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창 32장 22-32절
설교제목 : 하나님과 겨룬 자
일인칭의 의미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이 나라와 세계가 불안정한 정세 가운데 있지만, 설 연휴 기간을 통하여 마음의 위로와 따뜻함, 회복이 있는 시간이 되시길 빕니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한강씨의 수상소감문을 읽었습니다. 한강씨가 어떻게 인간의 깊은 내면과 집단 속에 깃들인 어둠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지 수상소감을 보며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수상소감은 다음과 같습니다.
“... 어렸을 때 궁금했습니다. 우리는 왜 태어났는지. 왜 고통과 사랑이 존재하는지. 그것들은 수 천년 동안 문학이 던졌고, 지금도 던지고 있는 질문들입니다. 우리가 이 세계에 잠시 머무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세계에서 우리가 끝끝내 인간으로 남는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 가장 어두운 밤에 우리의 본성에 대해 질문하는, 이 행성에 깃들인 사람들과 생명체들의 일인칭을 끈질기게 상상하는, 끝끝내 우리를 연결하는 언어를 다루는 문학에는 필연적으로 체온이 깃들여 있습니다. 그렇게 필연적으로 문학을 읽고 쓰는 일은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들의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폭력의 반대편인 이 자리에 함께 서 있는 여러분과 함께, 문학을 위한 이 상의 의미를 나누고 싶습니다.”
사유하는 인간으로서 ‘호모 사피엔스’가 인간을 발전시키기지만, 진정으로 인간 개체를 성숙시키는 것은 ‘호모 궤렌스’, 질문하는 인간일 것입니다. 한강 작가는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해 어린 시절부터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자신의 문학에 녹여왔습니다. 그녀의 질문은 중요합니다. 인간이 끊임없이 질문하지 않으면, 충동의 먹이가 되고, 집단의 노예로 전락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녀가 던지는 핵심 질문은 일인칭으로서 이 세계에 잠시 머무는 의미는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대충 시간을 보내며, 그저 욕망을 소비하면서 보내는 것이 존재의 의미일까요? 무의식성에 사로잡혀 자신의 권력과 부만을 쟁취하고 지키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일인칭의 의미일까요?
일인칭의 의미에 대하여 끊임없이 질문하지 않는 인간의 결말이 한국사회를 혼란하게 만든 대통령을 통해 잘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 또한 일인칭의 의미를 묻지 않으면, 잠시 머물다 가는 이 행성에서 진정한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없음을 마음에 품고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두려운 밤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하나임의 하나님을 목격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돌아오는 자에게 두 군대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참된 의미를 온전히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32장 7절에서 너무나 두렵고 걱정되어 자신의 일행과 가축 떼를 두 떼로 나누었습니다. 마치 두 군대처럼 나누기는 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키신다는 것을 깨달아서 나누기 보다는 한 떼를 치면, 한 떼라도 도망가기 위한 방편으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야곱은 걱정이 가시지 않자, 하나님께 형 에서로부터 자신을 건져주시길 기도하였습니다(32:9-12). 그래도 진정이 안되었는지, 그날 밤에 에서에게 줄 선물을 따로 골라내었습니다. 암염소 이백마리, 숫염소 스무마리, 암양 이백마리, 숫양 스무 마리, 어미 낙타 서른 마리와 거기에 딸린 새끼들, 암소 마흔 마리, 황소 열 마리, 암나귀 스무 마리와 새끼 나귀 열 마리였습니다. 엄청난 선물 공세를 통하여 에서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환심을 사려했습니다. 이 선물들도 두 떼로 나누어 야곱은 형 에서의 분노가 서서히 풀어주고 만나서 반가이 맞아 주리라 기대했습니다. 이런 철저한 계획에도 야곱은 자다가 일어나서 자신의 아내들과 아들들을 데리고 얍복 나루를 건너 보내고, 뒤에 홀로 남았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자신의 계획을 따라 모든 조취를 취했지만, 그의 두려움은 사그러들지 않았습니다. 보복에 대한 두려움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형 에서에 대한 범죄는 동시에 신성한 축복을 가로챈 범죄입니다. 그림자에 대한 범죄는 곧 자기에 대한 범죄이며, 하나님에 대한 범죄이기 때문에, 보복의 형태로 자극될 수 밖에 없습니다. 외적으로 타인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타인의 보복을 두려워하는 것은 전체정신의 핵인 자기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신명기 33장 35절에서도 복수와 보복은 나의 것(야훼의 것)이라는 말씀은 보복당함에 대한 심리적 두려움에는 하나님이 게재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내적으로도 그림자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그것은 전체 정신을 침해하는 것이고, 자기의 보복을 야기할 수 있음을 제시합니다. 이것이 내면의 법칙입니다. 야곱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과 대결로써로만 해결될 수 있음을 드러냅니다.
두려움의 얼굴 인식하기
야곱은 가족들을 얍복 나루로 건너 보내고, 뒤에 홀로 남아 갑자기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와 함께 동이 틀 때까지 씨름하였습니다. 낯선 하나님이 출현한 것입니다. 도저히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고, 날이 새려 하니 놓아달라 하였고, 야곱은 자신을 축복하지 않으면 놓아줄 수 없다고 합니다.
야곱은 에서에게 선물을 보내면서 에서의 분노와 씨름했을 것입니다. 에서와 만날 용기가 생길 때까지 두려움과 씨름했을 것입니다. 이런 모든 종류의 강렬한 정서는 깊은 무의식의 심층에서 나오는 것이고, 자아의식이 이를 중개하지 않으면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그런 분노와 공포가 자아의식을 사로잡아버리면, 신경증이나 분열증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결정적인 순간은 홀로 남은 야곱이 하나님과 겨루는 때입니다. 융은 얍복나루에서 벌인 대결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그(하나님)는 처음에 말하자면 적의에 가득 찬 형태의 폭력적인 자로 나타난다. 그래서 영웅은 그와 싸우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역동적인 무의식의 폭력성에 상응한다. 이러한 형태의 신은 극복되어야 한다. 이 싸움은 야보크(얍복) 여울가에서 야훼의 천사와 벌인 야곱의 격투와 비슷하다. 인간이 압도적인 위력에도 굴복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무조건 맹목적으로 그 위력에 복종하지 않고, 오히려 신적인 힘의 동물적 특성에 대항하여 인간 존재를 성공적으로 지킨다면, 그때 충동 위력의 엄습은 신의 체험이 된다. 살아 있는 신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융기본저작집 8권, 영웅과 어머니 원형, p261-262]
자아의식이 이런 엄습해오는 본능적 위력에 맞서 견딜 수 있다면, 그것은 그에게 신성한 체험이 되고, 이는 무서운 신의 얼굴을 변형시킬 뿐 아니라 자아의식도 새로운 존재로 변환시킵니다.
하나님과 겨룬 자
하나님의 사자를 끝까지 부여잡은 야곱은 자신에게 축복해주실 것을 요구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자는 야곱에게 물었습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은 대답하였습니다. “야곱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닐 것입니다. 야곱이란 이름으로 살아온 삶을 각인시킵니다. 너의 정체성과 그 인격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발뒤꿈치를 잡고, 속이며 산 야곱의 이름을 각성시키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하나님은 다시 말씀합니다. “네가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겼으니, 이제 네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야곱의 이름을 하나님과 겨룬다는 의미의 이스라엘로 바꾸어줍니다. 자신의 존재의 정체성이 변화되고, 발전된 것입니다. 이스라엘로의 이름의 변환은 모든 인간이 가야할 개성화, 인격의 발전, 성화의 모델을 제시합니다. 하나님과 겨룬다는 의미는 하나님과 씨름하는 존재가 인간의 궁극적인 본성임을 일러줍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씨름할 때 존재의 의미를 이해하고 나 자신을 일인칭으로 객관적으로 성찰할 수 있습니다. 나는 정신의 중심이 아니며, 결코 우주의 중심이 될 수 없습니다. 나의 왕국은 의식의 지협적인 부분일 뿐 전체라 할 수 없습니다. 정신의 중심과 우주의 중심은 하나님이시며, 전체 세계는 하나님 그 자체입니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는 자는 보다 위대한 힘과 위대한 인격과의 접촉을 통하여 인간에게 부과된 운명과 발전을 추동해갈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과 겨룬 자, 이스라엘이란 이름 속에는 때로 적대적인 모습으로 등장하는 하나님의 위력, 역동적인 무의식의 폭력성으로 나타날 때 이를 극복해야 하는 과제가 인간 모두에게 있음을 시사합니다. 때로 하나님의 얼굴은 선한 모습으로 아름다운 모습으로만 등장하지 않습니다. 야곱조차도 엉덩이뼈를 쳐서 반불구의 모습으로 만들어버립니다. 뜻밖에 만나는 불행한 사건과 질병과 고통 또한 어두운 하나님의 위력일 수 있습니다. 이때가 신적 경험을 통하여 나 자신을 변환해야할 때일 수 있습니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변화하는 기회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무서운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해야할 때 끈기있게 씨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야곱이 새 이름, 이스라엘로 바뀌었듯이 우리의 존재의 정체성이 보다 발전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