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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광주 5.18 때
광주에 내려 왔던
북한
특수군 534
폭풍 군단 우레3여단
부대의 158 명의전사자와
전투 기록 물을
2017년 12월 20일에 올린
참깨 방송에서 들어 보세요
시간 18분 걸린다
5.18 당시 광주에 있었던
문병소 중사는
북한의 조선 중앙 통신의
광주인민보고대회(5.18 민주화)
30 회 보고 대회 때
맨 앞줄 로열 박스에 앉은
지만원의 5.18 영상 분석의
광수를 5.18 당시 사진을 보고
그 당시 상황을 분명 하게 그억 한다고 그랬다
그 트럭은 광주 시민이 꾁 줄지어 있는
뒤 편의 공간에서 돌아 다녔다고 한다
즉
계엄 군인들이 줄로 서서 방어하고
맞은 편에 광주 시민들이 있었고
광주 시민들 뒤에서 별도로 트럭은 돌아 다니다가
계엄군 쪽으로 와서 돌아 다녔다고 한다
광주에 갔었던 다른 사람들의 증언도 들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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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5.18에서 특전사 군인들이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것은
1980년 5월 21 일 자정 서울 용산역을 출발해서
광주로 가던 2 개 연대중 1 개 연대는 열차편으로 가고
열차로 같이 갈 수 없었던 1 개 연대 차량은
전두환과 같은 육사 11기 박준병 소장 사단장이
광주로 육로로 가던 1 개 연대 차량 45 대가 폭도들에게
기습 당했다고 한다
청문회 기록에도 없는 것이다
광주 송정리로 가던 부대가
광주 톨 게이트로 진입하자 마자
시민(농민)으로 가장한 (북한 특수군)폭도들이
환영 하는 척 하여서
손을 흔들었는데 육로로 가던 45대의
45 대의 차량이 진입하자
폭도들이 낫과 몸동이 농기구를 휘두르면서
차량들을 다 빼앗는 바람에
아군 특수군들은
데모데 진압 간다고 실탄도 없이 가다가
처량 버리고 다 도망 쳤다고
그리고 많은 특전사 군인들이 이 때 죽었다고 하며
가지고 가던 총을 다 빼앗겼다고 하였다
그 사실을
도망쳐 나온 서 모 중위가 간신히 광주의 경찰
간부집으로 도망쳐 가서
그 집 할머니가 구해다 준 사복을 입고서
부대에 와서 알려서 알았다고 한다
특수군이 입은 엄청난 피해를 챙피해서 까발리지 않고
그 당시 기습을 당하였던 군인들은 얼마나
겁을 먹었을까
문병소 중사의 증언과 다른 사람들의 증언 들어 보세요
북한 특수군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대한민국
특수군을 챙 피하게 하였을까요
문병소 중사가 이야기 하는 주요 전투
(폭도로 가장한 북한 특수군 과
대한민국 특전사 군인들과의 전투)
5월 21일
오후 6-7시 해질무렵
대한민국 특전사 들은 조선 대학교 본관 건물과
의대 건물 사이로 철수 할려고 하였다
폭도들은 조선 대학교
본관 옥상과
의대 옥상에
무기고에서 빼앗은 기관총을 양쪽에 거치해 놓고
계엄군들이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위협 사격을 하였다
그래서 새벽 2 시 정도 까지
조선 대학의 뒷산 계곡에서 머물러야만 하였다
새벽 2 시쯤 빠져 나올라 하다가
여단장 정웅이 탄 짚차가 나가는데 사방에서
총을 쏘아 대어
여단장 운전수 하사는 그 자리에서 죽고
짚차는 철길 옆에 디비졌다
그리고 여단장 옷과 특수 군 몇명의
옷을 다 빼앗겼다
무전기도 빼앗겼다
여단장은 다른 병사 몇명과 무등산
미군 미사일 기지로 도망 쳤다
남아 있는 특전사 병사들은
총알도 없는 빈 총과
먹지 못한 상태에서
그날 저녁을 그렇게 보내고
다음날 실탄과
비상 식량을 지급 받았다
그리하여 5월23 일 날은 빠져 나와서
광주 비행장 쪽으로 갈려고 하였다
5월 25일
검문소 근처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시민군으로 위장한 폭도들은
무고고에서 빼 앗은 무기들로 무장 하고
사방에서 사격을 하였다
가장 큰 전투는 검문소 근처에서 벌어졌다
폭도들이 계엄군 복을 입고 목포 쪽으로
동망 갈려고 하니
계엄군 복장을 하고서 트럭을 타고
광주 비행장 쪽으로 갈려고 하였던
63 대대 차량이 진입해서 오는데
도로 양쪽에 묻어 놓은
대전차 지뢰와 크레모아 등이
큰 폭발음을 내면서 터지는 바람에
많은 특전사 군인들이 죽었다 한다
무전기 비밀이 다세어 나가서 당한 것이었다
더 자세한 것은 문병소 중사 증언을
들어 보기 바라니다
20 사단 62 연대 2 중대 최종원 대위의
간절한 부탁
5.18 때 광주에 있었던
31 사단, 20 사단, 3 공수, 11 공수,
전교사참모진 교도대, 보병학교, 기갑학교,
학생장교, OAC, OBC 장교들이여!
당신들이 광주에서 보고 느낀 것만
참깨 방송으로 이야기 해 주세요
믄병소 중사는 자기가 겪었던
5 월 21일
5월 22일
오월 23일
5월 25 일날 가장 많은 특전사 군인들이
죽어간 것을 이야기 하였다
검문소 지나 갈 때
가짜 소령이 지나가면서
비표로 붉은 깃발을 흔들어서
뒤 따르던 63 대대 특전사 장병들이
터지는 대 전차 지뢰, 크레모아 등이
폭발 하는 바람에 죽어 갔다고 이야기 하였다
그 가짜 소령은 자기가 타고 가던 짚차를 버리고 부근의 산으로 들어 가서 권총으로 턱에서 머리로 총을 쏘아서 자살 하였다 하였다
주남 마을 뒷산 대공포 진지에서
쇠사슬에 묶어서 기관총을 쏘아 대던
당시 초등 학생(지금 쯤 40 살 이상)도 당시 상황을
이야기 해 주세요
1979년 10.26 당시 청와대 경호실에 있었던
11 공수 김민수 중사의 이야기도 들어 보세요
월남전에도 참전 하였던 당시 37 살의 언론인
김동문 의 증언을 들어 보세요
5.18 당시 전남 매일 신문을 유신 언론이라고 말하였다
5월 19일 월요일 날 김대중 사조직이 20 대 젊은 이들을
몽둥이와 각목을 들고서
"나주 민이여! 광주로 갑시다
공수 부대가 있는 광주로 갑시다" 라고 선동 하였다고 한다
김동문은 정웅, 이해찬, 한 화 갑 등 35 명이
모두 5.18 유공자가 되었다고 하였다
지만원은 12월 28일 시국 진단에서
박근혜가 가장 잘못한 것은
2013년 쳐널A TV 조선와 털북자들을 상대로
광주 5.18 까발리는 것을
그렇게하지 말라고
방송 중단 하고 방송 진행자 중징계
시키도록 한 것이 지금 이렇게 당하는
이유라 하였다
전두환과 김대중 노무현 시절에 온갖
권력을 누린 육사 15기 출신 권정달은
죽기 전에 양심 고백 해서 육사생들에게
잘못을 회개 하라고
권정달은 김영삼 시절
전두환이 대통령을 하고 싶어서
5.18을 일으켰다고
죄를 전두환에게 덮어 씌워 감옥 가게 하고
자기는 온갖 좋은 자리와 권력을
잘 누리고 있다고
권정달 시절 안기부 장관 권영해와
권영해 밑에서 일하였던 홍준표
홍준표는 5 월 대선 전에
광주 망월동 가서 비석을 붙잡고 쇼 했다
그러니
보수 우파에서 많은 표를 얻었으리요
모두들 자기 잘못을 뉘우쳐서
살아 가라고
조갑제는 뒤에서 웅성 거리지 말고
앞에 나서서 5.18을
군사적으로 토론 좀 하고 그래라
1990년 노태우
1995년 김영삼
1997년 김대중의 잘못된 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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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1 일 쯤
오후 6-7 시쯤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 때
조선 대 뒤 고압선 부근에서 계엄군이 모여서
철수 하느라
뒤죽 박중인데
폭도(북한 특수군)들이 총을 쏘 아 댔다
다시 돌아서 조선 대학교 정문으로 나오는데
조선대 본관 건물과 의대 건물의 옥상에
설치해두 기관총으로 양쪽에서 사격을 하여서
계엄군은 이리 저리 피하면서
조선대 정문 쪽으로 도망 가기 바빴다
그 와중에 최웅 장군 짚차도 운전수 하사가 총에 맞아 죽고 짚차는 뒤집어 졌다
최웅 장군은
권총과 무전기 다 폭도들에게 빼앗기고
광주 무등산 미군 미사일 기지에 있다고
그 다음날 알았다고 한다
미처 빠져 나가지 못한 계엄군은 밤새도록
조선대 뒤의 계곡에서 숨어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11 여단장 최웅은 자기를 태우고 가던
짚차가 폭도들이 조선대 옥상에 거치해둔
기관총으로 쏘아서
운전사 하사는 즉사하고
짚차는 뒤비졌고
자기는 무등산으로 도망 가서
무등산 미군 미사일 기지에 갔다가왔는데
전두환으로 부터 격려금 까지 받았다는데
왜 그사실을 알리지 않고 있는데
그 때 운전사 하사 외에도
군수처 보급관 차정환 대위와
여단 정훈관 군목 최연안 중위
갓 전입온 최연안 소위 등
4 명이 전사 하였다
잘못을 이실 직고 하렸다
나는 산악회
따라서 무등산으로 2006년과 2008년
등산을 두번 갔다
두 번째 갈 때는
애국가에도 멋있는 광경이 나왔던
주상절리 바위인 서석대 구경도 하였다
내려 올 때는 증심사 쪽으로 내려 왔다
그리고 3공수 당시 서울 출신 김응근 대위는
동작동 국립묘지 28 묘역에
흩어져 있는 광주 사태 때 죽어간
장교와 하사관 묘역에 와서
당시 계엄 사령관 이었던
전두환은
참배 해야 한다고 하였다
광주 사태 때 폭도들이 마구잡이로 몰고 다니던
트럭 바퀴에 깔려서
배가 "뻥" 하면서 비참하게 죽어간
하사도 있었다 하였다
다른 곳에서 옮겨 온 글
1995년도에 김영삼 대통령이 검사들에게 ‘신군부를 감옥에 집어넣으라’고 지시했다.
이에 검사들이 그들의 죄를 조사했다.
그러나 아무리 조사해도 법원으로 회부시킬 죄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신군부가 깨끗한 인간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미국 때문이었다.
신군부는 본래 박정희의 키드였다.
따라서 이 사람의 암살을 조정한 미국으로서는 그들은 용납할 수가 없었다.
한국은 오늘날도 그렇지만 그 시대는 100% 미국에 예속된 나라였다.
미국은 어떠한 경우에도 불법한 행위를 용납하지 않는 나라이다.
한국인들에게는 그 행위를 조금 눈감아 주기도 했으나
신군부에게만은 털끝만큼도 눈감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이 1981년 전두환이 정식 대통령이 될 때가지 털끝만큼의
불법한 행위도 저지르지 못했다.
1979.12.12 사태 후에 신군부가 수시로 모여 쿠데타를 모의했다.
그러나 미국에 100% 예속된 나라인 한국에서 쿠데타를 일으킬 수가 없었다(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가 육본을 점령했으나 성공 가능성이 제로이기 때문에 도망가려고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박정희의 쿠데타는 윤보선 대통령, 장면 국무총리의 협조 덕택으로 성공했다.).
신군부가 집권한 것은 100% 합법적으로였다(이에 대해서는
여기 블로그에서 상세히 밝혀놓고 있다.).
그러니 검사가 그들을 법원으로 회부시킬 어떤 죄를 발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들의 죄라는 것은 쿠데타를 모의했다는 것 한 가지 뿐이었다.
이것은 법원으로 회부시킬 수 있는 죄가 아니지만 다른 죄가 없기 때문에
그것으로 회부시켜야만 했다.
그러나 쿠데타 모의는 신군부 끼리 끼리 했기 때문에
그 증거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다행으로 그 모의 현장을 권정달이 엿보았다.
그러나 녹음을 하고 사진을 찍어놓지 않았기 때문에
법적 증거로 사용할 수가 없었다.
쿠데타 모의 자체는 민주국가에서는 설령 그 현장을 녹음을 하고 사진을 찍어놓았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재판에 회부시키는 법적 증거로 사용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사들이 권정달의 증언 한 가지로, 신군부를 재판에 회부시켰다. 그러나 판사들로서는 그 증언으로 유죄판결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자연법(관심법, 여론법)을 내세워, 신군부에 유죄를 선고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전두환이 병신들로 변호인단을 구성했기 때문이었다.
전두환은 민정기, 이양우, 허문도 같은 병신 같은 놈들만 브레인으로 두었다.
그의 큰아들 전재국도 똑같은 놈이라는 점에 미루어 볼 때
전두환 자신이 병신 같은 놈이었다.
1996년에 김영삼 정부 때 대법원에서
‘신군부가 5.17쿠데타를 일으키고 5.18 광주학살을 했다’고 선고했다.
따라서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그 내용이 실렸다.
이에 신군부가 5.17 쿠데타를 일으키고 5.18 광주학살을 한 것이 만고의 진실이 되었다.
광주시민 수천 명을 학살한 장본인이 되어버린 전두환은 화장실도 겁내며 가면서 살아야만 했다.
사실인즉 이것은 대법원 선고가 있기 훨씬 이전부터였다.
1980년에 식자들이 모두 신군부가 5.17 쿠데타를 일으키고 5.18 광주학살을 한 것으로 자리매김했다.
이것에 대하여 전두환의 브레인인 허문도, 박철언, 민정기, 이양우 등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 이유는 그들이 모두 병신들이기 때문이었다. 자연법(관심법)은 국민들의 마음속 뜻에 따르는 법이다. 1996년에 대법원에서 신군부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것은 국민들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신군부가 5.17쿠데타를 일으키고 5.18광주학살을 했다고 기술하고 있으니 이들로서는 그것을 하늘의 뜻으로 여기고 살 수밖에 없었다.
이런 때에 인터넷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
이에 필자가 ‘5.17 계엄확대는 합법적인 것이고 신군부는 5.18광주비극에 대한 책임이 없다’는 내용의 글을 인터넷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신군부가 그 누명에서 벗어났다(현재는 100% 벗어나지는 못했다.).
따라서 이들이 필자를 은인으로 여겨야만 했다.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일은 5000만 명 국민 누구나 할 수가 있다.
따라서 그 효과가 있을 수가 없다.
사실인즉 필자가 인터넷에 신군부를 옹호하는 글을 아무리 많이 올려놓아도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만은 전혀 효과를 볼 수가 없었다.
전국민의 뜻에 반하는 내용의 글이 어떻게 효과를 볼 수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군부의 누명을 벗겨주었으니 이런 일이 어떻게 해서 일어난 것인가.
오늘날은 인터넷 시대이다.
따라서 네이버의 영향력은 모든 신문사, 모든 방송국의 그것을 앞지르고 있다.
필자가 인터넷에 글을 올려놓으면 네이버 직원들이 그 글을 잘 노출시켰다.
그렇다면 그 글의 영향력이 신문사, 방송국의 기사의 그것을 앞지를 수밖에 없다. 신군부의 누명을 벗겨주는데 필자가 1%의 역할을 하고
네이버 직원들이 99%의 역할을 한 것이었다.
이 사실을 필자는 잘 알았다.
따라서 네이버 직원들에게 감사해야 하는데 산속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는 사람이라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돈 많은 신군부들한테 돈을 좀 받아내,
네이버 직원들에게 사례하는 것이었다.
신군부 가운데에서 가장 그 덕을 본 사람은 전두환이고 가장 돈 많은 사람도 전두환이었다.
그러나 29만 밖에 없다는 사람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할 수가 없었다.
다행으로 전두환의 큰아들 전재국이 수천억 원 재산을 갖고 있었다.
이 재산은 모두 압류 당했다는 사실에 미루어 알 수 있듯이
아버지 전두환 덕택으로 모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전재국은 수천억 재산을 갖고 있을 때 당연히 필자에게 돈을 좀 내놓아야만 했다.
필자가 전재국에게 아래와 같이 말했다.
“광주학살 누명을 쓴 당신 아버지는 지금까지 똥 쌀 때도 벌벌 떨면서 살았다. 나와 네이버 직원들이 그 누명을 벗겨주었다(불원간 100%벗어난다.).
따라서 당신 아버지가 이제부터는 마음 놓고 똥을 쌀 수가 있다.
당신도 당신의 자식들도 지금까지 학살자 자식, 손자라는 누명으로 인해 전전긍긍해하면서 살았다.
나와 네이버 직원이 그 누명을 벗겨주었는데 이것에 대하여
당신 아버지보다 당신이 감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곧 죽을 사람이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고 당신의 자식들은 더욱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늙고 산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
돈이 별로 필요가 없다.
그러나 네이버 직원들은 서울에서 사는 젊은 사람들이라 데이트 자금이다
무엇이다 돈을 필요로 하고 있다. 당신이 지금 수천억 원 재산을 갖고 있다.
이 재산은 죽을 때 가져가지 못한다.
나 같으면 그 재산을 모두 내놓지만 당신은 그러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 약간의 돈만 내놓아라.
나에게 사례하는 것이 아니라 네이버 직원에게 사례하는 것이므로
경제원칙에 의거해도 손해를 안 볼 것이다.
그러니까 몇 억 원, 몇 십억 원을 내놓아도
그것에 상응하는 이득을 본다는 말이다.”
위의 내용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전재국은 1원도 아까워 내놓지 않았다.
그러더니 갖고 있는 수천억 원 재산을 몽땅 압수당하고 말았다.
고명승 - 신군부 쥐새끼 시리즈(1)
앞으로 ‘신군부 쥐새끼 시리즈’를 여기 블로그에 올려놓을 예정이다.
그 첫 번째로 ‘고명승’을 올려놓는다.
이 이유는 그가 이번에, “‘5.18광주사태 때 북한 특수부대가 개입했다’는 말은 지만원이 했지 신군부는 안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5.18광주사태 때 북한 특수부대가 개입했다는 말은 원래 탈북자들이 했다.
이 말을 지만원이 되받아 하기 전에 박세직이 조갑제에게,
‘광주사태는 북한 특수부대가 일으킨 것으로 하자’고 제의했다.
‘북한특수부대 개입설’은 신군부가 지만원을 앞서 제기한 것이다.
고명승 네놈의 앞의 그 말은 틀린 것이었다.
지만원이 ‘북한특수부대 개입설’을 주장하고 나선 때에도
신군부 너희들이 그것에 깊숙이 관련되어 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 책인 ‘12.12와 5.18’를 펴내자
이양우를 제외한 신군부 그룹이 태반 그 책의 내용에 동의한다는 의사 표시를 했다.
장세동 한 사람만 반대했다.
정호용은 당연히 지만원의 ‘12.12와 5.18’ 책의 내용에 동의했다.
필자가 인터넷에다가 5.18에 관한 글을 올려놓기 시작하자
전자가 후자로부터 갈라섰다.
지만원이 ‘12.12와 5.18’ 책을 펴냈으나 팔릴 리가 없었다.
이에 민정기, 송모, 전모 세 비서관이 그 책을 대량으로 팔아주었다.
이들이 정호용보다 앞서 지만원과 갈라섰는데
이 이유는 필자의 ‘부자나라’ 책 때문이었다.
고명승 네놈은 김대중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려고 하자,
“수류탄을 안고 그를 끌어안겠다”고 말했다.
그것은 네 마음이다. 그러나 그 수류탄은 네놈이 만든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고명승 네놈은 국군의 수류탄을 안고 김대중을 끌어안겠다고 말했다.
그러니 ‘개 같은 놈’이라는 욕을 먹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놈이 ‘성우회’ 회장을 역임했다.
1980년은 내가 양구에서
군대 생활 할 때 였다
양구는 소양호 옆에 있다
1980 이니까
1990년 이후에 태어난
요즈음 30 대 전후의 젊은 이들은
이건 뭔대 대한 애국당에 올려 놓고 말썽이 많은데
할 것이다
그 5.18 거짓말로 지금 정부는 정권을 빼앗아서
붕어 대가리들을 시켜서
나라를 이끌어 갈려고 하니
학교 다닐 때 공부는 하지 않고 데모만 앞장 섰던 인간들을
세워 놓고 하는 짓들이
나라 말아 먹고자 하는 짓들이다
북한의 김정은은 34 살로
남한으로 쳐서
아직 취직도 못하는 햇병아리 이다
그 풋내기 한테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적어도 50 살은 넘어 되고
시회 생활 경험이 많아야 다른 사람 이야기도 들어 보고
자기가 다스리는 인민들의 이야기도 들어 봐야 하는데
자기가 뭐 잘나서 자기 맘대로 하는데
멍청한 웃음 거리 이다
왜 70-80 살 되는
나이 많은 자기 부하들이
자기 맘대로 하도록 놔 두는데
뚱띠이 김정은은 가만 되어도
과대 비만으로 뒤지게 되어 있다
소양호 길이는 대충 40 킬로이다
박정희는 정주영과 같이 그 댐을
만드는데 노력 하였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기전 1973년
그 댐을 완공하였다
댐을 만들고 5년 다음인 1978년에 물이 꽉찼다
우리를 실은 배가 그 때 갔으니
그 사실을 잊을 수 없다
그런데 그 댐의 역할을 거의 모르고 산다
그 댐은 일종의 북한으로 부터의 방어선이다
만약 전쟁이 일어나도 북한은
그 쪽으로 남한을 내려 올 수 없으니까
그리고 양구는 6.25 전에는 북한 땅이었다
내가 군대 생활 하면서 그 옆에서
군인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아주머니로 부터
이야기 들었다
그 아주머니의 오빠들이 6.25 전에
강물이 얼마 되지 안았을 때
가끔 소양강을 건너서 다녔다고 하였다
나는 북한강 파로호에도 몇 개월 있었다
그 파견대 몇명 안되는 부대를 담당 하던
선임 하사가 엄청 겁을 주었다
1960 년대 초인가
북한군이 남한에 넘어 와서
화염 방사기로
불에 태워서
벙커 안에서 근무하던
우리 군인들을 다 죽였다고
내가 근무 했던 부대에서
대암산에 벙커 만드는 곳에 지원간 곳이 있었다
대암산 너머에 펀치볼이란 마을이
북한과 휴전선 바로 아래 민통선 안에 있었다
미 제10군단장은 1951년 8월 중순 군단 정면
해안분지(펀치볼) 북측 고지군에 연한
작전통제선을 설정한 다음
각 사단에게 공격을 명령하였다.
이 명령에 의거 군단예비로 있던
미 제1해병사단이 해안분지(펀치볼)를 공격하게 되었다.
미 해병 제1사단(배속: 국군 해병 제1해병연대)은 1951년 8월 30일까지 국군 해병 제1연대와
미 제7해병연대를 전방에 배치하고
나머지 2개 연대를 예비로 확보한 채
공격준비에 들어갔다.
당시 사단이 부여받은 공격목표는
해안분지 북쪽 일련의 횡격실 능선상의
1026, 924고지와
해안분지 북동쪽의 702, 660고지군이었다.
이 무렵 이곳에는 적도 부대 교대를 실시하여
인민군 제3군단이 제2군단 지역을 인수하였으며, 그 중 제1사단이 해안분지(펀치볼) 북쪽 방어선에 투입되었다.
1951년 8월 31일 국군 제1해병연대는 제3대대가 793고지에서 출발하여 월산령에서
전초중대와 합류한 다음 924고지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다음날 9월 1일 미 제7해병연대 제3대대는
09:00에 702고지 공격을 재개하여 견고한 진지에서 집요하게 저항한 적을 격퇴하면서 전진을 하다가 백병전 끝에 10:55 702고지를 점령하였다. 대대는 다음날 공격 개시 3일 만에 702고지 전방의 602고지도 점령함으로써 사단목표를 모두 점령하였다.
6.25 이전에는 북한 땅이어서
6.25 끝나고
간첩으로 남한에서 북한으로 오가는
사람들이 가끔 있어서
자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세어 봐야 한다고 하였다.
당시 그 마을 여자들은 서울쪽으로 올 수
없었는데
오로지 방법은 군인들과 결혼 해서
밖으로 나올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가끔 결혼도 하였지만
남자들이 여자들 유혹에 넘어가서 사고 쳤다가
집에 와 있으면
여자가 물어 물어서 찾아 오는 바람에
빼도 박도 못했다고.
내가 초등학교 5 학년 때 군대 갔다가
제대한 지금의 70 대 후반의 아저씨는
군대 있을 때 고향 옆 마을에서 같이 입대 하였던
사람이 북한군이 몰래 와서 벙커 안에
던진 수류탄이 폭발하는 바람에
그 사람이 돼지 고깃 덩어리 처럼 되어
죽어간 것을 보아서
그랬는지
제대하고 고향으로 돌아 왔지만
자기가 보았던
무시무시한 광경을 보아서 그랬는지
몇년동안 정신병이라고 동네 사람들이 말 하였다
몇년 전 그 아저씨로 부터 그 때의
이야기 좀 듣다가 말았다
내가 처음 근무 하였던 곳은
지금 평화의 댐이 있는 곳에
물자를 실어다 주는 곳이 었다
내가 1979년 초에 소양호로
오면서
나는 그곳에 한번도 가보지 못하였다
전두환 때
엄청 큰
북한의 금강산 댐을 그 상류에
만들어서 그 곳으로 흘러서 남한 쪽으로 오던
북한강 상류 물을 유역 변경하여
동해쪽으로 흐르도록 만들었다
남한을 물바다 만들겠다고 하여서
남한에서는 평화의 댐을 만들게 되었다
그것은 북한의 말을 그 때 믿었겠는가
지금도 거짓말만 흘러 내리는데
지금은 사람들이 놀러 가는 지역이 되었다
박정희는 1979년 초에 우리 부대 옆을 지나 갔다
자기가 군생활 할 때 인제 쪽에서
근무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양구 대암산 너머의 펀치볼 이라고 한
마을은 6.25 때 미군들이 공중에서 내려다가
보면 펀치볼 술 잔 같이 생겨서
펀치볼이라 불렀다고 한다
내가 박정희가 죽은 10.26을 잊지 못하는 이유는
그해 추석 전에 양구 근처에 북한 무장 간첩이
나타나서 대암산으로 들어가서
비상에 걸리는 바람에 병력이 몇명 않되는
부대에서 보초가 한꺼 번에 4 명씩 나가니
하루 저녁에 보초를 2 번이나
나가야 했다
내무반에 와서 4 시간쯤 자면
또 다시 보초 나가라고 깨웠다
그것도 한달정 도 말이지 3 개월 가까이 되니
너무 지루 했다
그래도 실탄은 5 발 밖에 주지 않았다
잘못 하다가 총기 사고 난다고
정말 우리 부대에서 100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헌 병 초소에서 총기 사고가 났다
한 밤중에 "탕!" 총소리가 한방 나서
전 부대원이 긴장 하였다
그 다음날 알고 보니
초소에서 캄캄한 중에 잘못 하다가
총기 사고를 내었나 보다
그리고 남한으로 넘어와서 대암산 쪽으로 들어간
특수 훈련을 받은 간첩 3 명의
그 간첩은 잡지 못하였다
그 간첩을 잡지 못한 이유를 다른 분이
당진신문 웹사이트에 올렸 군요
그만큼 훈련된 특수 군인들은 작전을 잘한다.
그리고 1979년 10.26 사태가 벌어지는 바람에
10월 26일 저녁 뉴스에
박정희 대통령이 삽교천 행사에 참석 하였다는
뉴스도 보았다
그리고 삽교천 행사 다음에
바로 서울로 오지 않고
포항 제철소 다음으로 만들 광양만을
둘러 보고 왔다고
박정희 경호실 측근이
유튜브에서 이야기 하는 것 들었다
공양만 제철소의 간단하게 별로 기술은
별로 들지 않는 것을
내가 다니던
부산 공장에서 만들었는데
부피가 추레라 50 대 분량으로 너무 많아서
부산 다대포로 해서
바지선으로 옮겼다
결국 내가 다녔던 회사는 적자를 못이기고
몇년 뒤 문을 닫았다
또
비상이 연기 되었다
그리고 전두환의 12.12 사태
그러다가 다음해 즉 1980년
5월에 5.18이 일어났다
부대 내무반에 있는 요즈음 20 인치 정도
크기의 흑백 테레비에서 자주 광주 소식이 나왔다
최규하 대통령이 헬기 타고
광주 시민에게 호소 하는 내용도 나왔다
그러다가 나는 그해 8월에 제대 하고
고향으로 돌아 왔다
그런데
5.18 작전에
군인들이 엠 16 총으로 시민들을
무차별 죽였다는 것이다
그 다음해 부터는 회사 다니고
일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회사 생활 마치고
요즈음은 유튜브가 많이 나오니
여기 저기 들어 보고
내 나름대로 판단을 내리면 된다는 것이다
광주 문방구 장여사 아지매 이야기도 들어 보고,
광주에 특수군으로 내려갔던
문병소 중사 이야기도 들어 보고
20사단 62연대 통신대대장 김기환 대위의
이야기도 들어 보고
2017년 6월 17일에 증언한 51.18 때
20사단 중대장
육사 32 기생 김응근 대위의 증언도
들어 보세요
1980년 5월 21일에
서울 용산역에서 출발해서
광주로 갔다고 하였다
2 개 연대가 광주로 가는데
그 때 박준병 사단장은 육사 11 기로
전두환과
같은 동기라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 발생 하였다
선발대는 열치편으로 먼저 광주 송정리로 가고
군용차량은 군용차량을 기차에 싣는 시간 문제로
육로로 광주 송정리에 가다가
광주 송정리 근처에서
시민군으로 위장한
북한에서 보낸 특수군에게 속아서
그 차량 부대가 다 부서지고
몰고 가던 수십대의 차량을
시민군으로 위장한
북한군 특수 군인들에게 다 빼 앗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도 많이 걸리고
군대에서훈련도 받아 보지 못했던 사람들은
무슨 내용인지 그 때 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 차리기 힘이 든다
지만원은
육군 사관학교 졸업 하고
월남전에도 참전하고
그리고 미국 해군 대학에서 공부한 베테랑이다
그리고 20 년 가까이 5.18을 연구 하였으니
대한민국에서 지만원 만큼 군대 생활에서
환하게 잘아는 사람은 잘없다
대한 민국 군인들은 군대에서
진급할려고만 애쓴다
군인 경험도 북한 군에게 따지면
남한 군인은 거의 10년 안에 제대 다 한다
북한은 직업이 군인이니
어떻게 북한 군인들을 잘 알 수 있으리요
5.18 때 남한의 특수군들은
5.18 때 남한에 왔던
특수군들은 1953년 -1948 년에
태어나서 5.18 당시 29살-32 살의
특수 훈련을 받은 북한군소위나 대위 같은
장교 출신경력 13년 이상의
직업 군인인데,
남한의 광주 진압 하러 갔던
특전사는약 26-30 살의 군인 경력 10년 미만의
하사관 들이나
장교 몇명 뿐이었다.
그리고 가장 허술 했던 부분은
광주는 재대군인들과
대학생이 었던 것으로 착각 하였기 때문에
광주 에 투입 되었던
많은 특전사 군인들이 죽어 갔던 것이다
처음에는 데모데 진압으로
실탄을 지급 받지도 못해서
김동길이 이야기 하기를 거짓말의
김대중 빨갱이들의 속임수에
속았던 것이다
전두환은 그런 빨갱이들이 섞여서
폭동을 일으켰다는
증거를 보고 받지 못하였다 한다
왜 하필 광주 교도소를 5 번이나 공격해서
그 안에 반공범 들이 많이 잡혀서 감옥 살이 하던
광주 교도소를 습격 하였는가
그것 하나 만이라도 광주는 민주화를 가장한
폭동 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김대중은
장기로 갇혀 있던
빨갱이들을 다 북쪽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것도
비전향 장기수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전두환은
결국
김영삼 시절에
노태우와 같이 감방에 가게 되었다
김영삼 시절의 군인들이 나서서
광주 5.18 때 부상당해서
광주 5.18 때 받은
특전사들의 충무 무공 훈장을 다 반 납 하라고
하여서 반납였다고 한다
육사 33 기의 수첩에 기록 하였는데
필요 없다고 몇년전에 그 수첩을 버렸다나
탈북 군인 김명국씨 이야기도 들어 보세요
보랏빛 호수( 북한의 빨간색 + 남한의 파랑색)
(비봉 출판사)
북한에서는 북한군 특수군이 내려 와서 그랬는데
북한의 문제신(당시 북한 소장) 보좌관으로 따라
남한 광주 5.18 때 남한에 내려온 사람도
있었는데
남한에서는 민주화로 떠들고 있어서
탈북한 약 3만명의 북한 사람들이 많이
헷갈리고 있다고
덕분에 2006년 쯤 산악회 따라서
설악산 갔다가
대청봉으로 봉정암- 백담사로 내려 올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봉정암은 백담사의 암자여서
조그마한 줄로 알았다
엄청 규모가 크다
백담사에서 걸어 오려면
약 2 시간 걸린다
돌길로 계속 올라 와야만 한다
그래도 찾는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봉정암 뒤의 큰 바위는 엄청 멋있다
유명 정치인들도 그 곳에 왔다 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백담사에서 버스 타는 곳 까지 다시 1 시간 정도 걸어서 내려 와야만 한다
백담사는 그만큼 외진 곳에 있었다
전두환 때문에 유명해 졌다
1967
그리고 김일성은 자나 깨니 남한 때려 부수겠다고
박정희 죽일려고 1967년 1 월의 1.21 사태
1968년 삼척 주문진으로 약 120 명의 무장 공비 침투
등등
박정희가 자유체제로 다스리는 남한이 북한 보다
더 잘사는 꼬라지를
볼수 없었다
이리역 폭파 사건, 강원도 사북 탄광 사태.등등
야단 치다가 늙어 뒤져 버렸다
그 런 썩어 빠진 대가리 통을 받아 가려는
인간들은 정신 차려야 한다
뒤지기 전에
그리고
앞에서 일하는
조원진, 변희재, 정미홍, 조사철
서석구는 힘을 합하도록 노력 해야만한다
변희재, 정미홍은 서로가 맞다고 우기지 말고
조금씩 물러서서 의견을 모아야
대한 애국당이 잘 될 수 있다
변희재 이야기 들어 보면 변희재 이야기도 맞고
정미홍 이야기 들어 보면 정미홍 이야기도 맞다
두 사람 사이의
좋은 공통점을 만들어야만 한다
다른 당들이 서로 자기들 주장이 맞다고 싸울 때
대한 애국당이 좋은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한다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부엌에 가서 며느리 말을 들어면
며느리 말이 맞고
방에 와서 마누라 말을 들으면
마누라 말이 맞다고
우리 집에도 4 명이 같이 살다가
큰 애는 결혼 해서 나가서 산다
4 명의 의견이 같을 수 없다
다 각각 아니면 2:2 1:3 으로 나누인다
회사서도 그렇고
어떤 모임에서도 그렇다
좋은 지도자를 만나면 좋은데
언제나 좋은 지도자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살아 가도록 노력 하여야 한다
나는 중학교 다닐 때
그러니까 1967년
책에서 김일성은 가짜 이름이고
진짜 이름은 김성주 라고 배웠는데
실제 인물과 다르다는 것으로 배웠는데
정미홍- 조사철이 밝히는 사진으로 이해가 갔다
해방되고 1945년에 이승만은 70살로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철학 박사, 그리고
미국으로 간 이유가 고종 황제가 잘못 한다고
만민 공동회에서
서재필의 제자로 따지다가
서재필과 이승만은 미국에 가서
독립운동 하였는데
김일성은 그냥 햇 병아리로 북한의
김성주를 김일성이라 속여서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는데
요즈음은 이승만은 독재자로
마구 잡이 엉터리 교육으로
다 거짓으로 가르키고 있다
내가 국민 학교 들어갈 1961 년에는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 수두록 하였다
우리 엄마 아버지도 국민학교도 졸업 하지
못 해서
한글을 잘 읽지 못하였다
왜 그랬느냐고요?
고향의 국민학교는 1929년에
4 년제로 문을 열었다
그런데 아버지 나이가 10살 때 즘
1 회로 들어 갔는데
당시에는 월사금으로 벼 몇되를 낼 형편이
못되어서 그만 두었다고
아버지가 이야기 하였다
그저 밥이나 먹고
다른 사람 집에 가서 머슴 사는 사람도
수두룩 하였다
해방 될 때 아버지 나이가 25 살 이었다
그리고 일본 천황이 보낸
총독이 다스리던 ( 연도도 대정,소화 몇년 읽었다)
국가에서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으니
독재가 뭔지를 어떻게 알았으리요
맨 처음 대한민국 헌 법을만든 사람들도 나름대로 여기 저기서 한법을 연구 해서 만들었겠지요
북한은 소련이 시키는 대로 김일성을 앞세워서
공산주의 국가로 만들었고
머리에 든 것이 없는 햇병아리 선생들이니까
김일성은 33살
(지금 중국의) 간도 용문 중학교 졸업생이었다
반대파들은 당신들이 분열되어
판 깨지기만 기다리고 있다
손석희는 그만 놔도도 됀다
제풀에 뒤질지 모르니까
박근혜는 제주 4,3 폭동을 그냥 넘겨 주다가 보니 빨갱이들이 더 설쳤다
전두환 처럼 잡지 못해서 그렇다
그런 것을 경험 삼아서 다음에 나라를 다스리려고 하는 사람들은 더 힘을 기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전화 위복 이라고 해야 하는지
무조건 태극기만 흔든다고 나라 사랑이 아니다
어떻게 하여야 나라가 잘 될 수 있는지
연구를 해야 한다
어째던 이제 박근혜는 임기 끝나가고
내년 지자체 선거에서 월등하게
이길수 있도록 노력 해야만 한다
서울 시장과 각 구청장 그리고 각 지역구
시장이나 단체장 마다
대한 애국당 당원들이 많이 당선 되도록
노력 하여야만 한다
전두환 대통령 되던 해에
내가 군에서 재대 했으니
그 당시 군대 생활 하였던
사람들은
기억이 많을 것이다
특수군은 보통사람
찔러 죽이는게
목적이 아니다
적 후방에 침투 하는
특수 훈련이다
나도 논산 훈련소에서
전반기 교육 받고
후반기 교육 받을 때는
특수군 훈련 하는 것도
가끔 보았다
보통 훈련병 보다 엄청 강하게
훈련 받는다
한번은 식당에서
특수 훈련 받던 사람이
취사장에서 일하는 방위병을
좀 팼는가 보다
그 부대 교관이 나와서
의자에 앉혀 놓고
여러 사람이 보는대서
막대기로 몇차례 때 리는 것도
보았다
그 대신 그 당시 밥은 잘 주었다
그렇게 힘든 훈련을 받고 광주에 갔던
나와 비슷한 나이에 군대 생활을 하였던
대한민국 특수군들에게
온갖
나쁜 죄를 다 뒤집어 씌웠다
물론 당시
폭도들을 진압 하도록 한 것이
전두환 이었다고 믿었으니까?
당시 전두환은 군인들을 통수할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최규하 대통령이
박정희를 대신 해서
남은 기간을 통치하고 있었다
각종 나쁜 유언 비어는
북한 특수군이 저질러 놓고
남한의 전두환에게 다 뒤집어
씌웠다
김대중이 앞장 서서
북한의 특수군을 불러 들였는데
자기는 민주화 투사라고 그런다
거짓말은 다 들통 나게 나게
되어 있다
김대중이 빨갱이라는 것은
유튜브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알수 있다
2016년 7월의 광주에 살았던
김규철이야기도 들어 보아야
한다
국회에 있는 사람들은
군대도 가지 않았던 사람도 많고
특히 특수 훈련을 받지도 않은
사람이 많은데
그런 사람들은 북한의 특수군
실력을 알 수 가 없었다
나는 제대 하고 예비군
훈련 받으면서
광주 시민군들이 제대 군인들과 시민들이 무장한 것이러고 하지만
제대 군인들이 그렇게 하질 못한다
물론 선동에 이끌려
시위 현장에 나온 사람들도
많았겠지
그런 시민들에 섞여서
북한 특수 군인들은 자기들만
알아 차리도록 비표를 하고서
다녔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6.25 때 지리산 빨치산 후 손들 가운데
공산당을 좋아 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내가 고향에서 한번은 엄마 아버지 한테 놀러온
사람이 말하기를
"세상만 바꾸면 어떻한다고 하였다
6.25 때 고향 면 사무소는
인민군들이 들어 와서 설쳤고
면 사무소에서 일 하였던 사람들은 도망 갔다가
유엔군 인천 상륙 자전 다음에
다시 사람들이 바뀌고
공산 정권 하에서 일하였던
많은 사람은 죽었고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니까
요근래 일본을 욕하는
사람 많지만
일본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보다 훨씬 정직하다
옆에 사는 할아버지도
91 살 인데
국민학교 졸업하고 일본에가서
공부 하다가
해방되고 나왔는데
그 때 부산은 엄청 지저분 하다고 하였다
나도 10 년전 전쯤 일본
후쿠오카에
1 박2일로 갔었다
우리나라 처럼 차를 아무대나
주차하는 것은 없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2 시간 정도 걸어 더녀서 잘 안다
며칠 전 청주 화재 사건도
주차 문제 많았다지요
왜 그런가
거짓말도 얼마나 한국 사람들은 많은지
내말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일본에 한 번 갔다가 오세요
비석은 청진역 북쪽 600 미터
해발 70 미터의 낙타산 기슭에
있었다가 몇년전 공개 되고
그 후에
6.25 전사자 비석으로
바꾸어 버렸다
(비석은 청진역 북쪽 600 미터
해발 70 미터의 낙타산 기슭에 있다
북위 41도 47분 54.3초
동경 129도 47분 59.3 초 지점에 있다
묘지는 여군 왼쪽
남자 오른쪽에 있다
전사자 명부 및 전투 기록장 접수 김주호 박사 팀
세로로
"인민군 영웅들의 렬사" 묘
비석 왼쪽 세로로 두줄로 : 사람들이여 ! 걸음을 멈추고
용사들의 불멸의 애국정신을 추억하라
피로써 조국을 지킨 인민군 렬사들의 혁명 정신과
찬란한 위훈은 후손만대에서 길이 빛나리라!"
(158명의) 동무외 삼백삼십이명의 인민군 영웅 렬사들이
잠들고 있다.
오른쪽 끝에 세로로
"여기에 청춘의 고귀한 심명을
당과 조국과 인민을 위해 바친 님일세"
북한 폭풍 군단 우레 3 여단이 한 일
1.1980년 4월 28일밤 함남 신포항 출발
29일 남포 도착
2.군단장, 군단 정치 지도원 등이 마중나옴
3. 1980년 5월 2일 새벽 3시 잠수정 이용 남포 출발
잠수정 크기에 따라 승무원 3-10명
특수군 3-10 명 승선
다음날 새벽 2시 전남 영광군 염전면 두우리
백바위 해변 상륙, 미리온 대기자 및 안내원을 따라
1차 집결지 무등산 X 호 지역에 모임
4. 육지로 침투한 자는 강원도 철원군 땅굴로 침투후
전주 부근 대둔산에 야영
땅굴 출구에는 노인이 대기하고 있었음
1980년 4월 28일
5월 21일 오전 8시 : 20 사단 지휘부 차량 공격
아세아 자동차 공격
장갑차 6 대
군트럭 305 대
버스 100 대
고속 버스 5 대 탈취 및 운행
군 부대 무기고 등 40(47) 개
4. 전남 도청 점령 작전
5. 광주 교도소 5 차례 공격
6, 장흥 교도소 공격
8. 전남 도청 지하실에 8 톤 트럭 1 대분
(약 2,600 상자)폭탄 설치
9. 잔혹한 시민 학살
전사자 등 총 490명
475명 광주 근교 암매장
11 명 망월동 묘지
4명은 귀환중 사망
(조선무력부 534 부대) 폭풍 군단 우레 3여단은 참전자 300명중
생존 귀환자 57명(이중 부상자는 46명)
( 사망 : 165 명 , 행방 불명자: 78 명 )
4. 참가자 관리 부대
534 부대에서 전사자 150 명
108 부대에서 전사자 112 명
806 부대에서 전사자 74 명
직전종결
1980년 6월 19일
8월 1 일자로 인민군 렬사묘 조성
2013, 2014년은 인민군들의 열사 비석은
6.25 참전 묘비로 바꿈
(2012년 남한에서 비문 사진이 나돌았기 때문이다)
(대외비 한함) 남조선 통일 전선을 위한 투쟁에서 전사한한
조선 인민군 열사자료 조선무력부 534 부대 (1980. 8. 1)
더 많은 비문 자료는 방송 참조
(대외비 한함) 남조선 통일 전선을 위한 투쟁에서 전사한한
조선 인민군 열사자료 조선무력부 534 부대 (1980. 8. 1)
번호 성명 난 곳 생년 월일 입대 년도 전사한 연월일 군사 칭호
1 홍성표 청진시 송편구역 강덕동 4반 1950. 1.18 1967. 7.26 1980.6 19 조선 인민군소위
2 김석준 청진시 송편구역 송평동 2반 1951 2. 6 1968. 7.30 1980.6 19 조선 인민군소위
3 한창준 청진시 수남구역 어항동 3반 1948.12. 4 1965. 9.30 1980.6 19 조선 인민군소좌
4 오부진 청진시 청암구역 청암동 5반 1950. 5. 2 1967. 9.17 1980.6 19 조선 인민군소위
5 김윤선 청진시 포항구역 역전동 6반 1949. 8.10 1966. 7. 5 1980.6 19 조선 인민군대위
6 김웅수 청진시 성편구역 성암동15반 1949. 9. 9 1966. 8.14 1980.6 19 조선 인민군대위
7 김국식 청진시 송편구역 송편동 7반 1948.11. 6 1965. 9.17 1980.6 19 조선 인민군중좌
8 김한수 청진시 포항구역 역전동 12반1947.11. 3 1964. 8. 9 1980.6 19 조선 인민군상좌
9 서대석 청진시 송편구역 사구동 3반 1950. 6. 6 1967. 7 4 1980.6 19 조선 인민군중위
나머지 인원 비석에 새겨진 158명 명단 참조
1. 김석준 한창준 오부진 김운선 김응수 김국식 김한주 서대석 우준선 조영규
2. 염종식 유해윤 김종돈 천수만 유리극 김귀옥 서진남 김창록 김영석 김수전
3. 김용성 전순돌 리계찬 림한석 김진우 박원용 황송열 김동철 리진석 강원철
4. 최귀환 리창용 송원백 현태룡 박경화 김수근 김인준 방동환 전성규 남창섭
5.강일권 리봉섭 주창동 김인현 윤장우 리정부 김은태 최은신 김태환 김명규
6.리동근 김승미 리동철 리양수 허명신 염철남 염홍식 리정환 최철순 염근원
7.김학준 조기림 리숭봉 림용현 주장실 최진숙 백창덕 김두표 허죽순 최윤일
8.김길만 김일춘 리신전 김귀삼 리손직 박려원 리창근 리광주 박경준 김한옥
9.김영학 리인걸 림대식 박재준 리학권 염인순 홍인준 최리순 염운신 리광춘
10.라하권 리종문 박광용 림종문 노훈문 황명환 김두관 임원표 배은호 최영도 서용규
11.김기성 최재복 김원형 김종환 최봉준 최규학 김상혁 김기남 현원식 김옥현 유풍준
12. 김영식 김황로 김화룡 리순희 김종순 백기준 김길선 김우철 박일진 리은지 김종린
13. 김장복 최갑진 박두길 리도화 김현룡 안경찬 최도진 천지춘 김영호 리일호 전기천
14. 마진선 홍종묵 신안석 김허준 김월빈 백순옥 리춘식 류길산 김인도 김옥린 김동준
15 김영화 윤성화 림영훈 최중선 한승택 차준옥 김병천 김영옥 김두천 박은학 조영학
16. 홍성표 리진혁 (총 158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