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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시(慶州市)
○ 동강서원(東江書院)
- 지정번호 : 경상북도기념물 114호 (1996.01.20.)
-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강동면 유금리 147-1
- 시 대 : 1695년(肅宗21 乙亥)創建
- 제 향 : 손중돈(孫仲暾: 號愚齋 吏判 諡景節)
이 서원은 1695년(肅宗 21) 우재 손중돈(愚齋 孫仲暾)을 추모하고자 당시 숭덕사․순교당․탁청루․유도문 등의 건물들을 13년에 걸쳐 건립하였던 동강서원이다. 그러나 1868년(高宗 5) 서원철폐령에 의해서 대부분의 건물이 철폐당했다. 1901년 사림의 발의로 옛터에 설단하여 제향해 오다가 1960년 묘우․강당․신문 등을 중건하여 복향하였으며, 1986~87년에 걸쳐 동․서재와 신도비각을 건립했다.
主向이 서향인 서원의 우측에는 외삼문(由道門)․강당(諄敎堂)․내삼문․사당(崇德祠)을 일축선상에 놓고 강당 앞쪽 좌우측에 동재(窮理齋)와 서재(盡性齋)를 앉힌 전학후묘의 배치형식을 취하고 있다. 좌측에는 활원재(活源齋)․전사청․관리사가 배치되어 있으며, 유도문 우측 한단 낮은 곳에는 신도비각이 앉아 있다.
강당은 중앙에 3칸 대청을, 좌우측에 각 1칸씩의 온돌방을 두고 전면에는 툇마루를 들였다. 대청과 온돌방 사이에는 굽널을 끼우고 팔각형 불발기로 꾸민 맹장지 4분합 들문을 달고 대청 배면에는 판벽에 두짝 울거미널창을 달았다. 화강암 장대석 기단 위에 화강암 정평 초석을 놓고 정면에만 원주를 세웠다. 기둥 상부는 바깥쪽을 직절한 양봉을 끼우고 주두를 얹고 두공첨차를 놓은 무익공계로 기둥 사이에 화반을 두었다. 종량 위에는 제형판대공이 세워져 있고 종․중도리 밑에는 소로를 끼운 뜬창방이 대공을 건너지르는 5량가 홑처마 팔작집이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통칸으로 정면 어칸과 좌우퇴칸에 각기 쌍여닫이와 외여닫이 굽널정자살 문을 달고 나머지는 벽체로 막았다. 윗면을 화강암 장대석으로 덮은 막돌 허튼층쌓기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정면과 배면 우주만 원주를 세웠다. 기둥 상부는 초익공계로 윗면을 연화각한 앙서를 끼우고 그 위쪽 보머리를 봉두로 장식했으며, 기둥 사이에는 소로로 수장했다. 5량가 겹처마에 풍판을 단 맞배집이다.
동․서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그 형태와 평면이 거의 같다. 모두 온돌방으로 구성된 3칸 전면에는 안쪽에 쌍여닫이 띠살문을 달고 바깥에 띠장널문을 단 이중문으로 하고 그 앞쪽에 쪽마루를 두었다. 활원재는 가운데 대청을 두고 양측에 온돌방을 둔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의 3량가 장혀수장 홑처마 맞배집이다. 전사청은 모두 마루바닥으로 구성된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의 3량가 장혀수장 홑처마 맞배집이다. 신도비각은 칸살이 좁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 내부에 귀부와 이수로 장식된 비각을 둔 5량가 이익공 겹처마 팔작집이다.
○ 서악서원(西岳書院)
- 지정번호 : 경상북도기념물 19호 (1972.12.30)
- 소 재 지 :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615
- 시 대 : 1561년(明宗16 辛酉)創建, 1623년(仁祖1 癸亥)賜額
- 제 향 : 설 총(薛 聰: 新羅翰林 諡弘儒侯 文廟配享).
김유신(金庾信: 奉常正卿 平壤郡開國公).
최치원(崔致遠: 號孤雲 贈內史令 諡文昌侯 文廟配享).
이 서원(書院)은 조선 명종(明宗) 때 사람인 이정(李楨)(1512~1571)선생이 경주 부윤(府尹)으로 있으면서 김유신장군(金庾信將軍)을 후세에 길이 새기고자 하는 뜻에서 장군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명종 18년(1563)에 세운 사당(祠堂)이다. 그런데 당시 경주 지역의 선비들이 신라 10현으로 받들고 있는 사람 중에 설총(薛聰)과 최치원(崔致遠)의 위패도 함께 모실 것을 건의하여 이정(李楨)이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과 의논하여 이 분들의 위패도 함께 모시게 되었다.
퇴계(退溪)선생이 서악정사(西岳精舍)라 이름 짓고 손수 글씨를 써 현판을 달았다고 한다. 임진왜란으로 서원이 모두 불타버렸는데 그 후 인조(仁祖: 1623-1649) 때 모두 재건되어 나라로부터 서악서원이란 이름을 받게 되었다. 현재의 서악서원(西岳書院)이라고 현판에 쓰인 글씨는 당시의 명필(名筆)로 알려진 원진해(元振海)가 쓴 것이다.
서악서원은 1561년(명종 16) 김유신(金庾信;595~673)․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857~?)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하여 창건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소실(燒失)되었으며, 1602년에 묘우(廟宇)를 중건(重建)하였고, 1610년(광해군 2)에 강당(講堂)과 재사(齋舍)를 재건(再建)하였다.
1625년(인조 3)에 사우(祠宇)를 재건하였고, 1646년(인조 24)과 1810년(순조 10)에 중건 및 중수(重修)를하였다. 이 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毁撤)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현존하는 경내의 건물로는 사우, 조설헌, 시습당(時習堂), 절차헌(切嗟軒), 내삼문, 외삼문, 전사청, 영귀루, 고자실(庫子室) 등이 있다.
사우는 향사(享祀)를 지내는 3칸 규모의 건물이며, 설총․김유신․최치원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설헌은 원내의 모든 행사와 유림 회합 및 학문 토론 장소인 5칸 규모의 강당이다. 시습당과 절차헌은 유생들이 공부하며거처하는 곳이고, 영귀루는 누각이며, 전사청은 향례 때 제수(祭需)를 마련하여 두는 곳이고, 고자실은 고자(庫子)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소장 전적으로는 문집 몇 권이 있고, 재산으로는 대지 1,100여 평․전답 3,600여 평․임야 3,400평 등이 있다.
○ 구강서원(龜岡書院)
- 소 재 지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양월리 679
- 시 대 : 1686년(肅宗 12 丙寅)創建
- 제 향 : 이제현(李齋賢: 號益齋 高麗侍中 諡文忠 )
원래 이 서원(書院)은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때에 문충공(文忠公) 익제(益齋) 이제현(李齋賢)의 영당을 1686년(肅宗 12)에 서원으로 승격시킨 구강서원이다. 당시 묘우와 동․서재를 중창하였으나 1871년(高宗 8)에 철폐되었다. 1904년에 다시 중건하고 1961년에는 경각을 재축했다. 그 후 1992년에 서재를 중건하고 1993년에 전사청을 신축했다. 송림이 펼쳐져 있는 야산 바로 앞에 네 곽을 이루면서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강학과 제향공간을 앞 뒤 두곽으로 구분한 좌측에는 외삼문․강당․내삼문․사당을 일축선상에 배열하고 강당과 사당 앞쪽 좌측에 각기 서재와 전사청을 두었다. 우측에는 앞쪽에 대문채․안채․광채․아랫채가 튼ᄆ자형을 이룬 관리사를 두고 그 뒤쪽에 경각을 앉혔다.
강당은 가운데 3칸 대청이 자리잡고 좌우에 각 1칸씩의 온돌방이 놓여 있다. 전면에는 좌우측단에 문을 낸 툇마루를 들이고 우측방 뒤벽에는 벽장을 두었다. 대청 정면은 개방되어 있고 배면은 판벽에 쌍여닫이 울거미널창이 달려 있다. 대청과 좌우측방 사이에는 팔각형 불발기로 꾸민 맹장지 4분합 들문을 시설했다. 화강암 바른층쌓기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정면에만 원주를 세웠으며, 기단 네 모서리에는 고복초석으로 받친 활주를 세웠다.
기둥 상부는 윗면을 초각한 앙서와 아주 짧은 수서로 꾸며진 초익공계로 그 위의 보머리에는 봉두가 끼워져 있다. 대량 위에는 첨차를 끼운 양봉을, 종량 위에는 소로를 얹은 제형판대공을 세운 5량가 겹처마 팔작집이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전면 어칸과 좌우퇴칸에 각기 두짝과 외짝 널문을 달고 나머지는 벽으로 막았다. 화강암 장대석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원주를 세운 초익공계 3량가 겹처마 맞배집이다. 정면 익공 살미는 앙서 끝단을 직절하고 밑면을 연봉각, 윗면을 연화각 하였으며, 배면은 무익공으로 처리했다. 경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좌측에 1칸 온돌방을 두고 우측에 2칸통 판각고를 두었다. 막돌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방주를 세운 3량가 납도리 홑처마 맞배집이다.
경각은 1961년에 중수(重修)되었는데 여기에는 익재영정(益齋影幀:문화재자료 제90호)과 익재집책판(益齋集冊版:유형문화재 제233호)이 보존되어 있다.
이제현(李齊賢/1287~1367)
고려시대의 문신. 학자. 본관 경주(慶州). 자 중사(仲思). 호 익재(益齋)·역옹(翁)·실재(實齋). 초명 지공(之公). 시호 문충(文忠). 1301년(충렬왕 27) 성균시(成均試)에 장원하고 이어 문과에 급제했으며 1303년 권무봉선고판관(權務奉先庫判官)과 연경궁녹사(延慶宮錄事) 등을 지냈다. 1308년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에 등용되고 제안부직강(齊安府直講)을 역임했다. 이듬해 사헌규정(司憲糾正), 10년(충선왕 2) 선부산랑(選部散郞), 이듬해 전교시승(典校寺丞),삼사판관(三司判官) 등을 거쳐 12년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가 되고 성균악정(成均樂正), 풍저창사(豊儲倉使)를 지냈다. 이듬해 내부부령(內府副令) 풍저감두곡(儲監斗斛)을 거쳐 14년 원나라에 가서 조맹부(趙孟) 등과 고전을 연구하였다. 16년 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이 되고, 20년 지밀직사(知密直事)에 올라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이 되었다. 같은 해 충선왕이 모함으로 유배되자 원나라에 그 부당함을 밝혀 23년 풀려나게 하였다. 이듬해 광정대부밀직사사(匡靖大夫密直司使)에 승진, 25년 추성양절공신(推誠亮節功臣)이 되고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김해군(金海君)에 봉해졌다. 36년 삼중대광영예문관사(三重大匡領藝文館事)에 오르고 39년 심양왕(瀋陽王) 고(暠)가 원나라에 충숙왕을 모함하자 연경(燕京)에 가서 해명하고 돌아왔다. 43년(충혜왕 복위 4) 원나라 사신이 왕을 잡아가자 사면을 요청했고, 이듬해 삼사판사(三司判事)에 복직, 서연관(書筵官)이 되었다. 48년(충목왕 4) 왕이 죽자 제조경사도감(提調經史都監)으로 원나라에 가서 충정왕의 승습(承襲)을 요청했고, 51년 공민왕이 즉위하자 우정승(右政丞)·권단정동성사(權斷征東省事)가 되고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을 지냈다. 이듬해 동덕협의찬화공신(同德協議贊化功臣)에 오르고 53년 사직했다가 이듬해 우정승에 재임, 56년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그 후 사직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다가 62년 홍건적의 침입 때 왕을 청주(淸州)로 호종,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 당대의 명문장가로 정주학(程朱學)의 기초를 확립하였고, 조맹부의 서체(書體)를 도입하여 유행시켰다. 공민왕 묘정(廟庭)에 배향, 경주의 귀강서원(龜岡書院)과 금천(金川)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효행록(孝行錄)》 《익재집(益齋集)》 《역옹패설(翁稗說)》 《익재난고(益齋亂藁)》 등이 있다.
○ 성산서당
-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안강읍 하곡리 11
- 시 대 : 1814년(純祖14 甲戌)創建
- 제 향 : 정극후(鄭克後: 號雙峰)
이 건물은 1814년(純祖 14)에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낸 정래영(鄭來永)이 향내 사림의 중론에 의해 학자인 정극후(鄭克後)를 추모하기 위하여 수재정(水哉亭) 너머에 건립한 서당이다. 처음 사우와 서사를 건립하였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서사만 보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근년에 '祠'를 '堂'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집으로 양쪽에 날개지붕을 달았다. 좌․우퇴칸에 2칸 온돌방을 두고 윗쪽에 벽장을 덧붙인 중당협실형이다.
산록에 지리한 건물답게 큰 덩벙주초위에 흘림이 뚜렷한 단주를 세우고 5량가에 사분변작하여서 초각한 종대공이 높이 솟았다. 문틀은 안연귀 수법으로 오래된 수법을 지니고 있다.
주심포계열의 외1출목 3익공으로 주두위에 간단한 초각을 한 첨차를 겹쳐 주심장혀를 받추고 외출목첨자도 주심첨차와 동일한 형태로 출목장혀를 받고 있다. 또한 창방과 주심장혀사이는 화려하게 초각한 화반을 1개씩 설치하였으며 익공형태가 밀양 영남루(嶺南樓)와 유사하다. 그러나 측면은 초익공으로 수재정과 거의 비슷하나 쇠서가 짧고 날카롭지 못하며 내부쪽으로 양봉을 내어 대량을 지지하였으나 선각은 후기양식이 뚜렷하다.
지붕형태는 정면 3칸은 박공으로, 퇴칸은 날개지붕을 구성한 관계로 인한 무리를 해소하기 위해서 모서리마다 2개의 팔각주를 세워 독특한 지붕형태를 만들었다.
대청후면에 '흥교당(興敎堂)'이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으며 여기의 '堂'자를 모사하여 원래의 편액인 '사'와 바꾸어 써서 '성산서당'으로 편액을 교체하였다 한다.
○ 옥산서원(玉山書院)
- 소 재 지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9
- 시 대 : 1572년(宣祖5 壬申)創建. 1573년(宣祖6 癸酉)賜額.
- 제 향 : 이언적(李彦迪: 號晦齋 左贊成 贈領議政 諡文元 明宗廟 文廟配享).
옥산서원(玉山書院)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선생을 봉향하는 서원(書院)으로 1572년(선조 5년)에 창건되었다. 이언적(李彦迪) 선생은 조선조의 성리학자(性理學者)로 도학으로 이름이 드높았으며, 동방오현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었다. 옥산서원(玉山書院) 태극문(太極門) 안에는 임금이 쓴 글씨와 편지, 회재선생(晦齋先生)의 글씨, 퇴계선생(退溪先生)의 글씨를 비롯해서 「삼국사기(三國史記)」 완전 1질이 보관되어 있어서 학술연구(學術硏究)에 좋은 자료(資料)가 되고 있다.
옥산서원을 둘러본 뒤에 자계천을 따라 500m 쯤 더 올라가면 독락당(獨樂堂)(보물(寶物) 제413호)이다. 이곳에는 사랑채인 독락당(獨樂堂)과 ᄆ자형의 안채, 노비들이 거처하던 행랑채와 공수간(供需間:음식을 장만하는 공간), 임금의 하사품 서책을 보관하던 어서각(御書閣)가 사당, 그리고 별당인 계정(溪亭)등이 합쳐 큰 살림집을 이루고 있다.
서원(書院) 내 독락당(獨樂堂)은 이언적이 낙향하여 학문에 몰입하던 곳으로, 주위에 수려한 정자와 계곡이 어울려 운치를 더해 주고 있다. 또 독락당(獨樂堂) 뒷편 정혜사지(淨惠寺地)에는 일반탑과 판이하게 다른 양식의 정혜사지13층석탑(淨惠寺地十三層石塔)이 세워져 눈길을 모으고 있다.
옥산서원(玉山書院) 주변의 자연은 경치 좋은 자옥산 골짜기에서도 가장 풍광명미(風光明媚)하다. 서원 앞을 흘러가는 자계천(紫溪川)에는 너럭바위들이 층을 이루며 시원스레 깔렸고, 쉼없이 흐르는 계류는 바위마다 아담한 소(沼)와 폭포를 빚어놓았다. 물가 양편에는 그늘을 드리웠다. 그늘 짙은 너럭바위 위에 드러누워 한나절쯤 쉬노라면 갖은 시름이 절로 씻겨질 법하다.
이곳에 옥산서원(玉山書院)이 들어 선 것은 회재가 돌아가신뒤 20년 뒤였다. 회재의 죽음을 애도하던 영남(嶺南) 사림(士林)이 그의 학덕을 기려 묘우(廟宇)를 세운 것. 그리고 2년 뒤인 1574년에는 선조(宣祖)가 '옥산서원(玉山書院)'이라는 현액(懸額)을 하사해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승격됐다. 그 뒤로 크고 작은 화재로 소실된 몇몇 건물이 중건되기도 했지만, 전화(戰禍)를 입지 않아 오늘날에도 옛 모습 그대로다.
이 서원(書院)은 출입구 강당 사당 등이 일적선상에 놓인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형태. 정문인 역락문(亦樂門)을 들어서면 먼저 강당 영역에 이른다. 무변루(無邊樓)라는 2층 누각과 강당인 구인당(求仁堂)이 마주하고, 두 건물 사이의 중정(中庭)좌우에 동재와 서재가 있다. 그리고 강당 뒤편은 돌담으로 둘러싸인 사당 영역. 건물의 배치나 면적이 안동(安東)의 병산서원과 엇비슷해 보이는데도 병산서원 같은 상쾌함이나 호방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건물마다 기단(基壇)이 낮은 탓도 있거니와, 무엇보다 강당에서 마주보이는 무변루의 폐쇄성 때문이다. 즉 병산서원의 만대루는 사방이 시원하게 트여 바깥 풍경을 한껏 끌어안는 반면, 무변루는 마루 양쪽에 방이 있는데다 개울 쪽의 백체를 막아버려 시야가 차단되어 있다. 게다가 구인당 양쪽의 온돌방도 전면을 벽체로 마감함으로써 더욱 갑갑해 보인다. 밖에는 눈길도 주지 말고 오로지 학문에만 정진할 것을 강요하는 구조다. <자료출처 : 관광경주, 경주시, 1997>
○ 용산서원(龍山書院)
- 소 재 지 :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659외 2필
- 시 대 : 1699년(肅宗25 己卯)創建
- 제 향 : 최진립(崔震立: 諡貞式)
용산서원은 정무공(貞式公) 최진립(崔震立:1568-1636)을 향사하는 서원으로 경주시 내남면 이조3리에 있다. 이 서원은 숙종 25년(1699) 부윤 이횡상(李衡祥)이 창건하여 1년 후에 묘우(廟宇)가 이루어져 위판(位版)을 봉안하였고, 2년 후에는 강당 및 남북재를 세워 강당을 민고당(敏古堂), 양협실(兩夾室)을 흥인재(興仁齋)․명의재(明義齋)라 하고, 남재를 호덕재(好德齋), 북재를 유예재(游藝齋), 문을 식강문(植綱門)이라 하였다.
권대규(權大規) 등의 진정소(陳情疎)에 의하여 숙종 37년(1711) '숭렬사우(崇烈祠宇)'라는 묘액(廟額)을 내렸다. 액을 맞을 때에 경주의 유림들이 원호(院號)를 '용산서원(龍山書院)'이라 정했는데 원호(원호) 묘액의 글씨는 모두 이익(李瀷)의 형 이서가 쓴 것이다. 그리고 정조 2년(1778)에는 방당(方塘) 위에 청풍루(淸風樓)를 세웠다. 그 후 고종 7년(1870) 철폐되었다가 1903년 설단(設壇)하였다.
* 자료출처 : 경주지역문화유저보존개발계획, 경상북도, 동국대학교신라문화연구소
○ 숭렬사(崇烈祠)
-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 시 대 : 1688년(肅宗14 戊辰)創建. 1711년(肅宗37 辛卯)賜額.
- 제 향 : 최운립(崔震立: 號潛窩 仁祖丙子 以公州營戰亡 贈兵判 諡貞武).
○ 인산서원(仁山書院)
-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 시 대 : 1688년(肅宗14 戊辰)創建.
- 제 향 : 송시열(宋時烈: 號尤庵 左議政 諡文正 孝宗廟 文廟配享).
○ 매월당영당(梅月堂影堂)
-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 시 대 : 1670년(顯宗11 庚戌)創建.
- 제 향 : 김시습(金時習: 號梅月堂 諡淸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