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대구 종로를 카메라를 들고 걸어보았다.
길지 않은 길이었지만 곳곳에 역사가 담겨있었다.
약전골목에서 본 종로다. '종로'는 '종각(종루)이 있는
길'이라는 말인데,
실제 이 거리에 종각이 있었는 지는 나도 모르겠다.
다만
현재 종로라는 지명은 일제시대 '쿄마찌(京町)'를 1947년 4월,
일본식 동명을 우리말 식으로 개정하면서 서울 종로를 따라 종로로 고치면서 생겼다.
앞에 보이는 건물 붉은 색 기둥 앞에
'영남부성 영남제일관터'라는 표지석이 조그맣게 서있다.
'영남제일관'은 대구부성의 남문이다.
대구성 원래
토성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영조 12년 (1736) 민응수의 건의로 석성으로 새로 쌓았다.
그러나 , 1906~7년 사이에 헐리는데
여기엔 정부의 불허에도 불구하고 헐어버린 당시 대구부사 박중양의 역할이 컸다.
대구성을 허무는 것은 당시 대구거주 일본인들의 상권 확대와 이권을 위한 숙원사업이었다.
그래서 대구 거주 일본인들은 박중양을 그들의 은인으로 생각했다.
왼쪽은 1906년 '영남제일관'이고, 오른쪽은 현재 망우당공원에 복원되어있는 '영남제일관'이다.
한 눈에 고증이 잘못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요즘 뉴스에 경상감영공원 복원된 '선화당'과 '징청각'의 복원이 아주 부실했다는 사실이 보도됐다.
전에 일본 교토의 금각사 '금각'을 보고
그것이 불탄 것을 1955년 복원된 것임을 알고 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일본의 '장인정신'이 부러웠다.
우리의 '장인정신'은 도대체 어디로 그리고 왜, 사라졌을까?
대구 사투리로 '긴골목'는 뜻의 '진~골목'이다.
일제시기 대구의 대표적 부자 가문이었던 '달성 서씨'들 가옥이 집중되어 있던 곳이다.
그러나 그들 중엔 악덕지주로 지목된 사람도 있었고 일제에 협력한 사람도 있었다.
대구에서 성장하고 대학을 졸업한 소설가 김원일의 자전적 소설
'마당깊은 집' 기념 조상과 큰 홍보 사진이다.
언젠가 티비 드라마로도 방영되어 큰 인기를 얻었었다.
종로 옆 장관동이 주 무대인 이 소설은, 휴전 직후인 1954년 이후,
작가의 표현을 빌면
'빽 있는 부유층은 잘 먹고 살며 혼전만전 돈을 썼으며,
빽 없고
가진 것 없는 서민은 수제비로 하루 끼니를 잇기에도 부대끼고,
종로 거리 일대와 덕산동 뒷골목 요릿집은
밤마다 불야성을 이루어 노랫가락과 장고 소리가 그치지 않았던' (2005, 재판 11쇄, 11쪽)
휴전 직후 대구를 그리고 있다.
종로는 대구의 '차이나 타운'이었다. 사진은 '화교소학교'의 정문 모습이다.
'대구화교소학교'는 1943년에 설립됐다.
대구에 화교(華僑)가 정착한 해는 1905년으로 알려져 있다.
1930년에는 560가구(2천 384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1931년 만주에서 조선인과 현지인의 다툼으로 생긴 이른바'만보산 사건'으로
국내에서 반화교 분위기가 높아져 대구거주 중국인 수는 크게 즐어든다.
1970년대에도 중국인들에 대한 유무형의 압력으로 많은 중국인들이 한국을 떠났는데
대구도 예외는 아니었다.
소학교 건물이다. 건물 벽에 '예의염치'라고 적혀있다.
1934년 장개석은 난창에서 5만의 대중을 앞에 놓고,
‘국가 발전의 기초는 지식과 도덕이며’, ‘고대 성인이 가르친 '덕', 곧 '예, 의, 염, 치'는
현대에도 적용되어야 마땅한 규범이다’는 점을 강조했다.
‘신생활운동’의 시작이었다.
장개석은 과연 유교 도덕의 강조를 통해
당시 중국의 국내외적 어려움(사회적 모순과 공산당과 일본군 등)을 해결하기 위해
국민들을 하나로 뭉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소학교 구내에는 장개석의 흉상이 있다.
대구의 화교들은 아직 대만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있는 듯하다.
대구화교협회 건물.
대구 갑부 서병국씨가 1925년에 건립한 이 건물은 일제 강점기 병원으로
이용됐으나,
대구화상공회가 47년 화교들의 기부금 등으로 사들여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화교소학교터가 모두 서병국의 집터였다.
가톨릭 근로자 회관,
'가톨릭노동사목' 사무실이 있었던 곳인데,
1980년대 '노동야학'을 열었고, 노동자들의 소모임 지원을 지원했다.
근데 이 곳은 예전 '성가병원'이 있었던 곳이었다.
성가병원은 1955년, 잠시 대구에 머물렀던
비운의 화가 '이중섭'이 정신질환을 앓으며 입원했던 곳이다.
분단과 전쟁은 자유로운 예술활동을 꿈꾸었던 이중섭의 삶과 영혼을 파괴했다.
지난 해는 '이중섭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래서 기념 전시회가 몇 곳에서 열렸다.
사진은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찍은 것이다.
모텔 건물이 대구 최초의 중국 음식점이었던 '군방각'이 있던 자리이다.
모문금이 운영했는데, 그는 일제 때 벽돌공장으로 번 돈으로 문을 열었다.
1900년대 초기, 대구에 서양식 근대식 건물이 지어지면서
중국인 건축기술자들이 많이 건너왔다. 모문금은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다.
1968년 건물이 해체되었다.
종로에서 중국음식점의 명맥은
옆에 보이는 만두로 유명한 '영생덕'과 '복해반점'이 겨우 잇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