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의 기름부음으로 향기롭게 함 (요12:1-8)
마리아가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은 것은
유다의 가치관으로 볼 때는 잘못 된 낭비임에 틀림없지만
마리아에게는 가장 소중한데 사용한 것이고, 예수께서 보실 때는
자신의 죽음을 향기롭게 하는 기름부음으로 여겨진 것이다.
마리아가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은 것은
유다의 가치관으로 볼 때는 잘못된 낭비인 것이 틀림이 없다.
그런데 마리아는 가장 소중한 데에 사용했다.
가치관으로 볼 때 한 사람에게는 아주 무가치한 것이었고
한 사람에게는 아주 소중한 것이었다. 오늘 우리의 삶도 거기서
결정이 된다. ‘너의 재물(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이것은 틀림없는 말이다. ‘내 재물이 어디로 가는가’가 나의 가치관이고
내 인생관이다. 그냥 공기를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돈으로 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마리아를 볼 때 자신의
죽음을 향기롭게 하는 기름이라고 생각하셨다.
지금 죽으러 가는 사람에게는 ‘자기의 죽음을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고 생각하는가’가 중요하다.
가난한 사람에게 주느냐 안 주냐 하는 경제 정책적 문제가 아니라
자기 죽음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이 문제가 더 중요하다.
자기가 죽음으로 가는 길을 너무나 향기롭게 보고 그것을 향기롭게 하기
위해서 기름을 부은 마리아를 볼 때 예수님 마음이 흡족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일을 기록한 요한은 가롯유다는
그 속에 마귀가 들어가서 스승도, 사랑의 낭비도,
기름부음도 모르고 오직 돈만 아는 사람이 되었다고 하였던 것이다.
‘아담이 왜 선악과를 먹었냐?’ ‘마귀가 와서 그랬다.’ 그러면
주체성이 강한 사람들이 생각할 때 ‘무슨 마귀가 와서 그래?
그러면 사람은 로봇이라는 말이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마귀가 와서 그렇게 하지 않고
아담이 만일 자기 스스로 먹었다면 그것은 영 구제불능이다.
그런데 마귀에게 속아서 그랬다는 것이니까 구제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은 이상하게 복음이다.
나쁜 말 같은데도 그것이 복음이 된다.
‘뱀이 와서 꾀었기에 그것을 먹었다.’고 하면
주체성을 주장하는 사람은 ‘그것은 책임 전가가 아니냐?
무책임한 행동이 아니냐?’고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주체성이 강해서, 주체사상 때문에 그러는 것인데
‘마귀가 그런 것이 아니고 자기가 그런 것이다.’ 하면
자존심은 살아나는데 구제불능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귀에게 속아서 그렇다고 하면
조금 부끄럽기는 하지만 구제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부끄럽더라도 사는 게 낫지 않는가? 그러니까 복음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은 절절(節節)이 복음이다.
사람들이 모르고 자존심을 살려주는 말만 좋다고 하지만
가다 보면 자기가 죽을 일이다.
왜 예수를 팔았을까?
은 30냥이면 노예 한 사람의 몸값이라고 한다.
은 30냥 그렇게 많은 돈이 아닌데 그것 받고 팔았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죽게 되자 그것을 도로 성전금고에
던져버리고 자기는 목매달고 죽었다. 돈 때문이 아니었다.
이 사람을 따라가면 될 것인가 안 될 것인가?
과연 이 사람이 메시아로써 이 세상을 평정할 사람인가?
유대나라 왕이 될 사람인가 아닌가?
이게 지금 중요한 문제였다.
그의 가치관은 마리아와 너무 달랐고,
그의 길은 예수와 너무 맞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의 가치관은 마리아와 너무 달랐다.
돈 쓰는 것을 보니까 너무 달랐다.
한 사람은 300데라니온(Denarion)이나 되는 것을
그냥 깨가지고 예수의 머리에 부었고,
한 사람은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것을 팔아가지고
가난한 사람들 나눠주자’고 이렇게 생각했으니까 너무 다르다.
지금 가롯 유다가 가고자하는 길과
예수가 가는 길은 너무 맞지 않았다.
다른 제자들도 당시에는 그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대부분의 제자들이 다 이러했기 때문에 끝까지 그를 따를 수 없었다.
베드로까지도 다시 갔지만은 시험해보고 알아보려고 간 것이다.
대제사장 가야바의 법정에 들어갈 때도
‘결국 저 사람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을 알아보러 갔다가 마지막에
실망을 하고 ‘나는 저 사람을 도무지 모른다’ 하고 나온 것이다.
세상은 “이 복음”을 위해서 재물을 써주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목적을 위해 돈을 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것이요“
당시에 가장 값있게 돈을 쓰려면 유다가 말 한 대로
가난한 자들을 위해 쓰는 것이었을 것이다.
어려움에 있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은 참으로 선한 일로써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든지 꼭 필요한 일이며
언제나 할 수 있고 어디서나 환영 받을 일이다.
그러나 세상은 이 복음을 위해서 제물을 써 주지 않는다.
300데나리온을 왜 팔아서 낭비하나?
예수를 전하라고 세상에서 돈을 주겠는가?
줄 사람이 없다. 예수를 전하는데 왜 돈을 주겠는가?
예수 전하라고 돈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까 이 복음을 위해서 제물을 쓴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다.
그것이 얼마나 되었던가 그 돈을 쓴다는 것이다.
세상은 다 다른 목적을 위해서 돈을 쓴다.
주님께서도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 곁에 있다”고 하셨다.
그러나 마리아와 같은 사랑의 낭비는 그 성질이 아주 다른 것이다.
선하냐 악하냐의 범주에 속한 것이 아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이 복음이 전하여지는 모든 곳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향기로운 제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인정받기 보다는 오히려
비난 받기가 쉬운 일인 것이다.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이 복음이 전하여지는 모든 곳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향기로운 제사다.
이 복음이 무엇인가? 죽었다가 다시 산 복음(죽고 다시 산 복음)이다.
세상에서는 죽임을 받았지만 하나님에게서는 살림을 받는 제사다.
이 복음을 위해서는 세상은 돈을 쓰지 않는다.
이 복음에서 내가 구원을 받은 사람만 여기다 돈을 쓴다.
그 외의 사람은 돈을 안 쓴다.
세상에서는 마리아의 이런 행동은
인정받기보다는 오히려 비난받기가 더 쉬운 행동이다.
가롯 유다만 그런 것이 아니라 누가 봐도 ‘저 여자 미쳤나?’
이러지 ‘야~ 저 여자 아름답네!’ 이러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복음이 전하여 지는 곳에서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막14;9) 하셨다.
복음을 전하는 곳에서는 향기로운 제사의 냄새가 필요하다.예수의 복음은
예수를 사랑하는 자들의 어리석은 낭비로써만 전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