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포라는 이름의 환대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민음사)
단순한 배달부에서 삶의 동반자로
칠레의 작은 어촌 마을 이슬라 네그라. 이곳에서 나고 자란 청년 마리오의 일상은 단조롭습니다. 마리오는 어부였던 아버지와 단 둘이 삽니다. 우연한 기회에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사 온 위대한 시인 ‘파블로 네루다’를 위한 전담 우편배달부가 됩니다. 마리오는 처음부터 거창한 문학적 열망으로 네루다에게 다가간 건 아니었습니다. 그저 우편 배달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사회사업 현장에서도 우리는 수많은 ‘배달’을 수행합니다. 도시락을 배달하고, 정보를 전달하며, 서비스를 연계합니다. 만약 마리오가 네루다에게 편지만 전하고 돌아섰다면, 그는 평생 이름 없는 배달부로 남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마리오는 순수한 호기심에서 네루다에게 말을 걸기 시작합니다. 그런 작고 평범했던 대화가 두 사람 사이를 기능적 관계에서 인격적 관계로 바꾸어놓았습니다. 사회사업이 추구하는 사람 사이 관계의 시작과 닮아 있습니다.
당사자의 삶을 강점으로 번역하는 ‘메타포’
조금씩 가까워지는 관계 속에서 어느 날 마리오는 네루다에게 ‘메타포(Metaphor, 은유)’가 무엇인지 묻습니다. 네루다는 설명 대신 바다를 보여주며 말합니다. ‘바다가 나를 부른다’고 표현하는 게 바로 메타포라고 들려줍니다. 메타포는 ‘한 사물이 다른 사물에게 자기 이름을 빌려주는 것’입니다. 마리오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평생 보아온 지루한 바다가 시인의 언어를 통과하자 위대한 예술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회사업가에게 ‘메타포’는 ‘강점 관점’과 닮았습니다. 강점 관점이란 삶의 사실을 바꾸는 게 아니라, 그 사실을 해석하는 언어를 바꾸는 일입니다. 당사자의 거칠고 투박한 삶의 궤적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의 세계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어머니와 떨어지기 싫어하는 어느 지적 약자를 누구는 ‘분리불안’이라는 진단명으로 기록했습니다. 반면, 어떤 사회사업가는 ‘해가 바뀌어도 변치 않는 효심’으로 표현했습니다.
어쩌면 사회사업가는 당사자에게 새로운 언어를 가르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네루다가 마리오에게 그랬듯, 당사자가 이미 가지고 있는 삶의 파편들을 모아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시인지 깨닫게 해주는 번역가입니다.
마리오가 ‘메타포는 어려운 것 아니냐’고 묻자 네루다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메타포는 똑똑한 사람들이 쓰는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 이미 느끼고 있었지만, 아직 자기 말이 없었던 감정을 데려오는 방식이라고 답합니다.
그 한 사람의 힘, 환대가 만드는 변화
마리오는 네루다라는 거장이 자신을 ‘동료 시인’으로 대접해주고, 자신의 서툰 문장에 귀를 기울여주는 경험을 통해 조금씩 성장합니다. 이 환대는 마리오의 내면을 단단하게 만듭니다. 그 덕분에 사랑을 쟁취할 용기가 생겼습니다. 나아가 시대의 아픔에 공감하며 대중 앞에서 연설하는 ‘사회적 존재’로 성숙했습니다.
사회사업은 ‘한 사람의 인생이 변하려면, 그를 온전한 인격체로 믿어주는 단 한 사람이 필요하다’는 믿음을 바탕에 두고 있습니다. 사회사업은 적어도 이런 믿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실천입니다. 사람은 타자를 통해서만 자기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정체성은 내면에서 자라기보다, 타인이 건네는 인정과 응답 속에서 점차 형태를 갖춥니다.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은 그를 규정하는 존재가 없어 결국 괴물이 되었습니다.
마리오에게 네루다는 단순한 우편 수신인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증명해주는 ‘단 한 사람’이었습니다. 사회사업가는 당사자가 세상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위축될 때, 그의 등 뒤에서 ‘당신은 이미 충분히 빛나는 존재’라고 말해주는 처음 사람이거나 마지막 사람입니다.
침묵을 깨는 기록
이야기 후반, 마을을 떠난 네루다의 부탁으로 마리오는 녹음기를 들고 마을 곳곳을 누빕니다. 파도 소리, 종소리, 아들의 울음소리를 담아 이슬라 네그라를 그리워하는 네루다에게 보냅니다. 이는 수동적인 수혜자였던 마리오가 자기 일상을 스스로 기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주체’로 거듭났음을 뜻합니다.
사회사업 기록 또한 이와 같습니다. 전문가의 시선으로 당사자를 ‘평가’하는 기록이 아니라, 당사자의 생생한 목소리와 삶의 소리를 ‘담아내는’ 기록이길 바랍니다. 당사자가 자기 삶을 직접 들여다보고 기록할 수 있도록 돕는 일, 이것은 사회사업이 향하는 전문성일지도 모릅니다.
네루다와 같은 사회사업가
마리오는 결국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는 더 이상 비루한 존재로만 기억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언어를 찾았고, 사랑을 했으며, 공동체를 위해 목소리를 냈던 ‘인간 마리오’로 남았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당사자들은 어쩌면 저마다 자신의 이슬라 네그라(Isla Negra, 검은 섬)에 갇힌 마리오들입니다. 어느 때는 제도적 지원이나 복지 서비스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자기 삶을 시로 읽어줄 네루다의 시선이 필요합니다. 사회사업가는 시를 배달하는 사람입니다. 당사자의 무너진 자존감 위에 메타포라는 씨앗을 심고, 그들이 스스로의 삶을 노래할 수 있게 거드는 존재입니다.
누군가 시인은 제일 먼저 우는 사람이고, 마지막까지 우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회사업가도 함께 울어주는 시인이면 좋겠습니다.
첫댓글 네루다와 같은 사회사업가, 사회사업가도 함께 울어주는 시인이면 좋겠다는 말이 책을 더 읽어보고 싶게 합니다. 꼭 읽어보겠습니다!
김정현 선생님, 반가워요. 시인 네루다를 만나 성장하는 우편배달부 마리오 이야기. 저도 이 책 덕에 '메타포'를 알았어요. 당사자의 상황을 정확하게 말할 때도 있지만, 어느 때는 시인처럼 그 상황을 다르게 해석하기도 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