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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장법사 빤냐와로 스님의 “테라와다 이야기” 25-스님의 필수품⓷ 거주처
“승원은 모두 부처님의 세계관과 가치관, 인생관에 근거해서 이루어진 것”
15. 평상시 생활에서 테라와다 스님들에게 필요한 물품 ⓷
(3) 거주처(rukkhamulasenasana)
초기 부처님의 출가 재자들은 공한처(arañña)나 나무 밑(rukkhamūla), 산 속(pabbata), 동굴(kandara), 계곡(giriguhā), 무덤(susāna), 산림(vanapattha), 노지(ajjhokāsa), 짚더미(palālapuñja) 등에 머무르다가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의 청을 계기로 승원생활을 병행하게 됩니다.
얼마 안가서 기원정사나 죽림정사 등 많은 승원(saṁghārāma)이 건축되게 됩니다. 그래서 평상시는 대부분의 출가자들은 승원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러나 혼자서 조용하고 한적한 장소(arañña)에서 거주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다만 비구니는 혼자 아란냐에 거주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비구니 승원은 마을 내에 있었지만, 비구의 승원은 마을이나 마을에서 가까운 조용한 곳에 지었습니다. 그러나 우마차로 갈 수 있고, 우마차가 U턴할 수 있는 곳이 아니면 안 된다고 정해져 있습니다. 승원은 사람들이 부담 없이 출입할 수 있는 것이 원칙이 되어 있습니다. 기독교의 수도원과 같이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산 깊고 골 깊은 곳에서 신선과 같이 사는 은둔자가 존경되는 경향이 있는데, 부처님 시대에도 산 중에서 칩거하여 수행하는 사람(pavivitta 독거 거주자, paccekabuddha 연각)을 멀리서 경외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을 포함한 출가자 대부분은 집단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조용한 장소를 의미하는 아란냐도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가 아니라, 승원 옆에 있는 조용한 장소를 의미했습니다.
승원은 처음은 허술한 나무 오두막이었지만, 후에 돌이나 말린 벽돌, 진흙을 석회로 발라 단단한 건물이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벽의 색은 흰색이나, 흑색, 혹은 붉게 칠했습니다. 2 층으로 건물을 짓기도 했고, 첨탑같이 세워진 곳도 있었습니다. 동굴도 허용되었지만 부처님의 활동 지역인 왕사성 부근을 제외하면 동굴로서 적절한 장소는 없었습니다. 힌두스탄 평야의 중앙부에는 평평한 땅과 얕은 구릉만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큰 승원에는 좌선이나 법회 등을 하는 선설당(禪說堂), 스님 개개인이 사용하는 승방, 식당, 부처님을 모신 법당과 같은 전각(重閣, pāsāda), 포살이나 상가회의를 하는 포살당, 창고, 재봉실, 경행처(經行處, caṅkamana) 등의 시설이 있었습니다.
거주처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화장실이 만들어졌습니다.
우물이 있는 곳 가까이에는 수각과 욕실도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욕실은 욕조식의 더운 물을 받아 사용하는 목욕탕 형식이 아니라, 환자들의 병 치료를 위하여 사용하는 사우나 형식의 것이고, 평상시는 바가지로 물을 몸에 끼얹으면서 목욕하는 곳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스님이 사는 승방(kuṭi)은 독방의 경우 최대 길이 12 sugatavidatthiyā(佛搩手, 부처님이 손가락을 펼쳤을 때 엄지 끝에서 장지 끝까지의 길이, 부처님의 뼘은 일반인(majjhimapurisa)의 1.33배, 2배, 3배등의 설명이 있다. 예:30✕1.33✕12=4m80cm), 폭 7 sugatavidatthiyā(불걸수, 예:30✕1.33✕7=2m80cm) 정도로 정해져 있습니다. 인도와 파키스탄에 남아 있는 불교 유적의 승방 크기는 4✕2.5m보다 큰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스님이 사는 큰 방은 있었습니다. 이런 꾸띠를 만드는 기본조건은 정해진 크기를 지켜야 하고, 장로 스님을 모시고 가서 장소를 보아야 하고, 그 곳이 재난이 없는지, 왕래하기가 편한 곳인지를 살펴야 하는 것이고, 만족함을 알아 토굴 조성에 있어 재가신자에게 지나친 부담을 주지 않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유행 중에 승원에 숙박할 경우에는 법랍 순서에 따라 방이 나누어집니다. 스님의 수에 비하여 방의 수가 적은 경우는 물론 법랍이 적은 스님들이 같은 방을 쓰게 됩니다. 개인 소유의 승원도 있지만, 원칙적으로 승원 등 고정자산은 지상에 존재하는 스님 모두가 공유하는 재산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원칙입니다.
방안에는 나무나 대나무, 돌이나 진흙으로 만든 침상(mañca)이나 의자(pīṭha)가 놓입니다. 그러나 높고 크고 아름답고, 목화솜(tūla)으로 만든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침상이나 의자가 높으면 마음이 교만하고 방일해 지기 쉽기에, 이를 경계하여 8 불지(佛指 sugataṅgula, 12불지=1불걸수)보다 높아서는 안 됩니다. 침상이나 의자에 목화솜(tūla)을 넣어서 만들면 부드럽고 푹신한 느낌은 주지만, 재가의 욕망을 누리는 자(gihikāmabhogin) 같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계율에 어긋나기에 피해야 합니다.
매트에 해당하는 와구(sena)나 좌구(āsana), 베개(bimbohana)는 승원의 비품으로 개인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이런 물건들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아직 사용할 수 있는데도 버리고 해마다 새로운 와구를 만들면 안 됩니다. 좌‧와구는 6년 이상 써야만 합니다. 또한 좌‧와구는 상가 대중스님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것이므로 그곳을 떠날 때 잘 정리하여야 합니다.
방에는 바닥 깔개로 카펫(bhummattharaṇa)이 깔려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카펫(bhummattharaṇa)도구를 풀로 만드는 것은 허용되어 있습니다(tiṇasanthāraka).
좌선용 방석(nisīdana)이나 (침대) 시트(santhata) 등의 천 제품은 각자가 지니는 것입니다. 여러 명이 하나의 좌선용 방석(nisīdana)이나 침대시트(santhata)를 공유하여 사용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기에 필요품은 각자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좌선용 방석(nisīdana)은 대체로 세로 90cm×폭 67.5cm의 두 겹으로 만들어진 천인데, 출가자가 바닥에 앉을 때 그 몸을 땅위에 사는 해충 등으로부터 지키고, 가사를 더럽히는 것을 막고, 또한 앉은 장소를 스스로가 더럽히는 것을 막기 위해 무명·모직·아마 등의 천으로 만듭니다.
예경, 좌선, 식사, 설법 등 앉아서 행하는 대부분의 경우에 이 니시다나를 사용하기에 출가자가 필히 가지고 다녀야하는 일상품 중의 하나입니다.
이 니시다나를 이동할 때 소지하는 방법은 2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로로 두 번 접어서 우측 어깨에 걸치는 방법, 다른 하나는 역시 세로로 두 번 접어서 좌측 아래팔 위에 걸쳐서 가사로 그것을 가리는 방법입니다.
인도에서는 다만 첫 번째 방법만 행해졌던 것이 후대로 오면서 두 번째의 방법도 통용되게 됩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첫 번째 방법만을 고집하기도 합니다.
이 니시다나를 만들 때는 규정 이상의 크기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길이는 2불걸수(40✕2=80 혹은 45✕2=90cm), 폭은 1과 1/2불걸수(60~68cm), 안쪽 테두리는 1불걸수(40~45cm)입니다.
안쪽으로 테두리가 있는 이유는 쓰고 있던 니시다나를 떼어내어 붙였기 때문입니다.
즉, 새로 니시다나를 만들고자 할 때는 새 천으로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쓰고 있던 니시다나 괜찮은 부분에서 1불걸수의 천을 잘라 안쪽 테두리로 하고, 거기에 새 천을 덧대어 만들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새로운 좌구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침대시트(santhata)는 비단으로 만든 것은 사용할 수 없고, 침대시트를 만들게 되면, 검은색 털 1/2, 흰색 털 1/4, 붉으스럼한 갈색 털 1/4로 적절히 혼합하여 만들어야 합니다. 검은색만의 모직으로 된 침대시트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또한 새로운 침대시트는 상가 대중의 특별한 허락을 받지 않았으면 6년 이상 지니고 사용해야 합니다. 마음대로 새로운 침대시트를 구할 수 없습니다.
추운 날 이불로는 자신의 상가띠(重衣)를 사용합니다. 상가띠는 2매를 겹침으로 만들어져 있기에 이불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모기장도 허용되어 있습니다.
방에는 침을 뱉는 용기(kheḷamallaka)가 놓여져 있고, 등불을 두는 선반도 있습니다. 뱀이 떨어져 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 삿갓모양의 보개(宝蓋)를 달아놓기도 합니다. 방안에는 대나무(cīvaravaṁsa)나 줄(cīvararajju)로 가사걸이를 만들어 가사를 겁니다. 발우는 침대나 의자 아래에 둡니다.
좌와구를 사용할 때는 이와 같이 회상하여야 합니다.
“제가 사용하는 좌복과 방사에 대해 바른 생각으로 관찰합니다.
다만 추위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요,
더위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요,
파리와 모기, 비바람과 태양열, 여러 곤충들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함이요,
다만 이와 같은 계절의 변화로부터 일어나는 위험을 막아, 한적한 곳에서 수행하기 위해 이 좌복과 방사를 사용하겠습니다.”
이제 사원을 건설한 목적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왕사성의 장자가 비구들을 보고 신심을 일으켜,
「만약 내가 승원(vihāra)을 만들면, 나의 승원에 머물러 주시겠습니까?(vaseyyātha me vihāreru)」라는 요청에 대해,
부처님께서 「비구들이여! 5종의 방사(pañca lenāni)를 허락하노라. 승원(vihāra, 간단한 토굴), 누각(aḍḍhayoga, 반쯤 지어진 옆이 트인 집), 전각(pāsāda, 일반적인 집), 빌라(hammiya, 길고 층계가 있는 여러 층의 대저택), 동굴(guhā)이다」라고 그런 곳에 머무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비구들은 승원이 건설되기 전에는 확실히 아란냐나 나무아래 등에 거주하고 있었지만, 「유행」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되면(kālassa eva)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머물던 아란냐에서 나와 왕사성의 마을로 탁발을 다녀와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왕사성의 장자는 어떠한 이유로 승원을 기부하려고 생각했고, 부처님은 어떠한 이유로 그것을 받게 된 것일까요?
왕사성의 장자는 하루에 60개의 승원을 지어 상가에 보시했다(ekāhan'eva saṭṭhiṁ vihārepatiṭṭḥāpesi)는 구절에서 드러나듯이, 매일 아침 산 속으로부터 왕사성의 마을로 내려와서 탁발하는 비구들의 모습을 보고 단순하게 그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서 제의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하여 승원생활을 허락하게 됩니다.
첫 번째는 우루웰라에 머물던 깟사빠 3형제의 일천 명 무리가 부처님을 따라서 왕사성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사리뿟따‧목갈라나를 따라 부처님의 제자가 된 250명이 합쳐져 1250명의 큰 무리가 편안하게 생활하기위해서 비와 이슬을 막을 새로운 거주처를 확보할 필요가 생긴 것일 것입니다. 이런 자연스런 흐름으로 사원이 건설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새롭게 비구가 된 출가자는 10년간 스승의 아래에서 불교 수행자로서 기초적인 것을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제 간의 제도가 제정된 것과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스승(upajjhāya, 和尚)으로부터 지도를 받고, 스승을 아버지처럼 존경하며 시중들어야 할 제자를 동주제자(saddhivihārika, 同住)라고 부릅니다. 또한 스승에게 어떤 장애가 생겼을 때 스승을 대신하여 제자를 인도하여 가르침을 주는 의지사(ācariya, 依止師, 阿闍梨) 아래에 있는 제자를 내주제자(antevāsika, antevāsin, 内住)라고 불립니다.
이와 같이 제자들은 더부살이하는 종형제처럼, 아침부터 밤까지 스승이나 의지사와 기거를 같이 하는 것이기에 그 때문에라도 단 한명이 사는 거주처(paṇṇasālā, 草庵)를 대신하여 보다 큰 시설(vihāra)을 필요로 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동주제자(saddhivihārika)는 아침에 아침 일찍 일어나야만 하고, 스승이 얼굴과 입을 씻을 수 있게 약간의 물과 치솔, 치약을 준비해야만 합니다. 스승이 식사를 마치면 발우를 잘 닦아 두어야하고, 좌와구는 물론 방사의 청소도 해야 하며, 스승을 따라 다니며 설법에의 시중, 병들었을 때의 시중 등 올바르게 의무를 이행해야 합니다. 내주제자(antevāsika)는 동주제자처럼 함께 숙박하지는 않지만 의지사에게 해야 할 의무는 마찬가지입니다. 동주제자나 내주제자는 항상 스승이나 의지사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의무를 행하며, 지극한 믿음을 지니고, 한없는 존경심을 가지며, 자신이 부족함을 알아, 수행에 매진해야 합니다.
이렇게 스승이나 의지사와 함께 머물며 배우고 익혀야만 신참 비구들이 예의범절을 지키지 않아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받는 것을 막을 수 있고, 또한 불교를 안정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나, 수행을 올바르게 점검받으며 하기 위해서도 승원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승원의 건설은 단순한 생활의 편의뿐만 아니라 이러한 내적 요인에 의해서 건설되었다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승원이 건설된 이유는 사제 간의 제도 제정과 때를 같이하여 비구계를 받는 제도가 3귀의 수구계로부터 백사 수구계로 바뀌게 되면서, 이것에 의해 상가가 모여 집단의 의사를 결정하고, 또 참회하는 의식을 실행할 수 있는 시설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필요 최소 인원수가 10명 이상으로 정해졌기 때문에 보다 큰 시설이 요구되었을 것입니다. 후대로 내려가면 포살을 실시할 때 큰 지붕이 있는 시설은 필요로 하게 됩니다. 포살은 그 계에 거주하는 모든 비구가 모이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아마도 왕사성과 같은 큰 도시에서는 상당한 인원수가 모였을 것입니다. 물론 포살은 지붕이 있는 곳이 아니면 실시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매월 2번 초하루와 보름에 모여 행할 때 비가 오기도 할 것이고 더구나 우기철도 있기 때문에 지붕이 있는 것이 용이할 것입니다.
물론 그 근저에는 부처님 자신이나 제자들의 생활에 유행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시기에는 반드시 정주해야 하는 기본적인 생활형태가 없으면 승원도 건설되지 않았을 것이고, 또 백사갈마나 수계의식의 변화, 포살 제도 등도 제정되지 않았을 것이고, 또한 상가도 형성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유행이라는 수행·생활형태만을 선택되지 않고, 정주를 중심으로 여긴 것은 그 세계관이나 목표하는 깨달음의 내용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승원이 건립된 것은 죽림정사의 기증이 성도10년이며, 기원정사의 건설이 성도 14년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죽림정사에 60개의 방사가 건설된 것은 성도 10년부터 14년 사이에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또한 죽림원에 건설된 죽림정사에서 사제 간의 제도가 제정되어 백사갈마나 참회 의식, 포살이 행해졌다는 기록으로 보면 그것은 성도 12년 혹은 13년에 이미 승원생활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죽림원에 죽림정사라는 승원이 건설되었던 시기에는 벌써 많은 부처님 제자들이 지방에 파견되어 그곳에 머물며 포교 활동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곳에서도 고유한 상가가 형성되어 각 지방에서도 승원이 건설되기 시작했다고 생각됩니다.
‘saṅgha'라는 말은 saṅ 「모두, 함께, 모이다」라는 의미를 가지는 접두어+√hṛ 「옮기다, 가져오다」라는 뜻을 나타내는 동사가 합성된 말이기 때문에, 「함께 운영하는 집단」이 원래 의미입니다. 이 말은 부처님 시대에는 「상공업자의 조합」, 「공화제의 정치체제」를 가리키는 말로서 이용되었습니다. 즉 상가라는 말은 2가지 의미를 가지는 말입니다.
(1) 자연스럽게 형성된 단순한 집단이 아니라, 공통의 목적을 가지는 조직체로서의 집단
(2) 구성원의 의사가 존중되는 민주적인 집단
이와 같이 「상가」는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조직적인 집단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운영 규칙이 수반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니 오히려 운영 규칙이 정해져 있는 민주적인 집단을 「상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이런 상가의 운영 규칙을 모은 것을 「경분별(Sutta-vibhanga, 経分別)」이라는 이름으로 율장을 구성하는 2가지 요소 가운데 하나로 정리되어 있고, 다른 하나는 「건도(Khandhaka, 健度)라는 이름으로 상가의 제도와 규정을 정리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이 「율장」에 규정된 불교의 상가의 가장 엄밀한 정의는 「깜마(羯磨)을 행할 수 있는 상태에 있는 비구 혹은 비구니의 집단」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깜마를 행할 수 있는 상태에 있다」라는 것은 이 깜마를 실행하는 시점에, 일정한 구역(界, sīmā) 내에 거주하고, 출석할 권한을 가진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깜마라는 것은 상가의 의사를 회의에 의해 결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 의결 요건도, 의제의 종류에 의한 의결의 방법도 세세하고 규칙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이와 같이 본래 「상가」는 뛰어나 조직적인 것이지만, 이 깜마는 통상 하나의 지역에서 집단생활하고 있는 비구 혹은 비구니의 그룹에 의해 행해지기 때문에, 관습적으로 비구·비구니의 「생활 공동체」를 나타낼 때에도 이용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상가는 결코 불교의 출가 수행자가 정주하는 집단생활을 시작한 것에 의해서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불교를 안정적으로 발전 존속시켜 수행하길 원하는 목적으로 자각적으로 형성된 조직적인 집단이라는 대전제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은 입멸의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유언을 남기는 기분으로 비구들에게 「상가의 7불퇴법이 지켜지는 한은 비구들에게 번영이 기대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7불퇴법이란 ① 비구들이 자주 모이고, 많은 수가 모이는 것.
② 비구들이 화합해서 모이고, 화합해서 상가의 일을 실행하는 것.
③ 이전에 정해진 적이 없는 것은 정하지 않고, 이미 정해진 것은 깨뜨리지 않으며, 정해진 계본에 따라서 그대로 행하는 것.
④ 출가한 지 오래되어 경험이 풍부한 상가의 어른들(saṅghapitar), 상가를 이끄는 지도자들(saṅghaparināyaka)을 존경하는 것.
⑤ 비구들이 갈애(渴愛)에 지배되지 않는 것.
⑥ 비구들이 아란냐에 앉아서 알아차리며 수행하는 것.
⑦ 아직 오지 않는 좋은 범행자를 환영하여 올 수 있게 하고, 벌써 와있는 좋은 범행자를 안락하게 머물러 있게 하는 것.
경전에 「상가가 화합하고 있는 것은 즐겁다. 화합하고 있는 사람들이 부지런히 힘쓰는 것도 즐겁다」라는 게송이나 「부처님과 담마의 가르침에 대하여 신심이 있고(buddhe pasannā dhamme ca), 상가에 대하여 열렬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으면 (saṅghe tibbagāravā) 그들은 천상에 태어나서 거기에서 빛난다.」에서 알 수 있듯이 삼보의 대상인 상가는 화합하여 부지런히 수행하며 살아야 하고, 불교에서 출가자가 되었으면 상가의 울타리(sīmā)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 해탈하여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는데 가장 효율적이고, 그러한 상가가 존경받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상가의 형성이나 승원의 건설은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을 깨닫기 위해 확립된 부처님의 세계관과 가치관, 인생관에 근거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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