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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학교 영덕연수원 |
간도는 만주의 길림성(吉林省) 동남부지역으로, 중국에서는 이 지역을 연길도(延吉道)라고 한다.
간도라는 지명은 병자호란 뒤에 청나라 측이 이 지역을 봉금지역(封禁地域 :
이주 금지의 무인공간지대)으로 정하고 청국인이나 조선인 모두의 입주를
불허하는 공간 지대로 삼은 뒤,
청나라와 조선 사이에 놓인 섬[島]과 같은 땅이라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우리 농민들이 이 지역을 새로 개간한 땅이라는 뜻에서
‘간도(墾島)’라고 적었으며, 또 조선의 정북(正北)과 정동(正東) 사이에 위치한
방향인 간방(艮方)에 있는 땅이라 하여
‘간도(艮島)’라고도 적었다.
간도는 서간도와 동간도로 구분된다. 서간도는 압록강과 송화강(松花江)의 상류 지방인 장백산 일대(長白山一帶)를 가리키며, 동간도는 북간도라고도 하며 혼춘(琿春)·왕청(汪淸)·연길(延吉)·화룡(和龍)의 네 현(縣)으로 나누어져 있는 두만강 북부의 만주 땅을 말하는데, 보통 간도라고 하면
동간도를 말한다.
즉, 간도는 노야령 산맥(老爺嶺山脈)과 흑산령 산맥(黑山嶺山脈) 사이의 일대 분지와 혼동강(混同江)과 목단령 산맥(牧丹嶺山脈) 사이의 분지를 아우르는 지명이다.
지역의 기후는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로 10월 중순부터 5월 초순에 걸쳐 강설과 결빙이 계속된다. 주민은 주로 농업과 목축업에 종사하는 한편, 임업이 성하며 연길시(延吉市)에서는 혼춘재(琿春材)·
간도재(間島材)로 불리는 목재를 산출한다.
연길 분지는 한민족이 최초로 벼를 이식한 곳으로 수도작(水稻作)이 행해지며, 그밖에 콩·수수·옥수수·보리 등도 재배된다. 광물 자원으로는 석탄·유모혈암(油母頁岩)·구리·납 등의 매장이 풍부하다. 용정(龍井)에는 제강, 노두구(老頭溝)·화룡에는 탄광, 천보산(天寶山)에는 구리·납 등이 산출된다.
- 역사 -
간도는 원래 읍루와 옥저의 땅이었다가 고구려가 이 지방으로 뻗어나면서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고, 고구려가 망한 뒤에는 발해의 영토가 되었다.
그 뒤 고려시대로부터 조선 전기에 걸쳐 여진족이 각지에 흩어져 살았다.
그들은 ‘번호(藩胡)’라는 이름으로 조선 왕국에 조공을 바쳐 왔고,
조선에서는 그들이 생활 물자를 교역할 수 있도록 북관개시(北關開市)의 기회를 열어 주었다.
간도는 두만강과 북동쪽 해란하(海蘭河)로부터 혼춘하(琿春河)에 이르는
여러 지류의 연안을 중심으로 한 분지와 구릉으로서,
산지가 발달해 땅이 기름지고 산림이 무성해 각종 자원도 풍부한 지방이었다.
그러나 여진족은 농경보다 유목·수렵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이 비옥한 지역이
오랫동안 개척되지 못하였고, 간도를 개척해 농경지로 만든 것은 우리 나라 사람이었다.
간도에 우리 나라 사람이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철종 말에서 고종 초부터였다.
세도정치의 학정과 수탈에 못 견딘 농민들이 관권이 미치지 않는 두만강 너머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생겼고,
1869년을 전후한 함경도 지방의 대흉년으로 기민(飢民)들이 압록강·두만강을 넘어
간도 지방에 들어가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 뒤 1910년을 전후해 일제 침략의 손길에서 벗어나고자 또는 항일 운동의 새로운 기지를 구해
간도로 이주하는 사람이 대폭 늘어났다.
1910년 9월부터 1911년 12월까지 간도로 이주한 우리 나라 사람은 2만 5,193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 뒤 일제가 이른바 토지조사사업을 강행함에 따라 농토를 탈취 당한 농민들의 간도 이주가 계속되어, 1926년에는 간도 지방의 우리 나라 사람의 호수는 중국인이 9,912호인데 비해 5만 2,881호였다. 농토는 전체의 52%를 소유했고, 화룡과 연길 지방에서는 평균 72%가
우리 나라 사람의 소유 농지였다 한다.
이와 같이 농민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한 이유는 반제국·반봉건투쟁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간도 지역에서는 이들의 인적·물적 자원의 공급에 의해
항일 투쟁이 활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간도 지역에서의 항일 투쟁도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제가 간도 지역에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을 수립하자 일시 중단되었다.
간도 지역은 1945년 8월 18일 중공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그리고 1952년 8월 29일부터 9월 3일까지 연변의 여러 민족 각 계층 제1기 인민대표회의에서 연변조선민족자치구 임시정부가 성립되었다. 이때 이 정부에서는 연길시와 연길·혼춘·화룡·왕청·안도(安圖) 등의 5개 현을 관할하였다.
1955년 12월에 개최된 자치구 제1기 인민대표대회 제2차 회의에서는 연변조선민족자치구를 연변조선족자치주로 변경하였다. 1956년 12월 8일에는 중국 길림성위원회의 결정에 근거해 연변 지위를 중국연변조선족자치주위원회로 변경하였다.
1966년에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1967년 1월부터 자치주의 당과 정부 기관 등은 마비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해 3월과 4월 사이에 연변 자치주의 당과 정부 기관에 대해 군사 관제가 실시되었다.
1968년 8월 18일에는 길림성 혁명 위원회의 비준을 거쳐 연변조선족자치주혁명위원회가 성립되어 연길·도문(圖們)의 2개 시와 연길·혼춘·화룡·왕청·안도·돈화(敦化) 등 6개 현을 관할하였다. 1970년 4월 27일에는 중국공산당 연변조선족자치주혁명위원회 핵심 소조가 성립되었다.
1971년 3월에는 제3차 자치주당대표대회가 소집되었으며, 중국공산당 연변조선족자치주위원회가 회복되었다. 1980년 2월 연변조선족자치주혁명위원회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인민정부로 바뀌었다.
- 귀속문제 -
[배 경]
청나라 태조는 장백산을 여진족의 발상지로 여겨 장백산 일대를 그들의 성역(聖域)으로 삼았다. 청나라 태종은 병자호란 뒤에 백두산과 북쪽 간도 일대를 봉금지역으로 선포하고, 장책(長柵)의 변장(邊墻)을 설치해 동북 지역으로의 입주를 엄금하였다.
그 뒤 청나라 성조는 봉금지역의 남방 한계를 명백히 하기 위해 조선과의 국경선 획정을 위한 교섭을 전개해 마침내 백두산정계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즉, 1712년(숙종 38)에 청나라의 요청에 의해 그들의 대표인 오랄총관(烏喇摠官) 목극등(穆克登)과 우리측 대표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과 이선부(李善溥)가 양국 경계의 공동 조사를 위해 혜산진에서 회동하였다.
목극등의 제안으로 백두산 일대를 실지 답사해 국경을 작정하기로 하고, 목극등 일행과 조선측 군관(軍官) 이의복(李義復)·조태상(趙台相) 일행이 백두산에 올라 현지 조사 끝에 이른바 백두산정계비(중국측 지도에는 穆碑로 표시)를 건립하였다.
비문에는 서로는 압록강, 동으로는 토문강(土門江)의 분수령에 세운 것으로 명기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 뒷날 간도 귀속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었다. 목극등이 합의한 토문강이 실상 두만강의 상류가 아니라 만주 내륙의 송화강 상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계비는 두만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간도 지방은 곧 토문강과 송화강의 동쪽 지역으로, 이미 우리 영토로 확정해 놓았던 것이다.
목극등의 주장에 의해 비석을 세우게 되었을 때 우리 역관(譯官)이 백두산 도면 한장을 요청하자, 그는 서슴없이 “대국산천(大國山川)은 다 줄 수 없지만, 백두산은 너희 나라이니 어찌 주기가 어렵겠느냐” 하고 건네주었으니, 백두산이 조선의 것임을 인정한 언동이 아닐 수 없다.
정계비가 건립된 뒤 160여 년간은 간도 귀속 문제가 논의된 바 없이 지내 왔으나, 19세기 중엽에 들어 청나라의 봉금과 조선의 월경 금지가 소홀해지고 함경도민들의 두만강 월경 농사가 시작되면서 문제가 야기되었다.
월경 농경을 하는 조선 농민은 주거를 두만강 이남 함경도에 두고 두만강을 넘어 내왕하면서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농촌 경제의 악화와 지방관의 탐학이 날로 심해지면서 아예 두만강 너머로 주거를 옮기게 되었고, 조선 관료의 권한이 미치지 않는 간도 깊숙이 들어가서 생활 터전을 마련한 것이다.
특히, 1869년과 1870년 함경도에 큰 흉년이 들면서 많은 사람들이 간도로 옮겨갔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들의 쇄환(刷還)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생활 근거를 잡은 주민들이 이에 응하지 않았고,
오히려 간도 이주민은 날로 늘어갔다.
1881년부터 청나라가 봉금을 해제하고 청국인의 간도 이주와 개간·농경을 장려하는 정책을 취하게 되자, 먼저 이주한 우리 농민과 새로 입주하게 되는 청나라 사람들의 문제로
간도의 정치적 영유권의 문제가 발생되었다.
[발 단]
1881년 10월 청나라 길림장군(吉林將軍) 명안(銘安)은 간도 지방을 개간하고자 이 지방을 답사하였다. 그는 이미 우리 동포들이 많은 농토를 개간하고 있음을 보고 본국 정부에 이 사실을 보고하는 한편, 각 현에 개황서(開荒署)를 설치하게 하였다.
이러한 보고를 받은 청나라 정부는 1882년 초에 우리 정부에 대해 월경사간(越境私墾)을 엄금하도록 요구해 왔다. 그러나 길림장군 명안과 독판영고탑등처사(督辦寧古塔等處事) 오대징(吳大徵) 등 만주 지역의 청나라 관리들은 기왕 이주한 조선인들의 입주를 기정 사실화 하되, 조세의 징수, 호적의 정리, 그리고 범죄자를 청나라가 직접 다스릴 것임을 통보해 왔다.
그런데 1883년 4월 길림혼춘초간국사무(吉林琿春招墾國事務) 진영(秦瑛)은 9월 수확 후, 태도를 급히 바꿔 간도의 우리 농민을 모두 쇄환하도록 요구해 왔다. 이유는 1882년 임오군란에 개입해 군대를 서울에 주둔시키고 조선 정부에 대한 정치적 압력을 강화하게 된 데 따른 것이었다.
청나라의 현지 관료들의 태도가 이처럼 경화되자 당황함을 금할 수 없었던 간도의 우리 나라 사람들은 토문강과 두만강이 다름을 그들에게 해명하는 한편, 백두산에 가서 정계비 부근과 토문강 원류 일대를 실지 답사하고, 그 자료를 가지고 종성 부사(鐘城府使) 이정래(李正來)에게 백두산 정계의 사실을 밝히며 대책을 호소해 왔다.
이러한 소식이 때마침 경원부(慶源府)를 순시 중이던 서북경략사 어윤중(魚允中)에게 알려졌다. 어윤중은 보다 신중을 기하고자 종성 사람 김우식(金禹軾)을 두 차례나 백두산에 파견해 현지를 재 답사시키고 정계비의 탁본을 떠오도록 조처하였다.
어윤중은 이보다 앞서 1882년 10월 청나라와 통상 장정(通商章程)의 타결과 서북 각읍의 암행 및 서북 국경의 답사, 감계(勘界)의 사명을 받고 서북경략사로 두만강 유역 열읍(列邑)을 순시 중에 있었다.
어윤중은 김우식의 답사 결과를 토대로 하여 여러 가지 자료를 제시하면서 토문강은 송화강상류로 간도 지방은 우리 영토임을 주장했고, 백두산정계비와 토문강 발원지에 대한 공동 조사에 의해 국경을 획정할 것을 청나라의 현지 관료에게 제기하였다.
한편, 어윤중의 보고와 건의에 따라 우리 정부도 청나라 정부에 같은 일을 자문하였으나 청나라 측의 무성의한 태도로 시일만 지연되었다. 1885년 4월에 청나라의 혼춘 당국이 함경도안무사 조병직(趙秉稷)에게 월경 조선 경작자들을 무력으로 축출할 것임을 통고하고 일부 지방에서 주민을 강제로 추방하였다.
이에 우리 정부는 청나라에 대해 토문감계(土門勘界)를 다시금 요청했다. 이 요청에 청나라가 응하게 되니, 이제 간도 문제는 현지 관료들의 행정적 문제에서 정치적 문제로 발전되어 간도 귀속 문제는 양국간의 새로운 외교 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을유·정해감계회담]
간도 문제 해결을 위한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회담인 제1차 을유감계회담은 우리 정부의 제안에 청나라가 응해 온 것으로, 1885년 11월 함경도 회령에서 회동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보다 앞서 7월 우리 정부는 안변부사(安邊府使) 이중하(李重夏)를 토문감계사(土門勘界使)로 임명하였고, 1월에 청나라 측 대표인 변무교섭승판처사무(邊務交涉承辦處事務) 덕옥(德玉), 호리초간변황사무(護理招墾邊荒事務) 가원계(賈元桂), 독리상무위(督理商務委) 진영과 회동하게 하였다.
이때 이중하는 정계비를 먼저 사감(査勘)하고 강의 발원을 조사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청나라는 강원(江源)을 먼저 조사해야 하며 정계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청나라가 두만강 상류를 도문강(圖們江)으로 보고 정계비의 토문강이 곧 도문강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자기들 주장대로 우리측을 승복시키기 위한 강변이었다.
회령 제2차 회합에서는 강원을 조사하기로 합의하고 백두산으로 현지 답사를 실시, 강원 지역과 정계비를 답사하고 무산에 내려와 의견 조정을 꾀하였다.
그러나 정계비의 표지가 송화강 상류인 토문강임을 확인하고서도 양국의 경계가 원래 도문강이고, 또한 본국 정부로부터 도문강의 사감만을 지시 받았다는 청나라 측의 강변과 비문의 토문은 문자대로 토문강이니 간도는 우리의 것일 수밖에 없다는 우리측 주장이 맞서 끝내 타결되지 못하고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청나라는 서울 주재의 위안스카이(袁世凱)를 앞세워 토문감계문제에 정치적 압력을 가해 왔다. 조선이 토문강과 두만강을 별개의 강이라고 내세워 영토 확장의 야심을 드러냈다고 강변하며 다시금 감계할 것을 요구해 왔다. 이에 우리 정부에서는 이중하를 다시금 토문감계사로 기용해 현지로 출발하게 하였다.
토문감계의 제2차 토문현지회담인 정해감계회담은 1887년 4월에 회령에서 시작되었다. 청나라측 대표인 독리길림조선회 판변방영무처(督理吉林朝鮮會辦邊防營務處) 진영, 혼춘승판처 덕옥, 총리혼춘흑정자등처둔간변방영무처(總理琿春黑頂子等處屯墾邊防營務處) 방랑(方郎) 등과 회담한 이중하는 도문과 두만이 같은 강임에는 동의하였으나, 토문과 두만은 별개의 것임을 내세워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현지 답사에 나선 청나라는 홍단수(紅丹水)를 가지고 국경으로 할 것을 강요하며 군대로 위협을 가하였으나, 이중하는 “내 머리는 잘라 갈 수 있을 것이나 우리 국토를 잘라갈 수는 없을 것”이라고 단호히 그 요구를 거부하였다. 쌍방간의 대립은 매우 심각해 국경선 전체를 획정 지을 수가 없었다.
홍토수(紅土水)와 석을수(石乙水)가 합류하는 지점 이하로 경계를 가결정하려는 노력을 폈으나, 결국 회담은 아무런 합의를 보지 못한 채 결렬되고 말았다. 1888년 정초에 청나라 측이 다시금 감계 재개를 제의해 오자 조선 정부는 이중하를 제3차 감계사로 임명하였다.
이중하는 현지답사 때의 청나라측 협박에 의한 협상의 전례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양국 정부의 사전 조정이 필요하다고 믿고 본국 정부로 하여금 홍단수를 경계로 하자는 제의를 공사 위안스카이에게 타진하게 하였다.
이에 청나라 측이 현지 회담보다도 앞으로는 양국 정부의 직접 교섭에 의한 문제 해결을 바라게 되어 토문감계의 교섭은 자연 중단되었다.
[대한제국의 적극 대책]
청일전쟁 후 독립협회의 자주적 근대국가 건설 운동이 활발해지고, 1897년에는 대한제국의 발족을 보았다. 이러한 일련의 자주 국가에로의 움직임에 따라 청나라와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게 되었고, 간도 문제에 있어서도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1897년 간도 문제 해결을 위한 보다 구체적인 현황 파악을 위해 함경북도 관찰사 조존우(趙存禹)에게 백두산정계비와 그 일대의 분수령의 강수(江水)에 관해 조사, 보고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조존우는 현지 지세를 답사해 도본(圖本)과 대요 설명서인 담판오조(談判五條)를 제출하였다.
이듬해 1898년에도 함경북도 관찰사 이종관(李鍾觀)에게 재차 현지 조사를 시달하였다. 이종관은 경원 군수 박일헌(朴逸憲)과 관찰 부사 김응룡(金應龍)을 파견해 철저하게 현지를 답사, 보고하게 하였다.
두 차례의 상세한 현지답사를 통해 우리 정부는 토문강 상류로부터 하류를 거쳐 바다에 들어가는 강줄기의 동쪽에 위치한 땅인 간도와 더 나아가 청나라가 1860년 러시아 제국에 할양한 연해주(沿海州) 땅까지 우리의 국토임을 확신하였다.
이런 확신을 토대로 1901년 회령에 변계경무서(邊界警務署)를 설치해 간도에 대한 행정권을 펴기 위한 태세를 갖추었고, 1902년에 이범윤(李範允)을 간도시찰원에 임명해 간도의 실태를 조사하게 하였다.
이범윤의 적극 대책의 건의를 받아 의정부 참정 김규홍(金奎弘)의 “간도주민보호관의 파견이 필요하다.”라는 건의가 있자, 정부는 이범윤을 북변간도관리사(北邊間島管理使)로 임명해 간도 주민에 대한 직접적인 관할권을 행사하도록 조처하였다.
이범윤은 간도 주민을 보호함에는 무력으로 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본국의 군대가 출동하면 국제분쟁이 야기될 염려가 있다고 보고, 사병(私兵)을 모아 병영(兵營)을 이루어 실력으로 간도의 우리 주민들을 보호하기에 힘썼다.
이로 말미암아 청나라 측과 자주 충돌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청나라가 우리 정부에 대해 이범윤을 소환할 것을 거듭 요구해 오므로, 조선 정부는 분쟁의 확대를 꺼려 1904년에 이범윤을 소환하였다.
그러면서 양국 관계 관들이 국경 문제의 정식 해결에 앞서 잠정적인 선을 정하기로 하여, 선후장정(善後章程)이라는 잠정적 문서로 합의하였다.
내용은 두 나라의 경계는 백두산정계비에 증빙될 만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양국 대표의 감계를 기다려야 하고, 그 이전에는 예대로 도문강을 격해 각자의 영지로 삼고 불법 월경해 경작하지 않는다는 약정이었다.
이는 어디까지나 분쟁 야기를 피하기 위한 임시 조처요, 양국 감계에 의한 국경 획정까지의 잠정 협정이었다. 이해에 러일전쟁이 일어나 한반도와 만주가 전쟁에 휩싸이게 되자 주청일본공사(駐淸日本公使)가 청나라에 대해 전쟁 기간에 감계문제를 들고 나와 조선과 분쟁을 야기함이 좋지 않으니, 감계교섭의 재개 중지를 종용하였으므로, 양국이 이 종용에 따름으로써 감계 문제는 중단되었다.
[통감부 간도 출장소와 간도협약의 모순]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조선 문제로부터 러시아를 밀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제국주의 국가의 세계 분할 정책을 이용해 영국과 미국에게 일본의 한반도에서의 정치적 우월권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무력을 배경으로 을사조약을 강요하고, 대한제국에 통감부를 설치해 이른바 보호 정치를 실시하게 되었다.
대한제국으로부터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은 청나라와의 간도 문제 처리를 위해 그들의 무력을 배경으로 간도의 실질적 확보를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1906년에 참정 대신 박제순(朴齊純)이 통감부에 간도 거주 우리 나라 사람을 보호해 주도록 요청하자, 통감부는 1907년 간도에 조선 통감부 간도 파출소를 설치하였다.
간도 출장소의 설치는 일본 정부가 간도 문제에 있어 종래 조선 정부가 취해 온 입장을 시인한 뒤의 조처였다. 물론, 그것은 일본 나름대로 대륙 침략의 세밀한 계산에서 나온 조처였으나, 어쨌든 간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승인하고 난 뒤의 행정 조처였다.
간도 파출소가 편찬한 <한청국경문제의 연혁>이라는 문서를 통해 일본은 토문강은 송화강상류로서 두만강과 관계가 없으며, 두만강이 결코 천연의 국경선일 수 없다고 여러 조항에 걸쳐 논증하고 있다.
또한, 간도 출장소에 소장으로 취임한 일본 육군 중좌 사이토(齋藤季次郎)는 “간도는 한국 영토라 간주하고 행동할 것임”을 성명했다. 조선 통감부는 1909년에 청나라의 변무독판(邊務督辦) 오녹정(吳綠貞)에게 간도는 한국 영토의 일부임을 통첩하고, 간도 거주 한국인은 청나라 정부에 대한 납세의 의무가 없음을 성명하였다.
비록, 일본이 간도의 우리 나라 영유를 인정하였다 하더라도 목적은 서로 달랐다. 즉, 그들은 그들의 지배권이 미치는 땅을 보다 넓게 확보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고, 한반도를 거점으로 만주에 세력을 침투시키는 첫 단계로 대륙 침략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간도가 분명히 우리의 영토라고 조선 통감부가 성명하였고, 청나라에 통첩한 일제가 1909년 9월 7일 돌연 청나라와 간도 협약을 체결하였다. 이 협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두만강을 양국의 국경으로 하고, 상류는 정계비를 지점으로 하여 석을수로 국경을 삼는다.
둘째, 용정촌·국자가(局子街)·두도구(頭道溝)·면초구(面草溝) 등 네 곳에 영사관이나 영사관 분관을 설치한다.
셋째, 청나라는 간도 지방에 한민족의 거주를 승준(承准)한다.
넷째, 간도 지방에 거주하는 한민족은 청나라의 법권(法權) 관할 하에 두며, 납세와 행정상 처분도 청국인과 같이 취급한다.
다섯째, 간도 거주 한국인의 재산은 청국인과 같이 보호되며, 선정된 장소를 통해 두만강을 출입할 수 있다.
여섯째, 일본은 길회선(吉會線 : 延吉에서 會寧間 철도)의 부설권을 가진다.
일곱째, 가급적 속히 통감부 간도 파출소와 관계 관원을 철수하고 영사관을 설치한다.
간도 협약에 의해 일제는 안봉철도(安奉鐵道)의 개설 문제, 무순(撫順)·연대(煙臺)의 탄광 문제, 영구지선(營口支線)의 철수 문제, 관외철도(關外鐵道)의 법고문(法庫門) 연장 문제 등 만주에서의 몇 가지를 교환하는 조건으로 중국에 간도를 할양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일제의 침략 야심에서 본다면 만주 지배를 위해 군사력을 만주 깊숙이 진주시켜, 마침내 만주를 무력 점령하였을 때, 간도 지방도 다시 지배하에 넣을 수 있다는 계산 아래 취해진 예정된 조처였다.
그러므로 간도 협약은 우리 정부가 간여하지 않은 가운데 취해진 불법적인 우리 영토의 할양이었고, 이 협약은 일본 제국주의의 불법행위를 입증하는 국제 문서인 것이다.
협약에 의해 1881년부터 야기되었던 간도 문제는 28년만에 일제에 의한 불법적 할양으로 중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절차를 가지고 간도 귀속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 독립운동 -
[기지의 건설]
1910년을 전후해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독립전쟁론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독립전쟁론이란 일본인의 침략 근성과 제국주의적 식민지 팽창 정책이 한국을 강점한 데 이어, 중국·러시아·미국 등을 침략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 아래 수립된 대일 항쟁 방법론이다.
그러한 전쟁이 일어날 때 한국인은 대일 독립 전쟁을 감행해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전국민은 무장 세력의 양성과 군비를 갖추면서 독립운동의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는 전제 아래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첫 단계 사업은 집단적으로 민족정신이 투철한 인사들을 해외로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계획안은 신민회에 의해 구체화되었고 그 대상지는 간도였다.
간도를 이주 지역으로 선택한 이유는, 첫째 한반도와 두만강·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있다는 지리적 이점, 둘째 한국인이 다수 거주하고 있다는 점, 셋째 이 지역에는 일본의 권력이 미치고 있지 않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간도 지역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고자 하는 계획은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를 탐지한 일제가 1910년 12월말부터 1911년 1월초에 걸쳐서 약 600명의 민족운동자를 체포, 투옥하였기 때문이다. 이른바 황해도의 안명근(安明根), 신민회의 양기탁(梁起鐸)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 기지 설립 계획은 계속 추진되었다. 아울러 군자금의 모금도 꾸준히 계속되어 독립운동 기지의 건설에 투입되었다. 그 결과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에 독립운동 기지가 건설되었다.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직후 이곳으로 이주한 이상룡(李相龍)·이시영(李始榮)·이회영(李會榮)·이동녕(李東寧) 등은 경학사(耕學社)라는 항일 단체를 조직하였다. 아울러 이곳에 군사교육 기관으로 신흥 강습소를 설치해 서간도 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기지로 발전시켰다.
특히, 신흥강습소는 신흥학교, 나아가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였다. 이 학교는 4년제의 본과 이외에 속성과로서 6개월간의 장교반과 3개월간의 하사관반을 두어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그 결과 3·1운동 때까지 7백∼8백명 안팎의 사관을 양성하였다. 이들이 곧 간도와 시베리아 지역에서 행해진 독립운동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청산리 대첩의 주역들이기도 하였다.
북간도의 독립운동 기지로서는 우선 명동촌(明東村)을 들 수 있다. 이곳에 명동학교(明東學校)를 비롯한 여러 교육기관을 설립해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면서, 청장년의 독립군 편성을 은밀히 추진하였다.
다음으로는 왕청현의 나자구(羅子溝)를 들 수 있다. 1913년에 이 지역에 무관학교가 설립되어 약 1년 동안 독립군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그 밖에 소만 국경 지역인 밀산(密山)에서는 신민회의 이동휘(李東輝)가 깊은 산 속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교포 청년 1,500명을 훈련시켜 독립 전쟁에 대비하였다.
이와 같은 독립운동 기지들은 이 지역의 한인 사회를 기반으로 한 한국 독립운동의 확대, 발전인 것이다. 아울러 독립운동 기지 건설은 3·1운동 이후의 본격적인 대규모 독립 전쟁을 위한 준비 단계로서 그 의미가 있다.
[전 개]
간도 지역에서 독립운동 단체들이 무장 세력을 보유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였을 무렵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 우리 민족은 평화적인 시위를 통해 조국의 광복을 달성하려 했지만, 이것은 제국주의의 기본 속성을 간과한 비현실적인 투쟁 방략이었음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간도 지역을 중심으로 무장투쟁론이 적극 대두되었고, 모든 재만 동포들의 절대적인 지지 하에 각 독립운동 단체들을 중심으로 독립군을 편성하였다.
1919년부터 속속 출현한 독립군 부대들은 현지에 거류 중인 일본인들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부각되었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국내에 침투해 일본군 국경 수비대를 교란시키는 무장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과 1920년 두해 동안 국내로 진입한 독립군의 무장 투쟁의 일례를 살펴보면, 우선 대한독립군은 일본군의 삼엄한 국경 수비에도 불구하고 혜산진을 점령하고 갑산으로 진격하였다. 이어서 강계와 만포진을 점령하였다. 아울러 국민회군과 북로군정서군 등이 국내로 진격해 회령을 점령하는 등 크게 성과를 올렸던 것이다.
이에 한반도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은 이들 독립군 세력을 조기에 제거하고자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1920년 10월에 이른바 ‘간도 출병’을 단행하였다.
그들이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1개 여단(2개 연대) 규모의 정규군을 두만강 대안(對岸)의 간도 지역에 투입하였다. 아울러 시베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의 일부와 북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의 일부를 동원해 간도 지역의 독립군을 토벌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간도 지역인 길림성과 연길도 일원에서 일본군과 독립군 사이의 접전이 벌어졌다. 대표적인 것이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이다. 봉오동전투는 독립군의 국내 침공 작전에 시달린 일본군이 독립군의 근거지를 공격하다가 실패한 전투이다.
홍범도(洪範圖)·최진동(崔振東) 등이 지휘하는 독립군이 일본군 1개 대대 병력을 봉오동으로 유인, 급습함으로써 적 157명을 사살하고 300여 명의 부상자를 내었다.
청산리대첩은 김좌진(金佐鎭) 등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와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에 의해 이루어졌다.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10여 회 교전 끝에 적의 연대장을 포함한 1,200여 명을 사살하였으며, 독립군 측도 60명의 전사자를 내었다.
두 전쟁은 3·1운동 후에 행해진 독립 전쟁 가운데 대규모의 전쟁이었으며, 독립군이 크게 승리한 것이었다. 이 승리는 간도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재만 한인은 물론, 한민족 전체에게 독립 전쟁을 통해 일제를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아울러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승리가 재만 동포들의 절대적인 인적·물적 자원의 지원 아래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청산리와 봉오동독립전쟁에서 크게 패한 일제는 군대를 대거 간도 지역에 출동시켜 독립군을 섬멸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미 병력과 무장면에서 열세였던 재만 독립군의 주력부대가 소만 국경 지대인 밀산으로 이동한 뒤였다.
이에 분격한 일본군은 화룡현과 연길현 등지에 재만 한인들이 살고 있는 마을들을 습격, 방화하고 죄 없는 양민들을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마구 살상하였다.
한편, 밀산 지역으로 이동한 재만 독립군은 일단 진영을 재편성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 군단 병력은 약 3천 5백명 정도였다. 총재는 서일(徐一), 부총재는 홍범도·김좌진·조성환(曺成煥), 사령관은 이장녕(李章寧)이 각각 담당하였다.
밀산에서 겨울을 지낸 대한독립군단은 1921년 3월 다시 이동을 시작해 소련령 연해주와 흑룡주일대(黑龍州一帶)에서 활동 중이던 문창범(文昌範)과 한창해(韓滄海) 등의 도움을 받아 소만 국경의 하천인 우수리 강을 넘어 이만(Iman)에 도착하였다.
이만은 소만 국경에 연한 소련령의 도시로서, 당시 하바로프스크 이북의 흑룡주를 장악하고 있던 적군(赤軍)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스파스크(Spassk)에 이르기까지의 연해주 일대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백군(白軍) 및 일본군 세력과의 완충 지대에 들어 있었다.
3월 하순까지 일단 이만에 집결한 간도 독립군들은 무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여망에 따라서 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921년 4월 중순에 대한독립단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대한독립단은 당시 흑룡주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공산 세력으로부터 항일 공동전선을 형성하자는 제의를 받아 독립군들이 이만을 떠나게 됨으로써 해체되고 말았다. 그 결과 김좌진·이범석(李範奭) 등 북로군정서계열은 이만에서 다시 동만주의 밀산으로 되돌아갔다.
한편, 홍범도·최진동·지청천(池靑天)·안무(安武) 등 대한독립군·군무도독부·서로군정서계열은 그 제의를 받아들여 자유시라고 불리고 있던 알렉세브스크(Alekseevsk)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이 독립군들은 자유시 참변을 겪게 되었다. 이것은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던 한국인들로 구성된 부대와 간도지역에서 이동한 독립군이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와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으로 갈라져서 벌인 군권쟁탈전의 소산이었다.
이를 계기로 재만 독립군의 주력부대가 속한 대한의용군은 러시아 적군 제29연대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였다. 이에 독립군은 1922년말경부터 다시 간도 지역으로 복귀해 효과적인 대일 항쟁을 위해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단체의 정비]
1920년말을 전후해 간도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주요 독립군 부대들이 소련으로 이동한 뒤에도, 간도 지역에는 상당수의 독립군들이 잔류해 비록 위축된 상황에서나마 항일 투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서간도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단체로는 대한독립단·광복단·광복군총영·혈성단·백산무사단 등이 있다. 이들은 조직적인 독립 투쟁을 위해 1921년 1월부터 각 단체간에 통합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한 노력은 이듬해에 더욱 활발히 이루어져 새로운 단체를 결성하였다.
1922년 대한독립단의 일부와 광한단·한교회(韓僑會) 등의 단체가 통합에 합의함으로써 대한통군부가 발족하였다. 총장은 채상덕(蔡相悳), 비서장은 고활신(高豁信), 사령관은 김창환(金昌煥)이 각각 담당하였다.
그 해 6월에는 대한통군부를 조직하였던 단체들 사이에 문호를 개방해 조직을 확대, 강화해 나가자는 논의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각 단체들의 통합 운동이 재개되어 많은 단체들이 참가하였다.
그리해 8월 23일에 환인현 남구 마권자(桓仁縣南區馬圈子)에서 8개 단체의 대표 81명이 모여 남만한족통일회를 개최하였다. 그 결과 대한통군부를 대한통의부로 확대, 개편하였다.
그리고 산하에 무장 부대인 의용군을 두었다. 관할구역은 16개의 지방구와 3개의 특별구로서 편성되었으며, 행정·입법·사법기관을 설치해 임시준칙·헌병조례·검찰법규 등의 법률로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대한통의부의 조직이 비대해지자, 신진 소장 세력과 보수 노장 세력 사이에 의견 대립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노장 세력이 별도로 의군부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함에 따라 소장 세력들은 대한통의부를 재정비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33년 12월 민사 계통의 부서를 축소, 조정하고 군사 분야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조직을 개편하였다. 이때 비록 군사 분야는 확대되었으나 전체적으로는 군사부 중심 체제로 축소되었다.
대한통의부가 내부의 의견 대립으로 탈퇴 세력이 생기는 등 분열의 위기에 직면해 진통을 겪는 동안에도 무장 부대인 의용군은 중립을 지키면서 고유 임무에 충실하였다. 특히 1923년에 활발한 국내 진입 작전을 수행하였다.
이 작전은 1,030명의 대원으로 소단위 부대를 편성해 실시하였다. 압록강을 건너 평안북도의 일본 경찰의 주재소·면사무소 등을 습격하거나 친일파의 숙청, 군자금의 모금 활동 등이 주요한 것이었다.
한편, 북간도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서간도와는 달리 조직을 복원하는 과정을 통해 통합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920년에 일본군의 간도 출병으로 큰 타격을 입은 북간도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일본군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일부 지역을 제외한 북간도 일대에서 조직의 재정비와 복원에 주력하였다.
1920년 10월 일본군이 간도 출병을 단행하자 북간도에서 활동하고 있던 대부분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소련령으로 이동해 갔다. 그러나 일부 독립운동 세력은 항일 활동을 중단하고 뒷날을 기다리며 북간도의 오지(奧地)에 잔류하였다.
소련령으로 이동하였던 독립군들은 1921년 6월에 자유시 참변을 겪고 이듬해 7월에 소련군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한 채 다시 북간도로 돌아왔다.
따라서, 일본군의 간도 출병 이후로 북간도 지역에 흩어져 잔류하면서 상황이 호전되기를 기다리던 독립군들과 소련령에서 돌아온 독립군은 옛 근거지인 북간도 지역에서 다시 합류해 부대의 재건을 모색하게 되었다.
[3부의 형성과 발전]
1922년 8월말에 서간도에서 대한통의부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이 단체는 대한통의부와 의군부로 갈려 대립하게 되었다. 대한통의부의 군사 조직인 의용군은 당초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대한통의부와 의군부 사이에 대립과 갈등이 점차 심화되자,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하게 되었다.
즉, 의용군은 상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제휴하게 되면서, 1923년 8월 의용군의 대한통의부와의 관계를 청산하였다. 그리고 임시정부 군무부 산하의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가 되었다.
참의부는 대한통의부 의용군 제1·2·3·5중대를 주축으로 하여 결성되었다. 관할 구역은 집안현(集安縣)·장백현(長白縣)·안도현·무송현(撫松縣)·통화현(通化縣) 등 압록강 연안 지역이었다. 참의부의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1924년 5월에 국경(압록강)을 순시하던 조선 총독 사이토에게 총격을 가한 사실을 들 수 있다.
5월 19일 사이토가 선박을 이용해 압록강의 국경선을 순시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참의부는 평안북도 위원군 마시탄(馬嘶灘) 대안의 절벽 위에 저격병을 매복시켜 사이토를 암살하려고 한 것이다.
이 때 독립군의 매복 지점과 순시선과의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에 몇 분 동안 저격병이 총격을 가하였으나, 거리가 미치지 못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작전은 당시에 완벽한 치안 상태를 자랑하던 조선 총독의 체면을 크게 손상시키는 충격을 안겨 주었다.
한편, 대한통군부가 확대, 개편된 대한통의부는 이탈 세력들이 의군부와 참의부 등을 조직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게 됨에 따라 침체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대한통의부를 비롯해 대한군정서·길림주민회·광정단(匡正團)·노동친목회 등의 단체들은 1924년 7월 10일 길림에서 전만통일의회주비회(全滿統一議會籌備會)를 개최하고 재통합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의성단·변론자치회·고본계(固本契) 등의 단체가 더 참여한 가운데 8개 단체의 대표 25명이 11월 25일에 정의부를 조직하였다.
정의부는 행정기관으로서 민사·군사위원회 등 9개 위원회로 구성된 중앙 집행위원회를 두었다. 그리고 입법기관으로서 의회를, 사법 기관으로서 사판소(査判所)를 중앙과 지방 구(區) 등에 각각 설치하였다.
그런데 정의부의 국내 진입 활동은 참의부에 비해 활발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정의부의 군사 단체인 의용군의 본부를 화전현(樺甸縣)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참의부는 본부를 집안현에 설치하였다.
즉, 정의부의 군사활동은 1925년 7월 4일에 의용군 7명이 평안북도 철산 경찰서 소속 차련관 주재소(車輦館駐在所)를 습격해 일본 경찰 4명을 사살한 경우와 같이 일본 경찰과 소규모 전투를 전개하는 데 그쳤다.
한편, 1925년 3월 10일에 북만주 지역의 영안현 영안성(寧安縣寧安城)내에서 신민부가 조직되었다. 그 주축은 대한독립군단과 대한독립군정서이다.
대한독립군단은 1922년 8월에 복벽주의자 이범윤과 공화주의자 김좌진 등이 중심이 되어 동녕현(東寧縣)에 조직한 무장 독립운동 단체였다. 이 단체는 1920년 말에 밀산에서 조직된 대한독립군단의 후신이었다.
그런데 신민부조직에 참가한 것은 북로군정서출신인 김좌진 계열이었다. 대한독립군정서는 1924년 3월에 북로군정서에서 활동하던 현천묵(玄天默)·조성환 등이 중심이 되어 동빈현(同賓縣)에서 조직된 공화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단체로서 북로군정서의 후신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신민부는 표면적으로는 대한독립군단과 대한독립군정서의 합작이었지만, 실제로는 북로군정서의 후신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신민부의 조직 당시에 참가한 구성원의 특징은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종교적인 면을 보면 대부분이 대종교의 신자이며, 특히 대한독립군단과 대한독립군정서원 가운데 북로군정서의 출신이 그러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학력은 대한제국의 무관학교와 신흥학교 등 군관계 학교의 출신과 전통적인 한학을 공부한 인물로 대별할 수 있다. 여기서 신교육을 받은 인물이 무관이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이들은 모두 북로군정서의 출신이었으며, 그들의 출신 지역은 전국에 걸쳐 있었다.
1927년 12월 25일에 석두하자(石頭河子)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신민부의 구성원은 군정파와 민정파로 분열되었다. 각 파의 구성원의 특징을 살펴보면, 군정파는 북로군정서에서 김좌진과 함께 무력 투쟁을 하였던 인물들로서 대부분 대종교의 신자였고, 무관학교출신들이 많았으며 신분상으로는 양반 가문의 출신들이 그 주류를 이루었다. 지역별로는 경기도·충청도·함경도 지역 출신의 인물들이 많이 가담하였다.
한편, 민정파는 일반 대중을 위한 자치 활동에 주로 관여하였던 인물들로서 최호(崔灝)가 중심이었다. 대부분 대종교의 신자로 양반 가문의 출신이 많았으며, 전통적인 한학을 배웠다. 지역별로는 평안도와 경상도의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신민부는 대종교적 민족주의를 표방하였다. 이를 추종하던 대종교적 민족주의자들은 단군을 정점으로 한 단군 신앙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민족보다 계급을 강조하는 공산주의에 동조할 수 없었고, 또한 1921년 6월의 자유시 참변 때문에 공산주의자에 대해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출신 성분 또한 양반 가문의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대종교적 민족주의자들은 공산주의의 침투를 저지하고 대종교적 민족주의 이념을 계몽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공화제의 실시를 표방하였고 위원 제도와 당제도 등을 추구하였다.
신민부가 애초에 추구하였던 독립운동의 방법론은 무장 투쟁을 우선하자는 것이었다. 이는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독립군단과 대한독립군정서가 주축이 되어 이루어진 단체였을 뿐만 아니라, 신민부의 실질적인 지도자인 김좌진이 청산리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무장 투쟁을 이끌어 온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주요 구성원 가운데 무관학교의 출신들이 다수 있었다는 사실 또한 방법론과 관련해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신민부에서는 농촌의 계몽과 교육 및 산업의 보급과 발전에도 힘을 기울였다. 신민부는 재만 한인에게 항일 민족 의식 및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해 학교의 설립과 ≪신민보≫의 간행 등을 추진하였다.
반면, 산업의 진흥을 위해 공농제(公農制)의 실시, 식산조합 및 소비조합의 설치 등을 시도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계획대로 이루어지지는 못하였다.
한편, 신민부에서는 효과적인 무장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군자금의 모집과 독립군의 양성 등의 계획을 수립하였다. 군자금은 재만 동포의 의무금 및 모연대에 의한 모연금으로써 충당하고자 하였으며, 군구제(軍區制)의 실시, 둔전제의 실시,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의 설치 등을 통해 독립군의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군자금의 모금은 북만청년총동맹과 적기단(赤旗團) 등 공산주의 단체의 방해 공작으로 효과를 보지 못하였으며, 독립군의 양성 또한 중국의 마적 및 지방민들의 비협조로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래서 일제와의 무장 투쟁 또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던 것이다. 다만, 국내 진입을 위한 예비 공작과 만주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친일 한국인 암살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민족유일당운동과 3부 통합운동]
1920년대에 들어오면서 국내외를 막론하고 한국으로부터 일제를 구축하기 위한 민족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간도 지역에는 50여 개에 이르는 각 종 독립운동 단체들이 생겨나 각기 나름대로의 독립운동의 방략을 실천에 옮기며 일제를 구축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와 같이 많은 독립운동 단체들은 사태의 변화에 따라서 때로는 통합, 분열되기도 하였으나, 1925년에 참의부·정의부·신민부 등 3부로 정립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1925년 6월 일제는 한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 통치에 위협을 느끼고,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간도에서의 독립운동을 철저히 탄압하고자 중국동북군벌과 이른바 미쓰야협약(三矢協約)을 체결하였다.
이처럼 독립운동의 조건이 악화되자 민족 진영과 공산 진영에서는 중국의 국민당과 소련의 공산당의 영향으로 이당치국(以黨治國)만이 분산된 독립운동 세력을 통합해 민족의 역량을 집결시킬 수 있으며, 근대적인 정당정치로서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첩경이라 생각하고 민족유일당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북경·상해·남경·광동 등지와 간도, 그리고 국내에서도 민족유일당운동이 강력히 추진되었으나 결과적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거기에는 물론 일제의 방해 공작이 한 요인으로 작용하기는 하였으나, 그보다는 독립운동계 자체 내의 문제가 더 큰 요인이 되었다.
즉, 개인 본위 조직론과 단체 본위 조직론이라는 방략상의 의견 대립이 가장 큰 장애 요인이었으며, 그밖에 사상대립·지연·혈연 등 봉건적인 요소들의 대립 등도 실패의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단체 본위 조직론을 주장한 세력은 민족유일당협의회로 발전하였으며, 중심은 평안도 출신들이었다. 이에 반해 개인본위조직론자들은 민족유일당촉성회를 조직하였으며, 경상도 및 강원도 출신의 인물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민족유일당운동이 실패로 끝나게 되자 민족유일당운동촉성회측이었던 김동삼(金東三) 등은 1928년 4월 신민부의 김좌진을 방문하고 3부 통합을 시도함으로써, 다시 한번 독립운동세력을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여기에 가담하고자 하였던 세력으로는 이른바 정의부 탈퇴 파인 김동삼을 중심으로 한 세력과 김좌진을 중심으로 한 신민부의 군정파, 그리고 참의부의 주류인 김승학(金承學) 계열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일제의 줄기찬 방해 공작과 신민부와 참의부 자체 내의 내분 등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처럼 민족유일당운동이 실패로 끝난 뒤에도 독립 운동가들은 계속해 독립운동 진영의 통합만이 일제를 한국으로부터 구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1928년 12월 정의부측의 김동삼, 참의부의 김승학, 신민부의 김좌진 등이 참가한 가운데 잠정적인 조직으로서 혁신 의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한편, 혁신 의회에 참가하였던 인사들, 특히 신민부의 군정파인 김좌진 등은 1929년 7월에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무정부주의를 수용해 한족총연합회라는 단체를 조직하였다. 그 뒤 1930년에는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으로 발전적인 해체를 하였다.
한편, 1929년 4월 신민부의 민정파와 참의부의 심용준파(沈龍俊派), 그리고 정의부의 현익철(玄益哲)·고활신·이탁(李鐸) 등이 길림에 모여 국민부를 조직하였다.
국민부는 그해 9월 20일에 개최된 제1회 중앙 의회에서 ‘국민부는 동포 사회의 자치 행정만 담당하고, 혁명 사업은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이 수행한다’는 방침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12월에 조선혁명당을 창당하였으며 당군(黨軍)으로서 조선혁명군을 창군하였다.
1931년에 일제가 동북사변(만주사변)을 일으켜 간도지역을 장악하려 하자,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은 각각 간도 지역의 중국 항일군과 제휴해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가운데 1932년 3월에 시작해 그해 7월에 끝난 영릉가(永陵街) 및 흥경현전투(興京縣戰鬪)는 항일 무장 투쟁사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전투에서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梁世奉)의 병력 1만여 명은 중국 의용군과 합작해 일본군과 정규전을 벌여 적의 맹공을 물리쳤던 것이다. 결국, 관동군의 공습작전에 못 이겨 퇴각하였지만, 이때 일본군의 사상자수는 막대한 것이었다.
한편, 한국독립군이 중국군 군대와 협동작전을 펼친 대표적인 것으로는 대전자령전투(大甸子嶺戰鬪)를 들 수 있다. 이 전투는 비록 한중 연합군에 의한 전투였다 하더라도 주도권을 한국독립군의 지청천이 가지고 있었으며, 동북사변 이후 위세를 떨치고 있던 일본군을 대파하였다는 데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중 연합 작전에도 불구하고 만주 지역이 완전히 일제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한국독립군은 1933년에 그 활동을 중지하게 되었다. 한편, 조선혁명군은 그 뒤에도 끈질긴 항쟁을 계속하였으나 1938년에 해체되고 말았다.
한국독립군과 조선혁명군의 해체는 곧 만주 지역에서 민족주의 계열의 무장 투쟁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이 만주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자 재만 독립군 가운데 일부는 중국 본토로 이동해 끝까지 항쟁하였다.
중국 국민당의 주선으로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 한인특설반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후일 광복군으로 활약하며 한국의 독립을 위해 공헌하였던 것이다.
- 현황 -
[인구]
중국이 1982년에 실시한 제3회인구조사에 의하면, 중국 전역에는 현재 176만3000명의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 숫자는 중국에 거주하는 소수 민족 가운데 4위에 해당되며 이들 동포들은 만주 지역인 길림성·흑룡강성(黑龍江省)·요령성(遼寧省) 등 동북3성에 주로 모여 살고 있다.
지역별로 살펴보면,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가 있는 길림성에 104만명, 흑룡강성에 43만명, 요령성에 17만명 정도가 살고 있다. 그 밖에 내몽고 자치주에 5만명, 북경·상해 등 대도시와 산동·광동지방의 주요 도시에는 지역에 따라 100명에서 수천 명이 거주하고 있다.
그런데 한인이 집중되어 있는 지역은 중국 변방에 설치된 29개의 민족 자치주 가운데 하나인 길림성의 연변조선족자치주로 1952년 9월 3일에 설립되었다.
이 지역에는 총 인구 175만 가운데 한족(漢族)이 60%를 차지하고 한인(韓人)이 약 75만명으로 40%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1990년 통계에 의하면 중국에 사는 한민족은 모두 1,920,597명으로 1982년에 비하면 많은 동포들이 도시로 이동해 경제활동에 종사하고 있다.
[지역 분포]
한인들의 한반도 내에서의 연고지와 현재 대륙에서의 지역적 분포의 관계는 뚜렷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단편적이고 비공식적인 보고를 종합하면, 연변자치주에는 북한, 특히 함경도 지방 출신들이 상대적으로 많고, 흑룡강성에는 남한 출신이 대부분이며, 동남부지역에는 특히 경상도 출신이 많다고 한다.
그리고 길림성의 혼춘에는 충청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안도현 영경인민공사(永慶人民公社)에는 강원도 고성 출신이, 복흥공사(復興公社)에는 전라도 출신이, 길림성 유하(柳河)에는 서울 출신이 많이 모여 산다.
또한, 길림성의 북부 지역에도 경상도 출신이 많고, 요령성의 심양(瀋陽) 일대에는 평안도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며, 북부의 개원(開原) 및 철령(鐵嶺)일대에는 경상도, 특히 안동과 경주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내몽고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은 거의 100%가 남한 출신이다.
[교육]
간도 거주 한인 동포들의 교육열은 상당히 높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처음 이 지역으로 이주한 1세들이 대부분 영세 농민이었던 까닭에 2, 3세들에 대한 교육열이 무엇보다도 강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교육 사업의 발전이 급속히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길림성 연변한인자치주에는 유치원에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교육기관들이 설치되어 있다. 현재 정규 대학 5개교, 중등 직업 기술 학교 28개교, 중학교 251개교, 소학교 1,218개교, 유치원 657개소가 각각 설립되어 있다.
대학 교육기관으로는 종합대학인 연변대학교(延邊大學校)와 연변농학원(延邊農學院)·연변의학원(延邊醫學院), 그리고 연변사범전과학교·연변예술학교 등을 들 수 있다.
연변대학교는 1949년 4월에 설립되었다. 10개 학부로 이루어져 있으며, 재학 생수는 1,600명으로 한인수는 70%가 넘는 1,180여명이다. 대학교 창립 초기에는 사범학부·의학부·농학부 등 3개 학부가 있었으나, 1958년에 의학부·농학부가 분리, 의과대학·농과대학으로 독립하였다.
현재 정치학부·역사학부·조선어문학부·한어학부(漢語學部)·일어학부·수학학부·물리학부·화학학부·체육학부 등 10개 학부가 있다.
연변의학원은 5년제로 재학생 1,000여 명, 교수 230명 정도가 있으며, 565개의 병상과 2,000여명의 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부속병원도 있다. 그리고 4,500여 명의 졸업생들은 대부분 연변을 중심으로 인술을 베풀고 있다.
한편, 길림성 장백한인자치현(長白韓人自治縣)에서도 동포들이 소학교 교육 사업을 합리적으로 운영해 학령 아동의 취학률이 97%에 이르고 있다.
이 지역에는 산간 지역이 많아 촌락들이 산재하며, 생산대(生産隊)와 생산대대(生産大隊)에 각각 소학교를 설립,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소수 한인 어린이들을 위해 ‘민족소학반’을 부설, 교육에 열의를 보이고 있다. 교육이 부족할 경우에는 ‘교육 강습반’을 조직해 교원을 양성해 내기도 한다.
흑룡강성의 경우에도 1981년 6월 현재 동포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 수가 고급 중학교 35개교, 초급 중학교 114개교, 소학교 410개교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소학교의 경우, 한인 학교는 이 지역 소수 민족의 소학교 전체 숫자 563개교 가운데 약 70%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흑룡강성에는 유일한 한민족사범학교가 있다. 사범학교는 1978년 정상현(正常縣)에서 개교하였으며, 성 전지역의 5, 6개 시와 현에서 온 한인학생 170여명이 다니고 있다.
한인자치주에는 민족교재출판기구가 있어 교재 출판과 번역, 인쇄 발행을 담당하고 있다. 특히, 이 출판 기구에서는 한인 중학교와 소학교들에서 사용되는 250여종의 교과서와 참고서 400여 만부도 찍어 자치주는 물론 동북3성에 공급하고 있다.
이밖에 자치주에서는 민족 교육 및 과학 연구 기구를 설립해 그 사업을 활발히 추진하고 있다. 그리고 자치주의 민족이론연구회·역사학회 등은 학술 연구에도 주력해 최근에는 연변 한인들의 민족사와 한글에 대해 활발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문학·예술활동]
연변한인자치주에는 최대 규모의 연변가무단(延邊歌舞團)을 비롯해 13개의 예술 단체가 있으며, 각 현과 시에는 예술 극장과 문화관 등이 있다. 한인들은 중국의 4인방축출(四人幇逐出) 이후 문예활동을 활발히 전개해 문학·음악·무용·미술·연극 등 다방면에 걸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45년 이후 자치주에는 연변문학예술공작자연합회·중국작가협회연변분회 및 연극·음악·무용·미술·활영 등 5개 분회가 결성되었다. 그밖에 연변가무단·연변활극단·연변희곡별원(延邊戱曲別院) 및 7개 현·시의 문예공작인단 등 예술 단체들이 설립되었다.
지난 1956년 7월 결성된 연변한인극단(단장 허종환)은 지난 30여년 동안 <춘향전>·<심청전> 등과 외국의 번역 작품을 연평균 207회나 공연하였다.
그리고 1970년대에 조직된 한인예술단은 노래와 춤, 의상에 이르기까지 민족적 색채를 그대로 지니고 있으며, 최근에는 흑룡강성 목단강시(牧丹江市)에서도 한인 동포 가무단이 조직되어 공연 중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자치주에는 문학예술연합회와 문학예술연구회를 비롯한 기구들이 조직되어 있고, 각 현에는 창작소들이 있다. 1981년에는 길림성 통화 지구에서 한인 동포 문학인들이 모여서 한인문학협회를 창립하였다.
통화 지구의 10개 시 및 현의 30여 명의 문학인들과 북경·요령·흑룡강성 등지로부터 많은 한인 문학인들이 참가하였다. 문학 협회에서는 문학잡지 ≪장백산≫을 발간하고 있다.
이밖에도 문예 잡지로 ≪연변문예≫가 문화혁명 기간 중 정간되었다가 복간되었다. 발행 부수는 약 8만 5,000부로, 중국 거주 전체 한인 동포 10명당 1부씩에 배포할 수 있는 분량이다.
길림성 거주 한인 동포들은 1957년에 설립된 연변예술학교를 통해 한민족의 문학·예술인들을 양성하기 시작하였으며, 조직 단체들의 문예 간부들은 민간 문학예술을 발굴하고 정리하는 데 많은 힘을 기울여 왔다.
그 결과, 오랫동안 파묻혀 있던 농악무(農樂舞)·검무(劍舞) 및 민간음악·무용·시가 등의 민간 예술들이 빛을 보게 되었으며, 부채춤·정수무(頂水舞) 등을 발전시키고 있다.
한인 전통 예술과 함께 기악·성악·무용 등의 전문 예술인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이 연변예술학교는 현재 131명의 중등반 학생과 50여 명의 대학전문반 학생들이 129명의 교직원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이밖에도 자치주내 농촌과 시내에는 100여 개의 문화실과 800여 개의 영화상영실이 있다. 영화의 경우는 한국어 제작과 함께 중국어 제작으로 나누어진다. 가령, 중국어로 제작된 것이라도 한국어로 번역되고 있다.
[출판·언론활동]
길림성 연변한인자치주에는 한인 동포들을 대상으로 한 문학·예술·과학·교양 등에 관한 한글 잡지의 발행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서 ≪연변문예≫·≪소년아동≫·≪주부생활≫·≪연변교역≫·≪재정과학≫·≪아리랑≫·≪청년생활≫·≪청년과학≫ 등을 들 수 있다.
현재 한인자치주에는 연길시 한인 동포들이 운영하는 연길교육출판사가 있다. 1947년에 창립된 이래로 정치·경제·문화·교육·과학·기술·문예 등 각종 한글 서적과 교과서 등을 1980년 말 현재까지 약 8,200여 종에 1억 3,000만부를 편집, 출판함으로써 한인문화교육사업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또한, 출판과 아울러 각종 민족도서·교과서·교양잡지까지 담당하고 있어 한인 동포 문예활동은 물론, 지식 및 문화 수준의 향상에 기여하고 있다. 그밖에 중국 고전을 비롯한 다수의 외국 작품들도 번역, 출판하고 있다.
연변자치주 연길시에는 1946년부터 한글로 발행되던 ≪길림일보≫를 개명한 일간지 ≪연변일보≫가 있다. 한글판과 한문판을 합해 발행 부수는 약 6만부 정도이고 회사 직원은 100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주로 정치 뉴스보다는 생활 뉴스에 비중을 두고 있다.
이 밖에도 흑룡강성에는 발행 부수 5만의 ≪흑룡강신문≫이 있으며, 요령성에는 ≪요령일보≫와 ≪요령농민신보≫가 있다.
방송의 경우는 길림성의 연길라디오·텔레비전방송국, 장춘라디오방송국과 흑룡강성의 하얼빈 라디오 방송국 등이 있다. 한국어 방송은 1981년 8월부터 현지 교포들의 손으로 꾸려져 전파가 발사되고 있으며, 주로 문예 프로와 지방 소식 등으로 편성되고 있다. 현재 길림성 한인자치주에서는 10여 가지의 한국어 텔레비전 프로를 방영하고 있다.
[경제생활과 물질문화]
한인들의 경제적 기반은 과수원과 벼농사를 위주로 한 농업이다. 특히, 쌀이 귀한 북중국지방에서 다른 작물에 비해 값이 비싼데다가 한인들은 한냉지대에서도 벼 재배를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주위의 한족(漢族)들에 비해 높은 수익을 올리게 되었다.
더구나 벼는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많으므로 전체적으로 벼 재배를 전문적으로 하는 한인들의 농업 경제는 안정되어 있다. 물론 개인적으로 살펴보면, 농업 노동력이 부족한 가족이나 식구 수가 적어서 다른 생산 분야에 종사할 사람이 없는 가족은 일반적으로 가난하다.
그러나 이는 같은 한인 가운데에서의 경제적 지위의 상대적 차이일 뿐, 다른 중국인에 비해서는 일반적으로 비교적 나은 편이다.
중국에 있는 한민족의 경제활동은 서비스업, 무역, 제조업 등의 순이다. 이러한 경제활동은 중국이 개혁 개방을 실시함으로써 가능할 수 있었다.
한편 최근에는 한국에서 노동일을 통해 경제적 부를 이룬 사람들도 자주 목격된다. 그리고 한국과의 교류를 통해 동포들의 경제적 지위는 크게 향상되었다.
일반적으로 가옥 형태는 농촌 지역에서는 부엌과 2, 3개의 방,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외양간이 딸린 한국 농가의 내부 구조를 가진 소규모의 단순한 집이다. 도시에서는 일반 아파트나 벽돌로 된 중국식 집에서 거주하고 있다.
집에는 장농·이불·요강·옹기단지와 독·책상·카세트·라디오·텔레비전·자전거·우마차·재봉틀 등이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텔레비전의 보급 상태는 통계적으로 조사된 것이 없다.
흑백 텔레비전은 꽤 보편화되어 있는 듯하나, 보다 깊숙한 농촌으로 들어가면 10여 호당 1대꼴로 있다. 자전거·시계·재봉틀 등은 장농과 더불어 혼인할 때 꼭 장만하는 품목으로 되어 있다.
농촌에 기계화 작업이 진행되고 있고, 대개 경운기와 이앙기·추수기 등이 보급되어 있지만, 생산대대의 공동소유로 되어 있다. 최근 연산승포제(聯産承包制)라고 불리는 공동보급생산제의 실시와 아울러 개인 소유 형태의 영농 방식의 도입이 시도되면서, 이러한 기계와 농업 기구들이 어느 정도 개인 소유 형태로 이양되어 가고 있다.
의생활면에서 남자인 경우 평소에는 인민복과 작업복을 입지만 한복도 자주 입는 편이다. 여자인 경우에도 보통 생활에 편한 대로 작업복을 입지만 남자보다는 한복의 착용이 훨씬 보편적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중국 옷은 거의 입지 않는 것 같다.
식생활에 있어서 평소에 먹는 음식은 반드시 한국 고유의 음식만은 아니다. 물론, 밥·나물국·콩자반·생선요리·김치·시래깃국·된장·쌈 등이 주로 식탁에 오르는 것들이며, 명절에는 떡과 경단을 마련하지만, 간단한 중국 음식도 자주 만들어 먹는다.
중국 음식은 중국인이 위주가 된 대도시에서 거주하는 사무직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일수록 상대적으로 자주 먹는 것 같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한국 음식이 많으며, 그 종류나 질에 있어서는 소찬에 가깝다.
[문화적 전통과 생활양식]
간도에 살고 있는 한인들은 다른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들에 비해 전통적인 생활양식과 문화를 비교적 많이 유지하고 있다. 그들은 음력설·정월대보름·한식·단오·추석·동지 등 절기에 따른 명절을 지키며, 남녀 모두 전통적인 의상을 입고 윷놀이·그네뛰기·널뛰기·축구·씨름판을 벌이고 엿·떡·찰밥·팥죽·떡국 등을 즐긴다. 또한, 용(龍)날에 우물물을 긷거나 그믐날 밤새우기 등의 세시 풍습도 여전히 지켜지고 있다.
또한, 출산한 집에서는 비록 금줄을 치지는 않지만, 첫이레 동안은 외부인의 출입을 삼가게 하고, 백날·돌날·환갑날은 잔치를 벌이는 등 통과의례 생활도 비교적 잘 지켜진다.
가을이면 각급 학교의 운동회가 열리고, 9월 3일 연변조선족자치주성립기념대회 때에는 전 한인이 모여 대대적인 축제를 개최한다. 이때는 물동이를 이고 달리기도 하며, 장구와 꽹과리를 치면서 <노들강변>과 <아리랑> 등의 옛 민요 가락 속에 춤을 추기도 한다.
특별 행사나 집단적 활동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영역에서도 문화적 전통과 전통적 생활양식이 많이 발견된다. 재래식 아궁이와 부뚜막에 큰 솥이 걸려 있고, 벽에는 바가지들이 몇 개 걸려 있는 부엌에서 머리는 흰 수건으로 싸고 아이를 등에 업은 채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다. 치마저고리에 흰 치마를 두르고 물동이를 이고 가거나 빨래터에 모여 앉은 여인들도 흔한 풍경이다.
중국식으로 의자 생활을 하는 집도 있지만, 대부분은 온돌방에서 모든 생활을 영위한다. 식구들은 모두 둥근 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한다.
성인이 되어도 부모나 연장자 앞에서는 담배를 삼가한다. 남녀관계에 있어서 젊은 세대들 가운데에는 연애를 하는 일도 많지만, 여전히 맞선을 보아서 혼인을 하는 경향이 강하다.
출산·생일·혼인·회갑에 따른 잔치와 장례는 비록 소규모의 단순한 형식이나마 지켜지며, 제사를 포함한 조상숭배 의식도 계속되고 있다. 최근에 들어서 이러한 모임과 행사는 더욱 활발해지고 규모도 크고 풍족하게 치러지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혼인식은 대부분 신랑은 양복을 입고 신부는 한복에 ‘너울(면사포)’을 쓰고 학교 강당에서 식을 올리고 사진을 찍고 잔치를 한다. 그러나 아직도 사모관대와 족두리를 쓰고 구식 혼례를 올리는 곳도 더러 있다.
또한, 한인들은 보신탕을 즐겨 먹어 곳곳에 개장국집 혹은 포육탕(抱肉湯)이라는 간판을 붙인 식당이 많다. 불고기와 냉면 집은 비싸기도 하고 평소에 집에서 만들어 먹기 때문에 오히려 중국인이 더 많이 간다.
전반적으로 물질적 측면에서는 현재의 한국 사회와는 차이가 많다. 여자의 한복만 하더라도 여러 가지 장식이 없이 소박하며 40년 전의 모형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음식 또한 몇몇 종류의 나물무침과 김치와 된장 종류, 갈비탕·불고기·냉면·식혜·떡·수수경단·팥죽·찰밥·쇠고기국·돼지고기찌개 등 보편적인 것들이며, 새로운 한국 음식의 개발은 없는 듯하다.
[조국관]
길림성은 북한 지역과 640㎞의 국경을 접하고 있지만,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북한을 지지하고 있지 않으며, 북한에 대해 극히 무관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인 동포 1세들의 고향은 북한이 3분의 1정도이고, 나머지는 대한민국 출신이다. 그들은 북한을 하나의 ‘사회주의국가’로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북한의 생활 수준이 간도에 살고 있는 한인 동포에 비해 훨씬 뒤떨어져 있음을 알고 있다고 한다.
한인들은 한민족이라는 데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정치적 연대감보다는 언어·핏줄이라는 문화적·혈연적 연대감이 더욱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2, 3세로 이어지면서 중국에 귀화하는 현상이 점차 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중국인과의 혼인율도 점차 증가하고 있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 중국의 한인 교포들이 한국에 와서 취업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일부분은 불법 취업을 하고 있다. 교포들이 한국에 취업하고 있는 동안 한국의 발전상에 크게 감명 받는 한편 동포들에 대한 한국 국민들의 대우에 불만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 결과 대한민국에 대한 호감은 점차 변하고 있는 실정이다.
시사상식사전 [
간도(間島)는 백두산 북쪽의 만주 지역 일대로, 서간도(압록강,송화강의 상류지방인
백두산 일대)와 동간도(북간도-훈춘,왕청,연길,활룡현 등 포함 지역)로 구분된다.
주로 간도라 하면 우리가 흔히 '연변'이라고 부르는 중국 길림성 동쪽의 연변조선족자치주에
해당하는 지역인 북간도(동간도)를 가리킨다. 지형적으로 볼 때 간도는 남서쪽의 백두산을
주봉으로 장백산맥이 자리하고 남쪽으로는 두만강이 흐르고 있다.
■ 간도 역사
간도는 원래 읍루와 옥저의 땅이었다가 고구려가 이 지방으로 뻗어나면서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고, 고구려가 망한 뒤에는 발해의 영토가 되었다.
그 뒤 고려시대로부터 조선 전기에 걸쳐 여진족이 각지에 흩어져 살았다. 그러나 여진족은 농경보다 유목·수렵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이 비옥한 지역이 오랫동안 개척되지 못하였고, 조선 후기 한국인 유민(流民)이 들어가 미개지를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 간도 영유권 분쟁
만주지역에 청나라가 세워진 후에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우리나라와 청나라간 국경선 문제가
계속되고 있었는데, 숙종 38년(1712)에는 우리나라와 청나라를 가르는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이 정계비에는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으로 하여 이 분수령에 비를 세운다
(서위압록 동위토문 고어분수영상 늑석위기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 勒石爲記)"고
기록돼 있다. 그런데 여기서 `토문강'이 어디를 지칭하는 지를 두고 훗날 논란거리가 되었다.
(이 정계비는 이후 소실돼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청나라는 간도지역을 오랫동안 봉금지역으로 선포하고 입주를 엄금하였다.
정계비가 건립된 뒤에도 간도 귀속 문제가 논의된 바 없이 지내 왔으나,
19세기 중엽에 들어 청나라의 봉금과 조선의 월경 금지가 소홀해지고
함경도민들의 두만강 월경 농사가 시작되면서 문제가 야기되었다.
특히, 1869년과 1870년 함경도에 큰 흉년이 들면서 많은 사람들이 간도로 옮겨갔다. 이에 청나라는 1881년부터 봉금을 해제하고 청국인의 간도 이주와 개간, 농경을 장려하는 정책을 폈으며, 1883년에는 간도에서의 조선인 철수를 요구했다.
이에 청나라와 조선 사이에 외교분쟁이 첨예화 되었는데, 조선은 백두산 정계비에 의거하여
'토문강'이 송화강 상류에 있는 지류인 토문강(해란강)을 가리키므로
간도는 조선 영토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청나라는 두만강이 '토문강'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1885년~1888년 청나라와 조선간 교섭이 진행되었으나 결렬되었다.
■ 청일간 간도협약
대한제국이 성립된 이후에도 우리나라는 간도에 대한 영유권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일제가 국권을 빼앗아 간 뒤인 1909년 9월 일제는 청나라로부터 남만주철도
부설권(선양-다롄)을
보장받은 대가로 백두산 정계비에 대한 청나라측 해석을 그대로 인정, '간도협약'을 체결했다.
간도협약은 제 1조에 "청·일 양국정부는 두만강을 한·청 경계로 상호 성명하고 정계비로부터
석을수를 경계선으로 한다" 고 규정했다. 이때부터 50년대 말까지 한-중 국경선은 두만강
상류인 석을수로 확정되고 말았다. 정계비에 기록된 `토문강'은
두만강이 아니라 송화강의 상류이며
따라서 간도가 우리 땅이라는 우리측 주장은 철저히 무시됐다.
한편 일제시대에는 일제에 항거하는 많은 한국인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하여
간도는 청산리대첩과 봉오동전투 등 항일무장투쟁의 거점이 되었다.
■ 간도 현황
오늘날 간도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중국의 소수민족정책에 따라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설치되어 있다. 현재 연변조선족자치주에는 11개 민족이 거주하고 있다. 이 가운데 조선족이 전체의 41%인 백만여 명에 달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한족·만주족·회족 순으로 분포하고 있다. 주요 도시로는 행정수도인 연길을 비롯해 북한과 접경한 도문, 러시아와 국경을 두고 있는
훈춘·안도·둔화·화룡·용정 등 6개 시와 왕청·안도 등 2개 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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