취사가 마취를 시작하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수술실에 사람이 뛰어들었다.
“수술을 그만두세요. 환자가 독사진이 없어 수술하기 전에 사진을 찍어야 해요. 만일 사진 없이 환자가 죽으면 악귀가 그 가족에게 역병을 주어 괴롭힌대요. 사진이 없이는 절대로 수술 못합니다!”
모두들 넋을 잃을 정도였다. 긴급회의를 하였고 일단 밖에 있는 가족들이 어떤 형태로든 분노를 폭발하지 않게 배려하기로 했다. 환자를 일으켜 세우고 사진사와 직계가족 한사람만 들어와 사진을 찍게 했다. 진정제의 효과가 없어지기 전 10분 내로 끝내야 한다고 했다. 사진사는 급히 사진을 찍고 나갔고 다시 소독제를 뿌리고 수술은 진행되었다. 어처구니없는 그 같은 상황에서도 메리언은 침착하게 수술을 진행하였고 수술은 성공했다.
환자는 병균에 감염되지 않았고 회복도 빨랐다. 퇴원할 때는 뱃속의 커다란 종양을 제거하여 원래보다 훨씬 날씬한 몸매를 갖게 되었고 메리언의 의술에 사람들은 경탄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는 수술할 때마다 환자들에게 최근에 사진을 찍었는지 물어 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당시는 어이없는 사실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셔우드는 농담처럼 말하며 웃곤 했다.
“메리언, 수술 직전에 금지된 수술 구역에 외부 사람이 들어왔다는 것을 당신 선배 외과 과장 닥터 맥과이어가 알았으면 얼마나 기절초풍을 했을까?”
셔우드는 병원 일과 학교의 여러 문제로 바쁜 시간을 보냈다. 저녁이면 펌프질을 자주해야 하는 석유 등불 밑에 앉아서 친지들에게 결핵요양원 건립에 필요한 자금을 후원해 달라는 간청의 편지를 쓰느라 밤을 밝히는 날이 많았다.
조선의 밤은 그들 부부에게는 한동안 힘든 시간이었다. 마치 조용한 시골에서 살던 사람이 소음이 많은 도시로 이사 온 느낌이었다. 이 소음은 도시의 것과는 달랐다. 다듬이 소리, 개 짖는 소리, 새끼를 잃은 것 같은 슬픈 동물 울음소리. 특히 참기 힘든 소리는 무당들이 굿을 하느라 울리는 북과 징 소리다. 이 째지는 듯한 쇳소리는 밤이 깊을수록 점점 강렬해지다가 클라이맥스에 오르면 갑자기 중단된다.
“휴, 이제 끝났구나!” 하고 잠을 자려 하면 또다시 이전 과정이 반복되고 새벽까지 이어졌다. 그런 밤은 참으로 길고 으스스 한 밤이었다. 메리언은 수술이 잡혀 있는 전날 밤은 숙면을 이루어야 하는데 잠을 잘 수가 없어 많이 힘들어했다. 그렇다고 주택이 방음 시설이 되어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잠을 못 자는 것보다 더 안타까운 일은 미신과 민간요법으로 환자들을 회생이 어려운 시기에 병원에 데리고 오는 일이다. 가족들은 악귀를 내쫓는다면서 환자의 몸을 바늘로 찔러 상처를 내기도 하고 특정 부분을 불에 달군 쇠붙이로 지진 다음 환자를 업거나 나귀 등에 태워서 무당집으로 데리고 가거나 셔우드의 집 뒤편에 있는 서낭당에 데리고 가서 악귀를 쫓아 달라고 빌었다. 그런 과정에서 바늘에 찔린 곳으로 병균이 감염되어 치료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있다. 메리언은 정신이 혼란해졌다.
“어떻게 해야 이 환자들을 병원으로 먼저 오게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생각으로 닥터부부의 몸과 마음은 한시도 편하지 않았다. 매일 밤 환자들에게 전염병이 퍼지는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다. 어느 날 아침, 지친 모습의 셔우드 부부를 보고 펄(pearl) 런드 간호 원장이 이렇게 말했다.
“두 분의 모습이 지치고 걱정스러운 모습이네요. 두 분의 힘만으로 이렇게 무거운 책임을 수행할 생각이신가요? 우리는 이 일을 하며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한답니다. 그분은 한없이 우리를 보살펴 주시니까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셔야 해요. 그분은 우리의 짐을 덜어주실 거예요.”
펄의 말이 옳았다. 그녀는 지쳐있는 셔우드 부부에게 회복할 수 있는 말씀으로 용기를 주었다. 그날 저녁 기도회를 마치고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잠잘 수 있었다. 모든 일을 자신이 한다는 자만을 버리자 마음에 평안이 샘솟고 새롭게 맡은 일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벚꽃 피는 봄에 해주에 도착하였는데 어느새 여름이 되었다. 한 계절이 너무도 빨리 지나갔다. 언더우드 선교사님 가족들이 소래 해변으로 잠시 휴양을 가자는 제안을 보내 왔다. 주말에 도착한 언더우드 선교사님 가족들과 소래 해변을 갔다. 소래 해변은 아름다웠다. 백사장의 깨끗한 모래도 인상적이었다.
가끔 복잡한 머리를 식히기 위해서는 휴양지가 있으면 좋은데 휴양지는 소래 해변도 좋지만 원산 해변도 좋다니 한번 가보자고 하던 어머니 닥터 로제타의 말이 생각났다.
조선어 학교 2학기 강의가 시작되기 전에 어머니를 모시고 강원도 원산 해변을 가보기로 하였다. 명사십리 원산 해변이 정말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 설렘과 기대가 컸다.
‘어서 원산 해변에 가보았으면…….’
화진포의 성 [35]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황연옥 작가의 전기소설(傳記小說) 연재 [35] / 삽화 윤광자 화가
2021년 10월 22일(금) 14:40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어머니, 지난번 말씀 하시던 원산 해변에 한번 다녀오시지요.”
셔우드 홀 부부는 조선어 학교 2학기 강의가 시작되기 전, 10월 초순에 이박 삼일 휴가를 내어 어머니(로제타)를 모시고 원산을 다녀오기로 하였다. 원산에는 어머니와 잘 알고 있는 캐나나 선교사 맥컬리 자매의 오두막 별장이 있었다.
세 식구는 해주에서 서울로 가서 원산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거리는 약 225km였는 데 기차로 무려 7시간이나 걸렸다. 엘리자베스와 루이스 맥컬리 자매가 역에 마중 나와 있었다. 그녀들의 집은 항구가 보이는 언덕 위의 햇살이 잘 들어오는 곳에 있었다.
그 집에 잠시 머물렀다가 원산 해변으로 갔다. 해변을 보는 순간 얼마나 아름다운지 마음은 벌써 원산 바닷가에 기울어졌다. 경치가 좋은 해안 주변에 레이드 목사의 작은 별장이 있었는데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어 별장을 오래전에 내놓았으나 팔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세 사람은 레이드의 별장에 가보았다.
아담한 목조건물이었고 화려하지 않고 소박하여 마음에 들었다. 앞마당에서 바다가 보였는데 멀리 있는 섬들이 그림처럼 보이고 집 가까운 곳에 작은 강이 바다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 별장과 함께 모터보트를 얹어 판다고 하였는데 파도가 심할 때는 보트를 강기슭 수로에 정박하면 안전하다고 했다. 별장의 위치가 높아 날씨가 좋은 날은 창문을 열면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고 추운 날은 문을 닫으면 햇빛이 가득 들어와 거실 전체를 훈훈하게 해 준다고 한다.
별장 주인 닥터 레이드(W.T.Reid)는 남 감리교 선교부를 창설했던 레이드(C.F.Reid)목사의 아들로 그도 의사였다. 유리창엔 방충망도 쳐 놓았고 마당엔 펌프를 설치해서 신선한 지하수를 쓸 수 있었다. 특히 강당으로 쓰기에 적당한 큰 방이 있어 강연이나 회의 장소로 쓰고 주일엔 예배를 드려도 좋을 듯했다.
“아, 우리를 위해 이렇게 좋은 집을 예비해 주셨네!”
세 사람은 망설임 없이 그 별장을 구입하기로 하였다. 더 좋은 조건은 돈은 후불로 주어도 된다고 하였다. 닥터 레이드는 이 집을 많이 아꼈고 돈보다는 집을 좋아하는 사람이 주인이 되길 바라고 있다고 했다. 집값을 후불로 지불하고 가격도 저렴한 편이라 흔쾌히 계약을 했다. 일을 하다가 피곤하면 찾아와 쉴 수 있는 아름다운 공간을 마련하게 되어 기뻤다.
이 별장이 가족들과 병원 식구들, 지인들이 휴식이 필요할 때 오래도록 유용한 안식처가 되길 바라며 기쁨 가득했는데, 훗날 일제는 원산의 외국인 별장들이 있던 곳을 군함기지로 활용하려고 이 아름다운 곳을 폐쇄하고 별장 주인들을 강제로 고성의 화진포 주변으로 이주시켰다.
그해 가을, 어머니 닥터 로제타의 예순 번 째 생일을 맞았다. 조선에서는 태어나는 해를 한 살로 치고 61세는 ‘환갑’으로 큰 잔치를 한다. 조선의 달력은 ‘갑을 병정 무기 경신 임계’라는 이름을 각 해에 붙여 10년의 기간을 정한다. 여기에 12가지 짐승이나 파충류를 정하여 십이지(十二支) 를 만들고 이름의 배합이 이루어진다. 갑자, 을축 등의 순서로 나가는데 같은 해가 다시 일치하려면 60년이 지나야 한다. 그러므로 태어난 해와 같은 이름의 년 수(회갑)를 맞게 되면 자식들은 부모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잔치를 하는 것이 풍습이다. 선교사들도 회갑을 맞이하면 조선의 교인들은 아들딸이 되어 잔치를 차려 준다. 닥터 로제타도 제자들, 후배들, 교인들이 성대한 잔치를 베풀고 축하해 주었다.
성대한 음식과 축하 화분이 연회장에 가득했다, 참석한 조선의 명사들과 지인들, 완치된 환자들이 36년간 조선에서 의료 봉사한 로제타의 공적을 치하했다. 특히 맹인학교를 설립하고 뉴욕 점자를 바탕으로 한국 점자를 개발하여 맹인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고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준 것은 물론, 한국 사람들을 의사로 양성시킨 공적을 모두들 크게 치하했다.
이날 닥터 로제타 홀이 입은 실크 한복은 어느 맹인 부인이 맹인학교에서 배운 기술로 자신이 번 품삯을 모아 만들어 보낸 옷이었다.
순서에도 없었는데 스므 살쯤 되어 보이는 아가씨가 앞에 나와서 어머니와 자신이 이렇게 살아있게 된 것은 로제타가 위중한 산모와 아기를 구해 주었기 때문이라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또 한 사람이 나와서 자신의 어머니가 처녀 때 화상을 입어 흉한 모습이었는데 로제타가 본인의 피부를 떼 내어 이식해 주어 결혼도 하고 잘 살 수 있게 되었다고 감사하며 큰절을 하였다. 병원의 한 여의사 남편이 자작시에 직접 곡을 붙이고 직원들이 합창을 하여 참석한 사람들 모두 큰 감동을 받았다.
“산 중 깊은 곳에 보석이 숨겨져 있네/ 진주는 깊은 바다 밑에 놓여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닥터 홀 부인은 우리에게 보내졌네/ 60년간 흘린 노고와 눈물 끝이 없었네/ 서슴지 않고 하나님께 바친 그녀의 생애는/ 진정 오래도록 기억되리.”
닥터 로제타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앞으로도 조선의 여성들이 의료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여성들을 위해 더 많이 봉사하겠다고 답례 인사를 하였다.
환갑잔치가 있은 지 2년 후에 닥터 로제타는 그 꿈을 실현시켰다. 1928년 9월 4일, 서울에 여자 의학교(Women’s Medical Institute)를 설립하여 문을 열었다. 이것은 최초로 조선에 세워진 여성을 위한 의학교였다.
서울에서 조선어 학교 2학기를 마치고 해주로 돌아왔다. 셔우드 부부에게 너무나 기쁜 일이 있었다. 메리언이 임신을 한 것이다. 두 사람은 행복하였고 새 생명을 잉태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그런데 바로우 양이 착찹한 표정으로 메리언에게 말했다.
“메리언, 당신, 임신했죠? 틀림없어요. 당신은 실수로 아가를 가졌어요. 이제 선교사 임무를 수행하는데 당신의 임무는 크게 저하될 거예요.”
예기치 못한 말을 들은 메리언은 눈을 크게 뜨며 날카롭게 반박하려다가 숨을 크게 쉬고 감정을 진정시키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유용성이란 게 대체 뭔데요?”
바로우는 선교사가 결혼을 하거나 아기를 낳으면 하나님 일을 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다른 여선교사들은 메리언의 임신을 축하해 주었다. 이처럼 선교사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지만 조선인 친구들은 메리언의 임신 소식에 환호성을 질렀다. 마침 윤치호의 딸 헨렌 윤이 미국에서 공부를 끝내고 조선에 돌아와 여학교를 시작하겠다고 해주에 와 있었다. 그녀는 조선인들의 환호에 대해 이렇게 설명해 주었다.
“조선인들은 결혼하고 아들을 못 낳으면 남편이 아들을 낳으려고 첩을 얻게 되고 본 부인은 쫓겨날 수도 있지요. 많은 사람들이 메리언을 유능한 전문의사라 인정하지만 아이가 없는 것을 걱정했어요. 아기를 낳아야 아무개의 ‘어머니’ 라는 이름으로 친밀감을 같게 되지요. 또한 제사를 지내 줄 아들을 낳게 되길 더 바라지요”
“아, 맞아요! 아기가 있다고 해서 내가 의료선교를 못하게 되지는 않을 거예요. 오히려 조선인들과 가까워지고 선교 효과도 더 커질 거예요. 미스윤, 바로우 양에게 이 사실을 잘 설명해 줄 수 있겠어요?”
헨렌 윤은 쾌히 승낙했다. 메리언에게 불쑥 심한 말을 하고 바로우는 며칠 여행을 간다고 자리를 비웠다. 헨렌 윤이 바로우에게 뭐라고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여행에서 돌아온 바로우는 메리언을 찾아와서 자신이 심한 말을 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메리언은 다정한 태도로 그녀의 사과를 받아 주었다. 바로우 양이 숙소로 돌아가며 한 말은 더욱 뜻밖이었다.
“당신 아기한테 주려고 갓난아기 옷을 한 벌 주문했는데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도착했으면 좋겠군요.”
바로우는 중년이 훨씬 지난 나이에 선교사가 되어 조선으로 온 독신녀이다. 하나님 일을 하려고 조선어를 열심히 배워 거의 완벽하게 구사하는 점에 가끔 경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부유한 가정에서 고생하지 않고 자랐다. 지금도 본국에 있으면 편안하게 살 수 있지만 이 고달픈 선교사의 길을 택했고, 모든 환경이 어렵고 생소한 조선에 와서 적응하였다. 메리언의 그녀를 이해했다, 바로우가 허용적인 분위기가 되자 모두들 편안해 하였다.
메리언의 배는 점점 불러왔고 조선에 와서 처음으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게 되었다.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고 흙으로 만든 벽난로에 장작을 넣어 방을 훈훈하게 하였다. 트리 앞에 앉아 가족, 친구, 후원자들이 보낸 편지를 읽으며 따뜻한 성탄절을 보내고 있었다.
갑자기 위급한 수술 환자가 발생했다며 메리언을 와달라는 급한 연락이 왔다. 메리언은 만삭이었고 가야 할 곳은 50Km나 떨어진 산속 오지 마을이었다.
화진포의 성 [36]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황연옥 작가의 전기소설(傳記小說) 연재 [36] / 삽화 윤광자 화가
2021년 11월 15일(월) 11:27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고국에서 온 크리스마스 카드를 읽다가 피곤하여 잠자리에 들려던 순간이었다. 병원과 숙소를 연결한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50킬로 떨어진 산골 마을에 한 남자가 장폐색증을 앓고 있는데 이른 아침부터 몹시 고통스러워하고 있답니다.”
병원 직원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셔우드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매리언을 바라봤다.
“이 밤중에 그 멀리까지 가서 수술할 수 있을까? 더구나 당신은 해산이 임박한 임산부이고 한겨울이라 길도 미끄러운데…….”
메리언은 잠시 깊은 생각을 하더니 일어나 옷을 갈아입으며 말했다.
“힘들지만 이런 위급한 상황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그 사람을 죽게 내 버려두는 것과 다름이 없지요. 그런 응급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것은 여기서는 우리밖에 없으니까요.”
셔우드는 독신여성 기숙사에 가서 간호과장 런드 양과 간호사를 깨웠다. 그들도 같은 마음이었다. 병원에 가서 모든 기구의 소독을 확인하고 떠날 준비를 했다.
그날 밤은 달빛이 아름다웠다. 밤이 깊어지며 매서운 찬바람이 불더니 마을에 도착하기 전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몸이 얼어 덜덜 떨려 고통스러웠는데 드디어 차가 마을로 들어섰다. 마중을 나온 사람을 따라 어느 집으로 들어갔다. 방문이 열렸는데 화로를 가운데 두고 사람들이 둘러앉은 광경이 보였다. 환자가 어디 있느냐고 했더니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었다는 것이다. 그곳에서 조선사람 네 명을 더 태우고 차는 덜컹거리며 다시 좁은 산길을 달렸다. 마치 한밤중 어떤 공작을 꾸미러 가는 단원들과도 같았다.
차가 달릴 수 있는 막다른 길까지 가자 길이 좁아 차는 더 가지 못하고 논두렁길을 2km 남짓 걸어야 했다. 살을 에는 바람이 옷 속을 파고 들었다.
셔우드는 아내가 걱정이 되어 계속 매리언의 뒤를 따랐다. 매리언은 말없이 무거운 몸으로 논둑길을 타박타박 걷고 있었다. 머릿속엔 환자의 상태와 그곳에서 수술이 가능할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차 있는 것 같았다. 참 크신 사랑이 그녀를 지켜주는 것 같았다.
논두렁을 한참 걸어가니 마을이 나타났고 언덕에 진흙으로 지은 낡은 초가집 한 채가 있었다. 높은 돌계단을 올라가니 남자들이 모여 있는 사랑방이 보였다. 천정은 낮고 벽은 흙벽이고 바닥엔 돗자리가 깔려있었다. 난방장치라고는 약하게 타고 있는 화롯불뿐이고 아주 작은 등잔이 벽에 걸려 있었는데 불꽃의 크기가 완두콩만 했다.
“아! 저 깜빡이는 등잔불 아래서 어떻게 수술을 하겠어요. 닥터 김이 손전등을 주머니에 넣고 와서 다행이네요.”
사람의 의술만으로는 불가능한 조건이었다. 불가능을 이기는 기적이 있질 않고는 안 될 일이었다. 겉옷을 사랑방에 벗어놓고 빈대나 이가 많이 달라붙질 않길 바라며 환자가 있다는 옆방으로 갔다. 환자가 친척들과 식구들에게 둘러싸여 누워있었다. 닥터 노튼이 조선의료 선교사로 있을 때 의술을 배워 의사면허를 따서 이 지역에서 의료업을 하고 있는 조선인 의사도 와 있었는데 그가 셔우드 내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 의사의 진단은 정확했고 수술을 해야 환자가 살 수 있었다.
사람들을 방에서 모두 나가게 하고 곧 수술을 준비했다. 너무도 불결한 옷, 이불들을 어떻게 소독해야 할지 난감했지만 소독을 시작했다. 두 조선 남자가 거리를 두고 등잔불을 비추고 다른 한 사람은 손전등으로 수술 부위를 비추게 하였다.
어려운 수술이 밤새도록 진행되었다. 수술을 다 마치자 동이 텄다. 마지막 봉합이 끝나고서야 저렸던 다리와 무릎을 펼 수 있었다. 만삭인 매리언은 허리를 잘 펴지 못하고 진땀을 흘리면서도 의사로서의 투철한 사명감과 신앙심으로 끝까지 잘 참아 주었다.
“와, 참 대단하십니다. 감사합니다!”
등잔불을 들고 서서 수술 전 과정을 지켜보던 조선 남자들이 탄성을 질렀다. 수술을 마치고 사랑방으로 왔다. 담배연기로 자욱한 방에서 간호과장 런드양이 예수님을 전했다.
“이 추운 겨울밤에 우리를 여기까지 불러 한 생명을 구하게 한 것은 하나님 사랑입니다. 수술에 최선을 다했으니 환자의 상태를 하나님께 맡깁니다.”
마을 사람들은 환자가 낫기만 하면 온 동네가 예수님을 믿겠다고 약속했다. 환자는 수술 경과도 좋았고 얼마 후 완쾌되었다. 그 후 두 마을에서 교회를 세워 달라고 요청해 왔다. 기독교인이 한 사람도 없는 마을에 이렇게 하여 교회가 생기고 셔우드는 그 지역에 정기적으로 의료 봉사를 시작하였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 둔 그 날 밤의 응급수술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예수님 사랑의 사건이었다.
매리언의 분만 날이 가까워오자 셔우드는 서울에 가서 아기를 낳으면 어떻겠느냐고 넌지시 말했다. 다른 환자의 아기는 받아도 자신의 아기는 왠지 주저되었다. 그러나 매리언은 해주에서 아기를 낳겠다고 하였다. 남편과 런드 간호과장을 충분히 신뢰하기에 서울 병원에 갈 필요가 없다고 하니 셔우드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 당시는 ‘무통분만’이 보편화 되지 않아 산모의 고통을 줄여줄 방법이 없었다.
1927년 12월 18일 매리언은 건강한 사내아이를 낳았다. 셔우드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여보, 메리언, 수고 했어요! 우리가 아들을 얻었어요!”
아기 이름을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월리엄 제임스’로 지었다. 아기는 씩씩하게 울고 우유도 잘 먹으며 건강하게 자랐다.
일본이 조선을 통치하기 시작하자 조선은 ‘은둔왕국’에서 ‘허가왕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건축, 정지작업, 자동차의 소유나 판매, 출판과 인쇄, 공공집회까지도 허가를 받아야 했다. 이러한 허가 업무는 하급 관리들이 관할했는데 반 기독교단체의 입김이 작용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병은 치료보다 예방이 우선이기에 병원에서 시간을 내어 공중 위생계몽과 교육을 위해 마을을 찾아다니며 강연회를 준비했는데 계속 방해에 부딪혔다. 선교사업에 사용하라고 고국에서 선물 받은 비싼 영사기와 환등기로 공중위생계몽 교육을 시작했는데 보이지 않은 장애와 방해가 심했다.
질병 예방접종을 할 때도 허가를 받아야 했다. 학교에 장티부스 예방접종 허가를 신청했는데 승낙하지 않아 다른 학교 학생들은 예방접종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닥터 홀이 교장으로 있는 학교만 예방접종을 하였고 그 학교는 장티부스에 걸린 학생이 한 명도 없었다. 예방접종을 못한 학교는 여러 명의 환자가 발생했다.
이런 일들은 셔우드에게 깊은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미국으로 공부하러 떠나기 전에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 에스더 이모를 비롯해 조선에 결핵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많은 걸 보며, 훗날 의사가 되어 조선에 돌아와 결핵 요양소를 설립하겠다는 꿈을 안고 미국으로 갔었다. 그래서 그 분야를 전공하였고 롱아일랜드 ‘홀츠빌’에 있는 결핵 요양소에서 근무하며 이 포부를 동료 의사들과 자주 거론하곤 하였다. 우직한 성격이었던 셔우드는 경제적인 현실성이 없음을 알면서도 반드시 그 꿈을 이루려는 정열에 불타 있었다.
웰치 감독은 조선 선교사 파견이 결정되기 전에도 셔우드의 이 같은 계획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 단순한 젊은 의사의 이상주의에서 나온 객기라고 웃어넘기지 않았다. 감독이 되기 전 오하이오 주 웨슬리안 대학교(Ohio Wesleyan University)에서 11년이나 총장을 지낸 그는 젊은이들의 꿈을 인정하는 안목을 가진 분이었다.
웰치 감독은 셔우드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 주었다. 메리 버버그(Mary Verburg)가 조선에 새 병원을 짓는 데 사용해 달라고 유산을 남겼다는 유언을 선교회에서 통지받은 일이 있다고 하였다. 이 유산은 유언장의 조건에 맞는 사람과 계획이 나타나지 않아 유언의 법적 집행인이 집행을 보류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조건이란 공중위생을 강조한 내용이었다. 웰치 감독을 만났을 때 그는 격려의 미소를 지으며 셔우드에게 말했다.
“당신의 사업계획은 그 요지부동한 유언 집행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여건이 희망적이었는데 공중위생 교육을 막는 반기독교 세력들의 방해에 부딪혔으니 셔우드는 사기가 저하되고 마음에 심한 상처를 입게 되었다.
낙심되는 마음을 기도로 달래며 고심하고 있을 때 진찰은 받으러 온 환자 중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공중집회 위생계몽을 하려고 할 때마다 허가를 내주지 않고 항상 애타게 방해했던 그 관리였다.
“이 아침에 어떻게 저희 병원에 오셨습니까?”
셔우드는 반가운 표정을 하며 부드럽게 물었다.
“기침이 심하고 가슴이 아파서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무당이 하라는 대로 다 해 봤으나 더 심해지기만 합니다.”
그는 풀이 죽은 채 대답했다. 그의 가슴에 청진기를 대고 귀를 기울였다.
“안 됐습니다만 폐병에 걸렸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군요!”
화진포의 성 [37]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황연옥 작가의 전기소설(傳記小說) 연재 [37] / 삽화 윤광자 화가
2021년 12월 16일(목) 14:24 [강원고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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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병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된 관리의 얼굴은 충격과 공포로 굳어졌다.
“이 병원에는 현재 폐병을 치료할 시설이 없습니다. 담액이 음성으로 나타날 때까지 다른 환자들과 격리되어 치료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면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내 가슴 속에 폐병 균이 있다면 이제 나는 죽을 게 틀림없군요!”
그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실은 제 아...아들도 밤에 심하게 기침을 심하게 하는 데 폐... 폐병일까요?
“아드님도 병균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폐병은 한 사람이 걸리면 다른 가족들에게도 쉽게 전염이 됩니다. 그래서 제가 폐병 예방 교육을 하려고 그렇게 애썼던 것입니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더니 비탄에 잠긴 얼굴로 애원하듯 말했다.
“우리 아들이 폐병에 걸렸는지 검사받을 수 있도록 이 병원으로 데리고 와도 좋습니까?”
얼마 안 되어 그는 병색이 짙은 소년을 데리고 나타났다.
“당신 아들은 폐뿐만 아니라 목의 내분비선에도 감염된 것 같습니다. 증상이 아주 좋지 않아요. 아이가 병에 대한 저항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관리는 흐느껴 울었다.
“선생님, 저 아이는 외아들입니다. 저한테는 금쪽과 같습니다. 기독교 신의 신통력을 써서라도 제발 제 아이를 살려 주십시오. 부디 부탁합니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간절하게 애원했다.
셔우드는 그에게 잠시 진정시킬 시간을 주고 닥터 김과 긴히 의논했다. 전에 학교 교사의 아들을 치료하기 위해 사용했던 멀리 떨어져 있는 병동을 임시 폐결핵 병동으로 활용하자고 했다. 두 부자가 가엽기도 하고 이번 경우를 잘 처리하면 다른 관리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공중위생 교육에 많은 관심과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가 만약에 그들의 병이 호전되지 않고 치료받다가 잘못되면 어떻게 합니까?”
“그 문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맡겨야지요. 우리 부모님도 우리도 지금까지 의료선교사를 하며 수없이 어려운 일에 봉착했을 때마다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진실하게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할 뿐이지요.”
이번 일은 그들의 생명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보다 큰 중요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결핵은 격리해서 치료를 받아야 완쾌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릴 수 있고 결핵 요양소가 필요하다는 분위기를 조성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보다도 아들의 병세가 훨씬 심했다. 거의 가망성이 없었으므로 가족들이 몰래 특효약이라 생각하는 민간요법으로 쓰이는 뱀탕을 아이한테 먹일 수도 있어 간호사들은 24시간 교대근무를 하며 소년을 지켜봐야 했다. 생사탕에는 파충류의 내분비선 독소가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의료진들은 소년에게 맞는 특별한 영양처방으로 최선을 다했다. 그 당시는 ‘결핵특효약’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으므로 할 수 있는 임상치료와 간절한 기도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다행히 소년의 병세가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일광욕 치료를 시작했는데 일광욕은 목의 내분비선에 감염된 결핵균을 빠르게 녹였고 혈색이 좋아지며 체중도 늘어났다. 셀 수 있을 정도의 도드라진 앙상한 갈비뼈가 차츰 보이지 않게 되었다. 어느 사이 소년은 병원의 귀염둥이가 되었다. 동시에 소년의 아버지 병세도 조금씩 회복되었다.
드디어 청진기에서 부자의 폐에서 들리는 험악한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예방교육을 지독하게 반대하던 관리의 얼굴에 평안의 빛이 보였다.
어느 날, 닥터 김이 평소 그답지 않게 침착성을 잃고 흥분한 모습으로 사무실로 뛰어 들어왔다. 오래전 아버지들이 평양에서 선교개척을 시작했을 때 기독교인들을 악독하게 박해하고 죽이려 했던 높은 행정관리가 해주에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셔우드 아버지 윌리엄 선교사와 평양을 개척했던 초기의 신자 닥터 김의 아버지도 그의 손에 처형될 뻔했는데 구사 일생으로 살아났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닥터 김 아버지는 조선 최초의 감리교 목사(김창식 목가)가 되었는데 지금은 은퇴하여 해주에서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거리에 나갔다가 우연히 그 악질적인 행정관을 보았는데 그 사람은 저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의 출현이 좋은 징조인지 그 반대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의문점은 오래가지 않아 밝혀졌다. 그가 셔우드의 진찰실에 나타난 것이다. 아들과 손자가 이 병원에 입원해 있어서 면회하러 왔다는 것이었다.
“아!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인연이…….”
참으로 놀랍게도 그는 특별한 결핵 환자 두 부자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였다. 아들과 손자를 면회한 다음 그는 셔우드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였다.
“당신은 어려서 아마 나를 모르고 있겠지만 나는 당신과 당신 부친을 잘 알고 있소.”
나이 들어 이젠 머리가 허옇게 된 노인은 만감이 교차한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당신은 내가 전에 죽이려 했던 선교사의 아들이요. 당신 부친을 돕던 김창식도 내 손에 죽을 뻔했소. 나는 평양에서 김창식을 사형수 감옥에 넣었는데 그 감방에서 사형당하지 않고 살아나온 사람은 김창식뿐입니다.”
노인은 감정이 격해진 듯 잠시 숨을 고르더니 다시 말을 이어갔다.
“기독교를 박해했던 우리는 점점 세력을 잃었지요. 한편 기독교인들은 매우 강해졌어요. 평양감사는 김창식을 죽이지 못한 그 사건 이후 내게 책임 추궁을 하며 나를 평양 관가에서 내쫓았어요. 상식적으로 생각하며 이젠 기독교인들이 우리를 보복해야 할 차례지요. 그러나 당신들은 오히려 내 아들과 손자에게 사랑과 친절을 보여주고 죽을병까지 고쳐서 살려 주었어요. 나는 지금에 와서 기독교가 나쁜 종교라고 탄압한 일이 잘못했다는 점을 알게 되었어요. 용서하시오!. 아들과 대를 이을 우리 손주를 고쳐주어 그져 감사할 뿐이요!”
그는 눈물을 흘리며 진심으로 사과했다.
그가 돌아간 후 셔우드는 선교초기에 조선에 와서 아버지 닥터 홀이 뿌린 고난의 열매를 생각하며 만감이 교차했고 무릎을 꿇고 감사기도를 드렸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모든 일들이 형통하였다. 아버지와 아들이 완쾌되어 퇴원하는 날, 그 관리와 나이든 그의 아버지까지 셔우드의 하는 일과 교회를 보호해 주겠다고 하였다. 셔우드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 기뻤다.
소년은 빠지지 않고 주일학교에 나왔다. 한번은 황해도 각처에서 모여든 기독교 대표 신자들의 집회가 있었다. 환등기를 이용해 ‘예수의 생애’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려고 했다. 병원의 바쁜 일이 있어 깜빡하고 미리 강연회 허가 신청을 못 했는데 결핵을 고친 소년의 아버지는 연락하자 곧 집회 신청을 허락해 주었고 집회에도 참석했다.
셔우드는 일련의 이 모든 기적 같은 일들이 조선에 결핵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을 위해 결핵요양소를 세우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비록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일이었지만, 다음에 있을 선교회 연례회의에서 버버그 여사의 유산에 대한 승인 신청서를 내 볼 계획을 세웠다. 계획서를 내기 위해서는 먼저 조선의 선교부와 모국에 있는 선교위원회에서 사업 허가를 받아야 했다.
‘해주구세병원’이 좋은 소문이 나면서 병원은 기초가 단단히 잡혔고 남학교도 잘 운영되었다. 선교에 대한 인식이 좋아졌고 선교사들을 용납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927년 6월, 선교부 연례회의가 서울에서 있었다. 이 기회에 웰치 감독께 아들 월리엄 제임스의 세례를 부탁했다. 서울 제일감리교회에서 세례가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는데 갑자기 하얀 도포를 입은 조선 사람이 벌떡 일어났다. 주위에서 “앉으시오. 앉으시오!” 하고 소리쳤으나 그는 못 들은 척 자리에 서서 말하기 시작했다.
“죄송하오나 나는 말을 좀 해야겠소! 지금 세례를 받고 있는 저 백인 아기는 초대선교사 하락(닥터 월리엄 제임스 홀의 중국 발음으로 표기한 조선 이름)의 손자요! 우리 마을과 우리 가족을 광명의 세계로 인도해 주신 분이 바로 하락 선생이었소! 뒤늦게나마 하락 선생 손자의 출생을 축하하오!”
주위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세례식이 끝나고 많은 사람들이 다가 와 아기 월리엄을 축복해 주었다. 34세의 짧은 생을 살았지만 조선에서 선교사업에 일생을 바친 아버지 닥터 홀이 아들의 갈 길을 열어주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연례회의는 웰치 감독의 능숙한 사회로 진행되었다. 해주 결핵 요양원설립 신청에 대한 보고를 하자 많은 선교사들이 자금 문제로 반대하였다. 영변과 원주병원이 자금과 인력이 모자라 모두 문을 닫고 해주병원만 유일한데 이 상황에서 어떻게 새 사업을 시작하겠느냐는 의견이었다. 셔우드의 뜻을 존중하는 웰치 감독은 재치 있게 다음과 같은 토론 의제를 내놓았다.
“셔우드 선교사가 해주병원장 일을 계속하며 여가를 이용해 결핵요양소 건립을 추진하도록 하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선교부에서 예산을 받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하여 연례회에서 허락되었다. 지금까지 버버그 여사의 유산에 관한 집행을 만족시킬 만한 사람이 없었는데 결핵요양소는 특별하므로 계획서를 작성할 때 조선의 결핵환자 수와 전염상태, 현재 환자들의 상황을 자세히 적어 제출해서 유산관리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게 하라고 웰치 감독이 조언해 주었다.
그날 밤 셔우드는 밤을 새워 계획서를 작성하며 유산 관리자의 마음이 움직일 수 있는 서류를 만들어 보냈다. 그리고 새벽마다 매리언과 간절히 기도했다.
몇 주일이 지난 후 전보 한 통이 해주구세병원으로 도착했다. 버버그 후원회에서 온 전보였다. 봉투를 뜯는 손이 떨렸고 매리언도 초조하게 셔우드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당신이 제출한 서류가 승인되었음. 선교자금 활용이 가능함.”
셔우드와 매리언은 부등켜 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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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행복한학교으뜸교육 원문보기 글쓴이: 백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