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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걸 고문 부부께서 춘천에 오셨습니다. 참으로 반가운 일입니다.
점심쯤에 남양성모성지의 기공식에 성가봉헌을 하고..
저녁 약속이 오후 5시 ... 토요일인지라 부랴부랴 춘천을 향해 달렸습니다. 2016년 5월 28일.
법조계에 발을 들여 놓지 않았다면 분명히 음악인이 되었을 것이라는...
최고로 왕성한 활동을 하시고, 덕망있으신 이택수 변호사께서 장소를 예약하셨습니다.
이종걸 고문은 서울에서 별도의 업무 때문에 알게되어 친분을 쌓았는데,
무형문화재 전수회관 관장이 친구분이라 현장 공연에도 많이 초대해 주시고..
방배봉 성당 이솔리스띠 공연에도 오셔서 응원을 해 주셨는데..
친분이 두터워지고.. 한참 후에야 이택수 변호사가 가장 아끼는 법대 후배임을 알았답니다.
두분은 중앙대학교 법대 4년 장학생으로 존경과 애정의 선후배 관계였습니다.
그 4년 후배인.. 전 김덕중 국세청장과도 아주 가까운 인연을 맺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만남은 한달 전에 약속 시간을 정하신 이종걸 고문 덕분이었답니다.
그동안 계속 기대...기대.. 학수고대 해 오셨는데...ㅋㅋㅋ
이종걸 고문은 대학생 시절.. 누구나 인정할 정도의 석학으로 고시합격을 당연시 했으나
뜻을 달리하여 당시 최고의 효성그룹에 33,000명의 입사시험자 중에... 수석을 했답니다.
그러면서도 운동과 태권도를 잘 해서 도 체육대회에서 입상한 경력도 있고
불의를 보면 지나치지 못하는 정의파 성격인지라 에피소드도 많았답니다.
그룹의 핵심 부서에서 10여년을 근무하다가 김덕룡씨 비서관으로 추천되어
정무보좌관 생활로 그 능력을 인정 받았을 뿐만 아니라 6개국어에 능통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정치적으로 순조롭지 못하여 건강에 적신호가 왔고
간암으로 시한부 6개월을 선고받았지만..
친한 친구인 서울대병원 부원장과 삼성의료원 원장의 도움과 함께
워낙 강한 체력을 유지했던 터라... 지금은 완치단계이며.. 기적적이고 놀랍습니다.
사모님께서 너무 고생이 많으셨고.. 더욱 건강하시기를 빌고..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아울러, 지금 하시는 일이 잘 되시고,
큰 비전을 가지고 계시다니 열심히 응원하고.. 더욱 힘을 실어드리고 싶습니다.
이택수 변호사 부부, 이종걸 고문 부부께서 춘천 삼천동 조선갈비에서 기쁨으로 만나
대학시절 이변호사님의 통키타 실력과 사연.. 선후배로서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오랫만에 박장대소하고 추억에 잠기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소프라노 민은홍은 일본 돗토리현 오페라 공연을 가서 선물로 사 온 사케 큰 병을 드렸는데..
앉은자리에서 다 비우셨답니다...ㅋㅋㅋ
2차로 색소포니스트 이춘용 사장이 운영하는 비앤비(B&B) 룸으로 자리를 했습니다.
이종걸 고문께서 흥에겨워.. 일어나셔서 반주도 없이 추억의 노래를 한 곡 했고..
다 같이 합창하며 즐거워했답니다.
답가로.. 이택수변호사의 작은 소망을 담아 소프라노 민은홍의 il bacio를 MR에 맞추어
소중한 자리인 만큼 한 곡 했답니다. 모두가 큰 박수로 찬사를 보내주셨고..
이택수 변호사께서는 감동의 보답으로 큰 활동을 위해 필요한 것을 이야기 해 주면
뭐든지 지원하시겠다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두 분의 부부께서는 이택수 변호사께서 예약해 놓으신.. 춘천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산토리니 호텔.. 아르메니 빌리지 룸(Armeni Village Rooms)으로 향하셨고
거기에서도 밤 늦도록 추억을 나누셨나봅니다.
이종걸 고문 말씀 문자...
어제 아침 산토리니 6층에서 자고 일어나서 창밖을 내려다보고 깜짝 놀랐다.
춘천에 아니 우리 한국에 이렇게도 멋진 데가 있었다니!
그래서 아주 비싼 방 같은데 형수님께서 계산하셨으니 지금도 얼만 줄을 몰라요.
어제 저녁엔 깜깜하고 취해서 그 사실을 잘 몰랐었지.
다행인 것은 어제 밤 취하지 않고
거기가 그렇게 멋진 덴 줄 바로 알았더라면 놀라서 잠도 못 잘뻔 했었지.
.......
다음 날 오전엔 두 부부께서 다시 회동하시어 가까운 교회를 찾아 예배도 함께 보시고..
춘천 MBC에 있는 그 다방 카페에서도 차 한잔으로 여유를 만끽셨답니다.
얼마나 좋으셨던지 이종걸 고문께서는 1년에 한두번은 이런 모임을 갖었으면 한다시네요.
좋으신 제안입니다...ㅋㅋㅋ
항상 건강하시고.. 만사형통하시기를 기도하며..
모든 것을 다 챙겨주신 이택수 변호사님 부부께도 감사드리고..
법조계뿐만 아니라 음악계의 발전을 위해도.. 힘써 주시기를 희망드리고..ㅋㅋㅋ
기쁨으로.. 추억으로 소중함을 나누신 이종걸 고문님 부부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얼마나 음악을 좋아하시고.. 노력하시고... 즐기시는지..
이택수 변호사님께서 2005년도에 객원지휘자로 소리샘색소폰앙상블을 지휘하신 이후에
직접 쓰신 글이 있어서 아래에 올립니다.
소프라노 민은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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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수 변호사님의 글을 덧붙입니다>
난생처음 오케스트라 지휘를 해보고
그 뒷이야기를 소리샘가족들에게 전하는 것도 유익할 것같아 이렇게 글을 올려본다.
나는 1953년 12월.충북 음성 농촌에서 태어나 6.25.사변후 피폐된 환경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아버지는 6. 25. 사변때 육군군악대, 형님은 해병군악대 출신이고 나의 동생들 또한
모두 음악에는 일가견이 있어 가족들이 아버지때부터 음악을 좋아하는 가족이 되었다.
충북음성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중학교를 진학하여 다닐때 일이다.
그때는 오디오시설이 열악하여 유성기(축음기)를 가진 사람은 부유층 극소수이었고
지금처럼 흔하게 음악을 들을수 없었다.
학교에서 귀가할 때에 전파사(전축가게)점포 밖에 설치한 스피커에서 클래식 음악이 나오면
전봇대에 기대어 그 음악을 다듣고 왔던 적이 있을 만큼 음악을 좋아했었다.
특히 피아노음악을 좋아했다.
중학교때 서울에서도 공부를 잘하여 서울로 유학을 보낸 조부모, 부모, 고모등 온가족이
매우 흡족해하시고 계실때 나는 약10여일간 밥을 먹지 않았던 적이 있다.
서울까지 올라오셔서 밥을 해주시던 할머니가 큰일이 났다고 아우성을 치셨고,
드디어 시골에서 할아버지와 부모님이 올라 오셨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나는 그때 '피아노를 사달라. 음악을 하겠다'는 말을 했다.
그랬더니 당장 '이제 우리 집안은 망했다'는 탄식의 소리가 들렸고,
워낙 집안 경제사정이 어렵다는 사정을 내 자신도 잘 알고 있었던 터라
나 자신도 음악가의 꿈을 접어야 했다.
아버지가 음악을 하여 가세에 도움이 안되었다는 조부모님과 어머니의 판단이 우세하였다.
그때 무언가에 깊은 생각에 빠져 말을 안하시던 아버지의 모습도 생각난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 음악이 즐거운 것이 아니고
내가 접근하지 못할 음악이 되었기 때문에 음악을 들으면 정신이 혼란해지는 현상이 생겼다.
대신 클래식기타를 치면서 다소나마 내 자신을 달래며 살아왔고,
가끔 고등학교때 문학발표회때 찬조출연을 부탁받기도 했다.
그후 대학에 진학하면서 사법시험을 준비하고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내자신의 시간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1990년경부터 본격적으로 클래식 음악을 듣게 되었고,
한장 두장 음반을 사다보니 현재는 꽤많은 음반을 소유하게 되었고
비록 연주실력은 없지만 들을 수 있는 귀는 상당한 정도로 발달하였다.
그리고 경제사정이 과거보다는 풍요롭게 되자 수제품 클래식기타까지 마련하여
엄청나게 많은 여가시간을 거기에 할애하였다.
그리고 집에 오,비디오시설을 갖추고 오케스트라 연주곡을 오,비디오를 통하여 즐기면서
지휘자를 많이 접하게 되었고 자연히 지휘자를 선망하게 되었으나, 그 꿈은 단지 꿈에 불과하였다.
춘천에서 20년째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사회참여도 왕성하게 하였지만
음악과는 거리가 먼 곳에서만 머물렀다.
그러다가 지난 가을 본인이 10년째 회장을 하고 있는 춘천교도소 교정협의회에
우리 소리샘색소폰앙상불 유원표회장님이 교정위원으로 들어와 색소폰을 배운다는 말을 들었다.
전에도 춘천에 색소폰동호회가 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색소폰이야기를 듣고,
드디어 이제 나도 접근할 계기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고 당장 색소폰을 배우겠다는 각오를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2005. 10. 18. 우리의 단장님을 만나 안내를 받아 색소폰을 구입하게 되었고,
그 다음날 사농동 현재의 연습실을 찾았다.
물론 유회장님 덕분에 눈치 볼것없이 처음부터 친숙하게 느껴졌다.
이름만 듣던 김단장님의 지도로, 피리부는 연습부터 시작하였다.
그런데 나는 색소폰배우는 것만큼, 아니 그 이상 수확을 얻은 것이, 춘천에서 활동하는
음악가를 많이 알게 된 것이다. 원래부터 음악을 좋아하다보니 음악을 하는 사람을 만나는
그 자체만으로도 기분이 좋고, 처음 만나도 오래전 부터 사귄사람처럼 금방 친해졌다.
오히려 그분들이 변호사인 내가 음악까지 좋아하는 것을 의아해하는 것 같았다.
이춘석, 박교선 두분 선생님, 그후에 알게된 정순현 선생님, 이명우 선생님등등 실로 많은 분들과
춘천의 음악세계에 대하여 너무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정보를 접하게 되었고,
드디어 나의 잠새의식의 가장 많은 부분을 점해온 음악을 실생활에 활용할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을 맞이 하게 된 것이다.
악보를 읽을 수 있어서 다른 분들보다 색소폰을 빨리 익힐 수 있었던 것이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같고, 오래전부터 음악에 관심이 많았고 특히 클래식음악을 들었던 것이 선생님들로 하여금
나에게 객원지휘까지 부탁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같다.
10월중순경인가 사농동 메기매운탕집에서 식사를 할 때 우리 단장님, 유회장님(늦게 참석),
이춘석선생님(춘천청소년교향악단장님)이 식사를 하는데
이선생님이 갑자기 "객원지휘 한번 해보실래요?"라는 말씀을 하셨다.
아마도 선생님은 지나가는 말로 한번 던져보신것 같다.
그러나 나는 이제까지 고요히 잠자고 있던 나의 잠재의식의 넓은 들판에 잔잔한 바람이
이는 느낌을 받으며 잠시 흥분되었다.
"언제인데요?",
"12월인데 날짜는 확정되지 않았어요"
"무슨 곡을 하는데요?"
"지휘를 하시려면 오펜바하의 천국과 지옥 서곡을 하셔도 되고, 가벼운 곡 2곡을 하셔도 돼요"
나는 계속 흥분된 마음을 참으며 이선생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비상한 관심속에 듣고
뇌리에서는 수없이 많은 계산과 조심을 하는 중이었다.
"네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씀을 되새기면서도 "기왕에 한다면 무게있는 곡을 ----"
나도 모르게 내가 천국과 지옥 서곡을 지휘해보겠다는 승락을 하게 되었고,
이제는 되돌아 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었다.
드디어 몇일 후 전체악보(이를 스코어라고 한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를 받았고,
전에 듣던 CD를 찾으니 카라얀이 지휘하고 베를린필하모니오케스트라가 연주한 것이 있어서
챙겼다.
처음에는 CD를 들으며 악보를 따라가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런데 이 곡은 평범한 곳이 결코 아니었다.
악보를 안보고 듣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아니 베토베의 교향곡이라면 훨씬 수월할 것이다.
이 곡은 중간에 박자도 여러차례 바뀌고, 천천히 진행되다가 갑자기 폭풍이 몰아치듯 빨라지고,
조용하다가 깜짝 놀랄만큼 박력이 있고, 그야말로 변화무쌍한 곡이었다.
처음에는 악보를 익히고 음악을 완전히 이해하는데 주력하면서 지휘자로서의 동작을 연출하는
연습을 하는데, 이건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였고 장난이 아니었다.
날짜가 가까워지면서 점점 초조해지고, 어느때는 CD를 들으며 지휘동작을 연구하느랴
새벽 6시까지 잠을 못잔 때도 있었다. 아무리 잠을 청해도 잠이 오지 않으니 할수 없는 일 아닌가?
그렇다고 못하겠다고 포기하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어렸을 때로 돌아가 본다. 나는 중학교를 2년 중퇴하였다.
처음 중학교에 진학하여 중2가 되었는데 나보다 1년 선배가 중3을 건너뛰고 고등학교에 진학한 것이다.
난생처음 검정고시제도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내가 중 2 년 1학기초에 청계천 헌책방에 가서
중3교과서를 구입하여 혼자서 공부를 하였고
여름방학때도 집에 가지 않고 혼자서 서울에서 독학을 하였고,
방학이 끝나면서 시골에 내려가 아버지에게 "아버지 저 중3건너뛰고
내년에 고등학교에 진학할테니 중학교 중퇴하고 고입학원에 다닐 학원비 주세요"라고
말씀드렸을 때,
그 때 저의 아버지는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당시 중학 2년인 나의 말만을 들으시고
당시 쌀 2가마니(?)를 팔아 학원비를 주셨던 적이 있다.
나는 지금도 당시 저의 아버지의 의중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때부터 파란만장한 역사가
전개되지만(대입검정고시까지 합격한 다음에 고등학교에 입학하였고, 고등학교때 경제사정이
극도로 악화되어 대학진학을 포기할 뻔했었음)
천국과 지옥을 듣고 음악을 익히면서 그때의 생각이 났다.
이선생님이 나의 무엇을 믿으시고 나에게 이 어려운곡을 지휘하도록 허락하셨단 말인가?
나의 아버지가 나이어린 중2년생인 나를 전적으로 신임하였던 것처럼,
이선생님도 나를 그토록 신임하였단 말인가?
청소년교향악단 관계자들중에는 분명히 "이변호사 중간에 포기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분이
있었을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단원들과 인사를 하였을 때, 단원들이 학생들로서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요즘 아이들 생각만은 어른뺨친다'는 사실을 알기에 겸손한 말로 "내가 이자리에 선 것은
이미 나는 여러분의 열렬한 팬이 되었기 때문이고,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음악을 좀더 이해하고
공부를 하기 위해 이자리에 섰다."는 말을 하였는데, 아마도 단원들 중에도
'저 곡을 이변호사가 해낼 수 있을까'라고 반신반의하는 학생이 있었을 것이다.
그 음악을 웬만큼 이해하고 나서, 입장을 바꿔, 만약 내가 이선생님이라면 결코 그러한 곡을
나에게 지휘하도록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많은 사람들이 나를 염려하였을
것이라는 확신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그 곡이 나에게는 벅찬 곡이라는 사실을 일찍이 알았다면
나는 선뜻 지휘를 하겠다고 나서는 당돌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너무 부담감 갖지 말라는 이춘석, 박교선 두분 선생님들의 말씀은 전혀 귀에서만 들렸지
마음속에 간직할 수 없는 관심밖이었다.
그러나 나는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 내가 처음 골프를 배워 처음 필드에 나갔을 때 드라이버도
익히지 않고 3번 아이언으로 티샷을 하면서도 전혀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동료 법조인의 핀잔을
들었을 때, 3번아이언으로 가끔 다른 사람 드라이버거리만큼 내면서 자신감을 가졌던
뻔뻔스러움을 만끽했던 것처럼.
내심 만약 단원들이 따라만 준다면 베를린 필이 연주한 흉내까지 낼 수 있다는 착각도 하였다.
지난 2005. 12. 18(일). 17;00 춘천문화예술회관, 드디어 나에게는 역사적인 지휘시간이 되었다.
2시부터 리허설을 할때 단원들과 싸인을 점검하면서 최종마무리를 하였다.
난생처음 출연자들이 머무는 생소한 방에서 대기를 하면서 나의 앞에 진행되는 공연을 보며
'내가 어떻게 인사를 하고 진행을 하여야 하는지?'에 대하여 박교선, 정순현 두 선생님으로부터
자문을 받는 여유까지 가질수 있었다.
단원들에게는 절대로 서둘지 말고 차분히 연주하라고 당부까지 하고 침착함을 잃지 않으면서
나의 구상대로 지휘를 하였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의 90%는 발휘했다고
스스로 A 학점을 메겼다.
연주가 끝나고 나서 이춘석, 박교선, 정순현 3분이 만족스런 표정으로 '잘했다'고 축하해주셨고,
다른 분들도 잘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씀하셨다. 연주가 끝나고 로비에 나왔을 때
우리의 단장님과 소리샘가족들이 축하해 주시고,
나의 지휘를 보러 온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해냈느냐?고 다소 흥분한 표정으로
축하해 주었다. 아무개(교정위원)는 너무나 훌륭했다고 하면서 흥분하여 얼굴이 벌겋게 달아
식을 줄을 몰랐다.
그 곡은 9분40초 짜리이다.
그 짧은 시간을 위하여 내가 CD를 들은 시간만 해도 적어도 200-300회 이상 들었으니
대충계산해도 30-40시간은 넘을 것이고,
총투자시간과 노력을 감안하면,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짧은 시간을 위해
가장 많은 투자를 한 기록이 될 것이다.
출근하면서 스코어와 CD지참하고, 사무실로 오면서 승용차안에서 듣고,
사무실로 올라가면서 다시 챙겨 업무중에도 틈틈히 듣고 퇴근하면서 다시 챙겨 집에오면서
차안에서 듣고 집에 들어가 플에이어에 넣고 다시 듣기를 약 2개월간 반복하였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똑같은 음악인데 장소와 시간에 따라 약간씩 다르게 들린다는 것이었다.
연주가 끝난 이제도 가끔 주위에서 나는 소리가 그 음악의 일부인 것처럼 들려 놀란 눈으로
두리번 두리번 살필 때가 몇번 있었다.
이제는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 승용차를 탔을 때 천국과 지옥이 아닌 다른 곡을 들어도 괜찮아
한결 여유롭다.
나는 이번을 계기로 너무나 많은 것을 경험하고 배웠다.
2개월이 채 안되는 기간이지만 순수한 음악가의 생활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이
그 어느 일보다 보람을 느낀다.
그 모든 것이 내가 한단계 성숙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그 계기를 제공해주시고 지도해주시고
항상 격려의 말씀을 아끼지 않으신 교향악단 이춘석단장님 이하 정순현, 박교선 두분 선생님께
감사를 드린다.
무엇보다 현재 미국에 머물고 있는 아내와 1녀2남의 자녀들이 너무나 좋아 하니 나도 역시 좋다.
2005. 12. 21. 이택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