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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것이 아름답다' 원고 2020.6.7>
코로나19 이후, 어떻게 살 것인가?
변현단 (농부. 토종씨드림 대표)
옛것의 향수는 우연이 아니다
요즘 방송가에서는 트로트 가수들이 대세를 이룬다. 국민의 30%가량이 트로트에 열광하면서 코로나19로 인한 ‘강제 칩거’로 인한 ‘당혹스러움’에 ‘재미’를 붙이고, 열풍을 일으킨 가수들의 인생 역정에 ‘치유를 받고’ 있다고 말한다. 작년만 하여도 트로트에 심취한 어린 자식을 ‘신기한’ 아이로 취급하면서 ‘사회성의 우려’를 금치 못했다는데, 초등생이 트로트를 부르고 어른들이 트로트 ‘광팬’으로 열광한다. 우리의 조부모와 부모 세대가 듣고 불렀던 일제 강점기의 고통, 한국전쟁의 피난민으로서의 슬픔, 그리고 지금과는 사뭇 다른 ‘남녀 사랑의 애절함’을 담은 전통트로트는 2020년 온 가족이 즐겨 듣고 부른다. 예상치 못하고 코로나19를 겪으며 ‘집콕’하면서 ‘여가’를 방송이나 온라인에 집중 의존하면서 얻게 된 ‘우연한’ 방송 문화 트렌드일 수 있지만, 혹여 ‘풍요로운 삶’이 무너지면서 80-90년대 이전으로 회귀하는 ‘시대적 필연성’을 알려주는 것은 아닐까? 짧고 선명한 발음의 서울 표준어로 교육받은 세대들이 흑백 텔레비전시절과 사뭇 비슷한 북한 가수들의 ‘길게 뽑는 전통 트로트의 발음발성법’에 ‘향수’를 불러 일으키며 ‘옛 것을 버리고 새 것만을 취해왔던 시대’가 끝나고, 분절됐던 문화, 구시대로 치부되었던 문화를 묶어주는 ‘계기’가 되어 ‘익숙하되 새로운 모습’으로 가는 것은 아닐까?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던 13년 전, 우리가 버렸던 전통지식과 토종씨앗을 다시 찾아 ‘독립운동’을 벌이던 민간단체가 지자체의 관심을 받게 되고, 다국적 기업과 신자유주의 국가에 의해 무자비하게 전통자원을 약탈당해온 당사국들이 ‘이익 공유’의 목소리를 담은 ‘나고야 의정서’가 발효되어 전통자원 보호에 나서도록 강제한 것이 단순히 우연의 일치일까? 소수의 자각한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닥친 코로나로 인한 세계 공황 상태에도 놀라지 않고 늘 그렇게 자신의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오래전부터 예견한 것들이었고, 그래서 자신부터 실천한 삶이었으니까. 코로나19는 생명의 본능-지속성을 위해, 광폭한 자본주의 국가와 생활양식, 무분별한 사고체계에 대해 ‘병약한 자의 죽음과 집단 감염’으로 ‘자본주의’에 마지막 경고를 나는 환영한다. 코로나19는 자본주의 문명에서 새로운 문명으로 넘어가는 다리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문명과 멀어질수록 재난에서 멀어진다.
6월초, 찔레꽃이 한창일 때는 가뭄이 찾아온다. 낮에는 뜨거운 햇살이 이제는 부담스러울 정도의 초여름 날씨이지만 밤에는 쌀쌀한 기운이 들어앉아 아궁이 불을 떼지 않는 온돌방에서는 아직도 솜이불을 치우지 못하고 있다. 예년 같았으면 일주일에 기껏해야 이삼일 밭에 씨앗 파종을 한창이라 풀매기도 할 틈도 없었을 터인데, 올해는 코로나 덕택에 바깥 일정이 연기, 취소되어 농사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해마다 토종종자 증식과 연구를 위해 수 백 종 작물이 심겨지는 밭이 정갈하다. 일천 평이 넘는 경작지를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내 손으로 직접 하는 농사와 살림이니 할 일은 널리고 널렸지만 전국으로 토종씨앗 활동에 허덕였던 터라 올해는 나에게는 축복받은 한 해가 되었다. 도시 사람들에게 맞아죽을 일이지만 “12월까지 이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은근히 일고 있다. 산골에서 사는 나는 마스크 쓸 일도 손 소독 할 일도 없으니 딴 세상 얘기로 들릴 수밖에 없다. 전쟁이 일어나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전쟁과 바이러스의 위협이 시시각각 일어나 식량 문제가 닥쳐도 사람들과 접촉이 한산한 산골에서 살고 있는 나로서는 체감하기 어렵다.
백신은 내성을 키우는 농약과도 같다.
내가 연두공동체를 하던 2009년 전국이 구제역으로 시끄러웠다. 축산농가의 돼지들이 아비규환이 끊이질 않았고, 구제역 매몰로 인해 토양과 하천 오염으로 언론 매체가 시끄러웠다. 대규모 축산업에 대한 경종을 울렸지만 축산업의 고질적인 병폐는 개선되지 않았고 이후 구제역은 또 발생했다. 감기몸살처럼. 조류독감도 마찬가지였다. 지원 금액으로 비워진 돈사와 계사는 다시 돼지와 닭으로 채워지고 사육방식은 변함이 없었다. 돼지와 닭의 숫자는 돈이니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고, 도시 골목의 음식점에는 고기집이 여전히 즐비했고, 저녁이나 주말에는 고기 굽는 냄새로 가득 메워졌다. 사스와 메르스 때도 마찬가지였다. ‘백신 개발’이 처방이었다. 코로나 19만큼은 아니었으나 사스가 유행했을 때 ‘타미플루’라는 백신을 개발 보급했고, 이후 한국 병원에서는 독감에 처방하는 일상적인 ‘감기약’이 되어버렸다. 해마다 벌레 극성으로 농사가 힘들다는 아우성에 ‘농약’처방이 전부인 것처럼. 사람도 ‘약 처방’ 외에는 별 다른 반성도 대안도 없다. 돈은 정부에서 지원하면 되는 일이었고, 처방약을 개발한 제약회사만 돈을 벌었고, 사람들은 ‘약’이 바뀌었을 뿐, 반복되는 수많은 사건의 경고를 무시하고 자연이든 인간이든 ‘약의 내성’만 키워 매년 독감예방 주사를 맞고 감기에 걸리는 무한반복 메카니즘에 있다. 코로니19의 백신 개발 소식도 이 메카니즘일 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노약자만이 아니라 젊은이들도 쓰러졌고 이동이 제한되고 세계 경제가 멈추었으니 모두 ‘뜨악’ 했다. 한국이 그렇게도 추종해마지 않았던 자본주의 최강국인 미국과 유럽사회의 본 모습이 드러났다. 빈부에 따른 국민의료시스템 문제는 바이러스로 죽어가는 사람들은 돈 없는 국민이었다. ‘돈’과 ‘편리’의 ‘무한 욕구의 확대’는 ‘국가 경제 패권 전쟁’중에 코로나19는 회생할 수 없는 일격을 가한 셈이다. 시공간을 자유롭게 움직여야 ‘돈’을 벌고 소비하는 구조를 무너뜨린 것이다.
지역자립 순환을 위한 지역화폐의 시동
재난지원금 40만원을 ‘곡성사랑상품권’으로 받았다. 곡성사랑 상품권으로 개 사료와 후레쉬 건전지를 사고, 주유를 하고, 방앗간에 쑥인절미 수공비를 치렀다. 갑자기 생긴 ‘꽁돈’이지만 일상적인 소비를 했다. 읍면에 마트와 식당, 오일장에는 평소보다 사람들이 많았다. 여기 시골에서는 코로나 때문에 드문 불출한 것도 아닌지라 갑자기 생긴 ‘꽁돈’은 ‘횡재’의 넉넉함을 즐겼다. 상품권은 곡성에서만 사용하고 조금 비싸도 이상하게 ‘뿌듯’했다. 코로나 덕택에 지역순환 경제를 살펴볼 일이 생긴 것이다. 소비경제를 부추기를 의도했던 대로 재난지원금은 소비경제를 부추겨 재래시장이나 인근 상점 상인에게는 위로가 되었다. 조카가 작년에 아파트 상가에서 과일 장사를 시작했다는데 코로나가 아니었으면 망했을 확률이 많았을 터, ‘다행스럽게’ 코로나가 터져 ‘동네’상점을 이용하고, 재난지원금의 사용처가 된 것이다. 달걀과 두부 콩나물을 사러 ‘동네 점방’을 들락거렸던 어린 시절의 모습처럼. 동네 점방의 활황은 서민들이 산다는 것이며, 소비심리가 작아진다는 의미다. 하지만 정부의 소비심리 구축은 불행하게도 최우선으로 버려야 개념이다. 어려울수록 허리띠를 졸라매는 것은 상식이다. 가능한 소비하지 않는 삶으로 가야 살 수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코로나 시대 이후에 삶의 기본이 된다. 돈을 적게 쓰면 쓸수록 생태환경은 좋아지고 우리 일상도 여유가 생긴다. 소비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을 벌기 위해 일했으며, 무한 욕망은 일과 소비중독으로 충전 없는 ‘쉼’없는 생활이었다. 바야흐로 소박하고 순환하는 삶이, ‘돈’이 돌지 않는 시대에서 살아갈 수 있다.
갈등과 앓이는 소통과 순환을 위한 기회
자연의 순리에도 갈등이 있다. 균형을 잡으려는 것 자체가 갈등이다. 갈등은 균형을 위한 기회이며 거쳐야 과정이다. 통증과 아픔은 마음과 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앓이와 증상이 없으면 몸의 상태를 알 수 없으며, 앓이를 무시하고 지나치면 대비할 틈도 주지 않는다. 인간의 삶이 이동을 짧게 할수록 돈이 덜 들고, 필요한 것은 품앗이와 자급을 통해 해결하며, 자신이 직접 만든 것은 소중하고, 제 아무리 복잡한 과정이라도 손쉽게 간명한 것을 찾는 ‘영리함’이 저절로 생성된다. 전통 농경사회로 돌아갈 리 만무하지만 코로나가 준 역설은 토종씨앗이 완전히 소멸된 시기 1980년대 이전의 삶으로 눈을 돌리게 한다.
집단적 획일교육에서 벗어난 교육의 장으로
서울올림픽이 처음 열리던 1980년대, 놀이 문화에서 관람의 문화로 변했다. 자신은 참여하지 않고 대상화된 놀이를 관람한다. 체육. 예술. 연극. 각종 문화가 그렇게 변했다. 대상화된 문화는 소수 문화 권력으로부터 조정당하고 세뇌당하기 십상이다. 움직여 놀아야 자신의 몸도 살고, 놀이도 산다. 교육은 몸이 터득하는 것이다. 코로나 이후 정부와 과학자들은 ‘온라인 교육’의 중요성을 말하지만, 교육은 몸으로 원리를 터득하는 것으로 스스로 움직이고 만들고 소비하는 삶의 교육이다. 전통적으로 ‘학’이란 배우고 익히는 것을 말한다. 대형 강의실에 또래 집단을 모아놓고 일방적으로 떠드는 꼰대 교육은 일제교육의 집단적 군사적 획일적 교육으로 지금까지 변함없이 주요 교육시스템이며, 입시교육에 가둔 요인이며 사설학원에 의존하는 교육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었다. 소규모 놀이판은 사회문화나 교육에서 다시 등장해야 할 것이다. 동네에서 할머니의 입을 통해 지혜를 배우는 손주는 부모의 등을 보면서 자라고 익힌다. 부모는 노동을 하느라 손주 대할 시간이 없다. 다시 가족과 소규모 공동체의 부활이며, 자연에서 다양한 상상력을 실현한다.
분절적인 현대의학에서 벗어난 일상 가정의료로
과학계에서는 ‘4차 산업혁명‘을 언급하며 오프라인을 축소를 더불어 온라인 교육과 온라인 쇼핑의 확대가 필연적이라고 말하고 있는 2020년. 일자리가 급격하게 줄어드는 한, 민중들에게는 ‘소비할 돈’을 구할 수 없으니, 온라인과 인공지능의 확대는 오히려 역차별과 역기능을 담당한다. 여전히 정부가 국가에서 벌어지는 담론이 본질의 해법은 무시하고 ‘단순 환치 방법’을 말하는 것은 수많은 ‘징후, 증세. 앓이’의 근본 치유를 무시하고, ‘증상 억제제 처방’만을 하고 있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오래된 미래’를 말하고 살아왔던 것처럼, 코로나19와 같은 수많은 생명의 위협들이 나타나기에 우리는 지향해온 삶을 변함없이 살아가면 될 일이다. 큰 규모에서 작은 규모로, 중앙에서 지역으로, 뭉침에서 흩어짐으로, 분절에서 순환으로, 자본시장에서 자급순환시장으로, 거대병원제약기업에서 민간 가정의료로. 엘리트 교육 중심에서 자립생활교육으로, 집단적 가치에서 개인적 가치의 그물망으로, 다단계기계시스템에서 손끝 살림, 너무 바쁜 일상에서 여유로운 일상으로 그동안 우리의 공감을 국민 대다수로 확대하는 것이다. ‘괴물’이란 자연이 만들지 못했던 것을 인간이 만들고, 인간도 감당할 수 없는 것을 ‘괴물’이며, 자연은 경험한 적이 없어 교란상태에 잠시 빠진다. 자연은 말한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은 자연이 치유해줄 수 없다‘고. 하지만 자연은 인간에게 알려준다. 물이 흐르는 대로 살아가면 자연은 치유할 수 있다고. 코로나19의 백신을 만들었다고 기뻐할 것도 못되는 것이 결국 ’타미플루‘처럼 일상적 감기약으로 되고, 또 다른 바이러스의 출현은 끊임없이 백신을 만든다. 경고를 무시하면 자연은 자신의 균형을 위한 운동 속에서 인간에게 고통과 질병, 죽음을 주고 받는다. 인간은 자연과 ’백신‘과 ’바이러스‘의 경쟁에 돌입한다. 인간이 승리할 것인가? 자연과 경쟁해서 자연은 잠시 물러나있을 뿐, 인간이 결코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공권력의 인권 침해 정당화를 벗어나려면
미국에서는 자택 격리 지침을 어기고 쇼핑을 하러 나온 코로나19 감염자와 접촉자 등 다른 3명에 대해서도 전자발찌 착용 의무를 부과했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동경로를 공개했다. ”애플과 구글이 20일(현지시간) 공동으로 개발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환자의 접촉자 추적을 위한 스마트폰 운영체제(OS) 프로그래밍 인터페이스(API)를 내놓았다. 테크크런치에 따르면 이 API는 근거리 무선통신 기술인 블루투스를 이용해 사람들이 서로 어울리고 만난 데이터를 축적해뒀다가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은 사람이 나오면 감염자와 접촉한 사람들에게 코로나19 검사를 권유하는 통지를 보낸다고 한다. 이용자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는 위치정보 장치는 사용하지 않고 정부기관이 몰래 이 기술을 활성화시킬 수 없도록 했다지만 스마트폰 이용자의 사생활 침해가 ’집단 감염방지‘ 미명하에서 대다수가 동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개인의 사생활 추적을 ’의도한 자‘에 의해 ’인신구속‘이 된 셈이다. ’집단건강‘을 볼모로 전자팔찌와 스마트폰 웹 장착 같은 인권구속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당장 사생활 침해를 하지 못하도록 법제화한다 하여도 항상 악용하는 자는 반드시 있다. 특히나 ’생명‘을 담보로 하는 것은 집단의 ’어쩔 수 없는‘ 지지를 받는다. 안 그래도 편리한 문명의 첨단인 스마트폰이 가져오는 악영향은 이루 셀 수 없어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구속의 늪으로 빠져가고 있다. 편리한 도구가 만들어낸 스마트폰 세상,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우선 인권구속을 피하려면 스마트폰을 끊어야 하는 현실이 다가오고, 각종 전자파에서 가능하면 멀리해야 한다. 스마트폰 사용을 줄이거나 끊어야 한다. 수많은 전자파에서 가능한 멀어져야 한다. 최소한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 80년대 이전의 생활방식에서 가능한 일이다. 스마트폰을 줄이거나 끊을 수 있는 생활은 ’생활방식‘의 변화에서 가능한 일이다.
생활의 변화, 더할 생각을 말고 뺄 생각을 해야
쉽지 않겠지만 개인적 결단으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우선 소비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 물질적 풍요의 대가가 가혹하다. 소비하지 않는 삶은 오히려 많은 것을 되찾을 수 있다. 먼저 자신의 면역력을 키울 수 있다. 현대생활방식은 면역력이 떨어뜨린다. 우선 면역력을 되찾으려면 ’너무 위생적인‘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위생은 감염을 막을 수 있지만 오히려 ’순수무결점‘은 감염에 취약하게 한다. 개들과 뛰어놀고 흙에서 뒹굴고 지금보다 덜 씻고, 덜 갈아입고, 세면세탁화장제를 덜 사용하는 것이다. 감염은 밀집된 도시에서 일어난다. 시골에서도 요양원 같은 시설에서 일어난 것처럼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코로나 ‘청정구역’이 된다. 따라서 자연과 일상적 접촉을 하며 농사를 짓는 삶을 사는 농촌이나 도시인과 접촉이 거의 없는 사람들은 감염 우려가 적다. 역시 농촌 농부는 흩어져 살며 먹고 살 수 있는 생활직업군이다. 농부의 일상은 몸을 움직이고 자유로운 직업이다. 덜 바쁜 생활, ‘멍 때리는 쉼’이 많은 생활을 해야 한다. 없으면 안 쓰고, 안 하면 된다. 다시금 단순 소박이다. 단순 소박은 자립이다. 코로나 시대, 진정 봉쇄하고 차단할 것은 각종 자본주의 문명에서 파생한 생활습관과 관성이며, 집중과 규모화와 거대화, 종속적인 다단계와 멀티 시스템이다. 오래된 미래를 사는 사람들은 전쟁이나 코로나19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오래된 미래를 살고 있는 사람들은 지진과 같은 자연의 거대한 균형 찾기에도 생명의 생로병사에 순응할 뿐이다.
2020.6. 7 곡성 은은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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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코로나 사태는 현재의 자본주의 생활 양태를 다시 반성해보는 계기가 되었읍니다.
우리 토농 가족들은 옛날방식에 가깝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이 생산한
광택이 번질번질한 아름다운 채소,과일들을,..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를 농축산물들을...
(근동에 돈사가 더러 있는데
어느핸가 남의 매실밭 관수시설하느라 하루를 버리고 있는차 바로 옆에 있는 돈사 인부들이 집채만한 허연 죽은돼지를
지게차로 빼내는걸 보았지요.
것두 두번이나..
수많은 항생제를 투여해도 죽어나는 사육환경..
우리지역은 복숭아 주산진데 농장주인이
먹을 복숭아는 약을 안칠까요?
약 친거 먹습니다.
변이 이렇습디다.
"그렇게 해선 세상 먹을거 없다고")
먹을거 지천인데 산딸기.왕고들빼기~~~
정체를 아는것을 먹는다는것에
아랫배쯤에서부터
차오는 자긍으로 아침을 맞습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다는데...인류도 그 끝을 향해 가고 있는듯 합니다. 어제인가 텔레비젼을 보는데 독일 젊은 세대들은 자신들을 마지막 세대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환경문제에 대한 획기적인 방향전환이 없다면 결국 인류는 자멸할 수 밖에 없다는 그들의 절박한 문제의식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앓이를 잘 받아들이고 끝내면 몸과 마음은 아주 홀가분 해집니다.
앓이를 인위적으로 없애면 병은 더 깊어집니다.
깨끗한 흙바닥에서 뒹구는것이 최고의 백신이고 치료제일 것입니다~^^
좋은글,잘 읽었습니다
늘,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생각합니다
삶을 바꾼다는 일,어려우니까요
밭 만들기를 열심히 하고 있구만요!
반갑습니다.
저는60대 직장 과 텃밭을 하는 여인 입니다
좋은 글 공감 합니다
우리것이 좋은것 이지만 시대의 흐름속에 변화 무상 합니다
씨앗을 찾던중 가입은 했지만 폰에 카페를 몰라 이제 찾아 왔지만 준회원
글쓰기가 안됩니다
이쁘게 봐 주세요
마지막 세대...라는 말이 위기의식을 느끼게 합니다...
없으면 없는대로 불편하면 불편한대로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1.04.21 00:56
지구위 절대 자인 듯...80억을 치닫는 바이러스(인간) 탐욕에 쩌든 군상들이 지구 위를 돌아 다니고 있기에...
지구는 몸살을 온 몸으로 치유 중인듯 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보내서...
탐욕의 댓가를 고스란히 받아 들여야...
후에 순리대로 사는 삶이 시작되겠지요.
자연과 함께 사는 온전한 삶이 오는 그날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