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3월 26일,
요동반도의 끝에 있는 여순(旅順, 지금의 대련)에는 봄비가 내렸다.
하늘도 슬펐던가 보다.
여순 감옥,
안 의사는 아침 일찍 일어나 자리를 정돈하고 명상에 잠겼다.
세상과 이별을 해야 할 날이다.
할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날이 1909년 10월 26일이었으니, 이토를 죽인지 152일째 되는 날이었다.
형 집행 시간은 오전 10시.
안 의사는 고향의 어머니가 눈물로 지어 보낸 옷을 입고 간수 4명의 호위를 받으며 형장으로 향했다.
조선 명주로 만든 흰 저고리에 검정색 비단 바지, 그리고 흰 두루마기였다.
교도소장이 '유언은?' 했다.
안 의사는 “유언할 말은 없으나 단지 내 거사는 동양 평화를 위한 것이므로 내가 죽은 후 한·일 양국이 일치단결하여 동양 평화를 꾀하기 바란다.” 고 평소의 소신을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간수가 종이 두 장을 접어 안 의사의 눈을 가리고 그 위에 다시 흰 베를 둘렀다.
천주교 신자였던 안 의사는 묵도를 올린 후, 간수의 부축으로 교수대에 올랐다.
잠시 후,
숨이 끊어졌다.
피 끓는 32세, 부인과 세 자녀를 놔두고 안 의사는 그렇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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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의사를 죽음으로까지 이끈 “단지 동맹(斷指 同盟)”의 흔적을 찾아 우리는 너덜거리는 차를 타고 크라스키노를 가고 있다.
자루비노에서 크라스키노로 가는 길에서 본 들녘 풍경
크라스키노(Kraskino)는 1867년 러시아군의 요새로 건설되어 노보키예프스키(Novokievskii)라 불렀다. 그러던 이름이 1938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4명의 병사들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한 크라스킨 중위를 기념하여 크라스키노로 이름을 바꾸었다.
우리나라로 보면, 면 소재지 정도 되는 이 마을에서 서쪽으로 10㎞정도 떨어진 곳에 추카노보(Tsukanovo) 마을이 있다. 지금은 우리 민족이 살고 있지 않으나 이곳을 처음 개척한 사람들은 우리 농민이었다.
지배층의 수탈과 장기간의 흉년으로 먹고 살 것이 없어 만주로 연해주로 이주해야 했던 농민들은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로 들어와 ‘지신허’마을을 처음으로 만들었다. 1864년의 일이라고 한다. 그 후 많은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왔고 지신허가 포화상태가 되면서 약 14㎞ 떨어진 연추강가에 또 다른 마을을 열었다.
마을 이름을 연추(延秋)라 했다. 탐험대만(북한과 국경을 이루는 러시아 국경지대의 만 이름)으로 흘러들어가는 강인 연추하(延秋河)에서 따왔다. 러시아 말로는 ‘얀치헤(Ianchikhe)'라 했다. ’연추하‘의 중국식 발음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지금의 마을 이름인 추카노보는 1972년에 소련 정부가 극동지방에 널려있는 중국식 지명을 자기들 식대로 바꾸면서 새로 지은 것이다.
연추마을은 윗동네(연추 상리), 중간동네(연추 중리), 아랫동네(연추 하리)가 있었는데, 연추 하리가 중심이었다.
안중근은 1909년 3월 이곳에서 11명의 동지들과 함께 비밀리에 단지회(斷指會)를 조직하여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고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다지며 왼손 무명지를 잘랐다.
“오늘날 우리 한국 인종이 국가가 위급하고 생민(生民)이 멸망할 지경에 당하여 어찌 하였으면 좋은 방법을 모르고 혹 왈 좋은 때가 되면 일이 없다 하고, 혹 왈 외국이 도와주면 된다 하나 이 말은 다 쓸데없는 말이니 이러한 사람은 다만 놀기를 좋아하고 남에게 의뢰하기만 즐겨하는 까닭이라. 우리 이천만 동포가 일심단체하여 생사를 불고한 연후에야 국권을 회복하고 생명을 보전할지라.
그러나 우리 동포는 다만 말로만 애국이니 일심단체이니 하고 실지로 뜨거운 마음과 간절한 단체가 없으므로 특별히 한 회를 조직하니, 그 이름은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라. 우리 일반 회우가 손가락 하나씩 끊음은 비록 조그마한 일이나 첫째는 국가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빙거(憑據)요. 둘째는 일심단체하는 표라. 오늘날 우리가 더운 피로써 청천백일지하에 맹세하오니 자금위시(自今爲始)하여 아무쪼록 이전 허물을 고치고 일심단체하여 마음을 변치 말고 목적에 도달한 후에 태평동락을 만만세로 누리옵시다.”
단지된 안중근 의사의 왼손
안중근을 맹주로 김기룡, 강순기, 정원주, 박봉석, 유치홍, 김백춘, 백규삼, 황병길, 조응순, 김천화, 강창두가 함께 했다. 동지들의 선혈을 모아 안 의사는 태극기 주변에 “대한독립” 네 글자를 혈서했다.
안의사가 단지동맹 12인의 선혈을 모아 혈서한 태극기와 단지된 손 모습
그 후 안중근은 우리 민족의 원흉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할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동지들과 상의하여 그를 죽이기로 작정하고 할빈에 가서 할빈역 거사를 단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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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동맹비 앞면
안중근과 11명의 동지들이 조국 독립을 기원하며 단지한 것을 기념하여 2001년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크라스키노시를 관통하여 서쪽으로 빠지는 다리인 쥬카노브카 다리 밑에 단지 동맹비를 세웠다.
이 다리의 끝 부분 좌측 아래쪽이 동맹비가 처음 세워졌던 곳이다.
기왕 세울 비라면 단지동맹을 결의한 연추 하리에 세웠음이 더 좋았을 터인데, 구태여 이곳에 세운 이유는 아무래도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을 선정하다보니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단지동맹비는 이곳에도 없다.
비의 앞면은 한글로, 뒷면은 러시아어로 되어 있는데, 의도성을 가진 사람들에 의하여 비문의 일부가 판독이 불가능할 정도로 훼손되어 결국 좀 더 관리가 가능한 곳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군데 군데 뭉개 진 흔적이 보이는 단지동맹비 후면
누구의 소행인지 알 수 없으나 ‘한국(Koreya)'이라는 단어가 대부분 뭉개져 있는 걸로 보아 아이들의 단순한 소행이 아님은 분명하다.
결국 이 지역에 대규모 농장을 가지고 있는 '남양 알로에'에서 농장 앞쪽에 터를 닦아 비를 옮겨 놓았다.
다리 위를 느리게 걷는 소들을 차가 조심스럽게 피해서 남양 알로에 농장을 찾아 간다.
쥬카노브카 다리에서 약 2㎞를 전진하여 오른쪽 방향으로 틀어 조금 달리니 태극기가 선명한 농장 건물이 보인다.
남양 알로에 농장 정문 앞에 러시아 기와 함께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가슴이 져며 온다.
한국에서는 쳐다보지도 않던 태극기가 이곳에서는 유독 눈에 선연하게 들어온다.
타국에서는 매국노도 애국자가 된다더니, 정말 그런가 보다.
농장 위를 흐르는 구름이 마음을 선하게 만들었다.
차에서 내려 단지동맹비를 살핀다.
안 의사와 11동지들의 흔적이 이렇게나마 살아있음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