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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경주문화연구교사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월성
다리 건너가 진도이고 다리 아래가 울돌목, 명량이다.
명량에 벽파정이 있었고
벽파정 아래 명량에서 명량대첩이 있었다.
낫과 몽둥이와 수마석(돌)으로 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 바다가 명량대첩의 현장이다.
명량대첩에서 순국한 선열의 영혼이 이렇게 갯메꽃으로 피어났다.
법정 스님이 사랑한 달맞이꽃
진도대교 건너가다가 본 머루알?
진도대교 충무공상
진도에는 가로수로 무궁화나무를 심었다. 충무공의 애국혼과 관련 있을 것이다.
거북선 모형 우수영유스호텔
예민한 나는 꿀잠 주무시는 옆 사람들의 코고는 소리가
거북선에서 방포하는 천자 지자 총통의 소리처럼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숙직하는 관리인 아저씨께 부탁하여
숙직실 침대 위에서 겨우 잠들 수 있었다.
거북선 속에서 하룻밤을 지새며
최샘은 온지름 시조창, 한산섬을 아주 멋지게 해주셨다.
모두가 격군(노젖는 병사)이나 포수(현자 지자 천자 각종 대포 쏘는 병사)나
사수(활쏘는 병졸)나 살수(칼 쓰는 사졸)나 의병(수군 의병)이나 의승(승려 의병)이 되었다.
금골산 오층석탑
천불천탑 운주사의 탑들을 생각나게 하는 탑이다.
위도상 한국 최남단의 고려시대 탑이라고 한다.
금골산 중턱에는 마애불상도 있다.
고지도에도 금골산이 등장한다.
이필기 선생님의 명강을 잘 들었지만
나는 문제를 맞추지 못하여 사탕을 한 알도 받지 못했다.
나중에 농월정에 찾아가 달을 농사짓는 일을 거들어 드리고
차 한 잔 얻어먹어야 할까보다.
마음소리 이형우 샘 옆에는 악성 베토벤이나 들국화의 전인권을 닮은 샘이 보인다. ^^
명량대첩비
일제강점기엔 일인들이 경복궁을 공원으로 만들고 그곳에 갔다 놓았다고 한다.
정문부 장군의 북관대첩비는 본래 야스쿠니신사에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비문은 이민서가 짓고
전액은 구운몽을 지은 서포 김만중이,
비문 글씨는 이정영이 썼다.
'鳴梁之口'라는 글자가 보인다.
명량대첩비 탁본
공재 윤두서가 그린 동국여지지도
이 지도에는 남해와 서해의 섬들이 자세히 나와 있어서
난중일기를 읽을 때 꼭 필요하다.
지금 대학교 4학년이 된 딸 아이가 어릴 적에 크레용으로 지도에다 황칠을 하여
제가 야단을 치고, 지우개로 낙서 자국을 지운 흔적이 완연하네요. ^^
다산의 아버지 정재원은 공재의 손자이고
공재는 병와의 질서이다.
정재원은 처 진외조인 병와에게 경사를 배웠고
공재는 예학을 사사하였다.
정재원은 다산에게 경학을 가르쳤다.
비문이 햇빛에 반사되어 글자들이 보이지 않았고
사전에 설명을 부탁 받지 못하여 준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현장에서는 설명을 제대로 해 드리지 못하여
역사교사로서 미안합니다.
부족하지만, 명량대첩비를 우리말로 옮겨 보았습니다.
제가 꼭 권해드리고 싶은 책은
충무공의 난중일기입니다.
저는 오래 전에 윤두서의 동국여지지도를 지도가게에서 사서
족자로 배접하여 거실에 걸어두고
난중일기의 충무공 행로를 짚어가면서 읽었습니다.
충무공이 어떤 분인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감동! 감동! 감동!
난중일기
정유 9월 11일
흐리고 비가 올 것 같았다. 홀로 배 위에 앉아 어머님 그리운 생각에 눈물지었다.
천지간에 나 같은 사람이 또 어디 있으랴.
회는 내 심정을 알고 몹시 언짢아하였다.
13일
맑았으나 북풍이 크게 불어서 배가 안정할 수가 없었다.
꿈이 이상도 했다. 임진년 승전할 때의 꿈과 대강 같았다.
이 무슨 징조일까.
15일
맑음. 조수를 타고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진을 우수영 앞바다로 옮겼다.
그것은 벽파정 뒤에 명량이 있는데, 수효 적은 수군으로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으고 약속하되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모두 오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시행해서 작은 일일망정 용서치 않겠다."고
엄격히 약속하였다.
이날 밤 신인이 꿈에 나타나 가르쳐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진다"고 하였다.
23일
맑음. 이날 밤 몸이 몹시 좋지 못하여 허한(가만히 있어도 나는 땀)이 온몸에 배었다.
一揮掃蕩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血染山河 피가 산하를 물들이도다.
아산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는 충무공의 장도에 새겨진 명銘
대장장이 태구련이 만들어 충무공에게 선물한 것이다.
장군의 위용을 보이기 위한 의장용이지 실제로 전투에 쓴 칼은 아니다.
김훈이 일인칭 독백의 형식으로 쓴 소설, 칼의 노래도
물론, 난중일기를 대학생 시절 읽고 충격을 받아서
언젠가 소설로 쓰기를 희망한 데서 탄생하였습니다.
난중일기의 독백 형식이 김훈에 의해 그대로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노무현 대통령도 읽었던 칼의 노래도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이순신의 죽마고우였고 임진왜란 1년 전에
전라좌수사로 추천하는
몇 등급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인사를 하도록
한 사람이 서애 류성룡입니다.
그의 징비록도 같이 읽어 보시길 권합니다.
곧 개봉될 영화 명량도 한 번 보고 싶군요.
페르시아의 엄청난 해군을 테미스토클레스가 살라미스해전에서
격파하고 그리스를 구하는 역사와도 닮은 명량해전이니 말입니다.
통제사 충무 이공 명량대첩비
統制使 忠武 李公 鳴梁大捷碑
유명조선국통제사 증시충무공명량대첩비
有明朝鮮國統制使 贈諡忠武公鳴梁大捷碑
자헌대부 예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 경연 춘추관 성균관 의금부사 이민서(李敏敍, 1633-1688) 짓고,
보국숭록대부 행 판돈녕부사 이정영(李正英, 1616-1686) 글씨 쓰고,
숭정대부 행 지돈녕부사 겸 지 경연사 동 지춘추관사 홍문관제학 오위도총부도총관 김만중(金萬重, 1737-1692)이 전액(篆額)을 씀.
萬曆二十五年丁酉九月。統制使李公統舟師進駐於珍島之碧波亭下。大破日本賊於鳴梁之口。賊由是大衄。不敢窺海右逼湖圻。其明年賊遂罷兵歸。世謂中興戰功。公爲第一。而鳴梁之戰最奇云。
만력25년 정유(1597) 9월(난중일기에는 9월 16일에 전투가 있었다.) 통제사 이공이 수군을 통솔하여 진도 벽파정 아래에 가서 주둔했다. 일본 도적들을 명량의 입구에서 크게 부수니 도적들이 이로 말미암아 크게 기세가 꺾여서 서해를 넘보거나 호남과 충청 경기 땅을 감히 압박하지 못하였다. 다음해에 왜적들이 마침내 격파되어 군대가 철수하였다. 세상에서 조선이 망하지 않고 중간에 다시 일어나게 한 전공에 공이 첫째이며 명량의 전투가 가장 뛰어나다고 한다.
蓋公初以全羅左水使。聞賊至慷慨誓衆。進兵於嶺南界中。邀擊沿海賊。初戰於玉浦。再戰於唐浦。復戰於固城之唐項浦。皆以少擊衆。殺賊無算。卒乃大捷於閑山。威振海隅。乃進拜統制使。悉總三道舟師。仍屯閑山數歲。賊亦不敢復搶海路。
대개 공이 처음 전라좌수사로서 왜적이 침략해오매 분개하여 무리에게 맹서하고 군대가 영남 경계 속으로 나아갔다. 해안의 왜적을 맞아 치매 처음 옥포에서, 다시 당포에서, 또다시 고성 당항포에서 전투를 하였다. 이들 전투에서 모두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을 공격하여 왜적을 죽인 것이 헤아릴 수 없었다. 마침내 한산도에서 크게 승리하고 위엄을 바닷가에 떨쳐서 곧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충청, 전라, 경상 3도의 수군이 모두 한산도에 주둔한 몇 년 동안 왜적 또한 다시 바닷길로 감히 나가지 못하였다.
至是賊再擧大至。懲前之敗。蓄憾專力。欲衝海道直上。時公方被誣逮。命以白衣從元帥。俄復授舊職。於是元均已代公。大出兵迎賊。軍遂陷。盡喪其舟師器械蓄積而閑山已陷矣。顧公乘喪敗之後。無兵可戰。間關走海上。稍收亡卒。得戰艦十餘艘。遂進扼鳴梁。賊至者樓櫓蔽海。公督諸將進船。當海之隘口。連艫下碇。截中流待賊。鳴梁地迫陜。潮方盛水益急。賊從上流乘潮掩之。勢若山壓。士卒無生意。公意氣益勵。乘機奮擊。將士皆殊死戰船出入如飛。砲火四起。海水盡沸。賊船焚燒撞碎。沈溺死者不可勝數。賊遂大敗遁去。始戰方酣。巨濟縣令安衛少却。公立船頭大喝。命左右取衛頭。衛懼還入疾戰。是日破賊船五百艘。斬其將馬多時。
이 때에 왜적이 다시 군대를 일으켜 크게 몰려온 것은 종전의 패배를 갚으려고 한 것이다. 원한을 쌓고 힘을 오로지 하여 바닷길을 치며 곧바로 공격하여 왔다.
당시에 공은 무고를 입어 체포되었다가 권율 도원수에게 백의종군하도록 명을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삼도수군통제사에 다시 제수되었다.
이 때 원균이 공을 대신하여 통제사가 되어 큰 병력을 출동하여 왜적을 맞아서 싸우다가 군대가 끝내는 몰락하였다. 축적하였던 수군과 무기를 거의 잃고 한산도는 이미 함락되고 말았다.
공이 병력을 잃은 패배 뒤에 살펴보니 싸울 수 있는 병력은 없었다. 어렵게 바다로 달려가 패망한 군졸을 조금씩 거두어들이고 전함 10여 척(통제사에 다시 임명되고 올린 장계에는 "지금 신에게는 전선이 오히려 12척이나 있습니다. 今臣戰船 尙有十二"라고 하였다. 원균이 패배한 뒤에 배설이 끌고 온 12척에다 1척을 급히 만들어 전함이 모두 13척이었다.)척을 얻어서 드디어 명량을 장악하였다.
왜적이 몰려오매 다락배와 노가 바다에 가득하였다. 공이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전함을 나아가게 하여 바다가 좁아지는 입구에 가서 배를 잇고 닻을 내리고서 해류를 끊으며 왜적을 기다렸다. 명량의 땅이 좁아서 조류가 바야흐로 왕성하여 더욱 급류가 되었다.
왜적이 윗물(上流)를 따라 조류를 타고 덮쳐 오는 기세가 산이 내리 누르는 듯하였다. 병졸들이 전의를 상실하여 공이 전의와 용기를 더욱 북돋우었다. 기회를 잡아 떨쳐 일어나 공격하였다. 장수와 병졸들이 모두 결사적으로 전함을 나는 듯이 나가고 들어오며 대포를 사방에서 쏘니 바닷물이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왜적의 배를 불 지르고 부딪혀 부수고 침몰 시키고 익사 시킨 것이 헤아릴 수 없었다. 왜적이 마침내 크게 패배하여 꼬리를 감추며 물러갔다.
처음에 전투가 달아오르자 거제현령 안위가 조금 물러나자 공이 뱃머리에 서서 크게 호통 치며 곁의 사람들에게 안위의 목을 베도록 명하였다. 안위가 두려워서 다시 전투에 뛰어들었다. 이 날 왜적의 전함 500척(난중일기에는 200여 척이 다가왔고, 그 중에 133척이 아군의 배를 에워쌓다고 하였다.)을 부수었고 왜적 장수 마다시를 목 베었다.
時南民避賊從公者百餘船。未戰公令分船泛海爲疑兵。及戰船上觀者皆失色。謂公兵少當沒。及賊退戰氛息。見我舟屹然無恙。皆大驚爭來賀。自是軍聲復大振。
당시 남도의 백성들이 왜적을 피하여 공을 따른 자가 100여 척의 배가 되었다. 전투는 하지 않지만 공이 배에 나누어 타고 바다에 떠서 병력처럼 보이게 하도록 명하였다. 배 위에서 왜적을 본 자들이 모두 실색하여 공에게 병력이 적어서 당연히 패배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왜적이 물러나고 전투가 그치고 우리 배들이 우뚝하고 흠이 없음을 보고서는 모두가 크게 놀라서 다투어 와서 축하하였다. 이 때부터 군대의 용맹함을 다시 크게 떨쳤다.
夫自李鎰,申砬軍後。官軍及義軍。遇賊輒奔潰。無敢略齟齬其鋒者。及天子遣大兵來救。大震殲。次第復三都。然後我軍稍稍猗角之。如延安幸州之捷。雖一時稱雋。然皆藉天兵威重。僅能嬰城拒守得全。未有獨當一面鏖戰全勝如公之爲者也。
이일(1538-1601, 상주에서 패배), 신립(1546-1592, 충주 탄금대에서 패배)의 군대가 패배한 뒤부터 관군과 의병이 왜적을 만나면 문득 도망가고 흩어져 버리니 왜적의 예봉을 감히 무너뜨릴 수가 없었다. 명나라 천자의 대군이 우리나라를 구원하러 파견되어 와서 왜적을 크게 섬멸하고 차례로 세 도시(평양, 개성, 한양?)를 수복하였다. 이런 뒤에야 우리나라 군대가 점점 뿔을 세우고 연안, 행주 같은 곳에서 승리 한 것이 비록 한 때의 뛰어난 것이라고 칭찬할지라도 모두가 명나라 천자 군대의 위세에 힘입어서 겨우 성을 지키고 방어를 하여 온전할 수 있었다. 홀로 한 지역을 담당하여 전쟁을 하고 왜적을 무찔러서 공과 같이 모두 승리한 자는 없었다.
故賊屯湖嶺六七年。不敢蹈西海一步地。南原旣陷。賊勢尤張。而猶狼顧不得逞者。繄公是賴。至若露梁之戰。大戰而又大勝。臨陣殞命。卒以身殉國。公死而賊亦退。其後朝廷論平賊功。以公爲元勳。追賜宣武功臣號。贈官至左議政。立忠愍祠於露梁以祀之。
그래서 왜적이 호남과 영남에 주둔한 6, 7년 동안에 서해로는 한 걸음도 감히 밟을 수 없었다. 남원성이 이미 함락되고 왜적의 기세가 더욱 등등해져도 오히려 주변을 살피는 이리처럼 굳셀 수가 없었던 것은 아, 공에 힘입은 것이다. 노량 전투에서 크게 싸우고 또 크게 승리하고 진중에서 운명하였다. 마침내는 몸 바쳐 순국하였다. 공이 죽고 왜적 또한 물러났다. 그 뒤에 조정에서 왜적을 평정한 공을 논함에서 공의 공훈을 으뜸으로 삼았으며 선무공신의 호를 추서하고 좌의정 관직을 추증하였다. 충민사를 노량에 세우고 제사를 지낸다.
公諱舜臣字汝諧。牙山人。公平居循循雅飾如儒士。及其臨難討賊。決策出奇。雖古名將不能過。而忠義奮發。有可以貫日月而感鬼神者。是以所在克捷。威懾隣敵。義動中國。若公者乃古所謂眞將軍可屬大事者。非專以一時取勝爲可貴也。其行己之大方。用兵之大略。國史及他銘述備矣。不佞少過鳴梁。觀公戰地。慨然太息。彷徨久之。想見其爲人。今南人立石於其地。使來謁銘。義不敢辭。遂略序其舊聞。系(繫-이충무공전서)之以詞。
공의 휘는 순신이고 자는 여해이며 아산인이다. 공이 평소 행동거지는 차분하고 단아하여 선비 같았지만 전란을 당하여 왜적을 토벌하매 책략을 내는 것이 뛰어나서 비록 옛날의 명장이라 하여도 공을 능가할 수가 없다. 충의를 떨쳐 내매 해와 달을 꿰뚫고 귀신을 감동시킬만함이 있다. 이러한 승리가 있어서 그 위엄은 이웃나라의 적군을 두렵게 하였고, 그 충의는 중국을 감동시켰다. 공과 같은 자는 곧 옛날의 이른바 참된 장군은 큰일에 속하는 것이라는 것이니 오로지 한 때의 승리를 취하여 귀히 여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공의 몸가짐이 크게 방정함과 군대를 지휘하는 큰 지략은 나라의 역사와 다른 비문에 갖추어 서술하였다.
불초한 내가 어릴 적 명량을 지나다가 공의 전적지를 살피고서 슬퍼하며 한숨을 쉬며 오래도록 서성이며 그 사람됨을 떠올려보았다(이민서는 14세에 진도로 유배간 아버지 이경여를 따라갔다.). 지금 남도 사람들이 그 땅에 빗돌을 세우고 찾아와 비문을 구하니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 옛날의 견문을 적어 간략한 서문을 짓고, 노래로 공의 행적을 잇는다.
詞曰。사왈
鳴梁口兮隘而束。명량의 입구여 좁고 묶여 있네.
海潮蹙兮汩兩峽。조류의 대지름이여 두 협곡 사이로 흐르네.
兵因地兮利出奇。군대 지형으로 말미암음이여 승리 탁월하네.
藐群醜兮勢莫支。아득한 왜적이여 기세를 지탱하지 못하네.
士卒奮兮鼓方震。병사들 떨쳐 일어남이여 북소리 바야흐로 진동하네.
俄殲賊兮蕩餘燼。잠시간에 왜적을 섬멸함이여 남김없이 쓸어 버렸네.
惟將軍兮勇義俱。아, 장군이여 용맹과 충의를 겸비하였네.
扼海道兮海無虞。바다를 장악함이여 바다에 걱정 없어졌네.
怒濤擊兮蛟鯨趨。성난 파도가 침이여 이무기, 고래가 쫒네.
觀戰地兮想英謨。전쟁터를 살핌이여 영용한 책략 떠올리네.
靈皇皇兮赫海隈。혼령의 밝고 밝음이여 바다 모퉁이를 빛나게 하네.
呵星辰兮走風雷。별들을 꾸짖음이여 바람과 우레를 일어나게 하네.
海不竭兮石不泐。바다가 다함없음이여 빗돌은 갈라지지를 않을 것이네.
昭壯烈兮耀無極。밝고 씩씩하고 매움이여 빛남이 끝이 없네.
숭정 기원 후 을축년(1685) 3월 일에 글씨 씀.
가선대부 행 전라우도수군절도사 박신주(朴新冑) 숙종11년 무진(1688년) 3월 일 세움
감역(監役) 출신 한시달(韓時達)
-西河先生集卷之十四, 碑銘, 故統制使李舜臣鳴梁大捷碑,
-李忠武公全書卷之十 附錄二, 鳴梁大捷碑[大提學李敏叙]
-명량대첩비 탁본
아래는 을사조약 때 자결한
매천 황현 선생이 울돌목과 명량대첩비를 와서 보고 지은 시입니다.
누군가 말했지요.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말입니다.
병신고병신고(丙申稿)1896년(고종33), 매천의 나이 42세 때 지은 시고이다.(丙申稿)
벽파진에서 여기가 바로 이 충무공이 왜병을 모조리 무찔러 죽인 곳이다.〔碧波津 卽李忠武公鏖兵處〕
정유년 왜적 재침 때 일이 가장 위태했으니 / 丁酉年間事最危
벽파정 앞바다가 온통 왜적의 깃발이었지 / 碧波亭外盡倭旗
역사는 악의가 참소 입은 날을 가련해했고 / 史憐樂毅罹讒日
하늘은 분양이 재기용되도록 돌봐 주었네 / 天眷汾陽起廢時
만번 죽은들 어찌 전공을 바란 적 있었던가 / 萬死何曾戰功計
이 마음을 모름지기 무신들이 알아야 하리 / 此心要使武臣知
지금 여기가 왜놈 배들이 지나갔던 곳이라 / 至今夷舶經行地
손가락 깨물며 명량대첩비를 가리켜 보네 / 咋指鳴梁指古碑
-매천집 권2
[주C-001]벽파진(碧波津) : 전라도 해남(海南)과 진도(珍島)의 경계에 위치한 포구(浦口)였던바,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이 이곳에서 왜적을 크게 격파한 것이 바로 명량대첩(鳴梁大捷)이다.
[주D-001]역사(歷史)는 …… 가련해했고 : 악의(樂毅)는 전국 시대 연 소왕(燕昭王)의 장수였는데, 그가 일찍이 연(燕), 조(趙), 초(楚), 한(韓), 위(魏) 다섯 나라의 연합군을 거느리고 강대한 제(齊)나라를 쳐서 70여 성을 빼앗고 그 공으로 창국군(昌國君)에 봉해졌으나, 소왕이 죽고 혜왕(惠王)이 즉위해서는 혜왕이 제나라 전단(田單)의 이간질한 말을 믿고 악의를 의심하자, 악의는 마침내 연나라를 떠나고 말았다. 《史記 卷80 樂毅列傳》 여기서는 이순신 또한 임진왜란 때 여러 차례의 수전(水戰)에서 왜적을 크게 격파하여 혁혁한 공을 세우고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 올랐으나, 간첩 요시라(要時羅)를 통해서 전해 온 왜적의 흉계에 빠진 우리 조정의 잘못 내린 명령을 즉시 따르지 않은 데 대하여, 평소 이순신을 시기해 오던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이 이순신을 극력 모함하는 상소를 올리자, 조정에서는 마침내 원균의 말만을 믿고 즉시 이순신을 파직하여 서울로 압송해다가 가혹한 고문을 가함으로써 모진 고통을 겪게 되었던 것을 악의의 일에 빗대서 한 말이다.
[주D-002]하늘은 …… 주었네 : 분양(汾陽)은 당대(唐代)의 명장(名將)으로 분양군왕(汾陽郡王)에 봉해진 곽자의(郭子儀)를 가리키는데, 그는 숙종(肅宗) 연간에 안사(安史)의 난(亂)을 평정한 것을 비롯하여 그 후 토번(吐蕃), 회흘(回紇) 등의 군대를 격파하는 등 많은 공을 세우고, 덕종(德宗) 때에 상부(尙父)의 호를 하사받고 벼슬이 태위 중서령(太尉中書令)에 이르렀던바, 그가 한때 행신(幸臣) 어조은(魚朝恩)의 참소를 입어 파직되었다가, 뒤에 다시 제도병마도통(諸道兵馬都統)으로 기용되어 연달아 큰 공을 세웠던 데서 온 말이다. 《新唐書 卷137 郭子儀列傳》 전하여 여기서는 곧 충무공 이순신 또한 참소를 입어 파직당하고 모진 고통을 겪다가 겨우 죽음을 면한 채 백의종군(白衣從軍)으로 시작하여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기용된 후 끝내 왜적을 연달아 크게 무찔러 큰 공을 세웠던 것을 곽자의의 일에 빗대서 한 말이다.
법정 스님 생가
진도가 효봉 스님의 제자인 법정 스님의 탄생지인줄을 몰랐다.
스님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고등학교 삼학년 때 친구에게 법정 스님의 수필집
서 있는 사람을 빌려 읽었다.
그 친구는 출가하여 승려가 되어 있다.
대학에 입학하여 도서관에서 금방 들어온
스님의 수필집 산방한담을 빌려서 읽었다.
사서가 자기도 읽고 싶다고 하였지만
나는 사서보다 먼저 읽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 호숫가 오두막을 사랑했던
스님이 머물던 송광사 불일암에 가 보시면 스님의
체취를 흠뻑 느끼실 수가 있지요.
법정 스님 생가에서 돌아나오는 길에 본 어느 집 대문의 포대화상
지난겨울 1월에 중국여행하면서 사찰마다 위태천과 포대화상이 있는 것을 보았다.
포대화상은 불교의 산타클로스 같은 인물로 송나라 때 스님이다.
항상 자루(포대)에 선물을 넣어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보시를 하였기에
중국의 민중은 재물을 주는 신처럼 숭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