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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14일 금요일 <하나님의 나라 중심의 조직신학>
[김용호] [오전 6:41] 굿모닝입니다~^^주님과 함께 한 주간을 마무리 짓는 금쪽같은 금요일!
오늘은 김장 준비로 눈팅만.^^ 지금도 마늘 까다가 잠시 틈 냈습니다. 이어서 쪽파도 다듬어야 함.^^ 허전도사 일어나기 전에 다 해놓겠다고 큰 소리를 쳤는데 하필 오늘 늦잠을~ 큭^^
[연동흠] [오전 7:42] 힘내십시오 전도사님!
[김용호] [오전 7:42] ^^ 감사~
[최윤주] [오전 7:58] 힘내세요. 전도사님~ 저희는 맛있는 김치 먹을 준비 여유롭게 하고 있을게요.
[김용호] [오전 8:00] 저의 기쁨입니다.^^ 자매님의 말씀에 힘이 막 솟네요. 다들 같은 마음이시라 믿습니다.^^
[김용호] [오전 8:15] 마늘을 까다가 온 감동~
마늘을 까다보니 참 잘 생긴 마늘도 있고 참 못 생긴 마늘도 있고 조그만 마늘도 있고 심지어 일부가 썩어 반으로 잘라낸 마늘도 나오는군요. 그러나 모두 깨끗이 다듬어 믹서에 갈면 맛있는 김치를 만드는 한 그릇의 마늘 양념이 되지요. 그런데 그 전에 마늘끼리 우월감과 열등감으로 그 놈들 사이에 난장판이 벌어진다면 참 안타까운 일이 되겠지요.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각자의 모습이 다 다르고 가지고 있는 장단점이 다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서로의 비교에 있지 않고 우리가 하나가 되어 귀하게 쓰임 받는 일에 있을 뿐입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기적이지요. 이건 기적입니다. 시기 질투가 없는 공동체, 타자 인식이 사라진 공동체~
이건 성숙한 인격의 문제가 아니고 한 주인을 모신 노예들의 집단이기에 가능한 일이지요. 개인 영성으로 되는 일도 아닙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니지요.
[최해준] [오전 9:52] 마늘의 감동이 밀려오는 아침이네요.^^ 퐈이팅~! ㅋㅋㅋ
[김용호] [오후 12:09] 제가 요즘 좋아하는 개콘 코너에 "유장프~유진상 장가보내기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유진상이 장가를 가려고
관객들에게 자기 장점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신인 개그맨이 유진상 선배가 저러다 장가 가버리면 이 코너가 끝나는 거 아니냐고 울상을 짓습니다. 그때 제가 요즘 유심히 보고 있는 송영길이 후배 개그맨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어리석은 놈아. 뭐~ 그래서 뭐~ 유진상 형이 그렇게 똑똑해서 뭐~ 그래도 장가 못 가~ 걱정하지 마!"
똑똑해도 소용없고 운동을 열심히 해도 소용없고 무슨 짓을 해도 소용없다는 겁니다. 결국 못생겨서 장가를 못 가니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거지요. 그 코너를 보며 이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은혜 많이 받았다고?
은사 많이 받았다고?
기도 많이 한다고?
성경 많이 본다고?
뭐. 그래서 뭐~ 존재 자체가 자기를 위한 존재인데 뭐~ 온통 타자들에게 둘러싸여서 결국 자기 혼잔데 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고? 어떻게? 결국 자기를 위해서 살 수 밖에 없는 구조 속에 있는데 무슨 하나님의 영광~? 뭘 해도 다 자기 입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데 무슨 하나님의 영광~?
콘스탄틴 기독교가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를 불가시 교회라고 규정하면서 끝장이 나버린 거지요. 거기에다 종교 개혁가들이 은사 중지론까지 주장하면서 서구 교회는 완전히 암흑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겁니다.
지난 세기 순복음의 등장으로 은사중지론은 힘을 잃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나라 한 몸 공동체를 불가시 교회로 규정한 서구 기독교의 사악한 교리가 무너질 차례입니다. 주님의 교회가 그 최전방에 배치되기 직전입니다. 그 때가 코앞에 와 있음을 우리가 요즘 느끼고 있습니다. 모두모두 화이팅~!!!
안 그래도 자기를 위해 서로 물고 먹으며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인데 교회까지 자기를 위해 종교 생활을 하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 서구 기독교라는 괴물입니다.
[정진호] [오후 12:44] 개콘을 봐도 오직 하나님 나라만 생각하시는 전도사님.^^
[김용호] [오후 12:45] 개콘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봅니다. ㅋㅋㅋ 먹든지 마시든지 뭘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하셨으니까요.^^ 재미있는 개콘도 보고 하나님께 영광도 되고~ 대박 인생입니다. ㅎㅎ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개콘을 안 보는 사람들 불쌍해~ ㅋㅋㅋ 자기가 싫어서 안 보는 거야 누가 뭐랍니까~^^
[정진호] [오후 12:52] 내가 속한 하나님 나라가 있으니까 그게 좋더군요. 뭘 해도 일단 부담이 없다는 거.
[김용호] [오후 12:53] 기도원에서 설교할 때는 당시 유명한 드라마는 재미가 없어도 꼭 보았습니다. 효과적인 설교를 하기 위해서지
요. 일주일에 일곱 편의 설교를 해야 했으니까요. 그러나 지금은 의무감으로 설교를 준비해야 하는 고역을 벗어서 참 행복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 안에서 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형제자매님들과 성경의 진리를 나눈다는 것은 의무가 아니고 행복 그 자체지요. ^^
집사님 말씀대로 하나님의 나라의 삶에는 의무가 없습니다. 서로 종노릇할 권리만 있을 뿐~^^ 그러다 부담감이 찾아오면 회개하고 간구하면 다시 회복시켜 주시니 정말 대박입니다.
이번 주 설교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의 논리적 비교 3.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구약의 계명과 신약의 계명을 논리적으로 비교하도록 하겠습니다. 무를 썰다 결정했습니다. ㅋㅋ 식칼 때문인가? ㅎㅎ
[최해준] [오후 1:15] 뭘 해도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
[김용호] [오후 1:15] 아멘~^^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더니 하나님의 나라를 지워버리고 교회라고 쓰고 하나님의
의를 지워버리고 윤리도덕이라고 쓴 인간이 바로 바로 바로 어거스틴~
[정진호] [오후 1:18] 내가 우리 교회에 오기 전 질문했던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건가 말라는 건가 긴가 민가 했던 것도 내가 속한
하나님 나라가 없는 상태에서 그것이 나를 위한 건지 하나님을 위한건지 헷갈려서 나온 질문이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어떤 기도도 거침이 없어지지요. 과거에는 기복주의가 될 수밖에 없는 기도도 바뀐 조직신학에 의해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로 자리매김하게 되니까요.
[김용호] [오후 1:19] 그렇습니다. 먹을 것을 구하지 말라는 말씀과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말씀 사이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는 거지
요. 하나님의 나라가 없으면? 두 말씀의 모순은 절대 해결될 수 없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기도부터 자유로워진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유로워지진 않았다면? 진리가 없는 거지요. 입으로야 무슨 소린들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진리는 없는 겁니다.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방종은 어떻게 방지될 수 있는가?
그것을 위해서는 자유와 방종의 구분부터 치밀하게 이루어져야겠지요? 바로 조직신학입니다. 조직신학이 치밀하지 못하면 자유와 방종은 구분될 수 없습니다. 자유를 추구하다가 방종으로 빠지게 됩니다. 치밀한 조직신학이 없으면 모두가 꽝입니다.^^ 여기서 꼭 다음과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서구 교회 어디에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고~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린 안심할 수 있다고~
아이고~ 말이라도 못하면. 자기가 바로 성령을 훼방하는 마귀의 자식이라는 게 안 보이는 거지요. 못 말립니다. 올바르고 치밀한 조직신학이 분명하게 자리 잡고 있지 않으면 반드시 잡신신학으로 빠지게 됩니다. 서구 기독교의 그 기라성 같은 천재들도 잡신신학에 빠지는데 자기가 뭐라고~ ㅎㅎ
그 사람들은 결혼도 안하고 수도원에 평생 틀어박혀 성경 연구만 한 사람들이 대다수입니다. 그래도 성령을 훼방하고 잡신신학에 빠지는데 무슨 하나님이 보호하고 지켜주신다는 건지~ 도대체 그런 무모하고 어리석은 신념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정말 신기할 따름입니다. 어디서 나올까요? 본능에서 나옵니다.
[정진호] [오후 2:21] 무식에서 나오는 게 아니구요? ㅋㅋ
[김용호] [오후 2:22] ㅎㅎ 저는 이렇게 봅니다~
인간은 모두 슈퍼컴퓨터를 하나씩 장착한 존재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는 거지요. 모두가 극히 교활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말씀을 가지고 잡신신학을 만드는 겁니다. 다들 자기 머릿속에 제멋대로 만든 잡신신학을 하나씩 가지고 있어요. 시골 할머니가 새벽마다 교회에 가서 서울에 있는 아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것도 그렇게 하면 자기가 믿고 있는 신이 자기 소원을 들어준다는 나름대로의 신학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잡신신학이고 이 잡신신학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잡신신학이 없었다면 교회에 나올 필요도 없었던 거지요.^^ 성경의 표현으로는 송아지 우상숭배입니다.
따라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학이 잡신신학인지 아닌지를 항상 점검해야 하는데 아는 게 그것뿐이니 점검이 되나요? 안 되지요. 교회 목사도 잡신신학, 장로도 잡신신학, 옆집 김집사도 잡신신학이니 점검이 될 수가 없는 거지요. 미친 듯이 달려갈 뿐입니다.
집사님 말씀도 맞습니다. 단체로 무식한 길을 걷고 있는 거지요. 그 둘을 합하면? 교활하기 때문에 단체로 무식한 길을 가고 있는 겁니다.^^
작년에 제주 강정 마을에서 보수기독교와 진보기독교가 치고받기 일보 직전까지 갔었습니다. 피차 교활하기 때문에 무식한 길을 가기로 결정한 두 기독교의 충돌이었지요. 바로 윤리도덕 패거리와 휴머니즘 패거리의 충돌이었습니다. 교활해서 무식한 것들 같으니라고~ ^^ 다 배울 만큼 배운 자들이거든요. 목사들이고 신부들이고 수녀들이니까요.
문제는 그들이 자신들이 교활하다는 것도, 그래서 무식한 길을 선택했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보다도 아예 인식조차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본능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서로 문제는 상대방에게 있다고만 생각합니다. 왜일까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는 자기가 결정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르게 결정합니다. 그래서 자기는 옳고 다른 사람은 틀렸습니다. 서로가 그렇습니다. 완벽한 감옥입니다. 이웃을 죽이고도 늠름한 이유입니다. 양심에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옳고 상대방은 틀렸기 때문입니다.
이 완벽한 구도에서 사람이 빠져 나갈 수 있을까요? 절대 못 빠져나갑니다. 자신이 이 구도에 갇혀 있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본 사람만이 성경적인 회개를 시작하게 됩니다. 이 구도를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회개도 죄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송아지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아니면 송아지 우상, 즉 잡신을 믿고 있는가~ 정확하고 치밀한 조직신학이 그것을 구분해줍니다. 신학보다 신앙이 중요하다구요? 그냥 웃지요.^^
[정진호] [오후 6:03] 주차 시비로 옆집 여자를 두 명이나 살해한 사건이 어제 있었지요. 자기가 옳다는 생각이 살인도 불사하네요.
과거 내 신앙으로는 "교회 다니는 사람이었으면 양보 했을텐데..." 인간에 대해 완전 소경이었지요.
오래 전에 이런 일이 있었어요. 우리 윗집에 아이들이 4명이 있었는데 낮에는 자주 쾅광 소리가 났어요. 다행히 밤에는 일찍 자는지 조용했지요. 그때 내 생각은 "내가 크리스찬인데 그 정도는 이웃에게 양보해야지. 그게 크리스찬이지." 그때는 층간 소음 문제로 싸우는 사람들이 한심하게 보였어요.
그러다가 내가 임자를 만났어요. 이사를 갔는데 윗집에서 러닝머신에서 운동하는 소리가 나는데 도저히 못 견디겠는 거예요. 견디다 견디다 집사람을 올려 보냈더니 그 집 할머니가 하는 말이 "이웃끼리 이 정도는 서로 이해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에 ‘내가 크리스찬으로 참을 만큼 참았는데 이건 그 사람들이 너무 심한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양보 안 한다고 우리를 정죄해? 이번 경우는 저들이 틀린 거다’라고 그들을 정죄했지요. 지금 와서 당시의 나의 신앙을 생각하면 그것도 신앙이라고... 완전 똥오줌 못 가렸던 시절을 잠시 회상해 보았습니다.^^
[김용호] [오후 7:28] 그 때는 집사님이 하나님의 의를 치우고 그 자리에 윤리도덕을 넣은 자들의 설교를 들으면서 종교 생활을 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너무 자책하지 마시옵소서.^^ 성령의 열매를 치우고 그 자리에 별 쓸모없는 신앙 인격을 집어넣는 거지요. 지금의 집사님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쪽으로 방향을 완전히 틀으신 거지요.^^
크리스찬 개인이 2천년 서구 신학을 돌파하고 초월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합니다. 어찌 보면 오늘날의 신학자와 목사들도 그 피해자라고 볼 수도 있지요. 신학자 개인이나 목사 개인도 돌파하는 것이 사실 불가능하니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라고 번역한 루터의 엉터리 번역에 대한 반론이 1930년대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미국신학자 홀에 의해 제기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돌파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우리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8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주장은 소수의 주장입니다. 한국에서는 10년전 그 주장을 소개했다는 이유만으로도 감신대 교수 한 사람이 목이 날아갔었지요.
[김용호] [오후 8:58] 무채 썰기 끝~^^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