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노란 빛
1927년, 프린치페사 마팔다 호는
대서양 한가운데서 침몰했다.
'이탈리아의 타이타닉'이라 불린 그 배에는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의 가족이 타고 있어야 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향해,
새로운 세상을 향해 떠나는 배였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 땅을 파는 일이
예상보다 오래 걸렸고, 그들은 다음 배를 타야만 했다.
몇 주 후, 베르골료 가족이 탄 배가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에 닿았을 때, 그들은 이미 프린치페사 마팔다 호의 비극을 알고 있었다.
300명이 넘는 이들이 차가운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는 것을. 자신들이 그 배에 타고 있을 수도 있었다는 것을.
80년이 지난 후, 그 배를 타지 않았던 소년의 손자는 교황이 되어 자서전을 썼다.
《희망》이라는 제목으로. 그리고 그 첫 장에서 침몰하지 않은 배의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구원받았다."
이것은 감사의 고백이 아니었다. 부채의 고백이었다. 왜 우리는 살아남았는가. 왜 다른 이들은 바다에 가라앉았는가.
이 질문은 어린 호르헤의 가슴에 닻처럼 내려앉았고, 평생 그를 끌고 다녔다.
플로레스 거리는 노란 빛으로 가득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가난한 구역. 이탈리아인들, 유대인들, 무슬림들, 동유럽에서 온 사람들이 뒤섞여 살았다.
호르헤는 그곳에서 자랐다. 안식일을
지키는 유대인 친구의 집에 가서 빵을 나눠 먹었다. 무슬림 이웃의 기도
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다.
그곳에는 라 치케와 라 포로타라는
두 자매도 살았다.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매춘부"라고 불렀지만, 어린 호르헤는 그들이 동네 사람들에게 친절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도 이주민이었다. 그들도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었다.
수십 년 후, 주교가 된 베르골료에게 전화 한 통이 왔다. 라 치케였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자신과 같은 처지의 여성들을 위해 미사를 집전해줄 수 있느냐고. 고해성사를 들어줄 수 있느냐고.
베르골료는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갔다. 그들의 방에서, 그들의 눈물 앞에서, 그는 무릎을 꿇었다.
"나는 그녀를 매우 아꼈으며, 지금도
그녀의 기일에는 기도를 잊지 않는다."
침몰하지 않은 배에 탄 사람은,
침몰하는 사람들 곁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2. 흰 상자
2013년 2월 28일, 카스텔 간돌포.
베네딕토 16세는 교황좌에서 내려온
첫 번째 교황이었다. 그는 작고 여윈 몸으로 베르골료 추기경을 맞이했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마주 섰다.
한 사람은 내려오고,
한 사람은 올라가야 했다.
베네딕토는 흰 상자 하나를 건넬 때
말했다.
"여기에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베르골료는 나중에 그 상자를 열었다. 서류들이 가득했다.
학대 사례들. 부패 기록들.
어두운 거래들. 비행들. 교회의 상처들. 감춰진 죄악들.
바티칸의 금고와 권력의 회랑 속에서
벌어진 일들이 하나하나 문서로
정리되어 있었다.
베네딕토는 이것들을 정리했지만
끝내지 못했다. 아니, 끝낼 수 없었다. 그래서 내려왔다.
이제 베르골료의 차례였다.
그는 상자를 보며 생각했다. 이것은
청소가 아니라 전투다. 그리고 나는
전투에 소환되었다.
그는 교황궁으로 가지 않고 산타 마르타의 집이라는 소박한 숙소를 택했다.
화려한 제의 대신 검은 구두를 신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겸손의 제스처"라고 불렀지만,
그에게 그것은 생존 전략이었다.
권력의 언어로 권력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 가난의 언어로만 탐욕과 싸울 수 있다.
그러나 저항은 거셌다. 교황청 안에는 베르골료를 "남미에서 온 이방인"으로 보는 이들이 많았다.
개혁은 느렸고, 때로는 후퇴했다.
그는 외로웠다.
어느 날 밤, 그는 흰 상자 앞에 앉아
중얼거렸다.
"주님, 제가 청하는 가장 큰 선물은
수치심의 은혜입니다."
수치심. 자신의 죄를 아는 능력.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는 용기.
그는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나는 죄인입니다."
교황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완벽하지 않음을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그는 믿었다.
3. 모술의 죽음
2021년 3월, 모술.
이라크는 전쟁의 상처로 뒤덮여 있었다. ISIS가 휩쓸고 간 도시들은 폐허가 되었고, 그리스도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곳에 가기로 했다.
참모들은 만류했다. 코로나19가 여전히 기승을 부렸고, 보안 위협은 극심했다.
영국 정보기관은 구체적인 암살 계획을 포착했다고 보고했다.
폭발물을 몸에 두른 젊은 여성 한 명과 폭탄을 실은 트럭 한 대가 교황의 일정에 맞춰 움직이고 있다고.
교황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가야 합니다."
비행기 안에서, 그는 창밖을 내다보며 생각했다.
침몰하지 않은 배에 탄 사람은,
침몰하는 사람들 곁으로 가야 한다.
죽음의 위협이 있다면,
그것은 더욱 가야 할 이유다.
모술에 도착한 그날, 거리는 조용했다. 사람들은 그를 맞이하기 위해 폐허
사이로 나왔다.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었다.
"당신이 왔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겐 충분했다.
미사가 끝난 후,
교황은 보안 책임자에게 물었다.
"그 테러범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책임자는 짧게 대답했다.
"그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황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라크 경찰이 그들을 저지했다는 것, 그 과정에서 그들이 사살되었을
것이라는 것을 그는 알았다.
그날 밤, 그는 기도했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이들을 위해.
그들도 누군가의 자녀였을 것이고,
절망 속에서 폭력을 선택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전쟁은 광기입니다."
그는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와 가자에서
벌어지는 참극들을 언급하며 덧붙였다.
"일부 전문가들에 따르면 제노사이드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그 말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았다. 서방 세계는 불편해했다. 그러나 교황은 물러서지 않았다.
예언자는 환영받기 위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기 위해 존재한다.
4. 수치심의 기도
1976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르헨티나는 군부 독재의 어둠 속에
있었다. 사람들이 사라졌다.
"실종자(desaparecidos)"라는 단어가 일상이 되었다.
베르골려는 당시 예수회 관구장이었다.
어느 날, 두 명의 예수회 사제가
납치되었다.
오를란도 요리오와 프란츠 잘릭스.
베르골료는 그들을 구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군부와의 접촉,
비밀 협상, 은신처 제공.
그들은 결국 풀려났다. 그러나 수많은 이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수십 년이 지난 후, 비평가들은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왜 더 많은 일을 하지 않았습니까? 왜 침묵했습니까?"
교황은 변명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이렇게 썼다.
"그것은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
할 짐입니다."
그는 자신이 했던 일과 하지 못했던 일 사이의 간극을 인정했다.
역사는 흑백이 아니라고, 때로는 악을 막기 위해 불완전한 선택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수치심을 잊지 않았다.
살아남은 자의 수치심.
더 많이 하지 못한 자의 수치심.
"주님께 청하는 가장 큰 선물은
수치심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그의 영성의 핵심이었다.
완벽함을 가장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함을 고백하는 것.
나르시시즘의 시대에,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것.
5. 지중해의 묘지
람페두사, 2013년 7월.
교황으로 선출된 지 몇 달 후,
프란치스코는 이탈리아 최남단의
작은 섬 람페두사를 방문했다.
그곳은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난민들이 가장 먼저 도착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도착하기 전에
바다에 가라앉는 곳이었다.
교황은 난민들이 타고 온 낡은 보트
잔해로 만든 제단 앞에 섰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중해가 묘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1927년 프린치페사 마팔다 호를 떠올렸다. 자신의 가족이 탈 수도
있었던 배. 침몰했지만 자신은
살아남았던 그 배.
"나는 구원받았다."
그리고 이제, 다른 이들이 침몰하고
있었다.
시리아에서 온 아이들,
에리트레아에서 온 어머니들,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아버지들.
교황은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통계가 아니라 사람으로.
숫자가 아니라 얼굴로.
"이주민의 아들"로서, 그는 이주를
이론이 아니라 피와 살로 이해했다.
그의 신학은 플로레스 거리에서
시작되었고, 람페두사의 바다에서
증언되었다.
6. 시스티나 성당의 두려움
2013년 3월 13일.
콘클라베의 투표가 진행되었다.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에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베르골료 추기경은 투표용지에 적힌
자신의 이름이 점점 늘어나는 것을 보며 두려움을 느꼈다.
그는 교황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가
조용히 사목하고 싶었다.
옆자리의 클라우디오 훔메스 추기경이 속삭였다.
"가난한 이들을 잊지 마십시오."
그 순간, 베르골료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떠올렸다.
모든 것을 버리고 가난한 이들
곁으로 간 성인.
"프란치스코."
그는 그 이름을 택했다.
800년 교회 역사상 아무도 감히
사용하지 않았던 이름. 너무 높은 이름. 너무 무거운 이름.
그러나 그는 그 무게를 짊어지기로
했다. 침몰하지 않은 배에 탄 사람은,
다른 배들이 침몰하지 않도록 돕는 것이 사명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7. 영원한 봄날
교황은 이제 늙었다. 무릎은 아프고,
걷기는 힘들다. 사람들은 그에게 사임을 권한다. 베네딕토처럼 내려오라고.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젓는다.
"교황직은 종신직입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장례를 계획했다.
화려한 제대도, 특별한 의식도 없이.
"다른 그리스도인들처럼 소박하게."
그러나 그의 메시지는 죽음에 관한 것이 아니다. 희망에 관한 것이다.
"모든 것은 영원한 봄날에 꽃피우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희망은 낙관주의가 아니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환상이
아니다.
희망은 어둠 속에서도 닻을 내리는
것이다. 침몰하는 배 위에서도
부활을 믿는 것이다.
2025년, 희년이 시작되었다.
"희망의 순례자들"이라는 주제로.
교황은 전 세계에 말한다.
당신들도 순례자입니다.
침몰하지 않은 배를 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침몰하는 이들 곁으로
가십시오.
경쟁과 혐오의 벽을 허물고,
만남의 다리를 놓으십시오.
수치심을 두려워하지 말고,
자신의 불완전함을 고백하십시오.
전쟁의 광기를 거부하고,
평화의 언어를 배우십시오.
"희망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2014년, 교황은 한국을 방문했다.
세월호의 노란 리본이 가슴에 달려
있었다.
그는 유가족들의 손을 잡았다.
말은 없었다. 다만 함께 울었다.
침몰하는 배 곁에 머무는 것.
그것이 그의 신학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플로레스 거리의
노란 빛에서 시작되었다.
라 치케와 라 포로타의 눈물에서.
프린치페사 마팔다 호의 침몰에서.
침몰하지 않은 배에 탄 사람은,
평생 그 부채를 갚아야 한다.
그것이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