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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째날(1월 1일 수)
아침에 호텔 식당에서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8시 조금 지나 호텔 승합차로 칸쿤 해변으로 이동했다. 파란 바닷가에 강렬한 햇살이 매력적이었다. 이른 시간이라 사람이 별로 없어 한가했다. 수영도 하고 걸어서 해변을 산책하기도 했다. 바다 속 경사가 심해서 가까운 곳에서만 물놀이를 하도록 통제하고 있어 제대로 수영하기가 어려웠다. 보기는 좋은데 놀기는 불편한 지경이라 호감이 반감되었다.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고 맑은 공기와 고운 모래가 넓게 깔린 백사장은 일광욕을 즐기기에는 아주 좋은 환경이었다. 식사할 곳도 마땅치 않아 택시를 타고 근처 편의점에서 맥주와 간편식을 준비해 함께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오랜만이 여유와 휴식을 즐길 수 있어 만족스러워 했다. 다시 호텔 차량으로 돌아와 샤워하고 짐을 챙겨서 칸쿤 공항에 도착했다. 복잡한데 쿠바행 탑승수속대는 한가했다. 이른바 즉석비자를 파는 안내인으로부터 1인당 20유로로 구입하고 멕시코 출국세 20유로를 내고 기념촬영도 하면서 여유있게 발권수속을 하고서 출국장으로 이동했다. 발권 티켓에 명시된 게이트와는 달랐지만 출발하는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비행기는 로고 그림 하나가 그려진 정도라 외관만으로는 쿠바 항공임을 알 수 없었고 내부는 오래된 시설에 그 흔한 안내 책자 하나 없었지만 만석이었다. 창가 옆 자리에 앉은 미국인 여성 조사자의 양해를 구해 좋은 사진을 여러 장 찍을 수 있었다. 청명한 날씩 덕분이기도 했다. 1시간 반을 날아 6시가 다 되어 출국장을 나왔다. 2006년 당시의 모습 그대로 였다. 대부분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는 소박한 수준이었다. 정호현실장이 쿠바 현지인 가이드 메리씨와 함께 반갑게 마중해 주었다. 줄을 서서 유로화 환전을 하고 나니 금방 해가 지고 말았다. 준비된 마이크로 버스로 코파카바나 호텔로 이동하면서 소개도 하고 기본적인 인사를 나누면서 도착해 보니 오래 되기는 했지만 격조는 있어 보였다. 3층 방을 배정 받고서 1층 식당에서 뷔페식 식사로 저녁을 먹고 나오니 작은 밴드가 로비 한 쪽에 마련된 바앞 공간에서 연주를 하며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방문단이 모두 참가해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지고 박선봉씨가 민요연주까지 해서 많은 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일곱째날(1월 2일 목)
아침 일찍 일어나 호텔 밖을 돌아보니 해안가에 붙어 있는데 야외 수영장도 준비되어 있고 항구 방파제에는 낚시를 하거나 작은 보트를 타는 풍경이 들어왔다. 아주 독특하고 좋은 풍경이었다. 8시 조금 지나 가이드 정호현실장과 쿠바인 가이드 메리(ICAP 소속)가 도착했는데 차량이 늦어져 잠시 기다렸다가 출발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연휴 휴일기간이라 이동하는 주민이 많은데 대중교통 수단이 마땅치 않아 길에서 히치하이킹을 하려는 쿠바인들이 무척 많았다. 2006년 6월 방문했던 당시에 자주 봤던 모습 그대로 였다. 가족이 몇시간씩 길가에서 기다린다는 것은 매우 불편할 뿐 아니라 소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대중교통이 구축되지 못했다는 것은 석유가 부족하지도 않은데 큰 문제로 인식되었다. 중간에 쿠바 정부가 크게 벌이고 있는 사업인 마리엘항구의 개발과 경제특구를 설치 사업이 진행 중이라고 소개해 주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공사현장이 눈에 들어오고 철로도 새로 설치중이라고 했다. 아바나 항구의 관련 시설도 모두 마리엘로 옮기도 아바나시는 관광을 위해 재 재구성될 것이라고 했다. 피나델리오주의 바냘레스는 무관심하게 버려진 땅이었는데 좋은 환경과 융기한 산봉우리들과 독특한 자연환경이 사람들을 매료시켜 지금은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고 주민들의 소득수준도 매우 높아졌다고 한다. 전망대 언덕에 도착해보니 수백미터의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분지형 지형이 드러나는데 몽환적인 느낌을 주는 독특한 풍경이었다. 이 풍경을 그려 1940(?)년대 뉴욕 그림 전시회에 소개한 작가의 동상이 자리잡고 있었다. 당시 이 그림의 사실성 여부를 미국인 지리학자의 답사하여 확인하고 상도 받고 비냘레스가 유명해진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지어진 호텔이 전망대 옆에서 오랜 역사를 말해 주고 있었다. 전망대에는 기념품 판매장에서 시가와 엽서 책자들이 전시판매되고 있었다. 다시 차량으로 이동해 도착한 레스트랑 근처에는 산 한쪽에 원시 인류의 삶을 그린 초대형 암반화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카스트로가 원시 인간의 모습을 주민들에게 그려 보도록 제안 것이 시작이었다고 소개 한다. 인디오 동굴 탐사를 하는데 모터 보트로 관람을 해 주고 있어 매연냄새가 날뿐 아니라 석회석 동굴에 영향을 주게 될 것 같다. 메리씨의 설명에 의하면 환경오염을 고려해 차량운행량을 통제하는 방식을 사용 중이고 자연환경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최소한의 시설에서 묵으며 탐방하는 생태관광이 늘어나고 있다고 농업대학에서 임학을 전공한 현지 안내자가 설명해 주었다. 그는 새소리를 통해 어떤 새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였고 자세한 설명을 해주는 좋은 생태안내자 였다. 방갈로를 소개하면서 최소한의 시설만 갖춘 작은 방갈로에서 묶으며 생태관광을 하는 추세가 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담배잎을 말아 시가를 제조하는 모습도 시연으로 보여 주었는데 아주 인상적이었다. 농업건강학이라고 소개했다. 일반 담배는 질이 떨어지는 담배잎에다 화학첨가물이 섞여 있어 자연 시가와는 비교될 수 없다고 한다. 쿠바산 시가에 관한 상당한 자부심이었다. 비냘레스 중심지역 동네를 통과하는데 단층 집들이 민박을 받을 정도로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주유소에서 대기중에 민박집 한 곳을 방문해 보니 내부가 정갈하게 잘 단장되어 있어 숙박하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였다. 방 하나에 25-30쿡(3만원 내외) 정도라니 충분히 이용해볼 만 한 것 같다. 여행에 제한이 없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다. 정호현실장은 쿠바청년과 결혼해 자식(이안) 낳고 살면서 쿠바 사회를 생생하게 보고 느낀 점들을 잘 설명해 주었다. 특히 남녀간의 연애와 결혼생활 관련해 쿠바 사회의 자유로운 실상(자유로운 성관계과 이혼하지 않은 것이 예외적일 정도라는 사회)은 매우 충격적이었는데 오히려 여성들은 반갑게 듣는 분위기 였다. 여성차별과 억압 마초이즘에 관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어 그런 것이리라.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정호현 실장으로부터 쿠바 사회에 관한 많은 것들을 들을 수 있었고 쿠바 및 중남미 지역 시민 교류를 포함해 중미 평화여행 및 평화운동과 관련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여덟째날(1월 3일 금)
간간히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 파도가 높다. 그런 풍경이 참 아름답기도 하다. 통신을 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안을 써 봤지만 불가했다. 양해택씨의 KT 휴대폰으로 문자를 주고 받을 수 있을 뿐이었다. 알라마르 농장에 도착해보니 7년전 모습 그대로였다. 비닐로 신발을 감싸고 안내를 따라 농장에 관한 기본적인 설명을 듣고 나서 농장 곳곳을 돌아보았다. 현재 160명의 조합원이 함께 일하고 있으며 2013년에 8천명이 방문했다고 한다. 정부가 무상으로 임대해 주었고 5%의 세금을 납부하며 절반은 조합원에게 배분하고 나머지는 재투자 한다고 한다. 대부분은 남미 지역에서의 방문이었고 당일에도 아르헨티나 청년들이 실습을 하고 있었다. 식물의 특성을 이용한 자연농법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지렁이를 이용한 좋은 퇴비를 만들고 일반 흙과 섞어서 작물을 재배하고 있었다. 각종 화초를 통해 병충해를 예방하고 접근 자체를 막으면서 혼작 또는 윤작을 기본으로 채택하는 것이었다. 월 1회 회의를 통해 민주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성과가 많아 참가자가 늘어났지만 이제는 포화상태에 이르러 다른 부지를 찾아야 한단다. 재회를 기대했던 노엘 대표는 미국 출장중이라 만날 수 없어 아쉬웠다. 시내로 돌아와 나시오날호텔에 들러 돌아보는데 비가와서 야외의자에서 커피 한잔 하기에는 부담되는 정도라 해안을 바라보며 멋진 전망을 즐기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다시 식당으로 이동해 식사를 하고 폴리클리닉 등 주변 풍경을 살펴볼 수 있었다. 예정된 ICAP(국제우호협회) 방문을 위해 이동하는데 작은 공원도 있다. ICAP 에는 7.26 몬테카 병영 습격일에 맞춰 기념 현수막이 걸려 있다. 올 해가 혁명 55주년이라 관련 행사가 적지 않은 것 같다. 혁명을 진행하면서 대중동원에서는 북한과 유사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개발독재의 또 다른 변종같은 느낌이 든다. 1시간 반 정도 진행된 간담회에서 ICAP 역사와 사업활동 안내를 해 주었고 참가자 개별 소개 후 궁굼한 점들에 관해 질문을 하면 알리사 부대표로부터 솔직하게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올 해 10월 27-31일에 개최되는 세계연대의 날 행사에 참석해 줄 것을 요청하는 초청장도 받았다. 시내 중심가로 이동해 스페인 성당에서부터 옛날 풍경이 그대로 남아 있는 유적지 건물과 거리를 소개 받았다. 오후 7시에는 미리 약속해 둔 레스토랑에서 쿠바한인 후손인 안티니오 김 대표와 박 부대표를 만날 수 있었다. 외모로도 동양인으로 인식될 수 있을 정도였고 소수로 차별 받지는 않았다고 하셨다. 정실장의 설명에 의하면 원래 멕시코에서 출발해 도착한 곳은 다른 곳인데 쿠바 사탕수수가격이 폭락하면서 에네켄농장이 있는 마탄사스로 이동해 정착하게 된 것이란다.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모두 건강하셨고 반갑게 인사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동안 한국 정부와 기업 등에서 많은 관심을 보여 주었다고 고마워 하셨다. 나오기로 한 손녀딸이 오지 못해 아쉬웠지만 가지고 간 소주로 건배도 했고 김치를 준비해 오셔서 우리가 가져간 김치도 내놓고 함께 반가운 식사를 했다. 아쉬운 작별을 하고 모로성 포격식을 보러갔다. 많은 관광객이 몰려 들었고 군인복장을 한 사람들이 격식에 따라 성내를 걸어 포격식장에 도착해 아바나만을 향해 한발의 대포를 쏘는 의식이었다. 포격식 장 근처에서 한국 관광객을 안내 중인 펠리페선생을 만나 반갑게 인사하고 가벼운 안부를 나눈 후 화요일에 연락해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호텔로 돌아오니 10시가 되었다.
아홉째날(1월 4 토)
바람이 불어 파고가 높고 간간히 비가 내린다. 8시 반이 되어 출발했다. 결국 인터넷 통신을 하지 못한 채 코파카바나 호텔을 떠나야 했다. 이동 중에 가이드 마리씨의 설명 그리고 정실장의 체험담에 기초한 쿠바사회에 관한 여러 가지 설명은 쿠바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요시다 타로교수의 책에 소개된 내용과 괴리가 있는 점도 곧잘 발견되었다. 중간에 휴게소를 들러 잠시 쉬었다가 트리니다드롤 가는 길에 이캅 관계자가 동승해 현지 설명을 해 주었다. 18세기 스페인이 마지막으로 건설한 도시라고 하는데 바닥에는 자갈돌이 깔려 있고 집은 당시 풍경 그대로이다. 이른바 도시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아 답답했을 터인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지역을 가꾸려는 모습을 보게 된다. 오후 2시에 도착해 늦은 점심을 먹고 고풍스러운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트리니다드의 오래된 도시를 걸으며 느끼고 칸탄차라 바에서 두 개의 드럼을 치는 노인을 만나 좋은 솜씨의 연주를 들을 수 있었다. 박물관과 미술관 등을 돌아보면서 설명도 듣고 기념품점에도 들러 그림 등 기념품을 사기도 했다. 오후 5시가 다 되어서 앙콘해안의 호텔에 도착했다. 해안가에 자리잡고 있는데 아주 멋진 해안이다. 모든 것이 포함된 방식이라 편하기도 했다. 모두 바다로 들어가 수영을 즐기다가 어두워져 수영장으로 이동해 추가 수영을 하기도 했다. 야간에는 무용수와 가수가 등장해 격조있는 공연으로 모두를 즐겁게 해 주었다.
열흘째(1월 5일 일)
아침에 바닷가로 나가 수영도 하고 해변 백사장을 걸으며 해안사구도 보고 꽃무늬 산호 조각도 주워서 기념으로 챙겼다. 이런 저런 생각들을 했다. 휴양하기 좋은 곳이라는 생각에서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분위기도 있지만 동시에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나야 하는 여행이라는 생각에서 버스로 이동을 시작했다. 가이드 메리가 앙콘해변의 망글로브 숲에 관해 설명하면서 해적들이 출몰하고 머물렀던 이야기까지 해 주었다. 성실하고 진지한 가이드다. 점심때가 되어서야 산타클라라에 도착했다. 기념박물관으로 먼저 도착했다. 체게바라와 볼리비아 게릴라 전 희생자의 벽면 묘지석 앞에 작은 설명 표지석이 있고 게바라 석관 앞에는 홀로그램으로 작은 별이 있다. 그리고 묘지에는 꺼지지 않는 영원한 가스 불이 타오르고 있다. 모스크바 크레믈린 광장에 있는 병사들의 희생을 추모하고 기억하는 가스불과도 흡사하고 서울 남산의 안중근 기념관에 있는 홀로그램 불빛도 연상된다. 박물관에는 흑백사진처럼 잔잔하게 지난 역사를 보여주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사진에서부터 쿠바혁명을 시작하다 체포된 1953년 7월 26일 몬카타 병영 습격사건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사진과 유품을 중심으로 전시하고 있었다. 사진을 찍을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무덤도 사진을 찍을 수 없어 아쉬웠다. 대신 쿠바혁명과정에서 산타클라라 전투 희생자를 추도하는 묘지를 둘러 보았다. 그리고 주변 마을이 보여 가까이 가려다가 환영하는 아줌마가 사진을 찍고 나서 1달러를 요구하는 것 아닌가. 동남아 난민 어린이과 어른들에게서 볼 수 있었던 모습이었다. 저녁에는 1830이라는 레스토랑 바에서 운영하는 살사댄스 공연장을 함께 갔다. 젊은이를 중심으로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흥겹게 와서 즐기는 모습이 문화적 자유로움을 느끼에 된다. 흥미있고 재미있기도 했지만 그 역시 단편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카타르시스 시키는데는 아주 좋았다.
돌아보면 욕망을 절제함으로써 갖게 되는 인간의 높은 의식 수준과 수도원 분위가 있으니 그것은 인간의 원초적인 중심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열한째일(1월 6일 월)
아침에 일어나 숙소 주변을 돌아보니 그란마호 기념관이 있고 혁명박물관도 옆에 있었고 프라다 길을 따라 중앙공원과 말라콘까지 돌아 보았다. 항구 근처에서 여성 4인은 별도로 그림구입 등을 위해 내리고 열대농업연구소로 향했다. 호세마르티 공항 주변을 거쳐 연구소에 도착하니 7년전 방문했던 그 모습 그대로 였고 세미나실도 같은 공간이라 친숙감이 들었다. 쿠바의 농업에 관해 그리고 특히 도시근교 오가닉포니크(유기농업)에 관해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쿠바가 지리적으로 식량자급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소개했는데 유휴 농지가 많은데 이해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했다.
마치고 닭고기 전문식당으로 이동했다. 규모가 상당했다. 쇼핑을 마치고 온 여성들과 합류해서 식사를 하고 혁명광장을 잠시 들렀다. 호세마르티 기념탑과 체게바라 시엔푸에코스(혁명 직후 비행가 추락사고로 사망)얼굴이 설치된 건물 등에서 사진을 찍고 문화의 집으로 이동했다. 1층 전시실에는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고 지하에는 도자기 등 흙공예를 하는 곳이었다. 93세 할머니가 스케치를 하면서 작업을 하는 모습을 보고 감탄하기도 했다. 어린아이들이 자신의 얼굴을 만들기도 한다. 2층에는 음악레슨이 있었다. 우리를 위해 즉석 연주도 해 주었는데 교수가 학생 두명을 가르치는 중이었다. 연극모임에도 갔는데 유명한 연출자가 청소년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우리를 위해 마임을 준비했다고 한다. 10여명이 함께 하기도 하고 두명이 한조가 되어 하는 마임도 차례로 선보였다. 아이들의 진지함과 연출자의 기회 안목과 방문자를 위한 배려에 박수를 보냈다. 춤 모임도 있는데 어제 밤 보았던 살사도 있고 집단으로 함께 즐길 수 있는 춤도 함께 추는 즐거움도 있었다. 음악공연을 준비하면 악단의 연습장면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문화의 집이 무니시피오마다 있는데 예산 부족의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 이어서 유아공동체와 마을발전사업을 하는 곳을 찾았다. 3인조 밴드가 연주를 통해 마을의 여러 가지 역할을 하고 있었고 음악CD 판매를 통해 기금으로 제공하고 있다는 설명도 해 주었다. 우리를 위해 몇 곡을 연주해 주었다. 주민들이 수공예품을 제작해 전시 판매하는 곳이기도 했다. 폭우가 쏟아져 길이 막혀 버리고 전시 공간에 물이 들이지는 작은 사건이 생겼다. 대기하다 물을 퍼내고 한참을 지나서야 다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1830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위치에 독특한 풍경으로 품격있게 차려진 곳이었고 와인을 곁들인 식사도 맛있었다. 마당은 지난 일요일 살사공연장으로 처음 방문한 곳이었다. 해가 진 뒤라 정원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는 것이 좀 아쉬웠다.
열두째날(1월 7일 화)
안토니오 메야 국제캠프장을 방문했다. 호주에서 브리기다를 위해 방문한 팀이 있다고 한다. 미구엘교수는 가이미토 지역의원을 지내면서 국회의원까지 되었지만 직업을 대학에서 교육학을 가르치는 교수이며 자원봉사 활동 차원이라고 했다. 활달하게 잘 설명해 주었는데 쿠바의 정치시스템과 지방자치에 관해 특히 주민참여에 관해서도 정부와 국회 광역지방의회(푸로빈스) 기초지방의회(무니시피오) 를 포함해 잘 설명해 주었다. 612명의 국회의원 중에서 대통령 1인 수석부통령 5인의 부통령 1인의 국무장관 그리고 23명의 위원 등 총 31명을 선출하고, 정부의 장관은 대통령의 추천으로 국회에서 승인하며 부결된 적은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 중에서 대통령과 수석 부통령 국무장관은 전업 직업에 해당하고 나머지는 각자의 직업을 가진 채 참여한다고 했다. 지방에서는 가이미토지역의 경우 58명의 지방의원을 선출하고 거기서 대표 1인이 국회의원이 되며 부대표 1인도 선출한다고 한다. 질문도 잘 받아 주었고 활달하게 잘 표현해 주는 것이 반가웠다.
이어서 폴리클리닉을 찾았다. 1차 진료기관에 해당하는데 수십명의 의사와 많은 간호사가 근무하고 있었다. 젊은 의사가 병원을 돌며 설명해 주었다. 기기와 시설들은 낡고 허름해 보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한국의 의료수준 특히 장비와 시설면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지역 주민 모두를 대상으로 건광관리를 하는 것이 큰 장점으로 느껴졌다. 무상의료이기에 정부의 재정지원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질병의 증상과 종류에 따라 오랜 경제 봉쇄하에서 그것도 작은 시골 마을지역이니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는 여러 가지 병원 운영사항에 관해 거침없이 답변해 주었다. 쿠바에서는 의사는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집단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몇가지 질문도 이어졌다. 가이미토에서 정실장의 시댁 부모가 살고 있는 집을 방문했다. 1층 아파트인데 쿠바의 연인 영화 포스터가 있고 며칠간 할머니가 살펴 주었던 아들 5살된 이안과 함께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영어와 한국어 스페인어를 두루 사용하는 터라 다들 기대된다면서 관심있게 한마디씩 했다.
오다가 라틴아메리카 의과대학을 지나치면서 메리씨가 설명해 주었다. 요트장이 있는 바닷가에 자리잡은 중국식당 다빈루(多賓樓)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이어서 산호세 판매장을 방문했다. 각종 그림과 공예품들이 잔뜩 전시되어 있고 외국인들이 많이 이용하는 곳이었다. 여유롭게 시간을 가지다가 헤밍웨이가 자주 들러 식사하며 모히토를 마셨다는 호텔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헤밍웨이 동상이 사진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고 여성들은 옆에서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외국인 관광객으로 짐작되는 많은 손님들로 자리가 붐볐다. 그래서 체게바라와 헤밍웨이가 쿠바를 먹여 살린다는 농담도 한마디씩 했다. 비가 오는지라 걷지 못하고 호텔로 돌아오고 말았다.
열세째날(1월 8일 수)
예정된 출발일이라 마지막 일정으로 호텔옆 혁명박물관을 관람했다. 9시 시작이라고 하는데 꿈지락 거리느라 조금 늦게 들어갈 수 있었고 8쿡이나 되는 비용에 박물관 티켓에 안내지 한장 없는 채로 작은 티켓 영수증도 제시하면 찢어서 통에 넣어 버리는 모습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1층 계단 중앙에 자리한 호세 마르티 상 주변에 나 있는 총알자국들과 3층에서부터 시작되는데 7년전에 와서 본 모습 그대로 였다. 3층에는 사진과 당시 유품들을 중심으로 시대별로 전시되어 있었고 일부 공사를 하고 있고 청동 조각상이 세워진 것 외에는 변화를 느낄 수 없어 심지어 초라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혁명을 그렇게 강조하는데 정작 박물관이 이런 정도라니 좀 허탈했다. 일찍 호텔을 나서 공항으로 향했다. 수고해준 가이드 메리에게 작은 선물도 했고 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눴다. 공항에서 펠리페씨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는데 시간이 어긋나 만날 수 없어 통화만 하고 말았다. 쿠바사회를 좀 더 알고 싶어 이런저런 대화를 하고 싶었는데 아쉬웠다. 그래도 메일을 주고 받기로 했다. 출국세 25유로를 내고 나니 왠지 오가며 너무 비싼 비용을 지불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출국장은 새 단장을 하고 있었다. 정실장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공항 출국장으로 들어가니 새단장한 가게들이 고객을 유혹하고 있었지만 정작 열의는 보이지 않았다. 날씨가 쌀쌀한데도 에어컨을 계속 켜 둔 상태라 ‘공무원들이 고객의 필요를 체감하지 못하고 있고 심지어 에어컨 켜두고 놀고 있는 것 아니냐는 농담성 비아냥도 나왔다. 쿠바 사회주의의 현실적인 실상이라고 언성을 내는 한국인 관광객도 있었다. 샌드위치와 햄버거로 간단하게 점심 요기를 하고 칸쿤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번에도 만석이었다.
칸쿤공항에 도착하니 수많은 승객들이 쏟아져 나와 수속에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김형철선교사께서 이미경사모와 함께 두 대의 차로 나와 주셨다. ATM기계에서 돈을 찾고 김목사님 내외분과 함께 몇 사람이 차를 나눠 타고 메리다로 향했다. 준비해 오신 주먹밥을 맛있게 먹었고 겨울임에도 가을날씨처럼 간간히 비가 내리는 정도였다. 직선에 가까운 고속도로를 4시간 달려 메리다 시내 레스토랑에 도착해 따콘이라는 전통음식을 먹었는데 특색있는 맛을 느낄 수 있었다. 김목사님으로부터 유카탄주 그리고 한인이민사와 관련해 많은 이야기를 듣고 또 의견도 나눴다. 특히 양극화가 극심한 현실에서 기득권세력이 어떻게 그러한 기득권을 유지하는 제도와 사회분위기도 설명해 주어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메리다 지역 마야인들이 낙천적이기는 하지만 미래를 준비하지 못하고 있다고 아쉬워 했다. 한편 멕시코 세금의 30%가 관광과 석유 수입이 많은 유카탄주에서 나올 정도이고 그래서 한 때 독립의지를 밝인 적도 있었다고 한다. 식사 후 주청사 2층 전시장을 방문했는데 스페인 식민지배로 인한 마야인들의 고통과 저항을 그린 대형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유카탄주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주청사 주변 성당과 공원을 잠시 돌아보고 산타 마운티카 신학교에 도착했다. 1991년에 이곳에 온 조남환목사와 장순례사모님과 함께 반갑게 맞아 주셨다. 깔끔한 게스트하우스를 이용할 수 있었고 널찍한 방에서 편히 쉬기도 했고 오랜만에 인터넷이 되는 환경이라 늦도록 작업을 좀 할 수 있었다.
열네째날(1월 9일 목)
아침 식사는 사모님께서 정성을 다해 푸짐하게 차려 주셨다. 조남환목사로부터 유카탄 지역에 처음 이민 온 역사를 다시 들을 수 있었는데 너무 부정적으로 밝혀지고 있으나 사실과는 다르다고 강조하셨다. 멕시코 농장주들이 한인들을 위해 많은 배려를 했는데 일부 열악한 처우를 전부로 부각시킨 점들을 지적하셨다. 사실을 다시 확인해야 할 부분이다. 푸짐한 식사에 샌드위치까지 준비해 주셔서 들고 마야 문명의 정수인 체첸잇싸(잇싸족의 세마을)로 이동했다.
김형철목사께서 좋은 안내자 역할을 해 주셨는데 뱀과 재규어를 형상화한 거대한 신전건축물에서부터 각종 석조 건축물들 그리고 운동경기장도 설치되어 있었다. 석조건축물이라 오래 보존될 수 있었고 사람을 압도할 것 같기도 했고 1천개의 돌기둥은 기둥에 사람얼굴들이 새겨져 있는데 전투에서 희생된 전사를 기리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셨다. 작은 호텔이라 찾기 어려웠는데 오후가 되자 비가 내리기 시작해 칸쿤 바닷가에서 즐길 기회를 포기해야 했다. 작은 호텔에 도착해 잠시 쉬었다가 버스를 타고 ISLA이스라 라고 하는 작은 바닷가 쇼핑 상업지역으로 이동해 따콩으로 저녁을 먹고 잠시 산책을 한 후 다시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맥주 한잔을 하면서 그동안의 여행에 관한 평가를 했다. 좋은 여행지와 아쉬운 점들을 평가하고 주최측의 준비와 기획에 실망한 것까지 밝혔다. 여행사도 아니고 협동조합 방식으로 충분히 책임을 공유하지도 못한 점들도 지적했다. 기관방문이 너무 많았고 즐길 수 있는 자유시간을 많이 갖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오래된 도시 트리니다드가 좋았고 앙콘해안에서의 휴식이 너무 짧았다고 했다. 쉼과 힐링이 많이 포함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여성들의 의견이 많았다.
열다섯째 날(1월 10일. 금)
화창한 날씨가 떠나는 시간을 아쉽게 느끼게 했다. 준비된 호텔 택시로 9시에 출발해 금방 도착해 돈을 찾아 달러로 환전해 전해 주는데 페소와 달러의 환전차가 너무 커 부담되었다. 여섯명은 달라스행 탑승 준비를 하면서 헤어졌다. 시간 여유를 갖게 되어 셔틀버스를 타고 3터미널에서 2터미널로 이동해 한참을 머물다가 지난번 숙박했던 공항 근처 호텔로 연락해 무료 셔틀버스를 이용해 숙소에 도착해 결제를 하려니 되지 않는다. 연락해 보지만 대책이 서지 않는다. 덕분에 로비에서 그동안의 여행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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