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빛
별처럼 반짝이던 때도 옛적이니 오늘은 빛의 빛이 오셨도다. 빛의 빛이 네게 비치시니 너는 찬란한 별이로다. 하늘을 헤어 넘어갈 때에 주의 성광이 비치시면 巨星(거성)들이 무릎을 꿇고 제 빛을 감추는도다. 참으로 이 세상의 지식이 암흑이요, 금은 보배가 티끌이요, 부귀영화가 시궁이요, 그 지혜는 우몽이로다. 逆境(역경)에 빛이 빛을 부르더니 빛과 빛이 빛나라가 되었도다. 빛나라에서 王(왕)하시니 빛은 빛을 내신 빛이시로다. 빛 날지어다 하시니 天地(천지)가 빛났도다. 별들이 이 땅을 비추었고 오늘도 내일도 비추나니 이는 성인들의 前兆(전조)이니, 빛을 받은 이가 주의 뜻하신 별이로다. 이 빛으로 大星(대성)들이 일어나고 죽은 이가 부활하였도다. 아전이 종도가 되고 우몽은 천신이 되었도다. 막달레나가 소원을 풀고 우도가 만복소를 갔도다. 이 빛이 하느님 뜻하신 빛이오니 빛날지어다. 이는 하느님의 말씀이로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도다. 이 빛으로 오늘날 성인이 나고 이 빛으로 성인이 속출하는도다. 이 빛이 하느님 뜻하신 빛이로다. 이 빛이 뜻하신 영광이로다. 진심으로 네 나라가 임하시기를 원하거든 主(주)의 빛을 받을지어다. 主(주)의 빛을 받아 세상을 비출지어다. 달은 햇빛을 받아 땅을 비추면 우리는 主(주)의 빛을 세상에 전하는도다. 육신에는 生氣가 돌아야 하고 영혼에는 빛이 비쳐야 하는도다. 태양에서 빛을 받아 땅에 비치는 것이 별이요, 천주께 빛을 받아 형제를 비추는 이는 성인이로다. 이는 천주께서 뜻하신 바니 예루살렘은 일어나 밝아질지어다. 너의 빛이 오셨으니 여기서 빛을 맞이할지어다. 별은 사람의 모상이니 성인이 나면 그 별이 비치는 도다. 네 별은 어데 있느뇨? 네 별을 찾아 밝아질지어다. 빛을 모말밑에 두지 말고 조명대 위에 놓을지어다. 영원한 빛을 받아 山上(산상)에서 빛날지어다. 이 빛이 없으면 천지만물이 생길 수 없고 이 세상에 난 인생 아무 보람없도다. 태초에 빛이 나기 전 땅의 꼴이 말이 아니더니 빛에서 땅이 제 모양을 내고 만물이 생겨났으니 너도 일어나 빛날지어다. 침묵이 어둠을 헤치고 대월이 빛을 불렀도다.
<한국순교복자수도회 창설자 비오 무아 방유룡 안드레아 신부의 영가편 제 1부 빛 중 1편>
영혼의 복된 생명의 빛
육신 생명은 영혼에 달렸고, 영혼 생명은 良心(양심)에서 오는도다. 육신이 잘살고 못사는 것은, 부귀영화가 아니요, 영혼이 잘살면 육신도 잘살고, 영혼이 잘살면 육신도 망하는도다. 영혼의 福(복)된 生命(생명)은 빛이니, 이 빛은 양심에서 오는도다. 바른 양심이 빛을 받나니, 福(복)된 생명(生命)을 주는 빛이로다. 구름이 끼면 음산하고, 사욕이 일면 우울하도다, 밤이 들면 어둡고, 죄를 지으면 양심이 어두우니, 밤에 무엇을 하겠느뇨! 죄를 짓고 무엇을 바라느뇨! 육신은 먹어야 살고, 영혼은 밝아야 사는도다. 영혼의 음식이 말씀이요, 말씀이 생명이요, 빛이로다. 이 生命(생명)이 하느님 생명이요, 이 빛이 하느님의 빛이로다. 사람이 음식으로만 살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나니, 참생명은 음식에 있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에 있도다. 참된 행복은 부귀에 있지 않고, 하느님의 덕능에 있도다. 풍부한 天地萬物(천지만물)은 하느님 닮은 사람을 위해 내신 것이니, 사람이 하느님을 닮으면, 天地萬物(천지만물)의 주인이 되는도다. "가난하고 겸손한 이가 진복자로다. 天國(천국)이 저들의 것이요, 善良(선량)한 이는 진복자로다 저들이 땅을 차지 하리로다" "너희가 天國(천국)과 義德(의덕)을 구하면 모든 것을 덤으로 주시리라"
<한국순교복자수도회 창설자 비오 무아 방유룡 안드레아 신부의 영가편 제 1부 빛 중 2편>
빛을 향하여
主(주)여! 나는 언제나 주의 집을 그리오니, 언제나 주의 것이 나의 요람이로소이다. 주의 侍下(시하)가 나의 安息處(안식처)니, 거기는 파란이 없나이다. 물과 불을 지날지라도, 나의 갈 곳은 주의 집이요, 온 세상을 다 얻을지라도, 그리운 것은 주의 집이니이다. 이 땅에서 주 외에 바랄 것이 무엇이며, 하늘에선들 무엇이오리까! 나, 이 세상에 난 것이 주를 위해 드림이니, 내 일생에 주의 뜻을 받들고, 주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림이로소이다. 내 일생의 원이 이것이오니, 영원하도록 主堂(주당)에 거함이로소이다. 주는 나의 소원을 들어주시고, 주의 상속이 되게 하셨으니, 주의 仁慈(인자)하심을 노래하고, 나의 허원을 드리나이다. 쇄신분골할지라도 나는 주를 모시리니, 마음이 착한이에게 主는 얼마나 仁慈(인자) 하신고! 나를 힘있게 하시고, 내 팔을 잡으셨도다. 해지고 어두우면, 새는 둥지에 드는도다. 양은 제 우리를 가고, 이 맘은 임이 그리워 임댁을 찾나니, 거기는 어둠도 없고, 밤도 없는 낮이요, 영원한 빛이 찬란한데, 거기 복된 生命(생명)이 있더이다. 이 빛을 찾아 종일토록 침묵하고, 침묵으로 어둠을 물리쳤나이다. 빛이 이 밤을 비추면 낮과 같이 밝아, 육신은 자도 마음은 깨어, 이 빛을 즐기나이다. 이 빛이 生命(생명)이오니, 자도 임은 떠나지 않나이다. 이 몸은 잘지라도, 임의 빛이 비치어, 임은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아니 하시며, 밤새도록 나를 보호하시고, 강복하시며, 새 날을 준비하시면서, 밤을 새시나이다. 침묵은 어둠을 물리치고, 대월은 빛을 부른다 하기에, 빛을 찾아 종일토록 침묵하고, 침묵으로 어둠을 물리쳤으되, 어둠은 끝이 없고, 심연에 잠긴 이몸 어이 할지! 깊은 구름에서 부르짖되 임은 대답이 없으시고, 기진한 품꾼이 어둠을 기다리면, 나는 이 심연에서 자고있더이다. 심연에서 벗어날 줄을 모르고 자고 뒹굴음이 그 얼마던고! 천지개벽 전 빛이 없었을 때에는 혼돈이었고, 대우주가 그러하였으면 소우주도 그러하니, 근본을 모르는 사람이 그러하고, 심연에 잠긴 몸이 그러하도다. 첫빛으로 천지개벽이 시작되고, 풍성하고 아름다웠도다. 사람에게도 빛이 있어야 할지니, 지성을 비치는 빛이로다. 이 빛은 빛을 내신 빛이니, 나는 빛이니라 하신 하느님이시로다. 이 빛이 生命(생명)을 주는 빛이요, 지극히 복된 빛이니, 天地(천지)를 善化(선화)한 빛은, 저 내신 本然(본연)의 빛이요, 사람을 聖化(성화)하는 빛은 저 스스로의 超然(초연)의 빛이시니, 超然(초연)의 빛이 良心(양심)에 비치면 自由(자유)가 받아 모시는도다. 良心(양심)은 의지의 등대요, 등대가 비치는 데가 눈이로다. 이런 눈이 삼라만상을 바로 인식하고, 바로 살게 하는도다. 이런 삶이 복된 삶이요, 복에서 복으로 至福無極(지복무극)의 삶이로다. 사람의 죽음은 무엇이뇨? 넋과 몸이 서로 갈림이로다.
<한국순교복자수도회 창설자 비오 무아 방유룡 안드레아 신부의 영가집 제1부 빛 중 3편>
주는 나의 빛
하느님은 나의 빛이시요, 나의 힘이시로다. 하느님 내게 빛을 비추시니, 이 빛으로 하느님을 알아뵈옵고, 하느님 내게 힘을 주시니 이 힘으로 主(주)를 찾아 가나이다. 빛이 더욱 밝아질수록, 좋으신 하느님을 더 잘알고, 힘이 더욱 강할수록 난관이 물러가고 길이 환하게 열리나이다. 육신은 피가 돌아야 살고, 영혼은 神光(신광)이 비쳐야 사는도다. 건강을 잃고, 죽음과 병으로 약해지고, 生命(생명)이 끊어지니, 사욕으로 良心(양심)이 흐리면, 죄악으로 캄캄하도다. 빛이 人生(인생)의 生命(생명)이로다, 良心(양심)을 비추시는 빛이로다. 善心(선심)이 빛을 받아, 生命(생명)을 얻나니, 本性生命(본성생명)에 靈性生命(영성생명)이 합하면, 天人(천인)이 되는도다. 이는 人力(인력)이 이룬 바 아니요, 全能(전능)이 이루신 바로다. 정성이 至誠(지성)에 이르러, 全能(전능)을 부르나니, 全能(전능)은 至誠(지성)에 응하시고, 전능을 발휘하시는도다.
<한국순교복자수도회 창설자 비오 무아 방유룡 안드레아 신부의 영가편 제 1부 빛 중 4편>
빛이 하늘에서
하느님은 나의 빛이시요 힘이시니,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뇨? 주의 생명이 나의 생명이시니, 겁낼 것이 무엇이뇨? 하느님은 나의 빛이시니, 하늘길을 비추는 빛이시로다. 하느님은 나의 힘이시니, 千苦萬難를 넘어가는 힘이시도다. 빛과 힘으로 무장한 영혼은, 죽음을 이기고 지옥을 헐도다. 적들이 대진해도 무섭지 않고, 화살이 빗발쳐도 안전하도소이다. 내옆에서 천명이 쓰러져도, 또한 옆에서 만명이 쓰러져도, 내게는 미치지 아니 하리니, 能品天神(능품천신)들이 나와 같이 계심이로다. 주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은, 德能(덕능)으로 돌아감이로다. 거름이 더러워도, 萬善萬福(만선만복)이 따라오는도다. 너 나를 따르고자 하거든 十字架(십자가)를 지고 따라올지어다. 우리가 따라가는 이는 누구시뇨? 萬福所(만복소)에 계신 임이시로다. 피가 病菌(병균)을 맞으면, 피와 병균이 協力(협력)하며, 병에 걸리지 않고, 그를 克服(극복)하는도다. 괴로움을 감수하면, 괴로움이 神力(신력)이 되어, 단련으로 힘을 얻은 영혼은, 주께로 치닫나니, 하늘에서 천군이 내려와서, 영혼을 앞서갈 때에, 모든 난관을 돌파하고, 죽음을 정복하는도다. 밤이 가면 날이 오고, 어두움이 가면 빛이 오나니, 無罪(무죄)하면 밝아지고, 制慾(제욕)하면 빛이 나는도다. 하늘에서 오시는 빛은, 至極(지극)히 복된 빛이니, 이 빛이 비치는 곳에, 거룩한 사랑이 깃들고, 모든 德(덕)이 만발하고, 福音三德(복음삼덕) 세송이가 활짝 피어, 명랑한 미소가 흐르고, 萬福(만복)이 맺히도다. 이 빛이 萬福(만복)의 빛이니, 世福(세복)이 모여드는도다. 聖神七恩(성신칠은)이 내리는 길이요,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길이요, 임의 사랑이 오가는 길이요, 사랑하는 영혼이 오르는 길이로다.
<한국순교복자수도회 창설자 비오 무아 방유룡 안드레아 신부의 영가편 제 1부 빛 중 5편>
빛의 힘 하느님은 해와 달을 내시고 萬物(만물)을 비추시는도다. 사람이 세상빛으로 만물을 알아보고, 영혼은 하늘빛으로 主(주)를 뵈옵는도다. 이 生命(생명)은 영혼의 빛이니, 이 빛으로 영혼이 자라는도다. 빛으로 영혼이 主(주)를 뵈옵고, 主(주)의 눈에 드는도다. 어둠은 눈을 가리고, 사욕은 주를 막아내나니. 침묵은 사욕을 헤쳐나가고, 聖神(성신)의 빛을 받는도다. 쉴새없이 피가 돌고 맥이 뛰면, 육신이 살고, 하늘빛이 통하여 살면, 성인이 되는도다. 사람이 역경에 부딪치면, 더욱 강한 빛이 내리시는도다. 빛의 힘은 무한하시니, 영혼은 한없이 거룩하도다. 빛의 힘으로 재생한 사람이 , 천주 좋아하시는 聖人(성인)이로다. 하늘의 사람이요, 地上(지상)의 천사로다. 聖人(성인)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은 聖人(성인)을 사랑하시나니, 빛의 힘으로 세상을 극복하고, 죽음을 정복하였도다. 태산도 바다도 그 길을 막을 수 없고, 고통도 죽음도 맞설 수 없도다. 죽는 날은 성인의 생일이요, 만복의 날이로다. 神秘(신비)가 용약하고, 天使천사들이 즐기시는 경사로다. 이날은 하느님 특별히 강복하신 날이니, 天地(천지)가 환호하는 날이로다. 三仇(삼구)0를 정복하고, 천당으로 개선하여 가는 날이요, 잠세에서 영원세로 가고, 찬류소에서 복으로 가는 날이요, 세상집을 떠나, 천궁으로 이사가는 날이로다. 참사랑은 죄를 모르고, 수고도 몰라라. 거룩한 사랑은 죄를 없이 하나니, 어찌 사랑이 벌을 받으리오! 치열한 사랑은 애덕이니, 애덕에는 연옥도 없어라. 子女(자녀)가 옥에 갇히면, 父母(부모)와 親知(친지)가 걱정하듯, 영혼이 연옥으로 가면, 하느님 얼마나 측은히 여기실고! 세상에 계실 때에 우시던 主(주)를, 하늘에서도 우시게할까봐 죄악을 물리치라고 양심을 주셨거늘, 역경과 유감을 당할 적마다, 力品天神(역품천신)이 호위하셨거늘, 유감이 맹렬할 때는, 성총이 창일하였거늘, 나는 마음문을 닫고, 사욕이 부동하고, 自由(자유)는 主(주)의 길을 외면하였도다. 主(주)의 聖心(성심)을 슬프게 하는 이는, 主(주)를 위하는 이가 아니로다. 主(주)의 慈悲(자비)하심이 부족하였더뇨? 그 성실 하심이 너를 속였느뇨? 하느님을 眞心(진심)으로 사랑하였드뇨? 네 사욕을 더 위했드뇨? 네 입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마음은 사욕을 따랐도다. 二心(이심)이 앙화로다. 어두움을 헤칠 지어다. 地獄(지옥)만 면하면 된다하나, 밤길을 가는 영혼이여! 연옥불에 선이 되어, 연옥을 자청하는 이는 그 누굴고? 사형만 아니면 다행이요, 감금을 안방 삼는 草敵(초적)이로다. 날마다 해가 비치듯이, 순간마다 비치시는 빛을 받을지어다. 빛으로 하느님을 뵈오면 萬福(만복)의 날을 보리로다. 날마다 음식하듯이, 날마다 빛을 받아야 할지니. 날마다 빛을 받아 밝아지면, 날마다 主(주)와 친해지리로다. 날마다 하느님 더 잘알고, 그분과 切親(절친)해지도다. 절친이 심복이면, 심복은 하나로다. 心中天福(심중천복)중에 어떤 福(복)이, 邪慾(사욕)을 채움만 못하더뇨! 完德(완덕)은 남의 덕이 아니요, 우리의 德(덕)이니, 처음에는 어려워도, 나중에는 우리 本性(본성)의 德(덕)이로다. 시작도 좋고 進行(진행)은 더욱 좋고, 絶頂(절정)은 至極(지극)히 좋으니. 德(덕)에서 德(덕)으로 올라가면, 성총의 강물이 심복에 흐르는도다.
<한국순교복자수도회 창설자 비오 무아 방유룡 안드레아 신부의 영가집 1부 빛 중 6편>
무아의 영성으로 소묘해 본 영성의 토착화 전망 - 이유남(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수녀/영성 신학) 지난 12년 동안 총 49회에 걸쳐 발표되어 온 토착화 연구 발표 중 영성에 대해서는 전부 세 차례, 여섯 분이 연구 발표해 주셨는데, 그 동안 영성의 토착화를 위하여 각기 어떻게 접근하였는지를 간단히 평가한 후, 2000년대를 바라보는 오늘, 한국 교회 영성의 토착화를 무아(無我) 방유룡 신부의 영성인 면형무아(麵形無我)로써 전망해 보고자 한다.
1. 영성의 토착화 연구에 대한 평가
먼저 최석우 신부는 "한국 교회 영성의 어제"에서 초기 교회부터 일제 시대까지 한국 교회 영성의 특성을 크게 순교적 영성, 종말론적 영성, 사주구령적 영성으로 보면서 그 중에도 "순교적 영성은 초기 교회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 교회에서도 가장 뛰어나고 가장 이상적인 영성으로 나타났다. 또 우리는 그것을 가장 한국적인 영성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한국의 순교자들은 그리스도교인인 동시에 자제하고 희생하며 충성하고 해탈할 줄 아는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그들의 목숨을 용감히 또 평온하게 하느님을 위해 바칠 수 있었기 때문이고,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한국적인 고난을 통해 채우고, 나아가 파스카 신비에 한국적인 풍요로움을 다함으로써 가장 훌륭하게 참된 토착화의 표본을 보였기 때문이다."1)라고 표현함으로써 순교적 영성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그 시대 한국 교회를 주도했던 파리 외방 전교회가 수도회가 아닌 재속 사제들로 구성된 선교 단체였기에 지닐 수밖에 없는 한계점으로 수도회의 성소 육성에 비협조적이었고 수도회적 영성을 발전시키는 데 등한할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한다.
약정 토론자였던 김진소 신부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우리 조상들이 목숨을 바쳐 죽을 수 있었던 신앙의 바탕이 어디에 있었겠느냐 하는 것이다. 복음이 이땅에 와서 무성하게 자랄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우리 민족이 가졌던 심성이 이미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더욱 연구하여야 할 것은 한국 사람들이 지녔던 기질, 또는 과거나 지금에나 변하지 않고 한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심의 성향이 무엇이냐 하는 것"2)이라고 덧붙인다.
한편 류병일 신부는 "한국 교회 영성의 오늘"을 발표하면서 200주년 사목 회의 문헌을 중심으로 8개 항목을 열거하나, 결론적으로 한국 교회 영성의 오늘에는 별로 그 특성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특별히 한 가지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한국 교회 신자들의 활력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연수나 피정, 또는 교육이나 교회 활동에 엄청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바로 한국인의 심성 안에 있는 영성의 특성을 정열이라고 표현할 수 있게 한다."라고 말한다.
세 번째, 한정관 신부는 아빌라의 데레사의 [영혼의 성]과 유교를 중심으로 "동서 영성의 융합 시도"라는 주제를 발표하였는데, 그 연구 작업의 큰 성과와 방대한 자료에도 그야말로 동서양 영성의 융합 가능성을 찾는 하나의 시도이기에 갖는 한계를 부인할 수 없다고 본다.
네 번째, "토마스 머튼의 영성과 동양 사상"에 대해 이영식 신부는 '마음'이라는 성서적이며 동양적인 개념으로서 머튼의 영성이 담고 있는 동양적인 요소를 지적한다. "머튼은 마음의 고요를 찾아, 그 곳에서 진아(眞我)의 참모습을 보는 것이 깨달음의 체험이며, 그 마음 깊이 현존하시는 '사람이시오 하느님이신 분'과의 (만남) 친교와 합일에 도달하려는 것이 기도의 진수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고요를 찾는 동양적 기도의 분위기를 살피며 동양 종교와 그리스도교의 근본적 차이에 대해 말하면서 머튼의 영성이 지닌 동양적인 특성과 특히 선불교와의 공통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불교의 공(空), 무(無)가 그리스도교의 절대자, 하느님과 다르다고 말한다. 이는 불교의 영성을 있는 그대로 체험한 게 아니라 단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해하고 접근하는 데서 오는 한계라고 생각한다.
이에 대한 약정 토론자로서 강건기 교수는, "머튼이 이해하는 선(禪)은 '법열을 이끌어 들이는 세련된 기술'이 아니라 존재의 바탕에 대한 '직접적인 눈뜸'이다. 또 불교에서의 공은 소아병적인 '나'의 비움이요 멸(滅)이지, 허무적멸(虛無寂滅)의 단공(但空)이 아니다. 그것은 또 모든 존재는 순전히 환상에 불과하며 '공' 또는 '무'로 나타난다는 그런 것이 아니라,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공이다. 그러므로 공의 체험은 동체자비행(同體慈悲行)의 원천인 것이다. … 곧 머튼이 이해한 공은 단순한 공이 아니라 동시에 불공(不空)이며 fulness요, zero=infinity and infinity=zero의 공이다. 그것은 흔히 '마음의 가난', 'recovery of innocence', 'pure Being'과 대비되고 있다. 끝으로, 머튼의 하느님은 물론 위격적인 면과 더불어 절대적인 면을 가지고 있고, 그런 면에서 공과도 대비될 수 있다고 본다."라고 말한다. 이는 결국 영성적인 만남이야말로 상호간에 교리적이고 신학적인 연구나 해설에 의해서가 아니라 체험적인 접근, 곧 삶으로 체득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점을 암시하는 말이라고 본다.
다섯 번째, 이병호 신부(현 전주교구장 주교)는 "한국 교회 영성의 토착화 전망"이라는 주제로 발표하면서 특별히 우리의 종교 심성에 대하여 좋은 발언을 하고 있다. "1. 우리는 머리의 신학보다는 가슴 또는 마음의 신학에 더 적합한 소질을 타고난 사람들이다. 영성이란 신학이 머리에만 남아 있지 않고 마음에까지 내려가 삶을 실제로 이끌어 갈 때 바로 그것을 지칭하기 위한 말이다. 동양인은 선천적으로 신학을 위한 신학, 이론을 위한 이론인 듯이 전개하는 신학보다는 언제나 영성과의 긴밀한 관계가 유지되는 신학을 거의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2. 머리보다는 마음, 지성적 학식보다는 구체적인 삶에서 얻어지는 지혜를 더욱 숭상해 온 전통에 따라, 참된 영성을 찾아가는 노력에 있어서 그 주체는 전문 교육을 받은 학자들 못지않게 삶의 현장에서 생생한 체험을 쌓아 가는 신앙 대중이 될 것이며 그들의 역할이 점점 더 진지한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덧붙여 특히 성령론이 동방 교회의 전통 속에서 중요한 자리를 점유하는 이유와 한국 교회 안에서 성령 운동이 지속적인 힘을 발휘하는 특성 역시 객관적이고 명제적인 진리보다는 주관적인 체험으로 깨친 진리를 숭상해 온 동양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아울러 특별히 지식이 없는 사람들도 신앙인으로서 그 삶이 올바르고 성실한 사람이면 특유한 식별력, 곧 신앙 감각(sensus fidei)을 지니게 되어 신앙에 따르는 문제들을 나름대로 인식하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신앙 감각은 그 작용 방식에서 이성이나 지성과는 근본적으로 다른데, 말 그대로 일종의 감각이기 때문에 미각이나 촉각처럼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작용하여 추론의 과정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단순하고 소박한 하느님 백성, 곧 신앙 대중이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체득하는 이러한 방향 감각으로 우리 교회의 체질에 맞는 신학과 영성을 찾아갈 수 있으리라 전망한다.
마지막으로, "한국 교회 평신도 영성 토착화의 선결 과제"에 대해 박재만 신부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과 주교 대의원 회의 제7차 정기 총회 의안을 중심으로 평신도 안에 육화해야 할 영성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발표하지만 거기에서 제시한 평신도 영성의 신학적 원리가 한국인의 심성, 문화, 정치, 경제, 사회 및 전통적 상황에 어떻게 토착화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연구 시도되어야 할 과제로 미루고 있다. 특히 한국 평신도 영성의 토착화를 위한 몇 가지 선결 과제로서 신앙과 구체적 생활 간의 연속성, 일괄성, 통합성의 문제, 사제 중심의 신앙 생활이기에 소극적이고 미온적인 교회 활동, 대부분의 사도직 단체들이 지닌 국제적인 성격에서 요구되는 토착화 문제, 이에 우선적으로 필요한 전례 생활의 토착화, 교회의 사회 참여에 대한 인식 부족 등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결론적으로 한국인의 심성을 이해하려는 노력으로서 무속 신앙으로 표현되어 온 기초적 종교심을 비롯한 유, 불, 선의 영향을 파악하여 동양적 영성을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피력하고 있다.
2. 면형무아 - 동양인의 심성으로 직관한 그리스도의 신비
결국 지금까지 영성의 토착화 작업에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순교 영성이야말로 한국적인 영성이요, 이는 한국인 특유의 종교적 심성과 열정에서 기인하는 한편, 동양 영성의 핵심을 나타내는 무나 공이라는 불교적 개념3)은 머튼에 의해 그리스도교적 영성 안에서도 그대로 하느님 체험, 기도의 체험 안에 적용될 수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더욱이 마음의 신학에 적합한 소질을 타고난 우리 동양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신비는 이성적인 추론이나 지성적인 접근에 따르지 않고 곧바로 직관에 따른 깨달음의 방식으로 다가갈 수 있는 내용이 될 수 있다고 하겠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신비를 면형무아라고 직관한 무아 방유룡 신부4)는 자신의 아호마저 무아로 선택하고 무아의 일생을 살면서 그 삶의 결실로 얻어진 면형무아의 영성을 우리에게 남겼다. 우선 면형무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간단히 살펴보고 그 영성이 지닌 동양적 특성과 담고 있는 동양인의 심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1) 면형무아의 교의적 의미
우선, 면형무아는 말 그대로 '자아[自己] 없는 빵의 형상'이며, 이때의 자기는 일차적으로 밀떡을 지칭한다. 밀떡이 자기의 실체를 비우고 그 형상만으로 그리스도를 모셨다는 것을 암시한다.
두 번째, 면형무아는 그리스도의 비움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애 전부를 총결산하시면서 세우신 것이 성체성사인데, 결국 그분은 전생애를 종결짓는 자리에서 하느님 아버지와 그 나라를 위해 무아로 사신 평생의 자기 삶을 성체로 또 다시 내어 놓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 개인의 삶은 없으셨던 분이신데, 이제 다시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위한 음식이요, 사랑의 일치를 위한 양식으로 자신을 먹으라고 내어 놓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의 이런 비움의 생애는 먼저 말씀의 육화로서 하느님의 비움을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에서 면형무아는 또한 하느님 아버지의 비움을 의미한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육화하신 사건은 하느님 아버지의 비하(卑下), 자신을 비우시는 하느님이심을 드러낸다. 결국 모든 구원의 신비는 여기서 시작되고, 이 하느님 아버지의 비움 없이는 어떤 그리스도 사건도, 그리스도 교회도 이야기될 수 없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비움의 사건인 그분의 육화가 바로 모든 것의 시작이요 마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말씀, 행동, 죽음과 수난에 이르는 그 모든 것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고, 아버지를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면, 아버지만을 위하는 아들을 위해 아버지 역시 아들만을 위해 존재하시고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비움을 통한 아버지의 비움이 또한 면형무아의 신비이다.
네 번째, 면형무아는 성령의 비움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육화는 삼위일체 중 특별히 성령의 자기 비움으로 가능했다.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에 성령으로 잉태되신 그리스도의 생애는 바로 성령의 현현(顯現)이요, 성령의 역사였던 것이고 보면, 성령은 누구보다 자기 없음으로 자신의 역할을 가장 충실히 하셨고, 하시는 위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면형무아는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나타낸다. 이미 마리아의 생애에서 드러났듯이,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한 그 순간부터 마리아에게 자신의 삶이라 할 수 있는 인간적이고 고유한 영역은 없어졌던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가 있었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 있었을 뿐, 바로 그것이 마리아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모든 것이었다. 이 마리아의 삶이 바로 전형적인 그리스도인의 삶, 자기 없음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하늘 나라를 향해 걸어가야 하는 삶을 분명하고 완전하게 예표(例標)한다.
결국 면형무아라는 한마디로 무아 방 신부는 성체성사의 신비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적 비움의 존재 방식과 그리스도인의 실존 전부를 말하고 있다. 때문에 면형무아는 방 신부가 완덕의 길을 지향하고 출발하던 때의 하느님 체험이 바로 성체였음을 말하고, 성체의 신비에 대한 완전한 깨달음과 확신을 향한 여정이 바로 방 신부가 걸은 영성의 전(全) 여정이요, 그가 도달하고자 한 완덕이었음을 말해 준다.
그렇다면 무아 방유룡 신부는 왜 하필 무와 무아라는 단어로 자신의 영성적 핵심을 표현했는지 질문해 볼 수 있는데, 일찍이 한학자였던 할아버지5)의 영향으로 신학문을 배우기 전에 집에서 한학을 공부했던 영향과 더불어 그가 착안한 것은 한국적인 수덕의 모범을 바로 서양적인 성인의 모델이 아니라 한국의 순교 성인(당시엔 복자)들에게서 보았다는 데 직접적인 해답이 있다고 본다.
곧 한국의 순교자들은 오랜 박해 시기를 지내느라 선교사들에 의한 체계적인 교리 교육은 꿈도 꿀 수 없었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성서 공부는 물론 미처 신앙이 뿌리내릴 수 있는 충분한 시간도 여건도(전례 생활이든 신심 활동에서든) 없었기에, 더욱 즉자적(卽自的)6)인 형태로 민족의 원초적인 종교심, 유, 불, 선, 무속 신앙 등으로 축적되고 길러진 신앙 감각7)으로, 즉각적으로, 직관적으로 절대적 진리 앞에서 무아의 길, 자아 부정의 길을 걸었다고 무아 방유룡 신부는 보았던 것이다. 더구나 순교의 원형이신 그리스도는 자기 무화(自己無化), 자기 비움의 길을 걸어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고 직관하면서 바로 같은 맥락에서 초기 교회 순교자들의 영성을 물리적인 박해가 없는 오늘이라는 일상 안에서 더 구체적으로 살아내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매순간 모든 장소에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뒤를 따라 철저하게 무아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데서 그의 면형무아의 영성은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2) 면형무아는 동양인의 심성으로 직관한 그리스도의 신비
동양인들의 심성 안에서 무가 의미하는 바는 참으로 절대적이다. 아일랜드인 윌리암 존스톤(William Johnston) 예수회 신부는 일본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불교의 많은 신비가들을 만나고 난 뒤 이렇게 표현한다. "무(無), 또는 공(空), 또는 허(虛)라는 말은 동양의 신비가들 입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말이다. 불교의 몇몇 종파에서는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한다. '무를 제대로 알아들은 자는 만상(萬象)의 핵심에 도달했고, 깨달은 자다.'"8)
실제로 서양 철학의 출발이 有(있음)라면 동양 철학의 출발은 無(없음)이다. 도교 철학에서는 무라는 단어를 가지고 도(道)를 설명한다. 노자가 생각하는 도는 천지가 있기 전부터 있는 것으로 빈 것이며, 무이며, 존재 아닌 존재이기 때문에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것이고(無名), 그저 그것은 크고(大), 영원한 것(常)이다. [노자] 25장에서, "나는 그것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도라고 지어 부른다. 억지로 이름을 붙여 큰 것(大)이라고 한다. 이름 없는 것(無名)은 천지의 처음이고, 이름 있는 것(有名)은 만물의 어머니다."라고 한다.
한편 3-4세기 중국 위진 시대에 유행한 도교 철학의 한 분파이면서 유학과의 결합을 시도한 학파인 현학(玄學), 일명 신도교주의라고도 하는 이 학파에 공자의 어륙집인 '논어'를 무의 관점에서 해설한 [세설신어](世說新語)라는 책이 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왕필(王弼; 226-249년)과 배휘(裵徽)의 대화를 보면, "배휘가 왕필에게 질문하기를, '대체로 무란 참으로 만물이 밑천으로 삼고 있는 바이다. 그러나 성인(공자)은 즐겨 말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노자는 그것을 끝없이 이야기한 것은 어째서일까?' 왕필이 답하였다. '성인은 무를 체득하고 있었으며, 무는 또 말로 풀이할 수 없었으므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노자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 자(유에 머물렀으므로)였으므로 언제나 부족한 바를 말하였다.'"(삼국지, 위지, 종회전주문)라고 하면서 무가 만물의 밑천이요, 이를 깨달은 자가 진정한 성인이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향수(221-300년)와 곽상(?-312년)이 쓴 [장자주석서]에서는 직접적으로 "도는 무다."라고 정의하고 있기도 하다.
격의(格義)의 방법으로 탄생한 선불교(禪佛敎)에서는 그야말로 무가 그 핵심 언어가 되고 있다. 곧 1세기 중반쯤 중국에 인도 불교가 전해졌다고 하고, 이미 3-5세기 사이에 대부분의 대승 불교 경전이 산스크리스트어에서 중국어로 번역되기 시작하는데, 이때 불교 경전이 표현하고자 하는 철학 용어들이 대부분 도교 철학의 주요 단어들로 은유적으로 해석 번역이 되는데, 이를 격의라 하고 이 격의의 방법론으로써 동아시아 문명이 창출해 내는 위대한 불교, 선이 탄생한다. 곧 도교적 핵심 언어인 유, 무, 공, 허, 무위 등의 단어와 함께 도가 철학의 전개 방법인 부정어법(否定語法)도 함께 사용되니, 공종(空宗), 중도종(中道宗)에서 열반(Nirnava)을 설명할 때, "부처의 지혜(Prajna)는 앎이 아니다. 무라고 할 수 있다. 무는 모든 특성, 형태, 모양, 성질 등을 초월해 있어 앎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무에 대해 안다는 것은 무 자체와 하나 됨을 의미하며, 바로 이 상태를 열반이라 한다." 따라서 이 상태에서는 침묵이 유일한 수단이 된다고 말한다.
이 무로 확인되는 깨달음이 바로 선불교의 정통적인 맥을 잇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전설에 따르면, 520-526년 사이에 인도 대승 불교의 28대 조사인 보리 달마가 중국에 와서 선불교의 초대 조사가 되었다고 한다. 이 보리 달마를 시조로 하여 5대째 조사인 홍연에게는 유명한 두 제자가 있었는데, 신수와 혜능이다. 바로 이들에게서 선의 남북조가 갈리게 되었는데, 홍연의 임종시에 두 제자가 서로의 깨달음을 입증하기 위해 지은 계송에서 이 두 종파의 특색이 잘 드러난다.
신수의 계송 :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맑은 거울 같아서/ 닦고 또 닦아 내면/ 때묻지 않으리.[즉심즉불(卽心卽佛)]" 혜능의 계송 : "보리나무 원래 없고/ 거울 또한 없는데/ 본래 아무 것도 존재함이 없거늘/ 무슨 먼지 타령인고? [무심무불(無心無佛)]"
결국 혜능이 6조가 되고 선의 정통성은 무심무불로 이어질 뿐 아니라 그가 쓴 [육조단경](六祖檀經)은 계속적으로 선불교의 핵심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임제종의 창시자인 의현(?-866년)은 말한다. "만일 정견(正見)에 도달하기를 원한다면, 다른 어떤 것에도 결코 속지 마라. 여러분이 내 외적으로 만나는 모든 것을 죽여 버려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그 때 해방되리라. 모든 것으로부터." 허상(虛像)에 속지 마라. 집착하지 마라. 결국 무가 되라는 말이다.
이렇듯 무의 개념이 불교 안에서 절대적 깨달음의 경지와 거기에 도달하는 길을 암시하는 핵심어가 되면서 선불교가 동아시아의 역사를 풍미하게 되자, 유학자들 중에 이 불교 철학과 도가 철학의 영향에 힘입어 신유학(新儒學:주자학, 성리학, 유학, 성학)파로 일컬어지는 이들에 의해 새로운 학풍이 일어나는데 이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는 어떻게 지혜를 획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 때의 지혜는 곧 현자, 성인이 되게 하는 지혜를 뜻한다. 여기에 주돈이(1017-1073년)는 이렇게 답한다. "욕심이 없으면 고요해지고, 고요하면 마음이 텅 빈다. 마음이 비면 움직일 때 곧바로 나아간다. 고요하고 텅 비면 밝게 알고, 밝게 알면 사회에 통달한다. 움직임이 곧으면 공정하고, 공정하면 넓게 되고 밝게 통하니, 거의 성인에 가깝다." 결국 인간은 본성상 근본적으로 선하므로, 인간 마음의 내면적 상태는 본래 어떠한 이기적 욕심도 가지지 않은 정허(靜虛)의 상태일 수 있다. 주돈이에게는 이 사욕 없는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감이 곧 성인이 되는 방법이었으니, 곧 무사(無邪), 무욕(無慾), 무아(無我)가 성인의 상태이고 이 때의 마음은 비어 있고 고요하다. 곧 침묵의 상태이다.
결국 동양인의 영성은 비움(虛, Kenosis)이요, 침묵이요, 무아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맥락을 전제하지 않으면, 무아 방 신부의 영성의 출발이요, 그 정점인 면형무아와 거기에 이르기 위한 완덕의 길인 침묵 속의 여정9)을 알아들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서 침묵은 소리 없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없음, 곧 무아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동양 영성의 전통은 오래 전부터 침묵의 영성이었고 무의 신비를 체득하는 영성이었는데, 무아 방 신부에 의해 마침내 이런 전통은 그리스도의 신비를 관통하는 가장 직접적이고도 완전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3. 무아의 영성으로 소묘해 보는 영성의 토착화 전망
토착화의 근거는 예수님의 육화에 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신다."라는 이 명백한 진리가 바로 예수님을 통해 완전하고 충만하게 드러났다. 이 예수님은 하느님 백성을 한자리에 불러모으고, 치유하고, 용서하고, 구원하는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시는데, 이 성서적 표상이 동양인의 심성, 면형무아의 시각에서 고찰될 때 어떤 예수님의 모습을 드러내는지를 보기 위해 먼저 마태오 복음 사가가 전하는 예수님의 세례 장면을 고찰하면서 거기서부터 토착화를 위한 몇 가지 힌트를 얻고자 한다.
1) 무아의 영성이 고찰하는 예수님의 세례(마태 3,13-17)
세례자 요한을 통해 구약의 하느님 백성이 새로운 복음에 눈뜨기 위한 준비로 받던 세례의 현장에 예수님 친히 찾아가신다.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떻게 선생님께서 제게 오십니까?"(마태 3,14) 하며 굳이 사양한다. 과연 누가 감히 그분에게 세례를 베풀 수 있단 말인가?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는 그분 앞에서 요한은 굳이 사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세례를 받으시고자 하는 그분의 의도는 세례를 베푸는 요한과 받으시려는 당신 자신의 자격 여부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곳에, 인간의 이해와 의문을 뛰어넘는 저 높은 곳에 있었다. 바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아버지의 뜻 외에 예수님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성서 전체에서 일관되게 확인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하여라.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3,15).
그토록 굳이 사양하던 요한은 그제야 예수님께서 하시자는 대로 하였고, 그 때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시는 예수님을 향해 홀연히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당신 위에 내려오시며 들리는 소리가 있었으니,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3,15-17 참조)이었다.
한편,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요르단 강에 모여든 대중은 어떤 부류였을까? 유다교 회당의 성직자들이나 율법 학자들 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을까?(루가 7,30 참조) 아니면 세상 안에서 안정된 삶을 누리고, 기득권을 가진 부유층이나 권력자들이 있었겠는가? 아마도 어디에도 희망을 둘 수 없는, 그래서 새로운 세상을 희망할 수밖에 없는 가난하고 미천한 대중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들의 문화, 그들의 풍습, 그들의 종교적 소망, 그들의 삶이 그대로 드러나 고이고 흘러 드는 요르단 강으로 몸소 찾아가 그들과 함께 강물에 들어가셨다.
대부분의 유다인들과 그 지배층들에게 세례자 요한의 삶의 방식과 선교 자세는 너무 극단적이었고 위험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세례 받으시기를 청하심으로써 그의 삶과 선교 방식을 받아들이실 뿐 아니라 그의 뒤를 이어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시고자 하신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토착화의 올바른 의미와 방법에 대한 상당한 암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① 요르단 강의 세례를 통한 예수님의 신원 :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 마음에 드는 아들'이 드러나듯, 토착화를 통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신원이 마땅히 드러나야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찾아가 그 물에 몸을 담그는 일이다. 그 물이 어떤 물이든 하느님의 백성이 모여, 삶을 나누고, 문화와 풍습과 종교와 역사의 체험이 오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먼저 찾아가 그 물에 몸을 담가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받는 세례를 받아야 한다. 단 그 일은 나를 위한 것도 상대를 위한 것도 아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아버지요, 우리 아버지인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② 아버지를 위한 아들의 비움(Kenosis)은 예수님의 일생을 특징짓는다. 그의 삶, 일하는 방식, 기도와 사명 수행 모두가 '자기 비움', 곧 '무아'였다. 도무지 자기가 없이 살았다. 때문에 그는 마주치는 상대가 누구이든 그를 하느님의 백성으로 맞아들일 수 있었고,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만났다. 마침내 자신을 십자가에 처형하는 이들 앞에서마저 철저히 자신을 무화하는 그를 향해 "하느님의 아들이다."라는 확신과 고백이 터져 나온다.
③ 모든 사람, 모든 사건 안에서 아버지의 뜻을 드러내는 예수님의 사명 수행은 또한 성령의 역사에 맡기는 것이었다. 그들의 선택이 금방 어떤 결과를 드러낼지, 하느님의 어떤 응답을 이끌어 낼지는 예수님 자신도 세례자 요한도 몰랐다. 다만 "지금은 (하자는 대로 하여라)"이라는 잠정적인 기대 속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면 그에 맞갖은 결과를 주시리라 믿었을 뿐, 그 결과는 성령의 역사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성령을 통해 하느님의 응답을 들었던 것이다.
④ 예수님의 이 자연스럽고도 자발적인 행동은 물론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갖는 내적 일체감에서 비롯된다고 할 때, 그리스도를 전하려는 모든 이들 역시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과 내적 일체감을 마땅히 지닐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선적으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를 알아볼 수 있는 마음의 눈(직관할 수 있는 힘)을 지닐 뿐 아니라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창의성과 능동성, 용기와 지혜를 동시에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특히 지배층과 사회를 주도해 가는 이들의 정치, 경제, 문화, 종교의 논리가 인간들에게 부과하는 한계와 틀은 대단한 힘을 지니기 마련인데, 이를 과감하고 용기 있게 극복하고 넘어서기 위해서는 바로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아버지와의 내적 일치가 하느님의 일(특히 토착화 작업)을 하는 이들에게 꼭 필요하다. 사실 예수님은 지식과 학문의 축적, 인간적인 권위와 힘, 가문의 배경, 종족의 문화와 종교적인 우월감 그 어떤 것에도 의지하시지 않았다. 다만 하느님 아버지를 의지하셨고 그분과 갖는 내밀한 친교에서 오는 직관과 신앙 감각에 의존해서 알아보고, 찾아가고, 참여하고 만나고, 치유하고, 용서해 주셨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⑤ 강물에 직접 뛰어듦은 그 물의 흐름에 나를 맡김으로써 직접 온 몸으로 강물을 느끼고 체험한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어설픈 맛봄이 아니고 이런 체험은 똑같이 그 체험을 공유한 이에게만 전달되는 앎을 갖는다. 말이나 글로, 또는 간접적인 어떤 매개 수단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닌 바로 온 몸으로 전 존재로 체득되는 그 앎으로 육화와 토착화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더구나 영성 역시 삶으로 체득되고 표현되는 것이고 보면, 영성의 토착화는 자신을 비우고 먼저 찾아가 강물에 몸을 담그는 예수님의 자기 비움의 방식 바로 그것으로 이루어 내야 할 일이라 하겠다.
2) 면형무아의 영성과 영성의 토착화 전망
이상의 토착화를 위한 마태오 복음의 성서적 소묘는 그 자체로 동양인의 심성으로 그려 낸 예수님의 모습이요, 사명이며, 삶이다. 여기에 소묘된 예수님은 자기 비움으로 일관된 모습을 지니셨다. 성령에 내어 맡김도, 자발적인 세례 요청도, 아버지의 뜻에 순종함도 모두 자기 비움, 무아의 영성으로 일관되어 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면형무아의 영성은 토착화를 위해서도 그 고유의 사명을 갖는다고 하겠다.
사람들이 당신께서 베푸시는 성령의 세례를 받게 하시기 전에 먼저 당신께서 인간들의 세례에 참여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육화하셨고 요르단 강물 속에 육화하신 것이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먼저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지금까지 거의 모든 토착화 연구 작업은 타종교, 타문화, 우리 민족 전체가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하느님과 인간을 향해 늘 자신을 비우시며 사신 그리스도는 오늘도 당신께서 먼저 이 땅의 문화, 철학, 종교, 예술, 역사의 강물 안으로 걸어 들어가시기를 원하신다.
단군의 홍익 이상과 신단수 아래의 제사 장소이든, 무당들의 현란한 춤판이든, 신선들의 수레인 바람과 구름 속이든, 화랑과 낭도들의 도장인 깊은 산 속이든, 원효와 지눌의 일심(一心)과 선정(禪定)의 한 가운데이든, 한민족의 역사적인 강, 그 도도한 흐름에 성령의 신명(神明)이 실렸을 때 벌어지던 생사의 춤판, 저 순교의 현장 속으로든, 그 어디든 당신께서 먼저 들어가시어 세례를 받으시고자 하신다. 바로 거기에 예수님의 예수다움이 있고,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다움이 드러나는 것이다. 예수님은 언제나 그러하셨다. 역사 내적 인간임을 한 번도 거부하신 적이 없었다. 결국 먼저 자기를 비움으로써 상대와 함께 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역사의 주인으로서 상대를 살리시고 만물을 육화하시는 예수님의 신적 능력, 곧 창조하고 구원하는 능력이 발휘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제 그분의 신부인 교회 역시 신랑을 따라야 한다. 철저하게 남김없이 자기를 비워야 한다. 그분의 육화와 비움이 바로 면형무아라면 교회 역시 면형무아의 길을 따라 맡겨진 모든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2000년대를 향한 영성의 토착화를 위해 실천적인 제안 몇 가지를 하겠다.
첫째, 한국인의 심성 안으로 그리스도가 들어오신다는 것은 다른 말로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바로 참 한국인의 심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결국 한국 교회에 속하는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은 동시에 참 한국인이 되라는 소명에 열려 있다는 뜻이다.
한편 한국 교회의 특수성 가운데 하나가 성직자 중심이고, 특히 교구 사제, 본당 사제 중심이라고 한다면 전체 교회의 신자들을 위한 토착화를 위해 가장 먼저 교회 내 지도자들(주교, 신부, 부제, 수도자, 신학생 등)이 한국의 역사, 종교, 철학, 문화가 담고 있는 한국인의 심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 우선적인 과제이다. 지금까지의 토착화 작업들로 구별되고 정리된 우리의 것, 동양의 것에 주목하고, 왜곡된 역사 교육과 단절된 전통 문화의 맥을 다시 찾는 일에 관심과 노력을 기울일 뿐 아니라 그 모든 것에 먼저 비우고, 찾고, 다가가고, 함께 참여하면서 배우고, 체득하고, 삶으로 살아 내야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한국 교회를 대표하여 세계적인 모임이나 국제 대회에 자주 참가하는 지도자들일수록 세계 교회, 로마 교회를 향해 우리 것을 바르게 알아 그 고유성을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도록 스스로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둘째, 현재 한국 교회가 가장 우선적으로 당면한 현실 문제들, 예를 들어, 인간 성숙과 복음적 기쁨이 결여된 사제들의 독신 생활 문제, 신원 의식의 결핍 때문이든 오늘날 한국 사회가 가진 제반 현상 때문이든, 복음 삼덕의 봉헌 생활이 그리스도 안에 확고히 뿌리내리지 못한 채 부유(浮遊)하고 있는 수도자들의 문제, 가두 선교로 영입되는 신자 수에 비례하여 늘고 있는 냉담 신자들의 문제 등을 직시해야 한다. 실제로 현실 문제를 있는 그대로 정확히 인식하는 데서 정확한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기에 무엇보다 교회 자신에 대해 성실하고 정직한 성찰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개인의 영적 삶이 성장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내면으로 들어가서 영혼의 진실을 대면하는 것이라면 교회 공동체 역시 외적인 행사나 양적인 발전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내면의 문제들을 정직하게 대면하는 일이 참된 성장을 약속할 것이다.
셋째, 이제 더 이상은 서구 교회 특히 로마 중심의 신학과 교육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교계 제도에서도 로마적인 특성으로 일관한다든지, 정치적인 지배자들이 갖는 권위와 독선, 특권 의식으로 자기 방어만을 우선으로 하면서 세상을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울러 신학교를 가지고 있는 교구의 주교들은 신학교 교육 과정 안에 반드시 한국 영성을 배울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할 것이다. 더 개방적이고 열린 교육의 장에서 한국인의 심성으로 복음과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믿고, 사랑하도록 교육받은 신학생이라야 자기의 양을 잘 알고 잘 돌보는 목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넷째, 한국 교회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열정적이고 순수한 종교심을 바르고 성실하게 지도할 수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 적절하면서도 토착화한 신심 운동을 전개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한국 영성의 특색을 살린 피정 프로그램의 개발, 연수, 특강을 개설하는 일이다. 물론, 이 몫은 토착화된 영성을 지닌 수도회들의 것이기도 하지만, 교회 전체의 관심과 연구를 바탕으로 이루어질 때, 그 효과가 크다고 하겠다.
1) 최석우, "한국 교회 영성의 어제", 한국 사목 연구소 편, [전례/영성의 토착화], 사목 연구 총서 5,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2년, 148-149면. 2) 위의 책, 150면. 3) 무나 공의 개념은 본래 도가 철학의 핵심 용어인데 중국에 불교가 도입되고 산스크리스트어로 된 불경 서적들이 대량으로 중국에서 번역될 때 열반, 해탈 등을 지칭하는 번역어로 이들 도가적 개념들을 사용하기 시작하는 데서 불교적 주요 개념이 되었을 뿐, 그 이전부터 무와 공의 개념은 전반적인 동양 철학, 동양 종교의 핵심 용어로 사용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4) 1900년 3월 6일에 서울시 중구 정동(서소문 안 대한문 옆)에서 당시 궁내부 주사였으며 영국 공사관의 영어 통역관으로 지내던 방경희 주사관과 손유희 사이의 육남매 중 4남으로 출생하여 18세에 용산 소신학교에 입학, 30세에 사제로 서품된 뒤 수도 생활을 통한 완덕의 길을 추구하나 기존하던 수도원이 전부 외국 수도원이었고, 한국인의 체질에 맞지 않는 수도 생활이요, 한국인의 심성을 고려하지 않는 영성이라고 판단, 한국적인 수도원 건립에 주력한다. 1933년 황해도 재령 본당 신부로 재직할 때부터 청년 남녀들의 기도 모임과 그들의 영적 삶을 지도하며 때를 기다리다가 1946년 개성 본당 신부로 재직 중에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를 창립한다. 이어 1953년에는 남자 수도회를, 1957년에는 수녀회 삼회를 창립하고, 자신도 한국 순교 복자 성직 수도회의 수사로서 종신 서원한 뒤 1986년 선종할 때까지 수녀들과 수사들의 영적 아버지요, 한국 교회 순교자들의 참다운 후예로서 무아 가문의 상속자로서 동양적이고 한국적인 영성의 길을 수립하고 체계화하는 데 일생을 바친다. 5) 방 신부의 조부 방제열은 당시 명성 있는 한학자로서 뮈텔 주교와 백 주교에게 한문을 가르쳐 주었다. 6) 조광, "기독교 토착화 연구에 대한 한국 문화사적 평가", [사목] 247호(1999.8.), 34-50면 참조. 7) 이병호, "한국 교회의 영성의 토착화 전망", 한국 사목 연구소 편, [전례/영성의 토착화],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2년 참조. 8) William Johnston S.J., L'Occhio Interiore, 1987년, 123면. 9) 무아 방 신부는 영성의 절정인 면형 무아(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과의 합일)에 도달하기 위해 침묵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말한다. 특별히 침묵 십계와 완덕 오계가 그것이다. 침묵 십계는 육신 내적 침묵으로써 분심 잡념과 사욕에 침묵함이요, 육신 외적 침묵으로써 이, 목, 구, 비, 수족, 동작에 침묵함이요, 영혼 침묵으로써 이성과 의지를 침묵하라고 한다. 종덕 오계는 이 침묵 십계를 더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일(一)은 분심 잡념을 물리치고, 이(二)는 사욕을 억제하고, 삼(三)은 용모에 명랑과 평화와 미소를 띠우고, 언사에 불만과 감정을 발하지 말고, 태도에 단정하고 예모답고 자연스럽게 하고, 사(四)는 양심 불을 밝히고, 오(五)는 자유를 천주께 바치고 그 성의를 따를지니라.
<사목, 1999년 12월호 / CBCK 홈페이지에서>
1900년 3월 6일, 서울 중구 정동(덕수궁의 대한문 근처) 에서 부친 방경희와 모친 손유희의 육남매중 4째로 태어나셨다. 신학문으로 개화한 집안에서 자란 방신부님은 1917년 18세에 용산 소신학교에 입학하여 1930년 10월 30일, 12년간의 신학교생활을 마치고 30세에 사제서품을 받으셨다.(동창사제로는 서울대교구장을 역임하신 노기남 대주교와 윤형중 신부, 임충신 신부, 양기섭 신부,...등 10명) 강원도 춘천본당의 보좌생활을 시작으로 황해도 장연본당의 보좌를 거쳐, 1933년 황해도 재령본당의 주임신부로 부임. 이무렵 수도원 지망자들을 특별히 사랑하고 교육·지도하는데 대단한 애착을 보이셨으며 신부님 자신이 신학교 시절부터 수도생활을 원했고, 완덕에 이르러 성인이 되고자 하는 원의를 지녀오셨다. 당시 일제지배하에 있던 한민족의 암울한 시대상과 근대화와 함께 서양문명의 우월함을 앞세우며 유입된 서양학문과 가톨릭 교회의 수도생활 그리고 외국인 선교사 수도자들의 모습을 직시하면서 민족의 구원을 염두에 둔 한국인 사제로서 한국적인 수도의 맥을 이어 참된 구도의 길을 개척하는 것이 더욱 마땅하리라는 깨달음에서 순수한 한국적인 수도원을 건립하리라는 소명의식을 가지게 되셨다. 해주본당 주임신부로 재직하면서 수도생활을 갈망하는 윤병현 데레사와 홍은순 마리데레사 두 처녀를 만나게 되어 함께 해방다음해인 1946년 4월 21일 한국순교복자수녀회를 창설하셨다. 이어서 1953년에는 남자회원들을 위한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를 창설하고 1957년 3월에는 재속회인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제삼회]를 설립, 1962년 10월에는 기혼여성·미망인들을 위한 수도 공동체인 [빨마회]의 설립하므로써 한국순교복자 수도회는 남녀수도회와 재속회와 미망인을 위한 수도공동체까지 구성되어 대가족을 이루게 되었다. 1957년 5월 6일에는 방유룡 신부님은 자신이 창설한 수도원에서 종신서원을 발하고 서울교구소속 사제에서 수도사제로 전환하여 한평생을 남녀 스스로의 영적 수덕생활에 몰입하면서 남녀 수도회원과 찾아오는 소수의 일반 신자들의 영적지도에 전념하시다가 1986년 1월 24 선종하셨다.
영혼의 빛
별처럼 반짝이던 때도 옛적이니 오늘은 빛의 빛이 오셨도다. 빛의 빛이 네게 비치시니 너는 찬란한 별이로다. 하늘을 헤어 넘어갈 때에 주의 성광이 비치시면 巨星(거성)들이 무릎을 꿇고 제 빛을 감추는도다. 참으로 이 세상의 지식이 암흑이요, 금은 보배가 티끌이요, 부귀영화가 시궁이요, 그 지혜는 우몽이로다. 逆境(역경)에 빛이 빛을 부르더니 빛과 빛이 빛나라가 되었도다. 빛나라에서 王(왕)하시니 빛은 빛을 내신 빛이시로다. 빛 날지어다 하시니 天地(천지)가 빛났도다. 별들이 이 땅을 비추었고 오늘도 내일도 비추나니 이는 성인들의 前兆(전조)이니, 빛을 받은 이가 주의 뜻하신 별이로다. 이 빛으로 大星(대성)들이 일어나고 죽은 이가 부활하였도다. 아전이 종도가 되고 우몽은 천신이 되었도다. 막달레나가 소원을 풀고 우도가 만복소를 갔도다. 이 빛이 하느님 뜻하신 빛이오니 빛날지어다. 이는 하느님의 말씀이로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도다. 이 빛으로 오늘날 성인이 나고 이 빛으로 성인이 속출하는도다. 이 빛이 하느님 뜻하신 빛이로다. 이 빛이 뜻하신 영광이로다. 진심으로 네 나라가 임하시기를 원하거든 主(주)의 빛을 받을지어다. 主(주)의 빛을 받아 세상을 비출지어다. 달은 햇빛을 받아 땅을 비추면 우리는 主(주)의 빛을 세상에 전하는도다. 육신에는 生氣가 돌아야 하고 영혼에는 빛이 비쳐야 하는도다. 태양에서 빛을 받아 땅에 비치는 것이 별이요, 천주께 빛을 받아 형제를 비추는 이는 성인이로다. 이는 천주께서 뜻하신 바니 예루살렘은 일어나 밝아질지어다. 너의 빛이 오셨으니 여기서 빛을 맞이할지어다. 별은 사람의 모상이니 성인이 나면 그 별이 비치는 도다. 네 별은 어데 있느뇨? 네 별을 찾아 밝아질지어다. 빛을 모말밑에 두지 말고 조명대 위에 놓을지어다. 영원한 빛을 받아 山上(산상)에서 빛날지어다. 이 빛이 없으면 천지만물이 생길 수 없고 이 세상에 난 인생 아무 보람없도다. 태초에 빛이 나기 전 땅의 꼴이 말이 아니더니 빛에서 땅이 제 모양을 내고 만물이 생겨났으니 너도 일어나 빛날지어다. 침묵이 어둠을 헤치고 대월이 빛을 불렀도다.
<한국순교복자수도회 창설자 비오 무아 방유룡 안드레아 신부의 영가편 제 1부 빛 중 1편>
영혼의 복된 생명의 빛
육신 생명은 영혼에 달렸고, 영혼 생명은 良心(양심)에서 오는도다. 육신이 잘살고 못사는 것은, 부귀영화가 아니요, 영혼이 잘살면 육신도 잘살고, 영혼이 잘살면 육신도 망하는도다. 영혼의 福(복)된 生命(생명)은 빛이니, 이 빛은 양심에서 오는도다. 바른 양심이 빛을 받나니, 福(복)된 생명(生命)을 주는 빛이로다. 구름이 끼면 음산하고, 사욕이 일면 우울하도다, 밤이 들면 어둡고, 죄를 지으면 양심이 어두우니, 밤에 무엇을 하겠느뇨! 죄를 짓고 무엇을 바라느뇨! 육신은 먹어야 살고, 영혼은 밝아야 사는도다. 영혼의 음식이 말씀이요, 말씀이 생명이요, 빛이로다. 이 生命(생명)이 하느님 생명이요, 이 빛이 하느님의 빛이로다. 사람이 음식으로만 살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나니, 참생명은 음식에 있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에 있도다. 참된 행복은 부귀에 있지 않고, 하느님의 덕능에 있도다. 풍부한 天地萬物(천지만물)은 하느님 닮은 사람을 위해 내신 것이니, 사람이 하느님을 닮으면, 天地萬物(천지만물)의 주인이 되는도다. "가난하고 겸손한 이가 진복자로다. 天國(천국)이 저들의 것이요, 善良(선량)한 이는 진복자로다 저들이 땅을 차지 하리로다" "너희가 天國(천국)과 義德(의덕)을 구하면 모든 것을 덤으로 주시리라"
<한국순교복자수도회 창설자 비오 무아 방유룡 안드레아 신부의 영가편 제 1부 빛 중 2편>
빛을 향하여
主(주)여! 나는 언제나 주의 집을 그리오니, 언제나 주의 것이 나의 요람이로소이다. 주의 侍下(시하)가 나의 安息處(안식처)니, 거기는 파란이 없나이다. 물과 불을 지날지라도, 나의 갈 곳은 주의 집이요, 온 세상을 다 얻을지라도, 그리운 것은 주의 집이니이다. 이 땅에서 주 외에 바랄 것이 무엇이며, 하늘에선들 무엇이오리까! 나, 이 세상에 난 것이 주를 위해 드림이니, 내 일생에 주의 뜻을 받들고, 주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림이로소이다. 내 일생의 원이 이것이오니, 영원하도록 主堂(주당)에 거함이로소이다. 주는 나의 소원을 들어주시고, 주의 상속이 되게 하셨으니, 주의 仁慈(인자)하심을 노래하고, 나의 허원을 드리나이다. 쇄신분골할지라도 나는 주를 모시리니, 마음이 착한이에게 主는 얼마나 仁慈(인자) 하신고! 나를 힘있게 하시고, 내 팔을 잡으셨도다. 해지고 어두우면, 새는 둥지에 드는도다. 양은 제 우리를 가고, 이 맘은 임이 그리워 임댁을 찾나니, 거기는 어둠도 없고, 밤도 없는 낮이요, 영원한 빛이 찬란한데, 거기 복된 生命(생명)이 있더이다. 이 빛을 찾아 종일토록 침묵하고, 침묵으로 어둠을 물리쳤나이다. 빛이 이 밤을 비추면 낮과 같이 밝아, 육신은 자도 마음은 깨어, 이 빛을 즐기나이다. 이 빛이 生命(생명)이오니, 자도 임은 떠나지 않나이다. 이 몸은 잘지라도, 임의 빛이 비치어, 임은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아니 하시며, 밤새도록 나를 보호하시고, 강복하시며, 새 날을 준비하시면서, 밤을 새시나이다. 침묵은 어둠을 물리치고, 대월은 빛을 부른다 하기에, 빛을 찾아 종일토록 침묵하고, 침묵으로 어둠을 물리쳤으되, 어둠은 끝이 없고, 심연에 잠긴 이몸 어이 할지! 깊은 구름에서 부르짖되 임은 대답이 없으시고, 기진한 품꾼이 어둠을 기다리면, 나는 이 심연에서 자고있더이다. 심연에서 벗어날 줄을 모르고 자고 뒹굴음이 그 얼마던고! 천지개벽 전 빛이 없었을 때에는 혼돈이었고, 대우주가 그러하였으면 소우주도 그러하니, 근본을 모르는 사람이 그러하고, 심연에 잠긴 몸이 그러하도다. 첫빛으로 천지개벽이 시작되고, 풍성하고 아름다웠도다. 사람에게도 빛이 있어야 할지니, 지성을 비치는 빛이로다. 이 빛은 빛을 내신 빛이니, 나는 빛이니라 하신 하느님이시로다. 이 빛이 生命(생명)을 주는 빛이요, 지극히 복된 빛이니, 天地(천지)를 善化(선화)한 빛은, 저 내신 本然(본연)의 빛이요, 사람을 聖化(성화)하는 빛은 저 스스로의 超然(초연)의 빛이시니, 超然(초연)의 빛이 良心(양심)에 비치면 自由(자유)가 받아 모시는도다. 良心(양심)은 의지의 등대요, 등대가 비치는 데가 눈이로다. 이런 눈이 삼라만상을 바로 인식하고, 바로 살게 하는도다. 이런 삶이 복된 삶이요, 복에서 복으로 至福無極(지복무극)의 삶이로다. 사람의 죽음은 무엇이뇨? 넋과 몸이 서로 갈림이로다.
<한국순교복자수도회 창설자 비오 무아 방유룡 안드레아 신부의 영가집 제1부 빛 중 3편>
주는 나의 빛
하느님은 나의 빛이시요, 나의 힘이시로다. 하느님 내게 빛을 비추시니, 이 빛으로 하느님을 알아뵈옵고, 하느님 내게 힘을 주시니 이 힘으로 主(주)를 찾아 가나이다. 빛이 더욱 밝아질수록, 좋으신 하느님을 더 잘알고, 힘이 더욱 강할수록 난관이 물러가고 길이 환하게 열리나이다. 육신은 피가 돌아야 살고, 영혼은 神光(신광)이 비쳐야 사는도다. 건강을 잃고, 죽음과 병으로 약해지고, 生命(생명)이 끊어지니, 사욕으로 良心(양심)이 흐리면, 죄악으로 캄캄하도다. 빛이 人生(인생)의 生命(생명)이로다, 良心(양심)을 비추시는 빛이로다. 善心(선심)이 빛을 받아, 生命(생명)을 얻나니, 本性生命(본성생명)에 靈性生命(영성생명)이 합하면, 天人(천인)이 되는도다. 이는 人力(인력)이 이룬 바 아니요, 全能(전능)이 이루신 바로다. 정성이 至誠(지성)에 이르러, 全能(전능)을 부르나니, 全能(전능)은 至誠(지성)에 응하시고, 전능을 발휘하시는도다.
<한국순교복자수도회 창설자 비오 무아 방유룡 안드레아 신부의 영가편 제 1부 빛 중 4편>
빛이 하늘에서
하느님은 나의 빛이시요 힘이시니,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뇨? 주의 생명이 나의 생명이시니, 겁낼 것이 무엇이뇨? 하느님은 나의 빛이시니, 하늘길을 비추는 빛이시로다. 하느님은 나의 힘이시니, 千苦萬難를 넘어가는 힘이시도다. 빛과 힘으로 무장한 영혼은, 죽음을 이기고 지옥을 헐도다. 적들이 대진해도 무섭지 않고, 화살이 빗발쳐도 안전하도소이다. 내옆에서 천명이 쓰러져도, 또한 옆에서 만명이 쓰러져도, 내게는 미치지 아니 하리니, 能品天神(능품천신)들이 나와 같이 계심이로다. 주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은, 德能(덕능)으로 돌아감이로다. 거름이 더러워도, 萬善萬福(만선만복)이 따라오는도다. 너 나를 따르고자 하거든 十字架(십자가)를 지고 따라올지어다. 우리가 따라가는 이는 누구시뇨? 萬福所(만복소)에 계신 임이시로다. 피가 病菌(병균)을 맞으면, 피와 병균이 協力(협력)하며, 병에 걸리지 않고, 그를 克服(극복)하는도다. 괴로움을 감수하면, 괴로움이 神力(신력)이 되어, 단련으로 힘을 얻은 영혼은, 주께로 치닫나니, 하늘에서 천군이 내려와서, 영혼을 앞서갈 때에, 모든 난관을 돌파하고, 죽음을 정복하는도다. 밤이 가면 날이 오고, 어두움이 가면 빛이 오나니, 無罪(무죄)하면 밝아지고, 制慾(제욕)하면 빛이 나는도다. 하늘에서 오시는 빛은, 至極(지극)히 복된 빛이니, 이 빛이 비치는 곳에, 거룩한 사랑이 깃들고, 모든 德(덕)이 만발하고, 福音三德(복음삼덕) 세송이가 활짝 피어, 명랑한 미소가 흐르고, 萬福(만복)이 맺히도다. 이 빛이 萬福(만복)의 빛이니, 世福(세복)이 모여드는도다. 聖神七恩(성신칠은)이 내리는 길이요,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길이요, 임의 사랑이 오가는 길이요, 사랑하는 영혼이 오르는 길이로다.
<한국순교복자수도회 창설자 비오 무아 방유룡 안드레아 신부의 영가편 제 1부 빛 중 5편>
빛의 힘 하느님은 해와 달을 내시고 萬物(만물)을 비추시는도다. 사람이 세상빛으로 만물을 알아보고, 영혼은 하늘빛으로 主(주)를 뵈옵는도다. 이 生命(생명)은 영혼의 빛이니, 이 빛으로 영혼이 자라는도다. 빛으로 영혼이 主(주)를 뵈옵고, 主(주)의 눈에 드는도다. 어둠은 눈을 가리고, 사욕은 주를 막아내나니. 침묵은 사욕을 헤쳐나가고, 聖神(성신)의 빛을 받는도다. 쉴새없이 피가 돌고 맥이 뛰면, 육신이 살고, 하늘빛이 통하여 살면, 성인이 되는도다. 사람이 역경에 부딪치면, 더욱 강한 빛이 내리시는도다. 빛의 힘은 무한하시니, 영혼은 한없이 거룩하도다. 빛의 힘으로 재생한 사람이 , 천주 좋아하시는 聖人(성인)이로다. 하늘의 사람이요, 地上(지상)의 천사로다. 聖人(성인)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은 聖人(성인)을 사랑하시나니, 빛의 힘으로 세상을 극복하고, 죽음을 정복하였도다. 태산도 바다도 그 길을 막을 수 없고, 고통도 죽음도 맞설 수 없도다. 죽는 날은 성인의 생일이요, 만복의 날이로다. 神秘(신비)가 용약하고, 天使천사들이 즐기시는 경사로다. 이날은 하느님 특별히 강복하신 날이니, 天地(천지)가 환호하는 날이로다. 三仇(삼구)0를 정복하고, 천당으로 개선하여 가는 날이요, 잠세에서 영원세로 가고, 찬류소에서 복으로 가는 날이요, 세상집을 떠나, 천궁으로 이사가는 날이로다. 참사랑은 죄를 모르고, 수고도 몰라라. 거룩한 사랑은 죄를 없이 하나니, 어찌 사랑이 벌을 받으리오! 치열한 사랑은 애덕이니, 애덕에는 연옥도 없어라. 子女(자녀)가 옥에 갇히면, 父母(부모)와 親知(친지)가 걱정하듯, 영혼이 연옥으로 가면, 하느님 얼마나 측은히 여기실고! 세상에 계실 때에 우시던 主(주)를, 하늘에서도 우시게할까봐 죄악을 물리치라고 양심을 주셨거늘, 역경과 유감을 당할 적마다, 力品天神(역품천신)이 호위하셨거늘, 유감이 맹렬할 때는, 성총이 창일하였거늘, 나는 마음문을 닫고, 사욕이 부동하고, 自由(자유)는 主(주)의 길을 외면하였도다. 主(주)의 聖心(성심)을 슬프게 하는 이는, 主(주)를 위하는 이가 아니로다. 主(주)의 慈悲(자비)하심이 부족하였더뇨? 그 성실 하심이 너를 속였느뇨? 하느님을 眞心(진심)으로 사랑하였드뇨? 네 사욕을 더 위했드뇨? 네 입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마음은 사욕을 따랐도다. 二心(이심)이 앙화로다. 어두움을 헤칠 지어다. 地獄(지옥)만 면하면 된다하나, 밤길을 가는 영혼이여! 연옥불에 선이 되어, 연옥을 자청하는 이는 그 누굴고? 사형만 아니면 다행이요, 감금을 안방 삼는 草敵(초적)이로다. 날마다 해가 비치듯이, 순간마다 비치시는 빛을 받을지어다. 빛으로 하느님을 뵈오면 萬福(만복)의 날을 보리로다. 날마다 음식하듯이, 날마다 빛을 받아야 할지니. 날마다 빛을 받아 밝아지면, 날마다 主(주)와 친해지리로다. 날마다 하느님 더 잘알고, 그분과 切親(절친)해지도다. 절친이 심복이면, 심복은 하나로다. 心中天福(심중천복)중에 어떤 福(복)이, 邪慾(사욕)을 채움만 못하더뇨! 完德(완덕)은 남의 덕이 아니요, 우리의 德(덕)이니, 처음에는 어려워도, 나중에는 우리 本性(본성)의 德(덕)이로다. 시작도 좋고 進行(진행)은 더욱 좋고, 絶頂(절정)은 至極(지극)히 좋으니. 德(덕)에서 德(덕)으로 올라가면, 성총의 강물이 심복에 흐르는도다.
<한국순교복자수도회 창설자 비오 무아 방유룡 안드레아 신부의 영가집 1부 빛 중 6편>
무아의 영성으로 소묘해 본 영성의 토착화 전망 - 이유남(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수녀/영성 신학) 지난 12년 동안 총 49회에 걸쳐 발표되어 온 토착화 연구 발표 중 영성에 대해서는 전부 세 차례, 여섯 분이 연구 발표해 주셨는데, 그 동안 영성의 토착화를 위하여 각기 어떻게 접근하였는지를 간단히 평가한 후, 2000년대를 바라보는 오늘, 한국 교회 영성의 토착화를 무아(無我) 방유룡 신부의 영성인 면형무아(麵形無我)로써 전망해 보고자 한다.
1. 영성의 토착화 연구에 대한 평가
먼저 최석우 신부는 "한국 교회 영성의 어제"에서 초기 교회부터 일제 시대까지 한국 교회 영성의 특성을 크게 순교적 영성, 종말론적 영성, 사주구령적 영성으로 보면서 그 중에도 "순교적 영성은 초기 교회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 교회에서도 가장 뛰어나고 가장 이상적인 영성으로 나타났다. 또 우리는 그것을 가장 한국적인 영성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한국의 순교자들은 그리스도교인인 동시에 자제하고 희생하며 충성하고 해탈할 줄 아는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그들의 목숨을 용감히 또 평온하게 하느님을 위해 바칠 수 있었기 때문이고,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한국적인 고난을 통해 채우고, 나아가 파스카 신비에 한국적인 풍요로움을 다함으로써 가장 훌륭하게 참된 토착화의 표본을 보였기 때문이다."1)라고 표현함으로써 순교적 영성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그 시대 한국 교회를 주도했던 파리 외방 전교회가 수도회가 아닌 재속 사제들로 구성된 선교 단체였기에 지닐 수밖에 없는 한계점으로 수도회의 성소 육성에 비협조적이었고 수도회적 영성을 발전시키는 데 등한할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한다.
약정 토론자였던 김진소 신부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우리 조상들이 목숨을 바쳐 죽을 수 있었던 신앙의 바탕이 어디에 있었겠느냐 하는 것이다. 복음이 이땅에 와서 무성하게 자랄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우리 민족이 가졌던 심성이 이미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더욱 연구하여야 할 것은 한국 사람들이 지녔던 기질, 또는 과거나 지금에나 변하지 않고 한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심의 성향이 무엇이냐 하는 것"2)이라고 덧붙인다.
한편 류병일 신부는 "한국 교회 영성의 오늘"을 발표하면서 200주년 사목 회의 문헌을 중심으로 8개 항목을 열거하나, 결론적으로 한국 교회 영성의 오늘에는 별로 그 특성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특별히 한 가지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한국 교회 신자들의 활력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연수나 피정, 또는 교육이나 교회 활동에 엄청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바로 한국인의 심성 안에 있는 영성의 특성을 정열이라고 표현할 수 있게 한다."라고 말한다.
세 번째, 한정관 신부는 아빌라의 데레사의 [영혼의 성]과 유교를 중심으로 "동서 영성의 융합 시도"라는 주제를 발표하였는데, 그 연구 작업의 큰 성과와 방대한 자료에도 그야말로 동서양 영성의 융합 가능성을 찾는 하나의 시도이기에 갖는 한계를 부인할 수 없다고 본다.
네 번째, "토마스 머튼의 영성과 동양 사상"에 대해 이영식 신부는 '마음'이라는 성서적이며 동양적인 개념으로서 머튼의 영성이 담고 있는 동양적인 요소를 지적한다. "머튼은 마음의 고요를 찾아, 그 곳에서 진아(眞我)의 참모습을 보는 것이 깨달음의 체험이며, 그 마음 깊이 현존하시는 '사람이시오 하느님이신 분'과의 (만남) 친교와 합일에 도달하려는 것이 기도의 진수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고요를 찾는 동양적 기도의 분위기를 살피며 동양 종교와 그리스도교의 근본적 차이에 대해 말하면서 머튼의 영성이 지닌 동양적인 특성과 특히 선불교와의 공통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불교의 공(空), 무(無)가 그리스도교의 절대자, 하느님과 다르다고 말한다. 이는 불교의 영성을 있는 그대로 체험한 게 아니라 단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해하고 접근하는 데서 오는 한계라고 생각한다.
이에 대한 약정 토론자로서 강건기 교수는, "머튼이 이해하는 선(禪)은 '법열을 이끌어 들이는 세련된 기술'이 아니라 존재의 바탕에 대한 '직접적인 눈뜸'이다. 또 불교에서의 공은 소아병적인 '나'의 비움이요 멸(滅)이지, 허무적멸(虛無寂滅)의 단공(但空)이 아니다. 그것은 또 모든 존재는 순전히 환상에 불과하며 '공' 또는 '무'로 나타난다는 그런 것이 아니라,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공이다. 그러므로 공의 체험은 동체자비행(同體慈悲行)의 원천인 것이다. … 곧 머튼이 이해한 공은 단순한 공이 아니라 동시에 불공(不空)이며 fulness요, zero=infinity and infinity=zero의 공이다. 그것은 흔히 '마음의 가난', 'recovery of innocence', 'pure Being'과 대비되고 있다. 끝으로, 머튼의 하느님은 물론 위격적인 면과 더불어 절대적인 면을 가지고 있고, 그런 면에서 공과도 대비될 수 있다고 본다."라고 말한다. 이는 결국 영성적인 만남이야말로 상호간에 교리적이고 신학적인 연구나 해설에 의해서가 아니라 체험적인 접근, 곧 삶으로 체득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점을 암시하는 말이라고 본다.
다섯 번째, 이병호 신부(현 전주교구장 주교)는 "한국 교회 영성의 토착화 전망"이라는 주제로 발표하면서 특별히 우리의 종교 심성에 대하여 좋은 발언을 하고 있다. "1. 우리는 머리의 신학보다는 가슴 또는 마음의 신학에 더 적합한 소질을 타고난 사람들이다. 영성이란 신학이 머리에만 남아 있지 않고 마음에까지 내려가 삶을 실제로 이끌어 갈 때 바로 그것을 지칭하기 위한 말이다. 동양인은 선천적으로 신학을 위한 신학, 이론을 위한 이론인 듯이 전개하는 신학보다는 언제나 영성과의 긴밀한 관계가 유지되는 신학을 거의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2. 머리보다는 마음, 지성적 학식보다는 구체적인 삶에서 얻어지는 지혜를 더욱 숭상해 온 전통에 따라, 참된 영성을 찾아가는 노력에 있어서 그 주체는 전문 교육을 받은 학자들 못지않게 삶의 현장에서 생생한 체험을 쌓아 가는 신앙 대중이 될 것이며 그들의 역할이 점점 더 진지한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덧붙여 특히 성령론이 동방 교회의 전통 속에서 중요한 자리를 점유하는 이유와 한국 교회 안에서 성령 운동이 지속적인 힘을 발휘하는 특성 역시 객관적이고 명제적인 진리보다는 주관적인 체험으로 깨친 진리를 숭상해 온 동양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아울러 특별히 지식이 없는 사람들도 신앙인으로서 그 삶이 올바르고 성실한 사람이면 특유한 식별력, 곧 신앙 감각(sensus fidei)을 지니게 되어 신앙에 따르는 문제들을 나름대로 인식하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신앙 감각은 그 작용 방식에서 이성이나 지성과는 근본적으로 다른데, 말 그대로 일종의 감각이기 때문에 미각이나 촉각처럼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작용하여 추론의 과정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단순하고 소박한 하느님 백성, 곧 신앙 대중이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체득하는 이러한 방향 감각으로 우리 교회의 체질에 맞는 신학과 영성을 찾아갈 수 있으리라 전망한다.
마지막으로, "한국 교회 평신도 영성 토착화의 선결 과제"에 대해 박재만 신부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과 주교 대의원 회의 제7차 정기 총회 의안을 중심으로 평신도 안에 육화해야 할 영성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발표하지만 거기에서 제시한 평신도 영성의 신학적 원리가 한국인의 심성, 문화, 정치, 경제, 사회 및 전통적 상황에 어떻게 토착화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연구 시도되어야 할 과제로 미루고 있다. 특히 한국 평신도 영성의 토착화를 위한 몇 가지 선결 과제로서 신앙과 구체적 생활 간의 연속성, 일괄성, 통합성의 문제, 사제 중심의 신앙 생활이기에 소극적이고 미온적인 교회 활동, 대부분의 사도직 단체들이 지닌 국제적인 성격에서 요구되는 토착화 문제, 이에 우선적으로 필요한 전례 생활의 토착화, 교회의 사회 참여에 대한 인식 부족 등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결론적으로 한국인의 심성을 이해하려는 노력으로서 무속 신앙으로 표현되어 온 기초적 종교심을 비롯한 유, 불, 선의 영향을 파악하여 동양적 영성을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피력하고 있다.
2. 면형무아 - 동양인의 심성으로 직관한 그리스도의 신비
결국 지금까지 영성의 토착화 작업에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순교 영성이야말로 한국적인 영성이요, 이는 한국인 특유의 종교적 심성과 열정에서 기인하는 한편, 동양 영성의 핵심을 나타내는 무나 공이라는 불교적 개념3)은 머튼에 의해 그리스도교적 영성 안에서도 그대로 하느님 체험, 기도의 체험 안에 적용될 수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더욱이 마음의 신학에 적합한 소질을 타고난 우리 동양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신비는 이성적인 추론이나 지성적인 접근에 따르지 않고 곧바로 직관에 따른 깨달음의 방식으로 다가갈 수 있는 내용이 될 수 있다고 하겠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신비를 면형무아라고 직관한 무아 방유룡 신부4)는 자신의 아호마저 무아로 선택하고 무아의 일생을 살면서 그 삶의 결실로 얻어진 면형무아의 영성을 우리에게 남겼다. 우선 면형무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간단히 살펴보고 그 영성이 지닌 동양적 특성과 담고 있는 동양인의 심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1) 면형무아의 교의적 의미
우선, 면형무아는 말 그대로 '자아[自己] 없는 빵의 형상'이며, 이때의 자기는 일차적으로 밀떡을 지칭한다. 밀떡이 자기의 실체를 비우고 그 형상만으로 그리스도를 모셨다는 것을 암시한다.
두 번째, 면형무아는 그리스도의 비움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애 전부를 총결산하시면서 세우신 것이 성체성사인데, 결국 그분은 전생애를 종결짓는 자리에서 하느님 아버지와 그 나라를 위해 무아로 사신 평생의 자기 삶을 성체로 또 다시 내어 놓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 개인의 삶은 없으셨던 분이신데, 이제 다시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위한 음식이요, 사랑의 일치를 위한 양식으로 자신을 먹으라고 내어 놓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의 이런 비움의 생애는 먼저 말씀의 육화로서 하느님의 비움을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에서 면형무아는 또한 하느님 아버지의 비움을 의미한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육화하신 사건은 하느님 아버지의 비하(卑下), 자신을 비우시는 하느님이심을 드러낸다. 결국 모든 구원의 신비는 여기서 시작되고, 이 하느님 아버지의 비움 없이는 어떤 그리스도 사건도, 그리스도 교회도 이야기될 수 없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비움의 사건인 그분의 육화가 바로 모든 것의 시작이요 마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말씀, 행동, 죽음과 수난에 이르는 그 모든 것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고, 아버지를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면, 아버지만을 위하는 아들을 위해 아버지 역시 아들만을 위해 존재하시고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비움을 통한 아버지의 비움이 또한 면형무아의 신비이다.
네 번째, 면형무아는 성령의 비움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육화는 삼위일체 중 특별히 성령의 자기 비움으로 가능했다.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에 성령으로 잉태되신 그리스도의 생애는 바로 성령의 현현(顯現)이요, 성령의 역사였던 것이고 보면, 성령은 누구보다 자기 없음으로 자신의 역할을 가장 충실히 하셨고, 하시는 위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면형무아는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나타낸다. 이미 마리아의 생애에서 드러났듯이,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한 그 순간부터 마리아에게 자신의 삶이라 할 수 있는 인간적이고 고유한 영역은 없어졌던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가 있었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 있었을 뿐, 바로 그것이 마리아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모든 것이었다. 이 마리아의 삶이 바로 전형적인 그리스도인의 삶, 자기 없음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하늘 나라를 향해 걸어가야 하는 삶을 분명하고 완전하게 예표(例標)한다.
결국 면형무아라는 한마디로 무아 방 신부는 성체성사의 신비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적 비움의 존재 방식과 그리스도인의 실존 전부를 말하고 있다. 때문에 면형무아는 방 신부가 완덕의 길을 지향하고 출발하던 때의 하느님 체험이 바로 성체였음을 말하고, 성체의 신비에 대한 완전한 깨달음과 확신을 향한 여정이 바로 방 신부가 걸은 영성의 전(全) 여정이요, 그가 도달하고자 한 완덕이었음을 말해 준다.
그렇다면 무아 방유룡 신부는 왜 하필 무와 무아라는 단어로 자신의 영성적 핵심을 표현했는지 질문해 볼 수 있는데, 일찍이 한학자였던 할아버지5)의 영향으로 신학문을 배우기 전에 집에서 한학을 공부했던 영향과 더불어 그가 착안한 것은 한국적인 수덕의 모범을 바로 서양적인 성인의 모델이 아니라 한국의 순교 성인(당시엔 복자)들에게서 보았다는 데 직접적인 해답이 있다고 본다.
곧 한국의 순교자들은 오랜 박해 시기를 지내느라 선교사들에 의한 체계적인 교리 교육은 꿈도 꿀 수 없었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성서 공부는 물론 미처 신앙이 뿌리내릴 수 있는 충분한 시간도 여건도(전례 생활이든 신심 활동에서든) 없었기에, 더욱 즉자적(卽自的)6)인 형태로 민족의 원초적인 종교심, 유, 불, 선, 무속 신앙 등으로 축적되고 길러진 신앙 감각7)으로, 즉각적으로, 직관적으로 절대적 진리 앞에서 무아의 길, 자아 부정의 길을 걸었다고 무아 방유룡 신부는 보았던 것이다. 더구나 순교의 원형이신 그리스도는 자기 무화(自己無化), 자기 비움의 길을 걸어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고 직관하면서 바로 같은 맥락에서 초기 교회 순교자들의 영성을 물리적인 박해가 없는 오늘이라는 일상 안에서 더 구체적으로 살아내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매순간 모든 장소에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뒤를 따라 철저하게 무아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데서 그의 면형무아의 영성은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2) 면형무아는 동양인의 심성으로 직관한 그리스도의 신비
동양인들의 심성 안에서 무가 의미하는 바는 참으로 절대적이다. 아일랜드인 윌리암 존스톤(William Johnston) 예수회 신부는 일본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불교의 많은 신비가들을 만나고 난 뒤 이렇게 표현한다. "무(無), 또는 공(空), 또는 허(虛)라는 말은 동양의 신비가들 입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말이다. 불교의 몇몇 종파에서는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한다. '무를 제대로 알아들은 자는 만상(萬象)의 핵심에 도달했고, 깨달은 자다.'"8)
실제로 서양 철학의 출발이 有(있음)라면 동양 철학의 출발은 無(없음)이다. 도교 철학에서는 무라는 단어를 가지고 도(道)를 설명한다. 노자가 생각하는 도는 천지가 있기 전부터 있는 것으로 빈 것이며, 무이며, 존재 아닌 존재이기 때문에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것이고(無名), 그저 그것은 크고(大), 영원한 것(常)이다. [노자] 25장에서, "나는 그것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도라고 지어 부른다. 억지로 이름을 붙여 큰 것(大)이라고 한다. 이름 없는 것(無名)은 천지의 처음이고, 이름 있는 것(有名)은 만물의 어머니다."라고 한다.
한편 3-4세기 중국 위진 시대에 유행한 도교 철학의 한 분파이면서 유학과의 결합을 시도한 학파인 현학(玄學), 일명 신도교주의라고도 하는 이 학파에 공자의 어륙집인 '논어'를 무의 관점에서 해설한 [세설신어](世說新語)라는 책이 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왕필(王弼; 226-249년)과 배휘(裵徽)의 대화를 보면, "배휘가 왕필에게 질문하기를, '대체로 무란 참으로 만물이 밑천으로 삼고 있는 바이다. 그러나 성인(공자)은 즐겨 말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노자는 그것을 끝없이 이야기한 것은 어째서일까?' 왕필이 답하였다. '성인은 무를 체득하고 있었으며, 무는 또 말로 풀이할 수 없었으므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노자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 자(유에 머물렀으므로)였으므로 언제나 부족한 바를 말하였다.'"(삼국지, 위지, 종회전주문)라고 하면서 무가 만물의 밑천이요, 이를 깨달은 자가 진정한 성인이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향수(221-300년)와 곽상(?-312년)이 쓴 [장자주석서]에서는 직접적으로 "도는 무다."라고 정의하고 있기도 하다.
격의(格義)의 방법으로 탄생한 선불교(禪佛敎)에서는 그야말로 무가 그 핵심 언어가 되고 있다. 곧 1세기 중반쯤 중국에 인도 불교가 전해졌다고 하고, 이미 3-5세기 사이에 대부분의 대승 불교 경전이 산스크리스트어에서 중국어로 번역되기 시작하는데, 이때 불교 경전이 표현하고자 하는 철학 용어들이 대부분 도교 철학의 주요 단어들로 은유적으로 해석 번역이 되는데, 이를 격의라 하고 이 격의의 방법론으로써 동아시아 문명이 창출해 내는 위대한 불교, 선이 탄생한다. 곧 도교적 핵심 언어인 유, 무, 공, 허, 무위 등의 단어와 함께 도가 철학의 전개 방법인 부정어법(否定語法)도 함께 사용되니, 공종(空宗), 중도종(中道宗)에서 열반(Nirnava)을 설명할 때, "부처의 지혜(Prajna)는 앎이 아니다. 무라고 할 수 있다. 무는 모든 특성, 형태, 모양, 성질 등을 초월해 있어 앎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무에 대해 안다는 것은 무 자체와 하나 됨을 의미하며, 바로 이 상태를 열반이라 한다." 따라서 이 상태에서는 침묵이 유일한 수단이 된다고 말한다.
이 무로 확인되는 깨달음이 바로 선불교의 정통적인 맥을 잇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전설에 따르면, 520-526년 사이에 인도 대승 불교의 28대 조사인 보리 달마가 중국에 와서 선불교의 초대 조사가 되었다고 한다. 이 보리 달마를 시조로 하여 5대째 조사인 홍연에게는 유명한 두 제자가 있었는데, 신수와 혜능이다. 바로 이들에게서 선의 남북조가 갈리게 되었는데, 홍연의 임종시에 두 제자가 서로의 깨달음을 입증하기 위해 지은 계송에서 이 두 종파의 특색이 잘 드러난다.
신수의 계송 :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맑은 거울 같아서/ 닦고 또 닦아 내면/ 때묻지 않으리.[즉심즉불(卽心卽佛)]" 혜능의 계송 : "보리나무 원래 없고/ 거울 또한 없는데/ 본래 아무 것도 존재함이 없거늘/ 무슨 먼지 타령인고? [무심무불(無心無佛)]"
결국 혜능이 6조가 되고 선의 정통성은 무심무불로 이어질 뿐 아니라 그가 쓴 [육조단경](六祖檀經)은 계속적으로 선불교의 핵심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임제종의 창시자인 의현(?-866년)은 말한다. "만일 정견(正見)에 도달하기를 원한다면, 다른 어떤 것에도 결코 속지 마라. 여러분이 내 외적으로 만나는 모든 것을 죽여 버려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그 때 해방되리라. 모든 것으로부터." 허상(虛像)에 속지 마라. 집착하지 마라. 결국 무가 되라는 말이다.
이렇듯 무의 개념이 불교 안에서 절대적 깨달음의 경지와 거기에 도달하는 길을 암시하는 핵심어가 되면서 선불교가 동아시아의 역사를 풍미하게 되자, 유학자들 중에 이 불교 철학과 도가 철학의 영향에 힘입어 신유학(新儒學:주자학, 성리학, 유학, 성학)파로 일컬어지는 이들에 의해 새로운 학풍이 일어나는데 이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는 어떻게 지혜를 획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 때의 지혜는 곧 현자, 성인이 되게 하는 지혜를 뜻한다. 여기에 주돈이(1017-1073년)는 이렇게 답한다. "욕심이 없으면 고요해지고, 고요하면 마음이 텅 빈다. 마음이 비면 움직일 때 곧바로 나아간다. 고요하고 텅 비면 밝게 알고, 밝게 알면 사회에 통달한다. 움직임이 곧으면 공정하고, 공정하면 넓게 되고 밝게 통하니, 거의 성인에 가깝다." 결국 인간은 본성상 근본적으로 선하므로, 인간 마음의 내면적 상태는 본래 어떠한 이기적 욕심도 가지지 않은 정허(靜虛)의 상태일 수 있다. 주돈이에게는 이 사욕 없는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감이 곧 성인이 되는 방법이었으니, 곧 무사(無邪), 무욕(無慾), 무아(無我)가 성인의 상태이고 이 때의 마음은 비어 있고 고요하다. 곧 침묵의 상태이다.
결국 동양인의 영성은 비움(虛, Kenosis)이요, 침묵이요, 무아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맥락을 전제하지 않으면, 무아 방 신부의 영성의 출발이요, 그 정점인 면형무아와 거기에 이르기 위한 완덕의 길인 침묵 속의 여정9)을 알아들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서 침묵은 소리 없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없음, 곧 무아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동양 영성의 전통은 오래 전부터 침묵의 영성이었고 무의 신비를 체득하는 영성이었는데, 무아 방 신부에 의해 마침내 이런 전통은 그리스도의 신비를 관통하는 가장 직접적이고도 완전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3. 무아의 영성으로 소묘해 보는 영성의 토착화 전망
토착화의 근거는 예수님의 육화에 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신다."라는 이 명백한 진리가 바로 예수님을 통해 완전하고 충만하게 드러났다. 이 예수님은 하느님 백성을 한자리에 불러모으고, 치유하고, 용서하고, 구원하는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시는데, 이 성서적 표상이 동양인의 심성, 면형무아의 시각에서 고찰될 때 어떤 예수님의 모습을 드러내는지를 보기 위해 먼저 마태오 복음 사가가 전하는 예수님의 세례 장면을 고찰하면서 거기서부터 토착화를 위한 몇 가지 힌트를 얻고자 한다.
1) 무아의 영성이 고찰하는 예수님의 세례(마태 3,13-17)
세례자 요한을 통해 구약의 하느님 백성이 새로운 복음에 눈뜨기 위한 준비로 받던 세례의 현장에 예수님 친히 찾아가신다.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떻게 선생님께서 제게 오십니까?"(마태 3,14) 하며 굳이 사양한다. 과연 누가 감히 그분에게 세례를 베풀 수 있단 말인가?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는 그분 앞에서 요한은 굳이 사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세례를 받으시고자 하는 그분의 의도는 세례를 베푸는 요한과 받으시려는 당신 자신의 자격 여부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곳에, 인간의 이해와 의문을 뛰어넘는 저 높은 곳에 있었다. 바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아버지의 뜻 외에 예수님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성서 전체에서 일관되게 확인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하여라.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3,15).
그토록 굳이 사양하던 요한은 그제야 예수님께서 하시자는 대로 하였고, 그 때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시는 예수님을 향해 홀연히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당신 위에 내려오시며 들리는 소리가 있었으니,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3,15-17 참조)이었다.
한편,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요르단 강에 모여든 대중은 어떤 부류였을까? 유다교 회당의 성직자들이나 율법 학자들 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을까?(루가 7,30 참조) 아니면 세상 안에서 안정된 삶을 누리고, 기득권을 가진 부유층이나 권력자들이 있었겠는가? 아마도 어디에도 희망을 둘 수 없는, 그래서 새로운 세상을 희망할 수밖에 없는 가난하고 미천한 대중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들의 문화, 그들의 풍습, 그들의 종교적 소망, 그들의 삶이 그대로 드러나 고이고 흘러 드는 요르단 강으로 몸소 찾아가 그들과 함께 강물에 들어가셨다.
대부분의 유다인들과 그 지배층들에게 세례자 요한의 삶의 방식과 선교 자세는 너무 극단적이었고 위험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세례 받으시기를 청하심으로써 그의 삶과 선교 방식을 받아들이실 뿐 아니라 그의 뒤를 이어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시고자 하신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토착화의 올바른 의미와 방법에 대한 상당한 암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① 요르단 강의 세례를 통한 예수님의 신원 :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 마음에 드는 아들'이 드러나듯, 토착화를 통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신원이 마땅히 드러나야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찾아가 그 물에 몸을 담그는 일이다. 그 물이 어떤 물이든 하느님의 백성이 모여, 삶을 나누고, 문화와 풍습과 종교와 역사의 체험이 오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먼저 찾아가 그 물에 몸을 담가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받는 세례를 받아야 한다. 단 그 일은 나를 위한 것도 상대를 위한 것도 아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아버지요, 우리 아버지인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② 아버지를 위한 아들의 비움(Kenosis)은 예수님의 일생을 특징짓는다. 그의 삶, 일하는 방식, 기도와 사명 수행 모두가 '자기 비움', 곧 '무아'였다. 도무지 자기가 없이 살았다. 때문에 그는 마주치는 상대가 누구이든 그를 하느님의 백성으로 맞아들일 수 있었고,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만났다. 마침내 자신을 십자가에 처형하는 이들 앞에서마저 철저히 자신을 무화하는 그를 향해 "하느님의 아들이다."라는 확신과 고백이 터져 나온다.
③ 모든 사람, 모든 사건 안에서 아버지의 뜻을 드러내는 예수님의 사명 수행은 또한 성령의 역사에 맡기는 것이었다. 그들의 선택이 금방 어떤 결과를 드러낼지, 하느님의 어떤 응답을 이끌어 낼지는 예수님 자신도 세례자 요한도 몰랐다. 다만 "지금은 (하자는 대로 하여라)"이라는 잠정적인 기대 속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면 그에 맞갖은 결과를 주시리라 믿었을 뿐, 그 결과는 성령의 역사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성령을 통해 하느님의 응답을 들었던 것이다.
④ 예수님의 이 자연스럽고도 자발적인 행동은 물론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갖는 내적 일체감에서 비롯된다고 할 때, 그리스도를 전하려는 모든 이들 역시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과 내적 일체감을 마땅히 지닐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선적으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를 알아볼 수 있는 마음의 눈(직관할 수 있는 힘)을 지닐 뿐 아니라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창의성과 능동성, 용기와 지혜를 동시에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특히 지배층과 사회를 주도해 가는 이들의 정치, 경제, 문화, 종교의 논리가 인간들에게 부과하는 한계와 틀은 대단한 힘을 지니기 마련인데, 이를 과감하고 용기 있게 극복하고 넘어서기 위해서는 바로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아버지와의 내적 일치가 하느님의 일(특히 토착화 작업)을 하는 이들에게 꼭 필요하다. 사실 예수님은 지식과 학문의 축적, 인간적인 권위와 힘, 가문의 배경, 종족의 문화와 종교적인 우월감 그 어떤 것에도 의지하시지 않았다. 다만 하느님 아버지를 의지하셨고 그분과 갖는 내밀한 친교에서 오는 직관과 신앙 감각에 의존해서 알아보고, 찾아가고, 참여하고 만나고, 치유하고, 용서해 주셨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⑤ 강물에 직접 뛰어듦은 그 물의 흐름에 나를 맡김으로써 직접 온 몸으로 강물을 느끼고 체험한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어설픈 맛봄이 아니고 이런 체험은 똑같이 그 체험을 공유한 이에게만 전달되는 앎을 갖는다. 말이나 글로, 또는 간접적인 어떤 매개 수단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닌 바로 온 몸으로 전 존재로 체득되는 그 앎으로 육화와 토착화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더구나 영성 역시 삶으로 체득되고 표현되는 것이고 보면, 영성의 토착화는 자신을 비우고 먼저 찾아가 강물에 몸을 담그는 예수님의 자기 비움의 방식 바로 그것으로 이루어 내야 할 일이라 하겠다.
2) 면형무아의 영성과 영성의 토착화 전망
이상의 토착화를 위한 마태오 복음의 성서적 소묘는 그 자체로 동양인의 심성으로 그려 낸 예수님의 모습이요, 사명이며, 삶이다. 여기에 소묘된 예수님은 자기 비움으로 일관된 모습을 지니셨다. 성령에 내어 맡김도, 자발적인 세례 요청도, 아버지의 뜻에 순종함도 모두 자기 비움, 무아의 영성으로 일관되어 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면형무아의 영성은 토착화를 위해서도 그 고유의 사명을 갖는다고 하겠다.
사람들이 당신께서 베푸시는 성령의 세례를 받게 하시기 전에 먼저 당신께서 인간들의 세례에 참여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육화하셨고 요르단 강물 속에 육화하신 것이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먼저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지금까지 거의 모든 토착화 연구 작업은 타종교, 타문화, 우리 민족 전체가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하느님과 인간을 향해 늘 자신을 비우시며 사신 그리스도는 오늘도 당신께서 먼저 이 땅의 문화, 철학, 종교, 예술, 역사의 강물 안으로 걸어 들어가시기를 원하신다.
단군의 홍익 이상과 신단수 아래의 제사 장소이든, 무당들의 현란한 춤판이든, 신선들의 수레인 바람과 구름 속이든, 화랑과 낭도들의 도장인 깊은 산 속이든, 원효와 지눌의 일심(一心)과 선정(禪定)의 한 가운데이든, 한민족의 역사적인 강, 그 도도한 흐름에 성령의 신명(神明)이 실렸을 때 벌어지던 생사의 춤판, 저 순교의 현장 속으로든, 그 어디든 당신께서 먼저 들어가시어 세례를 받으시고자 하신다. 바로 거기에 예수님의 예수다움이 있고,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다움이 드러나는 것이다. 예수님은 언제나 그러하셨다. 역사 내적 인간임을 한 번도 거부하신 적이 없었다. 결국 먼저 자기를 비움으로써 상대와 함께 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역사의 주인으로서 상대를 살리시고 만물을 육화하시는 예수님의 신적 능력, 곧 창조하고 구원하는 능력이 발휘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제 그분의 신부인 교회 역시 신랑을 따라야 한다. 철저하게 남김없이 자기를 비워야 한다. 그분의 육화와 비움이 바로 면형무아라면 교회 역시 면형무아의 길을 따라 맡겨진 모든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2000년대를 향한 영성의 토착화를 위해 실천적인 제안 몇 가지를 하겠다.
첫째, 한국인의 심성 안으로 그리스도가 들어오신다는 것은 다른 말로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바로 참 한국인의 심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결국 한국 교회에 속하는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은 동시에 참 한국인이 되라는 소명에 열려 있다는 뜻이다.
한편 한국 교회의 특수성 가운데 하나가 성직자 중심이고, 특히 교구 사제, 본당 사제 중심이라고 한다면 전체 교회의 신자들을 위한 토착화를 위해 가장 먼저 교회 내 지도자들(주교, 신부, 부제, 수도자, 신학생 등)이 한국의 역사, 종교, 철학, 문화가 담고 있는 한국인의 심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 우선적인 과제이다. 지금까지의 토착화 작업들로 구별되고 정리된 우리의 것, 동양의 것에 주목하고, 왜곡된 역사 교육과 단절된 전통 문화의 맥을 다시 찾는 일에 관심과 노력을 기울일 뿐 아니라 그 모든 것에 먼저 비우고, 찾고, 다가가고, 함께 참여하면서 배우고, 체득하고, 삶으로 살아 내야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한국 교회를 대표하여 세계적인 모임이나 국제 대회에 자주 참가하는 지도자들일수록 세계 교회, 로마 교회를 향해 우리 것을 바르게 알아 그 고유성을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도록 스스로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둘째, 현재 한국 교회가 가장 우선적으로 당면한 현실 문제들, 예를 들어, 인간 성숙과 복음적 기쁨이 결여된 사제들의 독신 생활 문제, 신원 의식의 결핍 때문이든 오늘날 한국 사회가 가진 제반 현상 때문이든, 복음 삼덕의 봉헌 생활이 그리스도 안에 확고히 뿌리내리지 못한 채 부유(浮遊)하고 있는 수도자들의 문제, 가두 선교로 영입되는 신자 수에 비례하여 늘고 있는 냉담 신자들의 문제 등을 직시해야 한다. 실제로 현실 문제를 있는 그대로 정확히 인식하는 데서 정확한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기에 무엇보다 교회 자신에 대해 성실하고 정직한 성찰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개인의 영적 삶이 성장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내면으로 들어가서 영혼의 진실을 대면하는 것이라면 교회 공동체 역시 외적인 행사나 양적인 발전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내면의 문제들을 정직하게 대면하는 일이 참된 성장을 약속할 것이다.
셋째, 이제 더 이상은 서구 교회 특히 로마 중심의 신학과 교육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교계 제도에서도 로마적인 특성으로 일관한다든지, 정치적인 지배자들이 갖는 권위와 독선, 특권 의식으로 자기 방어만을 우선으로 하면서 세상을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울러 신학교를 가지고 있는 교구의 주교들은 신학교 교육 과정 안에 반드시 한국 영성을 배울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할 것이다. 더 개방적이고 열린 교육의 장에서 한국인의 심성으로 복음과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믿고, 사랑하도록 교육받은 신학생이라야 자기의 양을 잘 알고 잘 돌보는 목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넷째, 한국 교회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열정적이고 순수한 종교심을 바르고 성실하게 지도할 수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 적절하면서도 토착화한 신심 운동을 전개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한국 영성의 특색을 살린 피정 프로그램의 개발, 연수, 특강을 개설하는 일이다. 물론, 이 몫은 토착화된 영성을 지닌 수도회들의 것이기도 하지만, 교회 전체의 관심과 연구를 바탕으로 이루어질 때, 그 효과가 크다고 하겠다.
1) 최석우, "한국 교회 영성의 어제", 한국 사목 연구소 편, [전례/영성의 토착화], 사목 연구 총서 5,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2년, 148-149면. 2) 위의 책, 150면. 3) 무나 공의 개념은 본래 도가 철학의 핵심 용어인데 중국에 불교가 도입되고 산스크리스트어로 된 불경 서적들이 대량으로 중국에서 번역될 때 열반, 해탈 등을 지칭하는 번역어로 이들 도가적 개념들을 사용하기 시작하는 데서 불교적 주요 개념이 되었을 뿐, 그 이전부터 무와 공의 개념은 전반적인 동양 철학, 동양 종교의 핵심 용어로 사용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4) 1900년 3월 6일에 서울시 중구 정동(서소문 안 대한문 옆)에서 당시 궁내부 주사였으며 영국 공사관의 영어 통역관으로 지내던 방경희 주사관과 손유희 사이의 육남매 중 4남으로 출생하여 18세에 용산 소신학교에 입학, 30세에 사제로 서품된 뒤 수도 생활을 통한 완덕의 길을 추구하나 기존하던 수도원이 전부 외국 수도원이었고, 한국인의 체질에 맞지 않는 수도 생활이요, 한국인의 심성을 고려하지 않는 영성이라고 판단, 한국적인 수도원 건립에 주력한다. 1933년 황해도 재령 본당 신부로 재직할 때부터 청년 남녀들의 기도 모임과 그들의 영적 삶을 지도하며 때를 기다리다가 1946년 개성 본당 신부로 재직 중에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를 창립한다. 이어 1953년에는 남자 수도회를, 1957년에는 수녀회 삼회를 창립하고, 자신도 한국 순교 복자 성직 수도회의 수사로서 종신 서원한 뒤 1986년 선종할 때까지 수녀들과 수사들의 영적 아버지요, 한국 교회 순교자들의 참다운 후예로서 무아 가문의 상속자로서 동양적이고 한국적인 영성의 길을 수립하고 체계화하는 데 일생을 바친다. 5) 방 신부의 조부 방제열은 당시 명성 있는 한학자로서 뮈텔 주교와 백 주교에게 한문을 가르쳐 주었다. 6) 조광, "기독교 토착화 연구에 대한 한국 문화사적 평가", [사목] 247호(1999.8.), 34-50면 참조. 7) 이병호, "한국 교회의 영성의 토착화 전망", 한국 사목 연구소 편, [전례/영성의 토착화],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2년 참조. 8) William Johnston S.J., L'Occhio Interiore, 1987년, 123면. 9) 무아 방 신부는 영성의 절정인 면형 무아(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과의 합일)에 도달하기 위해 침묵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말한다. 특별히 침묵 십계와 완덕 오계가 그것이다. 침묵 십계는 육신 내적 침묵으로써 분심 잡념과 사욕에 침묵함이요, 육신 외적 침묵으로써 이, 목, 구, 비, 수족, 동작에 침묵함이요, 영혼 침묵으로써 이성과 의지를 침묵하라고 한다. 종덕 오계는 이 침묵 십계를 더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일(一)은 분심 잡념을 물리치고, 이(二)는 사욕을 억제하고, 삼(三)은 용모에 명랑과 평화와 미소를 띠우고, 언사에 불만과 감정을 발하지 말고, 태도에 단정하고 예모답고 자연스럽게 하고, 사(四)는 양심 불을 밝히고, 오(五)는 자유를 천주께 바치고 그 성의를 따를지니라.
<사목, 1999년 12월호 / CBCK 홈페이지에서>
1900년 3월 6일, 서울 중구 정동(덕수궁의 대한문 근처) 에서 부친 방경희와 모친 손유희의 육남매중 4째로 태어나셨다. 신학문으로 개화한 집안에서 자란 방신부님은 1917년 18세에 용산 소신학교에 입학하여 1930년 10월 30일, 12년간의 신학교생활을 마치고 30세에 사제서품을 받으셨다.(동창사제로는 서울대교구장을 역임하신 노기남 대주교와 윤형중 신부, 임충신 신부, 양기섭 신부,...등 10명) 강원도 춘천본당의 보좌생활을 시작으로 황해도 장연본당의 보좌를 거쳐, 1933년 황해도 재령본당의 주임신부로 부임. 이무렵 수도원 지망자들을 특별히 사랑하고 교육·지도하는데 대단한 애착을 보이셨으며 신부님 자신이 신학교 시절부터 수도생활을 원했고, 완덕에 이르러 성인이 되고자 하는 원의를 지녀오셨다. 당시 일제지배하에 있던 한민족의 암울한 시대상과 근대화와 함께 서양문명의 우월함을 앞세우며 유입된 서양학문과 가톨릭 교회의 수도생활 그리고 외국인 선교사 수도자들의 모습을 직시하면서 민족의 구원을 염두에 둔 한국인 사제로서 한국적인 수도의 맥을 이어 참된 구도의 길을 개척하는 것이 더욱 마땅하리라는 깨달음에서 순수한 한국적인 수도원을 건립하리라는 소명의식을 가지게 되셨다. 해주본당 주임신부로 재직하면서 수도생활을 갈망하는 윤병현 데레사와 홍은순 마리데레사 두 처녀를 만나게 되어 함께 해방다음해인 1946년 4월 21일 한국순교복자수녀회를 창설하셨다. 이어서 1953년에는 남자회원들을 위한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를 창설하고 1957년 3월에는 재속회인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제삼회]를 설립, 1962년 10월에는 기혼여성·미망인들을 위한 수도 공동체인 [빨마회]의 설립하므로써 한국순교복자 수도회는 남녀수도회와 재속회와 미망인을 위한 수도공동체까지 구성되어 대가족을 이루게 되었다. 1957년 5월 6일에는 방유룡 신부님은 자신이 창설한 수도원에서 종신서원을 발하고 서울교구소속 사제에서 수도사제로 전환하여 한평생을 남녀 스스로의 영적 수덕생활에 몰입하면서 남녀 수도회원과 찾아오는 소수의 일반 신자들의 영적지도에 전념하시다가 1986년 1월 24 선종하셨다.
영혼의 빛
별처럼 반짝이던 때도 옛적이니 오늘은 빛의 빛이 오셨도다. 빛의 빛이 네게 비치시니 너는 찬란한 별이로다. 하늘을 헤어 넘어갈 때에 주의 성광이 비치시면 巨星(거성)들이 무릎을 꿇고 제 빛을 감추는도다. 참으로 이 세상의 지식이 암흑이요, 금은 보배가 티끌이요, 부귀영화가 시궁이요, 그 지혜는 우몽이로다. 逆境(역경)에 빛이 빛을 부르더니 빛과 빛이 빛나라가 되었도다. 빛나라에서 王(왕)하시니 빛은 빛을 내신 빛이시로다. 빛 날지어다 하시니 天地(천지)가 빛났도다. 별들이 이 땅을 비추었고 오늘도 내일도 비추나니 이는 성인들의 前兆(전조)이니, 빛을 받은 이가 주의 뜻하신 별이로다. 이 빛으로 大星(대성)들이 일어나고 죽은 이가 부활하였도다. 아전이 종도가 되고 우몽은 천신이 되었도다. 막달레나가 소원을 풀고 우도가 만복소를 갔도다. 이 빛이 하느님 뜻하신 빛이오니 빛날지어다. 이는 하느님의 말씀이로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도다. 이 빛으로 오늘날 성인이 나고 이 빛으로 성인이 속출하는도다. 이 빛이 하느님 뜻하신 빛이로다. 이 빛이 뜻하신 영광이로다. 진심으로 네 나라가 임하시기를 원하거든 主(주)의 빛을 받을지어다. 主(주)의 빛을 받아 세상을 비출지어다. 달은 햇빛을 받아 땅을 비추면 우리는 主(주)의 빛을 세상에 전하는도다. 육신에는 生氣가 돌아야 하고 영혼에는 빛이 비쳐야 하는도다. 태양에서 빛을 받아 땅에 비치는 것이 별이요, 천주께 빛을 받아 형제를 비추는 이는 성인이로다. 이는 천주께서 뜻하신 바니 예루살렘은 일어나 밝아질지어다. 너의 빛이 오셨으니 여기서 빛을 맞이할지어다. 별은 사람의 모상이니 성인이 나면 그 별이 비치는 도다. 네 별은 어데 있느뇨? 네 별을 찾아 밝아질지어다. 빛을 모말밑에 두지 말고 조명대 위에 놓을지어다. 영원한 빛을 받아 山上(산상)에서 빛날지어다. 이 빛이 없으면 천지만물이 생길 수 없고 이 세상에 난 인생 아무 보람없도다. 태초에 빛이 나기 전 땅의 꼴이 말이 아니더니 빛에서 땅이 제 모양을 내고 만물이 생겨났으니 너도 일어나 빛날지어다. 침묵이 어둠을 헤치고 대월이 빛을 불렀도다.
<한국순교복자수도회 창설자 비오 무아 방유룡 안드레아 신부의 영가편 제 1부 빛 중 1편>
영혼의 복된 생명의 빛
육신 생명은 영혼에 달렸고, 영혼 생명은 良心(양심)에서 오는도다. 육신이 잘살고 못사는 것은, 부귀영화가 아니요, 영혼이 잘살면 육신도 잘살고, 영혼이 잘살면 육신도 망하는도다. 영혼의 福(복)된 生命(생명)은 빛이니, 이 빛은 양심에서 오는도다. 바른 양심이 빛을 받나니, 福(복)된 생명(生命)을 주는 빛이로다. 구름이 끼면 음산하고, 사욕이 일면 우울하도다, 밤이 들면 어둡고, 죄를 지으면 양심이 어두우니, 밤에 무엇을 하겠느뇨! 죄를 짓고 무엇을 바라느뇨! 육신은 먹어야 살고, 영혼은 밝아야 사는도다. 영혼의 음식이 말씀이요, 말씀이 생명이요, 빛이로다. 이 生命(생명)이 하느님 생명이요, 이 빛이 하느님의 빛이로다. 사람이 음식으로만 살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나니, 참생명은 음식에 있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에 있도다. 참된 행복은 부귀에 있지 않고, 하느님의 덕능에 있도다. 풍부한 天地萬物(천지만물)은 하느님 닮은 사람을 위해 내신 것이니, 사람이 하느님을 닮으면, 天地萬物(천지만물)의 주인이 되는도다. "가난하고 겸손한 이가 진복자로다. 天國(천국)이 저들의 것이요, 善良(선량)한 이는 진복자로다 저들이 땅을 차지 하리로다" "너희가 天國(천국)과 義德(의덕)을 구하면 모든 것을 덤으로 주시리라"
<한국순교복자수도회 창설자 비오 무아 방유룡 안드레아 신부의 영가편 제 1부 빛 중 2편>
빛을 향하여
主(주)여! 나는 언제나 주의 집을 그리오니, 언제나 주의 것이 나의 요람이로소이다. 주의 侍下(시하)가 나의 安息處(안식처)니, 거기는 파란이 없나이다. 물과 불을 지날지라도, 나의 갈 곳은 주의 집이요, 온 세상을 다 얻을지라도, 그리운 것은 주의 집이니이다. 이 땅에서 주 외에 바랄 것이 무엇이며, 하늘에선들 무엇이오리까! 나, 이 세상에 난 것이 주를 위해 드림이니, 내 일생에 주의 뜻을 받들고, 주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림이로소이다. 내 일생의 원이 이것이오니, 영원하도록 主堂(주당)에 거함이로소이다. 주는 나의 소원을 들어주시고, 주의 상속이 되게 하셨으니, 주의 仁慈(인자)하심을 노래하고, 나의 허원을 드리나이다. 쇄신분골할지라도 나는 주를 모시리니, 마음이 착한이에게 主는 얼마나 仁慈(인자) 하신고! 나를 힘있게 하시고, 내 팔을 잡으셨도다. 해지고 어두우면, 새는 둥지에 드는도다. 양은 제 우리를 가고, 이 맘은 임이 그리워 임댁을 찾나니, 거기는 어둠도 없고, 밤도 없는 낮이요, 영원한 빛이 찬란한데, 거기 복된 生命(생명)이 있더이다. 이 빛을 찾아 종일토록 침묵하고, 침묵으로 어둠을 물리쳤나이다. 빛이 이 밤을 비추면 낮과 같이 밝아, 육신은 자도 마음은 깨어, 이 빛을 즐기나이다. 이 빛이 生命(생명)이오니, 자도 임은 떠나지 않나이다. 이 몸은 잘지라도, 임의 빛이 비치어, 임은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아니 하시며, 밤새도록 나를 보호하시고, 강복하시며, 새 날을 준비하시면서, 밤을 새시나이다. 침묵은 어둠을 물리치고, 대월은 빛을 부른다 하기에, 빛을 찾아 종일토록 침묵하고, 침묵으로 어둠을 물리쳤으되, 어둠은 끝이 없고, 심연에 잠긴 이몸 어이 할지! 깊은 구름에서 부르짖되 임은 대답이 없으시고, 기진한 품꾼이 어둠을 기다리면, 나는 이 심연에서 자고있더이다. 심연에서 벗어날 줄을 모르고 자고 뒹굴음이 그 얼마던고! 천지개벽 전 빛이 없었을 때에는 혼돈이었고, 대우주가 그러하였으면 소우주도 그러하니, 근본을 모르는 사람이 그러하고, 심연에 잠긴 몸이 그러하도다. 첫빛으로 천지개벽이 시작되고, 풍성하고 아름다웠도다. 사람에게도 빛이 있어야 할지니, 지성을 비치는 빛이로다. 이 빛은 빛을 내신 빛이니, 나는 빛이니라 하신 하느님이시로다. 이 빛이 生命(생명)을 주는 빛이요, 지극히 복된 빛이니, 天地(천지)를 善化(선화)한 빛은, 저 내신 本然(본연)의 빛이요, 사람을 聖化(성화)하는 빛은 저 스스로의 超然(초연)의 빛이시니, 超然(초연)의 빛이 良心(양심)에 비치면 自由(자유)가 받아 모시는도다. 良心(양심)은 의지의 등대요, 등대가 비치는 데가 눈이로다. 이런 눈이 삼라만상을 바로 인식하고, 바로 살게 하는도다. 이런 삶이 복된 삶이요, 복에서 복으로 至福無極(지복무극)의 삶이로다. 사람의 죽음은 무엇이뇨? 넋과 몸이 서로 갈림이로다.
<한국순교복자수도회 창설자 비오 무아 방유룡 안드레아 신부의 영가집 제1부 빛 중 3편>
주는 나의 빛
하느님은 나의 빛이시요, 나의 힘이시로다. 하느님 내게 빛을 비추시니, 이 빛으로 하느님을 알아뵈옵고, 하느님 내게 힘을 주시니 이 힘으로 主(주)를 찾아 가나이다. 빛이 더욱 밝아질수록, 좋으신 하느님을 더 잘알고, 힘이 더욱 강할수록 난관이 물러가고 길이 환하게 열리나이다. 육신은 피가 돌아야 살고, 영혼은 神光(신광)이 비쳐야 사는도다. 건강을 잃고, 죽음과 병으로 약해지고, 生命(생명)이 끊어지니, 사욕으로 良心(양심)이 흐리면, 죄악으로 캄캄하도다. 빛이 人生(인생)의 生命(생명)이로다, 良心(양심)을 비추시는 빛이로다. 善心(선심)이 빛을 받아, 生命(생명)을 얻나니, 本性生命(본성생명)에 靈性生命(영성생명)이 합하면, 天人(천인)이 되는도다. 이는 人力(인력)이 이룬 바 아니요, 全能(전능)이 이루신 바로다. 정성이 至誠(지성)에 이르러, 全能(전능)을 부르나니, 全能(전능)은 至誠(지성)에 응하시고, 전능을 발휘하시는도다.
<한국순교복자수도회 창설자 비오 무아 방유룡 안드레아 신부의 영가편 제 1부 빛 중 4편>
빛이 하늘에서
하느님은 나의 빛이시요 힘이시니,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뇨? 주의 생명이 나의 생명이시니, 겁낼 것이 무엇이뇨? 하느님은 나의 빛이시니, 하늘길을 비추는 빛이시로다. 하느님은 나의 힘이시니, 千苦萬難를 넘어가는 힘이시도다. 빛과 힘으로 무장한 영혼은, 죽음을 이기고 지옥을 헐도다. 적들이 대진해도 무섭지 않고, 화살이 빗발쳐도 안전하도소이다. 내옆에서 천명이 쓰러져도, 또한 옆에서 만명이 쓰러져도, 내게는 미치지 아니 하리니, 能品天神(능품천신)들이 나와 같이 계심이로다. 주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은, 德能(덕능)으로 돌아감이로다. 거름이 더러워도, 萬善萬福(만선만복)이 따라오는도다. 너 나를 따르고자 하거든 十字架(십자가)를 지고 따라올지어다. 우리가 따라가는 이는 누구시뇨? 萬福所(만복소)에 계신 임이시로다. 피가 病菌(병균)을 맞으면, 피와 병균이 協力(협력)하며, 병에 걸리지 않고, 그를 克服(극복)하는도다. 괴로움을 감수하면, 괴로움이 神力(신력)이 되어, 단련으로 힘을 얻은 영혼은, 주께로 치닫나니, 하늘에서 천군이 내려와서, 영혼을 앞서갈 때에, 모든 난관을 돌파하고, 죽음을 정복하는도다. 밤이 가면 날이 오고, 어두움이 가면 빛이 오나니, 無罪(무죄)하면 밝아지고, 制慾(제욕)하면 빛이 나는도다. 하늘에서 오시는 빛은, 至極(지극)히 복된 빛이니, 이 빛이 비치는 곳에, 거룩한 사랑이 깃들고, 모든 德(덕)이 만발하고, 福音三德(복음삼덕) 세송이가 활짝 피어, 명랑한 미소가 흐르고, 萬福(만복)이 맺히도다. 이 빛이 萬福(만복)의 빛이니, 世福(세복)이 모여드는도다. 聖神七恩(성신칠은)이 내리는 길이요,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길이요, 임의 사랑이 오가는 길이요, 사랑하는 영혼이 오르는 길이로다.
<한국순교복자수도회 창설자 비오 무아 방유룡 안드레아 신부의 영가편 제 1부 빛 중 5편>
빛의 힘 하느님은 해와 달을 내시고 萬物(만물)을 비추시는도다. 사람이 세상빛으로 만물을 알아보고, 영혼은 하늘빛으로 主(주)를 뵈옵는도다. 이 生命(생명)은 영혼의 빛이니, 이 빛으로 영혼이 자라는도다. 빛으로 영혼이 主(주)를 뵈옵고, 主(주)의 눈에 드는도다. 어둠은 눈을 가리고, 사욕은 주를 막아내나니. 침묵은 사욕을 헤쳐나가고, 聖神(성신)의 빛을 받는도다. 쉴새없이 피가 돌고 맥이 뛰면, 육신이 살고, 하늘빛이 통하여 살면, 성인이 되는도다. 사람이 역경에 부딪치면, 더욱 강한 빛이 내리시는도다. 빛의 힘은 무한하시니, 영혼은 한없이 거룩하도다. 빛의 힘으로 재생한 사람이 , 천주 좋아하시는 聖人(성인)이로다. 하늘의 사람이요, 地上(지상)의 천사로다. 聖人(성인)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은 聖人(성인)을 사랑하시나니, 빛의 힘으로 세상을 극복하고, 죽음을 정복하였도다. 태산도 바다도 그 길을 막을 수 없고, 고통도 죽음도 맞설 수 없도다. 죽는 날은 성인의 생일이요, 만복의 날이로다. 神秘(신비)가 용약하고, 天使천사들이 즐기시는 경사로다. 이날은 하느님 특별히 강복하신 날이니, 天地(천지)가 환호하는 날이로다. 三仇(삼구)0를 정복하고, 천당으로 개선하여 가는 날이요, 잠세에서 영원세로 가고, 찬류소에서 복으로 가는 날이요, 세상집을 떠나, 천궁으로 이사가는 날이로다. 참사랑은 죄를 모르고, 수고도 몰라라. 거룩한 사랑은 죄를 없이 하나니, 어찌 사랑이 벌을 받으리오! 치열한 사랑은 애덕이니, 애덕에는 연옥도 없어라. 子女(자녀)가 옥에 갇히면, 父母(부모)와 親知(친지)가 걱정하듯, 영혼이 연옥으로 가면, 하느님 얼마나 측은히 여기실고! 세상에 계실 때에 우시던 主(주)를, 하늘에서도 우시게할까봐 죄악을 물리치라고 양심을 주셨거늘, 역경과 유감을 당할 적마다, 力品天神(역품천신)이 호위하셨거늘, 유감이 맹렬할 때는, 성총이 창일하였거늘, 나는 마음문을 닫고, 사욕이 부동하고, 自由(자유)는 主(주)의 길을 외면하였도다. 主(주)의 聖心(성심)을 슬프게 하는 이는, 主(주)를 위하는 이가 아니로다. 主(주)의 慈悲(자비)하심이 부족하였더뇨? 그 성실 하심이 너를 속였느뇨? 하느님을 眞心(진심)으로 사랑하였드뇨? 네 사욕을 더 위했드뇨? 네 입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마음은 사욕을 따랐도다. 二心(이심)이 앙화로다. 어두움을 헤칠 지어다. 地獄(지옥)만 면하면 된다하나, 밤길을 가는 영혼이여! 연옥불에 선이 되어, 연옥을 자청하는 이는 그 누굴고? 사형만 아니면 다행이요, 감금을 안방 삼는 草敵(초적)이로다. 날마다 해가 비치듯이, 순간마다 비치시는 빛을 받을지어다. 빛으로 하느님을 뵈오면 萬福(만복)의 날을 보리로다. 날마다 음식하듯이, 날마다 빛을 받아야 할지니. 날마다 빛을 받아 밝아지면, 날마다 主(주)와 친해지리로다. 날마다 하느님 더 잘알고, 그분과 切親(절친)해지도다. 절친이 심복이면, 심복은 하나로다. 心中天福(심중천복)중에 어떤 福(복)이, 邪慾(사욕)을 채움만 못하더뇨! 完德(완덕)은 남의 덕이 아니요, 우리의 德(덕)이니, 처음에는 어려워도, 나중에는 우리 本性(본성)의 德(덕)이로다. 시작도 좋고 進行(진행)은 더욱 좋고, 絶頂(절정)은 至極(지극)히 좋으니. 德(덕)에서 德(덕)으로 올라가면, 성총의 강물이 심복에 흐르는도다.
<한국순교복자수도회 창설자 비오 무아 방유룡 안드레아 신부의 영가집 1부 빛 중 6편>
무아의 영성으로 소묘해 본 영성의 토착화 전망 - 이유남(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수녀/영성 신학) 지난 12년 동안 총 49회에 걸쳐 발표되어 온 토착화 연구 발표 중 영성에 대해서는 전부 세 차례, 여섯 분이 연구 발표해 주셨는데, 그 동안 영성의 토착화를 위하여 각기 어떻게 접근하였는지를 간단히 평가한 후, 2000년대를 바라보는 오늘, 한국 교회 영성의 토착화를 무아(無我) 방유룡 신부의 영성인 면형무아(麵形無我)로써 전망해 보고자 한다.
1. 영성의 토착화 연구에 대한 평가
먼저 최석우 신부는 "한국 교회 영성의 어제"에서 초기 교회부터 일제 시대까지 한국 교회 영성의 특성을 크게 순교적 영성, 종말론적 영성, 사주구령적 영성으로 보면서 그 중에도 "순교적 영성은 초기 교회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 교회에서도 가장 뛰어나고 가장 이상적인 영성으로 나타났다. 또 우리는 그것을 가장 한국적인 영성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한국의 순교자들은 그리스도교인인 동시에 자제하고 희생하며 충성하고 해탈할 줄 아는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그들의 목숨을 용감히 또 평온하게 하느님을 위해 바칠 수 있었기 때문이고,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한국적인 고난을 통해 채우고, 나아가 파스카 신비에 한국적인 풍요로움을 다함으로써 가장 훌륭하게 참된 토착화의 표본을 보였기 때문이다."1)라고 표현함으로써 순교적 영성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그 시대 한국 교회를 주도했던 파리 외방 전교회가 수도회가 아닌 재속 사제들로 구성된 선교 단체였기에 지닐 수밖에 없는 한계점으로 수도회의 성소 육성에 비협조적이었고 수도회적 영성을 발전시키는 데 등한할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한다.
약정 토론자였던 김진소 신부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우리 조상들이 목숨을 바쳐 죽을 수 있었던 신앙의 바탕이 어디에 있었겠느냐 하는 것이다. 복음이 이땅에 와서 무성하게 자랄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우리 민족이 가졌던 심성이 이미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더욱 연구하여야 할 것은 한국 사람들이 지녔던 기질, 또는 과거나 지금에나 변하지 않고 한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심의 성향이 무엇이냐 하는 것"2)이라고 덧붙인다.
한편 류병일 신부는 "한국 교회 영성의 오늘"을 발표하면서 200주년 사목 회의 문헌을 중심으로 8개 항목을 열거하나, 결론적으로 한국 교회 영성의 오늘에는 별로 그 특성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특별히 한 가지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한국 교회 신자들의 활력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연수나 피정, 또는 교육이나 교회 활동에 엄청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바로 한국인의 심성 안에 있는 영성의 특성을 정열이라고 표현할 수 있게 한다."라고 말한다.
세 번째, 한정관 신부는 아빌라의 데레사의 [영혼의 성]과 유교를 중심으로 "동서 영성의 융합 시도"라는 주제를 발표하였는데, 그 연구 작업의 큰 성과와 방대한 자료에도 그야말로 동서양 영성의 융합 가능성을 찾는 하나의 시도이기에 갖는 한계를 부인할 수 없다고 본다.
네 번째, "토마스 머튼의 영성과 동양 사상"에 대해 이영식 신부는 '마음'이라는 성서적이며 동양적인 개념으로서 머튼의 영성이 담고 있는 동양적인 요소를 지적한다. "머튼은 마음의 고요를 찾아, 그 곳에서 진아(眞我)의 참모습을 보는 것이 깨달음의 체험이며, 그 마음 깊이 현존하시는 '사람이시오 하느님이신 분'과의 (만남) 친교와 합일에 도달하려는 것이 기도의 진수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고요를 찾는 동양적 기도의 분위기를 살피며 동양 종교와 그리스도교의 근본적 차이에 대해 말하면서 머튼의 영성이 지닌 동양적인 특성과 특히 선불교와의 공통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불교의 공(空), 무(無)가 그리스도교의 절대자, 하느님과 다르다고 말한다. 이는 불교의 영성을 있는 그대로 체험한 게 아니라 단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해하고 접근하는 데서 오는 한계라고 생각한다.
이에 대한 약정 토론자로서 강건기 교수는, "머튼이 이해하는 선(禪)은 '법열을 이끌어 들이는 세련된 기술'이 아니라 존재의 바탕에 대한 '직접적인 눈뜸'이다. 또 불교에서의 공은 소아병적인 '나'의 비움이요 멸(滅)이지, 허무적멸(虛無寂滅)의 단공(但空)이 아니다. 그것은 또 모든 존재는 순전히 환상에 불과하며 '공' 또는 '무'로 나타난다는 그런 것이 아니라,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공이다. 그러므로 공의 체험은 동체자비행(同體慈悲行)의 원천인 것이다. … 곧 머튼이 이해한 공은 단순한 공이 아니라 동시에 불공(不空)이며 fulness요, zero=infinity and infinity=zero의 공이다. 그것은 흔히 '마음의 가난', 'recovery of innocence', 'pure Being'과 대비되고 있다. 끝으로, 머튼의 하느님은 물론 위격적인 면과 더불어 절대적인 면을 가지고 있고, 그런 면에서 공과도 대비될 수 있다고 본다."라고 말한다. 이는 결국 영성적인 만남이야말로 상호간에 교리적이고 신학적인 연구나 해설에 의해서가 아니라 체험적인 접근, 곧 삶으로 체득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점을 암시하는 말이라고 본다.
다섯 번째, 이병호 신부(현 전주교구장 주교)는 "한국 교회 영성의 토착화 전망"이라는 주제로 발표하면서 특별히 우리의 종교 심성에 대하여 좋은 발언을 하고 있다. "1. 우리는 머리의 신학보다는 가슴 또는 마음의 신학에 더 적합한 소질을 타고난 사람들이다. 영성이란 신학이 머리에만 남아 있지 않고 마음에까지 내려가 삶을 실제로 이끌어 갈 때 바로 그것을 지칭하기 위한 말이다. 동양인은 선천적으로 신학을 위한 신학, 이론을 위한 이론인 듯이 전개하는 신학보다는 언제나 영성과의 긴밀한 관계가 유지되는 신학을 거의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2. 머리보다는 마음, 지성적 학식보다는 구체적인 삶에서 얻어지는 지혜를 더욱 숭상해 온 전통에 따라, 참된 영성을 찾아가는 노력에 있어서 그 주체는 전문 교육을 받은 학자들 못지않게 삶의 현장에서 생생한 체험을 쌓아 가는 신앙 대중이 될 것이며 그들의 역할이 점점 더 진지한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덧붙여 특히 성령론이 동방 교회의 전통 속에서 중요한 자리를 점유하는 이유와 한국 교회 안에서 성령 운동이 지속적인 힘을 발휘하는 특성 역시 객관적이고 명제적인 진리보다는 주관적인 체험으로 깨친 진리를 숭상해 온 동양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아울러 특별히 지식이 없는 사람들도 신앙인으로서 그 삶이 올바르고 성실한 사람이면 특유한 식별력, 곧 신앙 감각(sensus fidei)을 지니게 되어 신앙에 따르는 문제들을 나름대로 인식하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신앙 감각은 그 작용 방식에서 이성이나 지성과는 근본적으로 다른데, 말 그대로 일종의 감각이기 때문에 미각이나 촉각처럼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작용하여 추론의 과정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단순하고 소박한 하느님 백성, 곧 신앙 대중이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체득하는 이러한 방향 감각으로 우리 교회의 체질에 맞는 신학과 영성을 찾아갈 수 있으리라 전망한다.
마지막으로, "한국 교회 평신도 영성 토착화의 선결 과제"에 대해 박재만 신부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과 주교 대의원 회의 제7차 정기 총회 의안을 중심으로 평신도 안에 육화해야 할 영성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발표하지만 거기에서 제시한 평신도 영성의 신학적 원리가 한국인의 심성, 문화, 정치, 경제, 사회 및 전통적 상황에 어떻게 토착화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연구 시도되어야 할 과제로 미루고 있다. 특히 한국 평신도 영성의 토착화를 위한 몇 가지 선결 과제로서 신앙과 구체적 생활 간의 연속성, 일괄성, 통합성의 문제, 사제 중심의 신앙 생활이기에 소극적이고 미온적인 교회 활동, 대부분의 사도직 단체들이 지닌 국제적인 성격에서 요구되는 토착화 문제, 이에 우선적으로 필요한 전례 생활의 토착화, 교회의 사회 참여에 대한 인식 부족 등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결론적으로 한국인의 심성을 이해하려는 노력으로서 무속 신앙으로 표현되어 온 기초적 종교심을 비롯한 유, 불, 선의 영향을 파악하여 동양적 영성을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피력하고 있다.
2. 면형무아 - 동양인의 심성으로 직관한 그리스도의 신비
결국 지금까지 영성의 토착화 작업에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순교 영성이야말로 한국적인 영성이요, 이는 한국인 특유의 종교적 심성과 열정에서 기인하는 한편, 동양 영성의 핵심을 나타내는 무나 공이라는 불교적 개념3)은 머튼에 의해 그리스도교적 영성 안에서도 그대로 하느님 체험, 기도의 체험 안에 적용될 수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더욱이 마음의 신학에 적합한 소질을 타고난 우리 동양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신비는 이성적인 추론이나 지성적인 접근에 따르지 않고 곧바로 직관에 따른 깨달음의 방식으로 다가갈 수 있는 내용이 될 수 있다고 하겠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신비를 면형무아라고 직관한 무아 방유룡 신부4)는 자신의 아호마저 무아로 선택하고 무아의 일생을 살면서 그 삶의 결실로 얻어진 면형무아의 영성을 우리에게 남겼다. 우선 면형무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간단히 살펴보고 그 영성이 지닌 동양적 특성과 담고 있는 동양인의 심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1) 면형무아의 교의적 의미
우선, 면형무아는 말 그대로 '자아[自己] 없는 빵의 형상'이며, 이때의 자기는 일차적으로 밀떡을 지칭한다. 밀떡이 자기의 실체를 비우고 그 형상만으로 그리스도를 모셨다는 것을 암시한다.
두 번째, 면형무아는 그리스도의 비움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애 전부를 총결산하시면서 세우신 것이 성체성사인데, 결국 그분은 전생애를 종결짓는 자리에서 하느님 아버지와 그 나라를 위해 무아로 사신 평생의 자기 삶을 성체로 또 다시 내어 놓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 개인의 삶은 없으셨던 분이신데, 이제 다시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위한 음식이요, 사랑의 일치를 위한 양식으로 자신을 먹으라고 내어 놓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의 이런 비움의 생애는 먼저 말씀의 육화로서 하느님의 비움을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에서 면형무아는 또한 하느님 아버지의 비움을 의미한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육화하신 사건은 하느님 아버지의 비하(卑下), 자신을 비우시는 하느님이심을 드러낸다. 결국 모든 구원의 신비는 여기서 시작되고, 이 하느님 아버지의 비움 없이는 어떤 그리스도 사건도, 그리스도 교회도 이야기될 수 없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비움의 사건인 그분의 육화가 바로 모든 것의 시작이요 마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말씀, 행동, 죽음과 수난에 이르는 그 모든 것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고, 아버지를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면, 아버지만을 위하는 아들을 위해 아버지 역시 아들만을 위해 존재하시고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비움을 통한 아버지의 비움이 또한 면형무아의 신비이다.
네 번째, 면형무아는 성령의 비움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육화는 삼위일체 중 특별히 성령의 자기 비움으로 가능했다.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에 성령으로 잉태되신 그리스도의 생애는 바로 성령의 현현(顯現)이요, 성령의 역사였던 것이고 보면, 성령은 누구보다 자기 없음으로 자신의 역할을 가장 충실히 하셨고, 하시는 위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면형무아는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나타낸다. 이미 마리아의 생애에서 드러났듯이,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한 그 순간부터 마리아에게 자신의 삶이라 할 수 있는 인간적이고 고유한 영역은 없어졌던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가 있었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 있었을 뿐, 바로 그것이 마리아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모든 것이었다. 이 마리아의 삶이 바로 전형적인 그리스도인의 삶, 자기 없음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하늘 나라를 향해 걸어가야 하는 삶을 분명하고 완전하게 예표(例標)한다.
결국 면형무아라는 한마디로 무아 방 신부는 성체성사의 신비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적 비움의 존재 방식과 그리스도인의 실존 전부를 말하고 있다. 때문에 면형무아는 방 신부가 완덕의 길을 지향하고 출발하던 때의 하느님 체험이 바로 성체였음을 말하고, 성체의 신비에 대한 완전한 깨달음과 확신을 향한 여정이 바로 방 신부가 걸은 영성의 전(全) 여정이요, 그가 도달하고자 한 완덕이었음을 말해 준다.
그렇다면 무아 방유룡 신부는 왜 하필 무와 무아라는 단어로 자신의 영성적 핵심을 표현했는지 질문해 볼 수 있는데, 일찍이 한학자였던 할아버지5)의 영향으로 신학문을 배우기 전에 집에서 한학을 공부했던 영향과 더불어 그가 착안한 것은 한국적인 수덕의 모범을 바로 서양적인 성인의 모델이 아니라 한국의 순교 성인(당시엔 복자)들에게서 보았다는 데 직접적인 해답이 있다고 본다.
곧 한국의 순교자들은 오랜 박해 시기를 지내느라 선교사들에 의한 체계적인 교리 교육은 꿈도 꿀 수 없었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성서 공부는 물론 미처 신앙이 뿌리내릴 수 있는 충분한 시간도 여건도(전례 생활이든 신심 활동에서든) 없었기에, 더욱 즉자적(卽自的)6)인 형태로 민족의 원초적인 종교심, 유, 불, 선, 무속 신앙 등으로 축적되고 길러진 신앙 감각7)으로, 즉각적으로, 직관적으로 절대적 진리 앞에서 무아의 길, 자아 부정의 길을 걸었다고 무아 방유룡 신부는 보았던 것이다. 더구나 순교의 원형이신 그리스도는 자기 무화(自己無化), 자기 비움의 길을 걸어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고 직관하면서 바로 같은 맥락에서 초기 교회 순교자들의 영성을 물리적인 박해가 없는 오늘이라는 일상 안에서 더 구체적으로 살아내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매순간 모든 장소에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뒤를 따라 철저하게 무아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데서 그의 면형무아의 영성은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2) 면형무아는 동양인의 심성으로 직관한 그리스도의 신비
동양인들의 심성 안에서 무가 의미하는 바는 참으로 절대적이다. 아일랜드인 윌리암 존스톤(William Johnston) 예수회 신부는 일본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불교의 많은 신비가들을 만나고 난 뒤 이렇게 표현한다. "무(無), 또는 공(空), 또는 허(虛)라는 말은 동양의 신비가들 입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말이다. 불교의 몇몇 종파에서는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한다. '무를 제대로 알아들은 자는 만상(萬象)의 핵심에 도달했고, 깨달은 자다.'"8)
실제로 서양 철학의 출발이 有(있음)라면 동양 철학의 출발은 無(없음)이다. 도교 철학에서는 무라는 단어를 가지고 도(道)를 설명한다. 노자가 생각하는 도는 천지가 있기 전부터 있는 것으로 빈 것이며, 무이며, 존재 아닌 존재이기 때문에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것이고(無名), 그저 그것은 크고(大), 영원한 것(常)이다. [노자] 25장에서, "나는 그것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도라고 지어 부른다. 억지로 이름을 붙여 큰 것(大)이라고 한다. 이름 없는 것(無名)은 천지의 처음이고, 이름 있는 것(有名)은 만물의 어머니다."라고 한다.
한편 3-4세기 중국 위진 시대에 유행한 도교 철학의 한 분파이면서 유학과의 결합을 시도한 학파인 현학(玄學), 일명 신도교주의라고도 하는 이 학파에 공자의 어륙집인 '논어'를 무의 관점에서 해설한 [세설신어](世說新語)라는 책이 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왕필(王弼; 226-249년)과 배휘(裵徽)의 대화를 보면, "배휘가 왕필에게 질문하기를, '대체로 무란 참으로 만물이 밑천으로 삼고 있는 바이다. 그러나 성인(공자)은 즐겨 말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노자는 그것을 끝없이 이야기한 것은 어째서일까?' 왕필이 답하였다. '성인은 무를 체득하고 있었으며, 무는 또 말로 풀이할 수 없었으므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노자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 자(유에 머물렀으므로)였으므로 언제나 부족한 바를 말하였다.'"(삼국지, 위지, 종회전주문)라고 하면서 무가 만물의 밑천이요, 이를 깨달은 자가 진정한 성인이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향수(221-300년)와 곽상(?-312년)이 쓴 [장자주석서]에서는 직접적으로 "도는 무다."라고 정의하고 있기도 하다.
격의(格義)의 방법으로 탄생한 선불교(禪佛敎)에서는 그야말로 무가 그 핵심 언어가 되고 있다. 곧 1세기 중반쯤 중국에 인도 불교가 전해졌다고 하고, 이미 3-5세기 사이에 대부분의 대승 불교 경전이 산스크리스트어에서 중국어로 번역되기 시작하는데, 이때 불교 경전이 표현하고자 하는 철학 용어들이 대부분 도교 철학의 주요 단어들로 은유적으로 해석 번역이 되는데, 이를 격의라 하고 이 격의의 방법론으로써 동아시아 문명이 창출해 내는 위대한 불교, 선이 탄생한다. 곧 도교적 핵심 언어인 유, 무, 공, 허, 무위 등의 단어와 함께 도가 철학의 전개 방법인 부정어법(否定語法)도 함께 사용되니, 공종(空宗), 중도종(中道宗)에서 열반(Nirnava)을 설명할 때, "부처의 지혜(Prajna)는 앎이 아니다. 무라고 할 수 있다. 무는 모든 특성, 형태, 모양, 성질 등을 초월해 있어 앎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무에 대해 안다는 것은 무 자체와 하나 됨을 의미하며, 바로 이 상태를 열반이라 한다." 따라서 이 상태에서는 침묵이 유일한 수단이 된다고 말한다.
이 무로 확인되는 깨달음이 바로 선불교의 정통적인 맥을 잇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전설에 따르면, 520-526년 사이에 인도 대승 불교의 28대 조사인 보리 달마가 중국에 와서 선불교의 초대 조사가 되었다고 한다. 이 보리 달마를 시조로 하여 5대째 조사인 홍연에게는 유명한 두 제자가 있었는데, 신수와 혜능이다. 바로 이들에게서 선의 남북조가 갈리게 되었는데, 홍연의 임종시에 두 제자가 서로의 깨달음을 입증하기 위해 지은 계송에서 이 두 종파의 특색이 잘 드러난다.
신수의 계송 :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맑은 거울 같아서/ 닦고 또 닦아 내면/ 때묻지 않으리.[즉심즉불(卽心卽佛)]" 혜능의 계송 : "보리나무 원래 없고/ 거울 또한 없는데/ 본래 아무 것도 존재함이 없거늘/ 무슨 먼지 타령인고? [무심무불(無心無佛)]"
결국 혜능이 6조가 되고 선의 정통성은 무심무불로 이어질 뿐 아니라 그가 쓴 [육조단경](六祖檀經)은 계속적으로 선불교의 핵심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임제종의 창시자인 의현(?-866년)은 말한다. "만일 정견(正見)에 도달하기를 원한다면, 다른 어떤 것에도 결코 속지 마라. 여러분이 내 외적으로 만나는 모든 것을 죽여 버려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그 때 해방되리라. 모든 것으로부터." 허상(虛像)에 속지 마라. 집착하지 마라. 결국 무가 되라는 말이다.
이렇듯 무의 개념이 불교 안에서 절대적 깨달음의 경지와 거기에 도달하는 길을 암시하는 핵심어가 되면서 선불교가 동아시아의 역사를 풍미하게 되자, 유학자들 중에 이 불교 철학과 도가 철학의 영향에 힘입어 신유학(新儒學:주자학, 성리학, 유학, 성학)파로 일컬어지는 이들에 의해 새로운 학풍이 일어나는데 이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는 어떻게 지혜를 획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 때의 지혜는 곧 현자, 성인이 되게 하는 지혜를 뜻한다. 여기에 주돈이(1017-1073년)는 이렇게 답한다. "욕심이 없으면 고요해지고, 고요하면 마음이 텅 빈다. 마음이 비면 움직일 때 곧바로 나아간다. 고요하고 텅 비면 밝게 알고, 밝게 알면 사회에 통달한다. 움직임이 곧으면 공정하고, 공정하면 넓게 되고 밝게 통하니, 거의 성인에 가깝다." 결국 인간은 본성상 근본적으로 선하므로, 인간 마음의 내면적 상태는 본래 어떠한 이기적 욕심도 가지지 않은 정허(靜虛)의 상태일 수 있다. 주돈이에게는 이 사욕 없는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감이 곧 성인이 되는 방법이었으니, 곧 무사(無邪), 무욕(無慾), 무아(無我)가 성인의 상태이고 이 때의 마음은 비어 있고 고요하다. 곧 침묵의 상태이다.
결국 동양인의 영성은 비움(虛, Kenosis)이요, 침묵이요, 무아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맥락을 전제하지 않으면, 무아 방 신부의 영성의 출발이요, 그 정점인 면형무아와 거기에 이르기 위한 완덕의 길인 침묵 속의 여정9)을 알아들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서 침묵은 소리 없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없음, 곧 무아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동양 영성의 전통은 오래 전부터 침묵의 영성이었고 무의 신비를 체득하는 영성이었는데, 무아 방 신부에 의해 마침내 이런 전통은 그리스도의 신비를 관통하는 가장 직접적이고도 완전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3. 무아의 영성으로 소묘해 보는 영성의 토착화 전망
토착화의 근거는 예수님의 육화에 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신다."라는 이 명백한 진리가 바로 예수님을 통해 완전하고 충만하게 드러났다. 이 예수님은 하느님 백성을 한자리에 불러모으고, 치유하고, 용서하고, 구원하는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시는데, 이 성서적 표상이 동양인의 심성, 면형무아의 시각에서 고찰될 때 어떤 예수님의 모습을 드러내는지를 보기 위해 먼저 마태오 복음 사가가 전하는 예수님의 세례 장면을 고찰하면서 거기서부터 토착화를 위한 몇 가지 힌트를 얻고자 한다.
1) 무아의 영성이 고찰하는 예수님의 세례(마태 3,13-17)
세례자 요한을 통해 구약의 하느님 백성이 새로운 복음에 눈뜨기 위한 준비로 받던 세례의 현장에 예수님 친히 찾아가신다.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떻게 선생님께서 제게 오십니까?"(마태 3,14) 하며 굳이 사양한다. 과연 누가 감히 그분에게 세례를 베풀 수 있단 말인가?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는 그분 앞에서 요한은 굳이 사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세례를 받으시고자 하는 그분의 의도는 세례를 베푸는 요한과 받으시려는 당신 자신의 자격 여부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곳에, 인간의 이해와 의문을 뛰어넘는 저 높은 곳에 있었다. 바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아버지의 뜻 외에 예수님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성서 전체에서 일관되게 확인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하여라.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3,15).
그토록 굳이 사양하던 요한은 그제야 예수님께서 하시자는 대로 하였고, 그 때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시는 예수님을 향해 홀연히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당신 위에 내려오시며 들리는 소리가 있었으니,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3,15-17 참조)이었다.
한편,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요르단 강에 모여든 대중은 어떤 부류였을까? 유다교 회당의 성직자들이나 율법 학자들 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을까?(루가 7,30 참조) 아니면 세상 안에서 안정된 삶을 누리고, 기득권을 가진 부유층이나 권력자들이 있었겠는가? 아마도 어디에도 희망을 둘 수 없는, 그래서 새로운 세상을 희망할 수밖에 없는 가난하고 미천한 대중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들의 문화, 그들의 풍습, 그들의 종교적 소망, 그들의 삶이 그대로 드러나 고이고 흘러 드는 요르단 강으로 몸소 찾아가 그들과 함께 강물에 들어가셨다.
대부분의 유다인들과 그 지배층들에게 세례자 요한의 삶의 방식과 선교 자세는 너무 극단적이었고 위험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세례 받으시기를 청하심으로써 그의 삶과 선교 방식을 받아들이실 뿐 아니라 그의 뒤를 이어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시고자 하신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토착화의 올바른 의미와 방법에 대한 상당한 암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① 요르단 강의 세례를 통한 예수님의 신원 :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 마음에 드는 아들'이 드러나듯, 토착화를 통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신원이 마땅히 드러나야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찾아가 그 물에 몸을 담그는 일이다. 그 물이 어떤 물이든 하느님의 백성이 모여, 삶을 나누고, 문화와 풍습과 종교와 역사의 체험이 오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먼저 찾아가 그 물에 몸을 담가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받는 세례를 받아야 한다. 단 그 일은 나를 위한 것도 상대를 위한 것도 아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아버지요, 우리 아버지인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② 아버지를 위한 아들의 비움(Kenosis)은 예수님의 일생을 특징짓는다. 그의 삶, 일하는 방식, 기도와 사명 수행 모두가 '자기 비움', 곧 '무아'였다. 도무지 자기가 없이 살았다. 때문에 그는 마주치는 상대가 누구이든 그를 하느님의 백성으로 맞아들일 수 있었고,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만났다. 마침내 자신을 십자가에 처형하는 이들 앞에서마저 철저히 자신을 무화하는 그를 향해 "하느님의 아들이다."라는 확신과 고백이 터져 나온다.
③ 모든 사람, 모든 사건 안에서 아버지의 뜻을 드러내는 예수님의 사명 수행은 또한 성령의 역사에 맡기는 것이었다. 그들의 선택이 금방 어떤 결과를 드러낼지, 하느님의 어떤 응답을 이끌어 낼지는 예수님 자신도 세례자 요한도 몰랐다. 다만 "지금은 (하자는 대로 하여라)"이라는 잠정적인 기대 속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면 그에 맞갖은 결과를 주시리라 믿었을 뿐, 그 결과는 성령의 역사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성령을 통해 하느님의 응답을 들었던 것이다.
④ 예수님의 이 자연스럽고도 자발적인 행동은 물론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갖는 내적 일체감에서 비롯된다고 할 때, 그리스도를 전하려는 모든 이들 역시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과 내적 일체감을 마땅히 지닐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선적으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를 알아볼 수 있는 마음의 눈(직관할 수 있는 힘)을 지닐 뿐 아니라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창의성과 능동성, 용기와 지혜를 동시에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특히 지배층과 사회를 주도해 가는 이들의 정치, 경제, 문화, 종교의 논리가 인간들에게 부과하는 한계와 틀은 대단한 힘을 지니기 마련인데, 이를 과감하고 용기 있게 극복하고 넘어서기 위해서는 바로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아버지와의 내적 일치가 하느님의 일(특히 토착화 작업)을 하는 이들에게 꼭 필요하다. 사실 예수님은 지식과 학문의 축적, 인간적인 권위와 힘, 가문의 배경, 종족의 문화와 종교적인 우월감 그 어떤 것에도 의지하시지 않았다. 다만 하느님 아버지를 의지하셨고 그분과 갖는 내밀한 친교에서 오는 직관과 신앙 감각에 의존해서 알아보고, 찾아가고, 참여하고 만나고, 치유하고, 용서해 주셨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⑤ 강물에 직접 뛰어듦은 그 물의 흐름에 나를 맡김으로써 직접 온 몸으로 강물을 느끼고 체험한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어설픈 맛봄이 아니고 이런 체험은 똑같이 그 체험을 공유한 이에게만 전달되는 앎을 갖는다. 말이나 글로, 또는 간접적인 어떤 매개 수단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닌 바로 온 몸으로 전 존재로 체득되는 그 앎으로 육화와 토착화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더구나 영성 역시 삶으로 체득되고 표현되는 것이고 보면, 영성의 토착화는 자신을 비우고 먼저 찾아가 강물에 몸을 담그는 예수님의 자기 비움의 방식 바로 그것으로 이루어 내야 할 일이라 하겠다.
2) 면형무아의 영성과 영성의 토착화 전망
이상의 토착화를 위한 마태오 복음의 성서적 소묘는 그 자체로 동양인의 심성으로 그려 낸 예수님의 모습이요, 사명이며, 삶이다. 여기에 소묘된 예수님은 자기 비움으로 일관된 모습을 지니셨다. 성령에 내어 맡김도, 자발적인 세례 요청도, 아버지의 뜻에 순종함도 모두 자기 비움, 무아의 영성으로 일관되어 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면형무아의 영성은 토착화를 위해서도 그 고유의 사명을 갖는다고 하겠다.
사람들이 당신께서 베푸시는 성령의 세례를 받게 하시기 전에 먼저 당신께서 인간들의 세례에 참여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육화하셨고 요르단 강물 속에 육화하신 것이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먼저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지금까지 거의 모든 토착화 연구 작업은 타종교, 타문화, 우리 민족 전체가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하느님과 인간을 향해 늘 자신을 비우시며 사신 그리스도는 오늘도 당신께서 먼저 이 땅의 문화, 철학, 종교, 예술, 역사의 강물 안으로 걸어 들어가시기를 원하신다.
단군의 홍익 이상과 신단수 아래의 제사 장소이든, 무당들의 현란한 춤판이든, 신선들의 수레인 바람과 구름 속이든, 화랑과 낭도들의 도장인 깊은 산 속이든, 원효와 지눌의 일심(一心)과 선정(禪定)의 한 가운데이든, 한민족의 역사적인 강, 그 도도한 흐름에 성령의 신명(神明)이 실렸을 때 벌어지던 생사의 춤판, 저 순교의 현장 속으로든, 그 어디든 당신께서 먼저 들어가시어 세례를 받으시고자 하신다. 바로 거기에 예수님의 예수다움이 있고,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다움이 드러나는 것이다. 예수님은 언제나 그러하셨다. 역사 내적 인간임을 한 번도 거부하신 적이 없었다. 결국 먼저 자기를 비움으로써 상대와 함께 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역사의 주인으로서 상대를 살리시고 만물을 육화하시는 예수님의 신적 능력, 곧 창조하고 구원하는 능력이 발휘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제 그분의 신부인 교회 역시 신랑을 따라야 한다. 철저하게 남김없이 자기를 비워야 한다. 그분의 육화와 비움이 바로 면형무아라면 교회 역시 면형무아의 길을 따라 맡겨진 모든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2000년대를 향한 영성의 토착화를 위해 실천적인 제안 몇 가지를 하겠다.
첫째, 한국인의 심성 안으로 그리스도가 들어오신다는 것은 다른 말로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바로 참 한국인의 심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결국 한국 교회에 속하는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은 동시에 참 한국인이 되라는 소명에 열려 있다는 뜻이다.
한편 한국 교회의 특수성 가운데 하나가 성직자 중심이고, 특히 교구 사제, 본당 사제 중심이라고 한다면 전체 교회의 신자들을 위한 토착화를 위해 가장 먼저 교회 내 지도자들(주교, 신부, 부제, 수도자, 신학생 등)이 한국의 역사, 종교, 철학, 문화가 담고 있는 한국인의 심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 우선적인 과제이다. 지금까지의 토착화 작업들로 구별되고 정리된 우리의 것, 동양의 것에 주목하고, 왜곡된 역사 교육과 단절된 전통 문화의 맥을 다시 찾는 일에 관심과 노력을 기울일 뿐 아니라 그 모든 것에 먼저 비우고, 찾고, 다가가고, 함께 참여하면서 배우고, 체득하고, 삶으로 살아 내야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한국 교회를 대표하여 세계적인 모임이나 국제 대회에 자주 참가하는 지도자들일수록 세계 교회, 로마 교회를 향해 우리 것을 바르게 알아 그 고유성을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도록 스스로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둘째, 현재 한국 교회가 가장 우선적으로 당면한 현실 문제들, 예를 들어, 인간 성숙과 복음적 기쁨이 결여된 사제들의 독신 생활 문제, 신원 의식의 결핍 때문이든 오늘날 한국 사회가 가진 제반 현상 때문이든, 복음 삼덕의 봉헌 생활이 그리스도 안에 확고히 뿌리내리지 못한 채 부유(浮遊)하고 있는 수도자들의 문제, 가두 선교로 영입되는 신자 수에 비례하여 늘고 있는 냉담 신자들의 문제 등을 직시해야 한다. 실제로 현실 문제를 있는 그대로 정확히 인식하는 데서 정확한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기에 무엇보다 교회 자신에 대해 성실하고 정직한 성찰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개인의 영적 삶이 성장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내면으로 들어가서 영혼의 진실을 대면하는 것이라면 교회 공동체 역시 외적인 행사나 양적인 발전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내면의 문제들을 정직하게 대면하는 일이 참된 성장을 약속할 것이다.
셋째, 이제 더 이상은 서구 교회 특히 로마 중심의 신학과 교육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교계 제도에서도 로마적인 특성으로 일관한다든지, 정치적인 지배자들이 갖는 권위와 독선, 특권 의식으로 자기 방어만을 우선으로 하면서 세상을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울러 신학교를 가지고 있는 교구의 주교들은 신학교 교육 과정 안에 반드시 한국 영성을 배울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할 것이다. 더 개방적이고 열린 교육의 장에서 한국인의 심성으로 복음과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믿고, 사랑하도록 교육받은 신학생이라야 자기의 양을 잘 알고 잘 돌보는 목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넷째, 한국 교회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열정적이고 순수한 종교심을 바르고 성실하게 지도할 수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 적절하면서도 토착화한 신심 운동을 전개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한국 영성의 특색을 살린 피정 프로그램의 개발, 연수, 특강을 개설하는 일이다. 물론, 이 몫은 토착화된 영성을 지닌 수도회들의 것이기도 하지만, 교회 전체의 관심과 연구를 바탕으로 이루어질 때, 그 효과가 크다고 하겠다.
1) 최석우, "한국 교회 영성의 어제", 한국 사목 연구소 편, [전례/영성의 토착화], 사목 연구 총서 5,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2년, 148-149면. 2) 위의 책, 150면. 3) 무나 공의 개념은 본래 도가 철학의 핵심 용어인데 중국에 불교가 도입되고 산스크리스트어로 된 불경 서적들이 대량으로 중국에서 번역될 때 열반, 해탈 등을 지칭하는 번역어로 이들 도가적 개념들을 사용하기 시작하는 데서 불교적 주요 개념이 되었을 뿐, 그 이전부터 무와 공의 개념은 전반적인 동양 철학, 동양 종교의 핵심 용어로 사용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4) 1900년 3월 6일에 서울시 중구 정동(서소문 안 대한문 옆)에서 당시 궁내부 주사였으며 영국 공사관의 영어 통역관으로 지내던 방경희 주사관과 손유희 사이의 육남매 중 4남으로 출생하여 18세에 용산 소신학교에 입학, 30세에 사제로 서품된 뒤 수도 생활을 통한 완덕의 길을 추구하나 기존하던 수도원이 전부 외국 수도원이었고, 한국인의 체질에 맞지 않는 수도 생활이요, 한국인의 심성을 고려하지 않는 영성이라고 판단, 한국적인 수도원 건립에 주력한다. 1933년 황해도 재령 본당 신부로 재직할 때부터 청년 남녀들의 기도 모임과 그들의 영적 삶을 지도하며 때를 기다리다가 1946년 개성 본당 신부로 재직 중에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를 창립한다. 이어 1953년에는 남자 수도회를, 1957년에는 수녀회 삼회를 창립하고, 자신도 한국 순교 복자 성직 수도회의 수사로서 종신 서원한 뒤 1986년 선종할 때까지 수녀들과 수사들의 영적 아버지요, 한국 교회 순교자들의 참다운 후예로서 무아 가문의 상속자로서 동양적이고 한국적인 영성의 길을 수립하고 체계화하는 데 일생을 바친다. 5) 방 신부의 조부 방제열은 당시 명성 있는 한학자로서 뮈텔 주교와 백 주교에게 한문을 가르쳐 주었다. 6) 조광, "기독교 토착화 연구에 대한 한국 문화사적 평가", [사목] 247호(1999.8.), 34-50면 참조. 7) 이병호, "한국 교회의 영성의 토착화 전망", 한국 사목 연구소 편, [전례/영성의 토착화],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2년 참조. 8) William Johnston S.J., L'Occhio Interiore, 1987년, 123면. 9) 무아 방 신부는 영성의 절정인 면형 무아(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과의 합일)에 도달하기 위해 침묵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말한다. 특별히 침묵 십계와 완덕 오계가 그것이다. 침묵 십계는 육신 내적 침묵으로써 분심 잡념과 사욕에 침묵함이요, 육신 외적 침묵으로써 이, 목, 구, 비, 수족, 동작에 침묵함이요, 영혼 침묵으로써 이성과 의지를 침묵하라고 한다. 종덕 오계는 이 침묵 십계를 더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일(一)은 분심 잡념을 물리치고, 이(二)는 사욕을 억제하고, 삼(三)은 용모에 명랑과 평화와 미소를 띠우고, 언사에 불만과 감정을 발하지 말고, 태도에 단정하고 예모답고 자연스럽게 하고, 사(四)는 양심 불을 밝히고, 오(五)는 자유를 천주께 바치고 그 성의를 따를지니라.
<사목, 1999년 12월호 / CBCK 홈페이지에서>
1900년 3월 6일, 서울 중구 정동(덕수궁의 대한문 근처) 에서 부친 방경희와 모친 손유희의 육남매중 4째로 태어나셨다. 신학문으로 개화한 집안에서 자란 방신부님은 1917년 18세에 용산 소신학교에 입학하여 1930년 10월 30일, 12년간의 신학교생활을 마치고 30세에 사제서품을 받으셨다.(동창사제로는 서울대교구장을 역임하신 노기남 대주교와 윤형중 신부, 임충신 신부, 양기섭 신부,...등 10명) 강원도 춘천본당의 보좌생활을 시작으로 황해도 장연본당의 보좌를 거쳐, 1933년 황해도 재령본당의 주임신부로 부임. 이무렵 수도원 지망자들을 특별히 사랑하고 교육·지도하는데 대단한 애착을 보이셨으며 신부님 자신이 신학교 시절부터 수도생활을 원했고, 완덕에 이르러 성인이 되고자 하는 원의를 지녀오셨다. 당시 일제지배하에 있던 한민족의 암울한 시대상과 근대화와 함께 서양문명의 우월함을 앞세우며 유입된 서양학문과 가톨릭 교회의 수도생활 그리고 외국인 선교사 수도자들의 모습을 직시하면서 민족의 구원을 염두에 둔 한국인 사제로서 한국적인 수도의 맥을 이어 참된 구도의 길을 개척하는 것이 더욱 마땅하리라는 깨달음에서 순수한 한국적인 수도원을 건립하리라는 소명의식을 가지게 되셨다. 해주본당 주임신부로 재직하면서 수도생활을 갈망하는 윤병현 데레사와 홍은순 마리데레사 두 처녀를 만나게 되어 함께 해방다음해인 1946년 4월 21일 한국순교복자수녀회를 창설하셨다. 이어서 1953년에는 남자회원들을 위한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를 창설하고 1957년 3월에는 재속회인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제삼회]를 설립, 1962년 10월에는 기혼여성·미망인들을 위한 수도 공동체인 [빨마회]의 설립하므로써 한국순교복자 수도회는 남녀수도회와 재속회와 미망인을 위한 수도공동체까지 구성되어 대가족을 이루게 되었다. 1957년 5월 6일에는 방유룡 신부님은 자신이 창설한 수도원에서 종신서원을 발하고 서울교구소속 사제에서 수도사제로 전환하여 한평생을 남녀 스스로의 영적 수덕생활에 몰입하면서 남녀 수도회원과 찾아오는 소수의 일반 신자들의 영적지도에 전념하시다가 1986년 1월 24 선종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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