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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 묵상글 들 ( 위령의 날-기억하지 않고 기도하는 우리.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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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위령의 날-기억하지 않고 기도하는 우리
죽은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오늘 위령의 날을 지내며 우리는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생각지 않을 수 없는데 그들을 망령으로 대해야 할까요?
영령으로 대해야 할까요?
망령이라 하면 좋은 뜻이 아닙니다.
망령亡靈이란 한자어의 뜻 그대로 망한 영이자 망해야 할 영일 뿐입니다.
그래서 독재자의 망령이니 세월호의 망령이니 하며 잊어야 하고,
깨끗이 몰아내야 하는데 다시 살아나는 혐오스러운 존재를 일컫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월호로 죽은 이들을 망령이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세월호 희생자를 영령이라고 하며
기억해야 한다고 하고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개신교적인 관점도 있습니다.
개신교는 죽으면 하느님 자비에 맡겨지기에 우리의 기도가 필요 없거니와
우리가 기도한다고 해서 죽은 자가 구원받는 것도 아니기에
기일에 기억하는 정도는 모를까 기도할 필요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개신교에는 연옥 교리가 없어서 죽으면 천당 가든지
지옥에 가든지 그것으로 끝이기에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 가톨릭은 연옥 교리가 있을 뿐 아니라
통공의 교리가 있어서 살아 있든 죽었든 다 하느님 안에 있기에
살아있든 죽었든, 죽어 천당에 있든 연옥에 있든 우리는 서로 기도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기억만 하지 않고 기도하고,
하느님 자비에 맡긴다고 하며 팽기치지 않고 연령을 위해 계속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죽은 이들은 연령煉靈이지 망령亡靈이 아니며,
특히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연령이지 망령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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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세상을 떠난 모든 이를 기억하며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모두의 행복을 바라시는 주님의 마음이 드러납니다.
"행복하여라."(마태 5,3.4.5.6.7.7.8.10)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여러 차례 외치십니다. 행복의 대상과 사안마다 반복해 덧붙이시면서, 마치 듣는 이들의 귀로는 행복의 권리를 일깨우시고, 심장으로는 행복의 소명을 각인시키시려는 듯합니다.
행복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우리 모두의 권리이고 소명입니다. 다들 행복하라고 주님께서 창조해 당신 정원에 심어 주신 것이니까요.
그런데 주님께서 건네시는 참 행복은 감각적이고 세속적인 쾌락이나 감정, 기분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돈과 권력이 많으면 으쓱하고 편리할 수는 있지만 정신과 마음과 영혼을 근원부터 뿌듯이 차오르는 참 행복은 못 되지요. 외모나 인맥은 잠시 만족을 보장하는 듯하지만 인간 실존을 깨닫는 은총의 순간이 오면 그저 허무히 스러져버릴 신기루였음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거짓 행복의 그림자 너머로 참 행복을 직관하고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욥의 고통스런 절규가 울려퍼집니다.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욥 19,26)
욥에게 닥친 고통의 원인을 그에게서 찾아내려, 불쌍한 욥을 다그치며 헤집어대는 친구들 앞에서 욥은 몸고 마음이 지쳐갑니다. 욥이 영화를 누릴 때 가까웠던 친구들은 지금 또다른 심판자로 돌변해 있습니다. 악의가 있어서라기보다 생각이 짧고 우매해서, 아직 하느님을 몰라서일 것입니다. 이에 욥은 하느님께 심판을 요청합니다.
욥은 스스로 아무리 자신을 성찰하고 샅샅이 살펴도 이 고통의 단초를 제공할 만한 죄악을 찾을 수 없으니, 이제는 하느님을 뵙고 여쭈려 합니다. 어리석음으로 하느님 뜻을 가리는 다른 이들이 아니라, 바로 그분을 만나겠다는 의지입니다. 억울하고 서러워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지금 우리가 어떤 상태인지 밝힙니다.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로마 5,9)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로마 5,10)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로 속량된 우리는 이제 하느님과 화해한 의로운 존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 이루신 화해이고, 율법을 철저히 지킨 공로가 아니라 믿음에서 오는 의로움이니 우리는 제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이렇듯 구원은 먼 미래의 가능성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누리는 현재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희망하고, 희망함으로 앞당겨 소유하고 누리는 은총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지금 여기에서 행복해야 합니다.
삶 여기저기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복병들로 지금의 삶이 신산하고 고통스럽다면 욥처럼 하느님을 뵈리라는 희망으로 견뎌봅시다. 그분은 반드시 만나 주십니다. 겨우 요것밖에 안 되었다고 스스로에게 실망스럽다면 자신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 존재임을 기억합시다. 행복이 내 것 아닌, 그저 먼 미래의 남의 일로 여겨져 서글프다면 "행복하여라." 하고 외치시는 예수님 목소리에 머무릅시다.
행복은 지금 여기서 영원한 천상 혼인잔치로 이어질 일상이 되어야 합니다. 아프고 가난해도, 완전무결하지 않아도, 삶에 찌든 실수투성이 죄인이어도 행복은 우리가 비키지 않는 한 결코 우리를 비켜가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피조물에게 내리신 지상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이 세상에서부터 이제와 영원히 행복을 누리는 성인성녀들께 전구를 청하며, 행복을 위해 단련의 시간을 보내는 연옥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는 오늘 되시길 바랍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내적 행복의 한 조각을 기도가 간절히 필요한 영혼들과 나눌 수 있으니 얼마나 복된지요! 여러분 모두 행복하십니다! 저도 행복하답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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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 이병우 루카 신부님. <위령의 날>
-둘째 미사-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오늘은 죽은 모든 이들을 기억하면서,
그들이 하루빨리 연옥에서 해방되어 천국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날입니다.
위령의 날 둘째미사 복음은
'마태오 복음 11장 25절에서 30절의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이천여 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셨던 주님께서 지금 우리를, 나를 부르십니다.
'무거운 짐???'
예수님 시대에는
그것이 '613개나 되는 유다교의 율법 규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짊어지고 있는, 더 나아가 내가 짊어져야만 하는 무거운 짐들, 그래서 지금 나를 힘들게 하면서 고생시키는 그 무거운 짐들은 무엇일까?
그것이 '사람'일 수도 있고, '영육의 고통'과 '나의 죄'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무엇'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고맙게도 그런 무거운 짐을 진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짐을 덜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을 단순하게 믿고 예수님을 따라 가 봅시다!
예수님께서 주시겠다는 '안식'은
'단순한 쉼'을 뛰어넘어, 지금 여기에서의 '자유와 해방과 평화와 부활'이며, 더 나아가 죽음 저 너머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자유와 해방과 평화와 부활'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5,20)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우리를 죄의 굴레에서 해방시켜주시기 위함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 계셔야 할 곳은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이들의 삶의 자리이며, 죄로 얼룩져 있는 나의 삶의 자리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큰 은총'입니다.
주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의인들,
주님께로 돌아가 주님을 신뢰하는 의인들,
그래서 주님과 함께 사랑 속에서 살아가는 의인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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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삶이 선물이듯 죽음도 선물입니다!
선배들이 잠들어계신 성직자 묘역에 들를 때마다 참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얼마나 많은 무덤이 줄지어서있는지 모릅니다.
다들 한 때 잘 나가던 분들이었고 나름 한 가닥씩 하던 분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도 보송보송 솜털 같던 시절과 꽃 같은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자취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저 덩그러니 흙무덤 하나, 그 속에는 형체를 알 수 없는 유골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순환의 법칙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으며 봐주는 것이 없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흐른 어느 순간, 꽃 같은 젊음이 가고, 인생의 절정기도 가고, 그 좋았던 시절도 가고, 결국 우리 앞에 남게 되는 것은 시들고 메마른 육체요 임박한 죽음뿐입니다.
그러나 그 힘겨운 순간 예외적으로 특별대우를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깨어있는 종들인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종말론은 절대로 우울한 색조를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기쁨과 설렘의 분위기로 가득한 희망의 종말론입니다.
언젠가 우리의 유한한 육체가 소멸되는 순간은 우리 삶이 종료되는 순간이 아니라 사랑의 하느님과 결합되는 새 출발의 순간입니다.
죄스런 우리 삶이 용광로같이 뜨거운 하느님 사랑 앞에 완전히 녹아버리는 기쁨의 순간입니다.
자격 없는 인간의 유한한 생명이 영원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환희의 순간입니다.
한 존재가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것, 소멸되어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그런데 그 일이 이제 우리 각자의 죽음을 통해서 실현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도 그분처럼 우리 안에 생명의 불꽃을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죽어도 죽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은혜롭고 과분한 일인지요.
그리스도교 안에서 죽음은 다리 하나를 건너가는 일입니다.
고통의 연속인 인간 세상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천상복락의 땅으로 가는 다리, 필멸에서 불멸에로, 죄의 상태에서 은총상태로 건너가는 다리가 바로 죽음의 순간입니다.
우리 각자의 죽음은 파스카 신비가 구체화되는 특별한 순간입니다.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노예상태에서 자유인으로, 어둠의 세상에서 광명의 세상으로, 혼돈 상태에서 완벽한 평화로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죽음은 고통과 저주가 축복과 은총이군요.
더불어 반드시 기억할 일 한 가지가 있습니다.
언젠가 맞이하게 될 죽음의 순간에 은혜로운 파스카 체험을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 매일의 삶 안에서 파스카의 신비를 체험하면 좋겠습니다.
그런 우리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하느님께서는 지상에서부터 천국 체험이란 선물을 건네실 것입니다.
노년기에 접어드시는 분들뿐만 아니라 젊은이들도 자주 죽음을 묵상할 일입니다.
좀 더 자주 대자연의 순환에 눈길을 주면 좋겠습니다.
사실 우리 앞에 펼쳐지는 사시사철이 다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봄날의 파릇파릇함도 좋습니다. 여름날의 푸르름도 좋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보여주는 단풍은 그 어느 때 보다 화려하고도 아름답습니다.
우리 역시 나이 들어간다는 것이 마냥 쓸쓸하고 허전하고 우울한 것이 아님을 보여줘야겠습니다.
노년기에 접어들어도, 임종을 목전에 두고서도 더욱 아름답고 더욱 당당하고 더욱 충만할 수 있음을 보여줘야겠습니다.
이를 위해 정말 필요한 노력이 한 가지 있습니다.
영적생활에 대한 우선권을 두는 노력입니다.
착한 죽음을 잘 맞이하기 위한 꾸준한 기도생활입니다.
삶이 선물이듯 죽음도 선물이기에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어린 시절 요절한 알로이시오 곤사가가 죽음을 앞두고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그가 얼마나 착한 죽음을 잘 준비했는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어머니와 우리 온 가족이 제 죽음을 하느님의 기쁜 선물로 생각해 주십사고 간절히 희망하면서 이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의 이별은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입니다.
천국에서 다시 만나 우리 구원이신 주님과 결합하여 불사불멸의 끝없는 기쁨을 누리고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찬미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할 것입니다.”
안토니오 성인의 죽음과 관련된 주옥같은 권고 말씀도 착한 죽음을 준비하는 기도로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매일 죽을 것처럼 산다면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날마다 일어나면서 저녁때까지 살지 못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저녁에 잘 때면 아침까지 깨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우리의 생명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목숨은 하루하루 주님의 손길에 맡겨져 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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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 전삼용 요셉 신부님.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자기 자신만 만나다 죽는 사람
오늘 우리는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을 지냅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11월 1일부터 8일까지 묘지를 방문하여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하면
그들에게 전대사가 주어집니다.
전대사를 받으면 연옥의 모든 잠벌을 용서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연옥에서 고통받는 많은 이들을 위해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연옥에 있는 이들은 부족하게나마 이 세상에서 주님을 만나고 간 이들입니다.
그러니 주님께 “나는 너를 안다”라고 인정받은 이들입니다.
한 번을 만났더라도 주님께서 안다고 증언해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처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라는 말씀을 들으면 큰일일 것입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신랑이 올 때 기름을 간직하지 못하고 있어서 신랑을 맞으러 나가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죽음과 그 죽음을 잘 준비한 이들을 기념하며
우리 또한 그 대열에 들기 위해 어떻게 하면 주님으로부터 “나는 너를 안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지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통사고로 심각한 뇌 손상을 입었음에도 이를 극복하고 TED 강연으로 유명해진 ‘에이미 커디’는 이런 경험을 소개합니다.
그녀가 사고로 인한 지능 저하로 남들보다 4년 늦게야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심리학을 전공하며 박사학위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때 교수직을 따기 위해 지도교수와 여러 중소 규모의 콘퍼런스에 참여하게 됩니다.
세계적으로 저명한 교수들이 함께 모이는데 박사과정에 있는 이들은 이 교수들에게 아주 짧은 시간에 자신의 매력을 어필해야만 합니다.
이때 준비해야 하는 것이 ‘엘리베이터 스피치’라고 합니다.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함께 탄 교수에게 약 90초 동안 자신이 연구한 모든 것을 핵심적으로 쏟아내어 그 교수가 자신을 채용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미 박사학위를 취득하고도 몇 년 동안 교수직을 얻지 못해 이런 콘퍼런스를 배회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에이미 커디도 단단히 준비하고 중소도시 평범한 콘퍼런스에 지도교수와 함께 참석하였습니다.
개회 만찬장으로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사회심리학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세 명의 거장이 타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 한 명을 만나는 것도 행운인데 세 명의 스타 교수들을 마주하니 정신이 멍멍하였습니다.
이때 한 교수가 “아하, 우리가 엘리베이터를 함께 탔네요. 연설 한 번 들어볼까요?” 라고 말했습니다.
에이미 커디는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리고 입안이 바짝바짝 타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늘의 별과도 같은 사람들이 함께 있는 그 비좁은 공간에서 초긴장한 상태로 연설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단어들이 제멋대로 튀어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첫 문장부터 엉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 저, 잠깐만요, 그걸 말씀드리기 전에 ...”
에이미는 말하면서도 ‘아, 이렇게 망하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한 번도 잡기 힘든 기회를 세 번이나 동시에 날려버리는 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이 아는 다른 교수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테니 그녀의 교수직은 물 건너간 것 같았습니다.
또 자신을 여기까지 믿고 데려온 지도교수를 볼 면목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런저런 걱정 속에 세 스타 교수들의 얼굴을 빠르게 살피며 이런저런 말들을 쏟아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지지한다거나 인정한다거나 공감한다거나 하는 아주 작은 표정만이라도
애타게 갈구하였습니다.
마침내 엘리베이터는 20층에 도착했고 문이 스르르 열렸습니다.
두 교수는 머리를 숙인 채 내렸고 마지막 교수는
“여태까지 내가 들었던 엘리베이터 스피치 중 최악이었네”라고 말하며 내렸습니다.
에이미는 그들과 함께 내리지 못했고 자궁 속 아기처럼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어 쭈그리고 앉았습니다.
엘리베이터는 다시 로비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안도감이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무지막지한 압박감에서 해방된 느낌이었습니다.
‘4년 넘게 공부한 내용에 대해 어째서 단 한마디도 말하지 못했단 말인가?
게다가 실패하고 나서 안도감이라니?
그리고 왜 이제야 준비한 내용이 떠오르는가?’
그녀는 이 경험을 깊이 성찰하며 ‘프레즌스’라는 심리학 용어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프레즌스는 ‘지금 여기 내가 존재하게 할 수 있는 능력’ 정도로 번역하면 될 것입니다.
그녀는 ‘내가 왜 그때 나로 존재할 수 없었을까?’를 깊이 생각한 것입니다.
[참조: 『자존감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에이미 커디]
미련한 처녀들은 분명 그렇게도 기다리던 신랑이 왔지만 그를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상태는 아마도 예수님께서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마태 7,22-23)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을 만난다고 하면서 자신들이 만든 금송아지를 경배했습니다.
자신들은 하느님을 만나고 있다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만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금송아지는 각자 자신이 섬기는 자기 자신입니다.
에이미 커디는 그때 ‘나는 세계의 유명한 스타 교수들을 만나고 있다.
나는 나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만나고 있었지 그 교수들을 만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자기 생각이 우선이고 교수들은 자신을 증명하게 만들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상태로는 누구도 진정으로 만날 수 없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만나려면 ‘그들을 만나고 있는 나를 잊어야’ 합니다.
내가 살아 있으면 그들이 나를 내가 원하는 대로 인정해주지 않을까 봐 불안해하고 초조해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두려워하는 대로 흘러갑니다.
나의 뜻을 이루려 누군가를 만나면 나를 만나는 것이지 상대를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누군가를 만나려면 상대의 뜻과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주님의 뜻을 만나면 내 뜻은 죽습니다.
내 뜻이 죽을 때 평화가 옵니다.
그런데 내가 죽었다면 누가 나의 주인이 될까요?
바로 주님이십니다.
내가 주님을 나의 지배자로 두면 그분이 나의 주인이 되시고 그분을 위해 나는 봉사해야 합니다.
나의 이익을 챙길 수가 없습니다.
이때 비로소 ‘프레즌스’가 성취됩니다.
자아는 끊임없이 과거의 걱정과 미래의 불안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주님께 집중하면 현재 주님의 뜻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현재에 머물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 하느님을 만나고 이웃을 온전히 만나려면 자기 생각에 빠져있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뜻에만 집중하고 있어야 합니다.
꾸준한 연습을 할 필요가 있지만, 아주 잠시라도 이 프레즌스가 이루어졌다면 주님은 “잠깐이지만 나는 너를 만난 적이 있다. 나는 너를 안다”라고 증언해주실 것입니다.
프레즌스를 연습하는 방법은 짧은 기도를 통해 자주 주님이 나의 주인이심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자주 짧은 대화를 나누어도 되고 그저 예수님의 이름을 자주 불러도 됩니다.
나의 의식을 나에게 두지 말고 주님의 뜻에만 두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내 안에 계신 주님의 뜻에 집중하는 시간을 갖는 연습을 한다면 이것이 깨어있는 연습이고 죽음과 심판을 준비하는 자세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나를 쉽게 신뢰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 주님 하면서 살았지만 결국 자기 자신만 만나다 죽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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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 이영근 신부님.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11월은 정녕 신비의 달입니다. 절로 죽음과 비움의 신비를 묵상하게 합니다.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만들고, 우리를 존재의 심연으로 이끌고 갑니다. 마른 풀 한 줄기를 침대로 삼아 내려앉은 서리에서도, 뒹구는 낙엽을 깨우며 소스라치게 부는 바람에서도, 우리는 그 만남과 죽음의 신비를 봅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마치 잎이 새싹일 때 ‘이미’ 단풍을 품고 있듯이 ‘이미’ 우리 안에 있는 죽음을 보는 것이요, 꽃이 몽우리일 때 ‘이미’ 씨앗을 품고 있듯이 ‘이미’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은 하나의 통로요, 만남입니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 묵상하는 것은 죽은 다음에 오는 미지의 세계가 아니라, 생사가 갈라질 수 없게 펼쳐져 있는 삶의 세계를 성찰하기 위해서입니다. 곧 현재를 충실히 사는 것이요, 현재를 충실히 죽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완성을 향한 삶이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에티우스는 말합니다.
“흘러가버리는 지금이 시간을 만들고, 머물러 있는 지금이 영원을 만든다.”
이처럼, 죽음의 질이 삶의 질을 결정짓고, 삶의 질이 죽음의 질을 결정짓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의 중요함을 파우스티나 성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이 첫 순간이고 마지막 순간이며 유일한 순간이다”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죽음이 신비한 것은 죽음이 한 생을 사라지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 생명의 신비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삶은 죽음의 또 다른 일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죽을 몸에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의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 4,10)
‘우리의 죽을 몸에서 하느님의 생명이 드러난다는 것’은 인생에 죽음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애초에 죽음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불사불멸의 하느님의 생명을 가지고 사는 영원한 존재인 것입니다. 이 심오한 진리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자 내가 여러분에게 신비 하나를 말해주겠습니다. 우리 모두 죽지 않고 다 변화할 것입니다~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는 몸이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이 죽지 않는 것을 입습니다.”(1코린 15,51-56)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듣기만 하여도 벅찬 감격이 밀려오는 말씀입니다. 당신께서 안식을 주겠다는 이 벅찬 초대에서 우리는 참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곧 “참된 안식”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선사되고 베풀어지는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다음 구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9)
“얻을 것이다”의 원어의 뜻은 “찾다”, “발견하다”는 뜻이라 합니다. 곧 참된 “안식”은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찾고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예수님 안에서 찾고 발견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참된 스승이신 예수님 안에서만이 참된 “안식”을 얻게 됩니다. “참된 안식”, 그것은 그것을 가지신 분으로부터 얻게 됩니다. 그것은 공로로 얻어지기보다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이요, 탐구로 얻어지기보다 순명으로 얻어지는 것이요, 앎으로 얻어지기보다 사랑으로 얻어집니다. 참으로, 그것은 그분의 선물이요, 사랑이요, 자비요, 호의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안식은 참된 주인에게서 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주님을 찬미하며, 이미 세상을 떠난 영혼들을 기리며, 주님의 축복과 은총에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우리는 가족과 공동체 식구들뿐만 아니라, 특히 소외된 영혼들, 곧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이들과 잊혀 진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또 평화를 위해 일하다 세상을 떠난 영혼들과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과 무죄한 사람들의 죽음을 함께 아파하며, 그들을 위해서도 기도를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전쟁의 살육 속에서 희생된 이들, 테러와 폭력의 희생자들, 고문과 억압으로 희생된 이들, 특히 코로나 19 상황으로 희생된 이들, 그리고 이루 헤아릴 수없는 타력에 의해 희생된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마태 11,29)
주님!
당신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묶지만 옭아 메지 않는, 위에 있지만 짓누르지 않는,
오히려 편하게 하는 사랑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함께 지며 나누는, 함께 가며 끌어주는,
그 손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동행해 주고 길이 되어 주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 마음을 따라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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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 위령의 날 <여기서부터 영원을 살자> 반영억 라파엘 신부
위령의 날을 맞이하여 우리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이들이 하느님의 자비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언젠가 맞이할 죽음에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그의 자녀이며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약속을 믿고 오늘을 이미 영원으로 알고 최선에 최선을 다해 살면 마침내 주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의 ‘사주’를 믿었습니다. 청년시절에 한 번 위험한 고비를 넘길 것이라는 것과 얼굴이 곱상한 여인과 결혼할 것이라는 것도 용케 들어맞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주에 의하면 그한테는 삼십 대에 재물의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믿고 어디 가서든 큰 소리를 쳤습니다. ‘두고 봐라. 내 나이 마흔을 넘기 전에 너희와 앉은 자리가 달라질 것이다.’ 서른 고개를 막 넘었을 때 일자리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어떤 사주를 지닌 사람인데 남의 밑에 가서 일을 한단 말이냐’하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몇 년 후에는 친구가 동업을 하자고 했습니다. 그는 웃으며 거절했습니다. ‘이 사람아, 내가 그런 시시한 장사를 할 사람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가?’ 그리고 또 몇 년이 흘렀습니다. 해외로 갈 기회가 열렸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나에게는 돈복이 터지게 되어 있다구.’ 하면서 밑이 터지게 가난하게 살다가 그만 일찍 죽게 되었답니다.
그는 저승사자에게 항의했답니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나한테는 재복이 예정돼 있었잖습니까?’그러자 저승사자가 한심스럽다는 얼굴로 대꾸했습니다. ‘우리는 기회만을 제공할 뿐이다. 직장 운 한번, 장사 운 한번, 무역 운 한번, 이 세 번의 기회를 다 주었었네.’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기회가 주어져 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주님의 뜻대로 살면서 주님께서 원하는 것을 할 기회가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럼에도 욕심을 부리거나 요행을 바란다면 그 기회는 그저 스쳐 지나갈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편한 쉼이 아니라 자기 힘에 알맞으면서도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쉼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힘들고 어려운 모든 이에게 그 쉼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30). 하시는 예수님의 위로를 받는 것은 하루의 생활을 봉헌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멍에는 틀림없이 우리에게 위로와 기쁨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성 엘리지오는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오히려 주님이 정하신 때에 죽기를 원한다. 이는 죽음으로써 만이 하늘에 계신 그리운 아버지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당당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지금 나에게 주어지는 순간순간의 기회들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편히 쉬게 하신다.’고 약속하심이 우리에게는 큰 위로요, 희망입니다. “죽음은 고통스러운 길이지만 보이지 않는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길입니다”(성 안눈시아따). 우리는 부활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죽음이 없이 부활은 있을 수 없으니 죽음은 부활의 문을 여는 출발점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결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의 뜻대로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찾아 최선을 다할 수 있음을 기뻐하십시오. 오늘은 죽은 이를 기억하는 날이면서도 나의 죽음을 생각하는 날입니다.
“사람들은 언짢은 죽음을 두려워하나 언짢은 삶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는 성 아우구스띠노의 말씀이 새롭습니다. 오늘 여기서부터 하늘의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Hodie mihi, cras tibi)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오늘의 주어진 시간에 충실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영원한 안식을 얻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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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은 우리보다 먼저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여 새로운 삶을 살고 계시는 분들을 기억하며 그 은혜에 대하여 감사드리고, 아직 연옥에 남아있는 분들을 위해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는 날이다. 그리고 우리도 언젠가는 맞이하게 될 죽음을 생각하고 현재의 나의 삶을 되돌아보는 날이기도 하다. 오늘은 연옥이 어떤 곳인가를 한번 보겠다.
연옥은 끝이 있는 일시적인 정화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로서 누구나 결점은 있으며, 완전한 인간은 없다. 그래서 스스로 죄스런 인간이라고 한다. 그리고 죽은 후에는 더는 어떻게 해볼 수가 없다. 하느님을 뵙는 순간 자기 자신 스스로 판단하게 되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발전 가능성은 죽은 다음에는 없다. 그러므로 결점이 있는 부당한 인간으로서 완전하신 하느님께 나아갈 수가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하느님은 정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조그마한 결점도 용납이 안 된다. 이같이 인간이 하느님을 향해서 살아갔지만, 인간적 약점 때문에 가지게 된 부족한 것과 결점을 기워 갚는 그것을 연옥이라고 한다. 이 연옥은 마지막 정화단계라고 보는 것이 좋겠다. 하느님께 나아가는데 죄스러운 결점이 하느님의 완전하심을 통해서 정화되고 구원이 성취되는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가 가르치고 있는 연옥론(煉獄論)은 하느님의 성성(聖性), 정의, 자비를 명백히 보여주며, 인간을 절망과 윤리적인 경솔함으로부터 지켜주고, 더구나 죽은 사람도 도와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증하여 줌으로써 많은 위로와 도움을 주고 있다. 교회가 연옥에 대한 가르침을 정식으로 정의한 것은 리용 및 피렌제 공의회(1274년 및 1439년), 그레고리오 13세 및 우르바노 8세의 신경(信經), 그리고 프로테스탄트에 반대하여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 이었다.
연옥에서의 영혼은 자신의 죄에 대해 정화 받는다. 이 세상에서는 죄에 대한 보속을 선행이나 기도로써 대신에 할 수 있으나 연옥의 영혼은 더는 무엇을 할 수 없고, 수동적인 형태로 하느님의 정의로 내려진 벌의 고통을 견디는 것으로 정화와 속죄되는 상태이다. 이 영혼은 하느님이 내리시는 고통을 즐겁게 수용함으로써 죄에 대한 유한적(有限的)인 벌의 보상을 하면 확실하게 정화되는 것이다.
연옥의 고통이란 모든 사람에게 같지는 않다. 각자가 지은 죄에 상응하는 벌을 받게 된다. 그다음 연옥 영혼은 하느님을 마음으로부터 사랑하고, 천국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확실하므로 고통으로 마음의 평화와 기쁨이 흔들리지는 않는다. 그 고통의 기간이나 엄중함도 지상교회의 기도와 선업(善業), 즉 신자들의 기도로 단축 또는 경감시켜줄 수 있다.
연옥의 영혼들을 도와줄 수 있고 그들의 고통을 경감 내지 단축해줄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현실의 삶 속에서도 그 예를 들어 충분히 이해가 가고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예를 들면, 아버지가 빚을 다 갚지 못하고 돌아가셨다고 한다면, 그 자녀는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서 그 빚을 대신 갚으려 할 것이다. 죽음을 통해서 더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그 사람을 위해서 아직은 무엇을 할 수 있는 우리가 대도(代禱)를 한다고 할 때, 즉 대신 고행(苦行)을 한다든지 대신 속죄(贖罪)의 선행을 하느님께 보여 드린다고 할 때 그 노력은 헛된 것이 아니다.
그 영혼을 위해서, 그 영혼의 명예회복, 즉 하느님의 모습을 닮음을 완전히 회복시켜 주기 위한 이 행위는 돌아가신 부모의 빚을 갚아서 그분들의 명예를 회복시켜드리는 것 이상으로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받아주실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자주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서 미사를 봉헌하며, 이 미사를 통해서 지상교회는 연옥의 영혼들과 통공을 나누고, 만일에 그 영혼이 정화되어 하늘나라에 있다면, 그 기도의 은혜는 다른 영혼에게 베풀어지며, 천상에 있는 그 영혼은 아직도 이 지상에서 순례하고 있고, 많은 어려움과 박해 속에 있는 지상교회를 위해 기도해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또한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나이다."하고 고백하는 것이 아닌가? 연옥의 영혼은 그곳에서 자신의 죄를 다 보속한 후에는 하느님의 생명에 나아갈 것이며, 천국에서 하느님을 직접 뵙게 되고, 그분의 신비에 잠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일시적 정화의 장소인 연옥은 모든 영혼이 하늘나라에 들어감으로써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교회는 이 영혼들을 위한 특별 기간(위령성월)도 마련하고 있지만, 그들이 하루 빨리 완전한 구원에 이르도록, 하느님께 일치하도록 선행으로써, 기도로써, 미사를 통하여 우리가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항상 “모든 성인의 통공”을 기억하면서이다. 그들을 위한 기도나 선행은 그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모든 성인의 통공 안에서 본다면 바로 우리 자신들을 위한 기도이다. 이 미사 동안 우리가 사랑했고, 우리를 사랑했던 돌아가신 부모와 형제 그리고 친지들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도록 주님의 자비를 간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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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 한상우 신부님.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15, 8)
삶속에서
죽음을
묵상한다.
한번도
가본적이 없기에
죽음이
두려운 것이다.
이 죽음을 통해
우리가 누군지를
깨닫게된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오신
예수님께서 먼저
이길을 걸어 가셨다.
죽은 이들을
기억하며
기도하는
오늘이다.
우리를 만드신
하느님께로
우리가
돌아가는
은총의
죽음이다.
우리모두는
죽음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게된다.
우리모두를 위한
기도의 날이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믿는다.
하느님 안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삶이다.
죽음과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들
삶속에서
아무 것도
소유할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닫게된다.
내어드려야 할
생명이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이다.
이 죽음을
어루만져 주시는
하느님께 기도한다.
삶과 죽음은
하느님께로
이어져있는
하나이다.
우리를
기다려주시고
기쁘게 맞아주실
아버지 하느님이시다.
아버지 하느님께
아픈 기억
아름다운 기억
모두를 봉헌한다.
우리모두는
점점 하느님께로
가고 있다.
죽은 모든
이들에게
빛과 안식을
주실 하느님을
믿고 기도드린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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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기억>송영진 모세 신부님.
우리 교회의 ‘내세에 관한 교리’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내세, 즉 죽은 다음의 세상은 있다.
2. 죽음은 끝이 아니라 내세로 건너가는 과정이다.
3. 부활할 자격을 얻은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고,
최후의 심판 때 부활해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
4. 심판 때에 멸망을 선고받은 사람은 지옥으로 떨어지고,
최후의 심판 때 지옥이 소멸되면 함께 소멸될 것이다.
5. 하느님 나라에 곧바로 들어갈 자격을 얻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지옥으로 떨어질 만큼의 죄인도 아닌 사람들은
연옥에 가서 지상에서 마치지 못한 보속을 하게 된다.
그 보속을 마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연옥은 벌을 받는 곳이 아니라 보속을 하는 곳이고,
천국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연옥은 천국과 지옥의 중간 지점이 아니라,
천국 옆에 있는 부속실과 같은 곳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연옥의 존재를 부정하고 천국과 지옥의 존재만 믿는 일부 종파가 있는데,
만일에 약간의 죄만 있어도 지옥으로 가야 한다면, 하느님은 너무 무자비한
분이고, 또 만일에 아주 작은 선행만으로도 천국으로 직행한다면,
하느님의 정의는 원칙도 없고 형평성도 없는
아주 이상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연옥은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가
균형을 이루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죽은 이들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것은,
연옥 영혼들의 보속 기간이 단축될 수 있도록,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한 일입니다.
(연옥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훌륭한 애덕 실천입니다.)
마카베오기 하권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그들은 모두 숨겨진 일들을 드러내시는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의
방식을 찬양하였다. 또 그렇게 저질러진 죄를 완전히 용서해 달라고 탄원하며
간청하였다. 고결한 유다는 백성에게, 전사자들의 죄 때문에 그러한 일이
일어난 것을 눈으로 보았으니 죄를 멀리하라고 권고하였다.
그런 다음 각 사람에게서 모금을 하여 속죄의 제물을 바쳐 달라고
은 이천 드라크마를 예루살렘으로 보냈다. 그는 부활을 생각하며 그토록 훌륭하고
숭고한 일을 하였다. 그가 전사자들이 부활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면,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쓸모없고 어리석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건하게 잠든 이들에게는 훌륭한 상이 마련되어 있다고 내다보았으니,
참으로 거룩하고 경건한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죽은 이들을 위하여
속죄를 한 것은 그들이 죄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었다(2마카 12,41-45).”
(이 내용은 연옥 교리의 근거가 되기도 하고,
죽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의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기도 덕분에 보속 기간이 단축되어서 천국으로 들어간 영혼들은
그 보답으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줄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 있는 이들은 죽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천국에 있는 영혼들은
살아 있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바로 ‘성인의 통공’입니다.
(지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천국에 있는 영혼들에게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죄인의 구원을 위한 기도에 관해서 요한 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 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그분께
청한 것을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 누구든지 자기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볼 때에
그것이 죽을죄가 아니면, 그를 위하여 청하십시오. 하느님께서 그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이는 죽을죄가 아닌 죄를 짓는 이들에게 해당됩니다(1요한 5,14-16).”
이 말은, 살아 있는 이들에게도, 이미 죽은 이들에게도 모두 적용되는 말입니다.
우리가 연옥 영혼을 위해서 기도를 하면,
하느님의 은총이 연옥 영혼들에게도 내리고 기도를 한 우리에게도 내립니다.
여기서 ‘죽을죄’는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용서받기를 거부하는 죄”로 해석됩니다.
(‘천국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죄’ 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려고 애를 쓰시지만,
천국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가지는 않으십니다.
구원이란, 자신의 자유의지로 원하고, 부르심에 응답하고,
받으려고 노력해서 받는 것입니다.
(원하지 않는데도 억지로 주는 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연옥 영혼은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하고, 희망하고,
그 희망의 실현을 위해서 노력하는 영혼입니다.
연옥에서 보속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보속은 벌이 아니고, 벌을 받는 일과는 분명히 다르긴 한데,
그래도 죄 때문에 벌을 받는 것만큼이나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전해집니다.
아마도 가장 큰 고통은 ‘기억의 고통’일 것입니다.
자기가 지은 죄들에 대한 기억과
그 기억에서 비롯된 부끄러움과 후회가 가장 큰 고통이 될 것입니다.
그 고통이 너무 커서 자기가 누구인지, 자기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를 정도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아닐 것이고, 연옥에서는 자기가 누구인지,
자기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아주 생생하게, 그리고 아주 세세하게
전부 다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그 기억들과 부끄러움 때문에 몸부림을 치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을 전부 다 기억해야만 보속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연옥에서의 보속은, 죄에 대한 부끄러운 기억들을 씻어내는(정화하는)
어떤 과정일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지상에서 살 때에는 부끄러운 일들을 잊어버리려고 하고, 또 실제로 잊어버릴
수도 있는데, 연옥에 가면 까맣게 잊어버렸던 일들까지 전부 다 기억날 것입니다.
(만일에 다 잊어버리고 있으면, 즉 자기가 누구인지도 잊어버리고,
자기가 어떻게 살았는지도 잊어버리고, 자기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잊어버리면,
보속을 한다는 것이 의미가 없게 됩니다.)
우리는 연옥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은 연옥에 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천국으로 직행할 자신이 없다고 해서 천국을 포기하고 연옥을 선택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포기하는 것 자체가 죄를 짓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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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 위령의 날. 이기우 신부님.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⒈ 오늘은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입니다.
어제 모든 성인 대축일을 지낸 데 이어서 오늘 위령의 날을 지내는 이유는 비록 지상에서의
생애가 곧바로 천상에 오를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하지는 못했을지라도 하느님께서 어여삐
보실 만큼은 진정성 있게 선하고 의로웠던 모든 이들을 우리가 기억함으로써 천상에 오를 수
있도록,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영원한 행복을 누리시기를 청원하고자 함입니다.
우리가 순교자 성월을 지내면서 미처 다 기억하지도 못한 무명 순교자들이 무척 많습니다.
또한 이 땅에서 천주교 신앙이 싹을 틔우고 그에 따라서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도록 부패한
조선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느님의 뜻을 사상으로나 행동으로 펼쳐보인 선조들도 우리가
기억해야만 그분들과의 통공 속에서 우리 세대에 우리 사회와 교회를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도록 변화시켜 나갈 수 있을 겁니다.
박해시대로 점철된 초기 역사 이후 신앙과 선교의 자유가 주어진 이후에도 그 신앙과
선교의 자유를 한껏 선용하여 이 땅에서 사랑과 진리와 정의를 위하여 헌신한 수많은
의인들을 그저 몇 몇 대표적인 사례만 기억하고 있을 뿐 우리는 다 알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다 알고 계시겠지요. 그래서 하느님께서 그분들을 받아주시고
혹시 있을 수도 있는 허물을 용서해 주십사고 우리가 대신 기도하는 것입니다.
선대 의인들의 헌신으로 인한 혜택을 우리가 거저 얻어 누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들을 위해 대신 기도해 드리는 일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⒉ 하느님에게서 비롯되는 의로움과 거룩함을 위하여 치열하게 살아가신
그 어느 선조도 자신의 삶을 후대의 누군가가 기록하고 기억해 주기를 바랄 것입니다.
비록 비석이나 바위에다 철필로야 새기지 못해도
우리의 의식 속에 그분들의 삶은 각인되어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의 부모님들, 부모의 부모님들과 같은 조상들을 비롯해서,
이 세상에서 우리와 삶을 함께 나누면서 우리에게 사랑과 지혜와
배려를 나누어주신 모든 분들에 대한 기억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 기억이 남아있는 한, 먼저 가신 분들과의 통공은 변함없이 지속될 것이며,
그 통공의 영향력이 우리를 영적으로 이끌어줄 것입니다.
그 이끄심은 우리가 그분들의 삶을 이어받는 계승, 그분들이 못 다한 바를 채우는 보속,
그리고 우리 시대에 가능하게 된 방식과 기회를 활용한 발전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⒊ 우리가 기억하는 선조들은 우리보다 먼저 이 세상을 살아가신 분들이시고, 우리에게 지금의 삶을 가능하게 만들어주신 분들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전해주신 부모님들을 비롯해서, 신앙과 지식과 지혜를 전해주신 분들도 계시고, 우리가 살아가는 나라와 사회를 살기 좋게 만들고자 애써주신 분들도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들의 사랑과 헌신 덕분에 그 혜택을 마치 물이나 공기처럼 무상으로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 자신의 행복과 후손들의 행복을 위하여 선조들의 삶과 사랑과 헌신을 본받아 계승해야 합니다.
⒋ 사람은 예외없이 때와 장소의 한계 안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시대적 한계는 물론이고 사회적인 제약을 받으며 자기 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불완전하고 자기중심적일 수 밖에 없는 실존적 한계 또한 어김없이 작용합니다.
그래서 잘 하고자 했어도 실수를 저지르고, 나약한 인간성을 노출시키는가 하면,
때로는 본성의 유혹에 빠져서 죄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우리가 기억하고자 하는 선조들,
먼저 가신 분들도 에외없이 이런 한계 속에서 살아가신 분들입니다.
우리가 그 한계를 알게 되는 한, 그 점은 우리의 선행으로 채워서 보속해야 할 기회요 대상입니다.
냉정하게 깎아 내릴 일만이 아닌 겁니다.
우리 자신도 한 생을 살아가다보면 여지없이 이 한계에 봉착하게 될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⒌ 하여, 우리 시대에 더 좋아진 기회와, 더 깊어진 지혜, 또 더 알게 된
좋은 방식으로 우리는 봉사와 헌신을 더 질 높은 사랑으로 실천할 수 있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사신 분들을 이끄셨던 하느님의 사랑은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도 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시대, 모든 나라에 태어난 사람들이 한결같이 바랐던 것은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바라마지 않는 그 행복이 하느님의 참된 행복으로까지
승화될 수 있도록 가르치셨고 손수 그 행복한 삶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옳지 않은 일에 슬퍼하며, 하느님께 온유한 마음으로 옳은 일에 주저없이
나서고, 비록 그 결과가 나를 칭송하지 않을지라도 하느님 안에서 흡족해 하며,
자비가 필요한 이들을 만나면 작은 자비라도 기꺼이 베풀고,
깨어진 한반도 평화가 하루빨리 회복될 수 있도록 뜻과 힘을 모으며, 혹시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이들이 보이면 그들이 꿋꿋하게 버틸 수 있도록 응원하는 삶이 그런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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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 새벽을 열며. 위령의 날. 빠다킹 신부님.
스트레스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암의 원인이 이 스트레스에서 온다는 연구 결과가 있고, 스트레스로 인해 우울증이 온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스트레스가 아예 없다면 어떨까요? 정말로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주요신경내분비계로 스트레스에 대한 반응을 보이는 동물의 HPA 축을 제거한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 동물들은 만사에 심드렁하고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일부는 심지어 먹는 것조차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스트레스를 받는 부분의 손상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스트레스에 대해 부정적인 뉘앙스를 갖게 되지만, 인간의 제 기능을 위해서는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단기간의 스트레스는 집중력을 높이고 사고 기능을 예리하게 만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스트레스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적당한 스트레스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스트레스를 거부한 것, 이것 역시 또 다른 스트레스는 아닐까요? 따라서 적당한 스트레스로 여기면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나 자신의 발전은 바로 이런 인정과 수용을 통해서 시작됩니다.
우리의 스트레스 중에서 가장 큰 부분은 죽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죽음을 무조건 피할 수가 있을까요? 어떤 사람도 죽음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누구나 한 번은 죽음의 경계를 지나야만 합니다. 그런데도 이를 스트레스를 받아들고 힘들어하는 것은 죽음 자체를 인정하지 못하고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오늘은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입니다. 특히 연옥 영혼들이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기도하는 날입니다.
이 취지에 맞게 당연히 고인을 위해 기도를 해야 하겠지만, 우리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도 가져야 합니다. 이 세상 안에서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세상으로 넘어가는 하나의 단계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말씀하신 행복 선언처럼, 세상 안에서 누리는 순간의 만족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영원한 만족을 누릴 수가 있게 됩니다.
죽음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과정 안에서 나의 진정한 성장이 이루어지게 됨을 오늘 위령의 날을 맞이해서 묵상해 보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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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제각기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으나 모든 이가 그것을 볼 수는 없다(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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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오셨다(조남익, ‘한강의 새벽’ 중에서)
가까운 곳도 먼 곳도 아니고
젊지도 늙지도 않으신 아버지
조용히 앉아 봄 오고 풀이 자라고
신의 그림자처럼 아버지가 오셨다
말은 없으시고
뜻으로만 주시는 말씀
아버지가 오셨다
나는 아직 오염되지 않은
표주박의 바다
산 자가 갇히는 땅에
아버지가 오셨다.
제 작은아버지의 시입니다. 아버지(제게는 할아버지가 되십니다)에 대한 사랑을 다루고 있습니다. 돌아가셨지만 죽음이 끝이 아님을, 우리 마음속에 계속 오시는 분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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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 위령의날
위령의 날(둘째미사)
제1독서(집회 3,1-9)는 죽은 뒤에 드러날 의인들과 악인들의 운명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에게 심각했던 고민 가운데 하나는 하느님의 말씀대로 의롭게 살았던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해주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여겨지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대로 사는 의로운 이들에게 주어질 보상이란 과연 무엇인가? 악인과 의인의 차이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을 계속 이어갔고, 결국은,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하듯이, “굳이 하느님을 믿어야 하는가? 하느님을 믿으면 정말 죽은 뒤에 보상을 해주시는가?”라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현자들은 우리가 죽은 뒤에 있을 부활과 인간에게는 파멸로 느껴지는 죽음이 하느님에게는 다른 삶으로의 변화이며, 그때에 하느님께서 축복을 주시리라는 희망을 강조했습니다.
집회서의 저자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불신을 의인들과 악인들의 운명에 비교하면서 생명과 죽음, 풍요로움과 황폐함, 장수와 단명, 평화와 파멸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의 시각으로 볼 때에 의인들은 마치 벌 받는 것처럼 늘 고통 속에서 살고 있으며, 악인들은 늘 편안하고 잘 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느님의 시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의인들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현세에서 겪는 어려움은 오히려 더욱 커다란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단련시키는 것이라면서 의인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의인들은 하느님께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으며, 하느님의 뜻을 깨달으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하느님 안에서 구원되리라는 궁극적인 희망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복음(마태 11,25-30)은 찬미기도(25-26절)와 아들의 지위에 관한 선언(27절), 그리고 구세주의 부르심(28-30절)으로 나뉩니다.
찬미기도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하늘과 땅의 주인, 즉 역사의 주인이시며 창조주로 부르면서 찬미를 드립니다. 예수님 시대에 율법학자들과 묵시문학자들과 같이 사회에서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이들(다니 1,4)은 자기들에게 하늘에서 특별한 것이 주어지기를 바라고 그렇게 믿었습니다(에세느파와 율법학자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소위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이라고 부르시지만, 사실은 아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들에게는 무엇인가를 감추신다고 하십니다. 반대로 오히려 철부지, 사회에서 약자로 취급되는 평범한 사람들, 여자들과 갈릴레아 사람들,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게는 하느님 아버지를 알 수 있도록 무엇인가를 드러내주셨는데 받아들였다고 감사드립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어떤 이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떤 이들에게 드러내신 것이란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신 하늘나라의 신비, 즉 옛 계약의 완성이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마음이 가난한 것뿐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계시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들의 지위에 관한 선언에서 철부지들에게 보여주신 하늘나라의 신비는 다름이 아니라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알지 못하고, 아들의 부활을 통하여 아들이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이 신비는 하늘과 땅과 저승은 물론 인간의 구원에 대한 전권을 아들에게 넘겨주셨기 때문에 오직 아들을 받아들이는 이들만, 마치 아버지가 아들을 알고, 아들이 아버지를 알듯이(요한 10,14-15), 하느님 아버지를 알게 해주신다는 뜻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느님 아버지를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새로운 계약을 맺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이란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써 하느님과 우리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맺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에 대한 참된 지혜는 선물이기 때문에 하느님 아버지께서 거룩한 영을 보내주시지 않으시면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지혜 9,17).
구세주의 부르심은 하느님의 구원을 요청하는 이들이지만, 하느님의 지혜를 깨우치지 못한 이들이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보시고 이들에게 보내는 새로운 형식의 행복선언입니다(집회 24,19-22; 51,23-29). 그런데 멍에란 옛 계약에 의한 노예생활을 말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지혜의 멍에, 율법의 멍에, 그리고 하느님의 멍에(예레 2,20; 5,5)라고 하면서 수많은 율법들을 무거운 짐이나 구속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마태 23,4) 사람들입니다. 실제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결코 겸손하거나 온유한 사람들이 아니라 남에게 보이기 위한 일만 하고, 윗자리와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 불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마태 23,5-7).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마태 23,3) 이들과는 반대로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당신이 가르치신 것을 실천하시기 때문에 새로운 계약을 맺으실 당신이 주시는 멍에는 편하고 가볍다는 것입니다.
제2독서(로마 5,17-21)는 죽음이 아니라 은총이 지배하는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된 사람, 즉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셨다.”(로마 8,2)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죽음과 생명이라는 두 가지 축을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아담은 부정적인 축으로서 불순종과 범죄로 점철된 역사를 지배하면서 죽음을 가져다주었다고 합니다. 새로운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긍정적인 축으로서 은총과 자비와 구원의 역사를 지배하면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해주셨다고 합니다. 율법의 기능이란 원래 신앙생활을 도와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 지키는 것 자체에만 매달리게 한 나머지 율법이 오히려 사람을 죄와 죽음으로 몰고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완성시키신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 모두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따른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불순종의 대표자였고 그리스도는 순종의 대표자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불순종은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했으므로 죽음으로 이끄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순종은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했으므로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이 순종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순종이며, 우리의 구원을 위한 순종입니다. 그리고 믿음과 함께 사랑의 실천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게 해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는 모든 생물이 새로운 삶을 준비하기 시작하는 가을에 죽은 이들을 위해 더욱 더 많이 기도할 것을 권고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위령의 날을 정해놓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순종한 이들이 영원한 안식을 누릴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고,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리스도께 순종할 것을 권고합니다. 죽음은 삶의 모퉁이를 돌아서 하느님을 직접 뵙게 되는 하느님의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죽으면 만사가 끝장나는 허무도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의 품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죽음이란 말도 많고 탓도 많은 이곳에서 평화와 사랑과 행복이 가득한 하느님 나라로 삶의 자리를 옮기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기다려지는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와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며, 하루를 산다는 것은 하루를 죽음으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전권을 지니신 하느님께서 당신 구원의 뜻을 실현하시는 구체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인 죽음을 우리 가운데 아무도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든지 압니다. 그렇다면 죽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을 살면서 죽음을 잘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남에게 멍에를 가끔 지우고 있으면서 지금 그대로 죽는다면, 그래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회개하고 닦아내고 정화해야 할 뿌리 깊은 이기심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의 씨앗을 없애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1코린 3,15; 1베드 1,7). 또한 지상에서 겪은 많은 고통과 희생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으며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의 사랑 실천에 따르는 보상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죽음은 내가 사는 다른 형태의 삶이므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순종하면서 하느님 아버지 안에서 안식을 찾게 되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기쁨이 되어 주신다는(집회 6,28) 믿음과 희망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 방효익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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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 위령의 날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세상을 떠난 모든 영혼을 기억하는 ‘위령의 날’입니다. 한국에 있을 때입니다. ‘위령의 날’에는 용산 성당에 있는 성직자 묘지엘 갔습니다. 교구장님과 사제들은 세상을 떠난 사제들을 위해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용산 성당에서 보좌신부로 있었습니다. 위령의 날은 본당의 큰 행사였습니다. 주교님과 신부님들이 많이 오시고, 교우들도 많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성직자 묘지를 가득 메운 교우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면서 우리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같은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성직자 묘지를 바라보면서 성모상이 있었습니다. 성모님께서 세상을 떠난 사제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바라보시는 것 같았습니다. 사제들을 사랑하시는 성모님께서 세상을 떠난 모든 사제들이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전구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2020년 위령의 날은 저에게는 특별한 날입니다. 지난 9월 10일어 어머니께서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아버님은 9년 전인 2011년 5월 5일에 하느님 품으로 가셨습니다. 비록 한국으로 가서 부모님을 위한 미사를 하지는 못하지만 이곳 뉴욕에서 부모님을 위한 미사를 봉헌합니다. 오늘 미사 전례는 위령의 날을 지내는 우리에게 많은 위로와 용기를 줍니다. 오늘 감사송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신앙 안에서 살았으니 부모님께서 세상에서 깃들이던 집은 허물어졌지만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거처를 마련하였으리라 믿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이 세상의 고통 중에서도 우리가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이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절망 중에서도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이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어둠 속에서도 우리가 빛을 볼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이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행복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모든 성인 대축일인 11월 1일부터 8일까지 정성껏 묘지를 방문하여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묘지를 방문하고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의 기도가 연옥의 영혼들에게는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성화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그것은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면 자연히 하느님의 나라에 대하여 묵상하게 되고,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여 성실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령의 날을 지내면서 천상병 시인의 ‘귀천(歸天)’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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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아름답고 행복한 삶
- 신뢰, 순종, 감사, 환대 -
어제는 모든 성인들(All saints) 대축일 이었고, 오늘은 죽은 모든 이들(All souls)을 기억하는, 특히 그들 가운데 연옥 영혼들이 하늘 나라에 속히 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날입니다. 고운 단풍 아름다운 늦가을 만추晩秋에
맞이하는 위령의 날, 주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위로가 참 한없이 따뜻하고 푸근하게 느껴집니다.
교회의 전례를 통한 주님의 배려가 참 고맙습니다. 주님 안에서는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살아있습니다. 하여 우리는 주님의 자비에 힘입어 끊임없이 산자들을 위한 생미사를, 죽은 이들을 위한 연미사를 봉헌합니다.
위령의 날은 우리가 자주 까맣게 잊고 지내는 언젠가 있을 우리의 죽음을 생각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정말 마지막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시험 날짜와도 같은 죽음의 날은 아무도 모릅니다.
하여 분도 성인은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 말씀하셨습니다.
천주교 대구교구청의 묘지 양쪽 입구에는 ‘오늘은 나, 내일은 너’(Hodie mihi Cras tibi)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오늘은 내가 죽지만 내일은 네가 죽는 다는 뜻으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와 비슷한 말입니다. 얼마전 선종하신 바오로 수사님을 연상하면 그대로 마음에 와닿는 말입니다. 흡사 형제들이 죽음을 향해
나란히 줄서 있는 느낌이 듭니다. 인명은 재천이라 아무도 죽음의 날짜를 모르지만 하느님의 눈에는 그 순서가 환히 보일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우리를 숙연하게 합니다. 환상이나 헛된 욕심은 말끔히 걷히고 깨어 겸손히 하루하루 오늘 지금
여기서 많이 사랑하고 섬기며 본질적 삶을 살게 합니다.
죽음이후의 삶은 아무도 모릅니다. 죽었다 살아 온 이들의 말을 직접 들은 적이 없기에 우리는 교회의 가르침에 의존해 희망과 위로를 받습니다.
제 좋아하는 미사경문에 나오는 한 대목과 위령감사송 내용도 참 깊고 아름다워 참 큰 희망과 기쁨을 줍니다.
“아버지, 부활의 희망 속에 고이 잠든 교우들과 세상을 떠난 다른 이들도 모두 생각하시어 그들이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뵈옵게 하소서.”(감사기도 제2양식)
“그리스도께서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위령감사송1).
그러니 죽음이후에는 아무것도 걱정안해도 됩니다. 자비하신 주님께 맡기고 오늘 지금 여기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될 것이요 언젠가의 복된 선종의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 깨어 잘 사는 것이 최고의 죽음 준비입니다.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 오늘 위령의 날 물음은 저절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물음으로 직결됩니다.
죽음이 있어 삶은 귀한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일일일생, 일년사계로 우리 인생 여정을 압축하면 날로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인 죽음도 가까워짐을 느끼게 되고 남은 인생이 더욱 소중하게 생각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죽은 형제자매들은 온전히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다음 고백대로 살면
됩니다. 어느 교구 사제의 제안대로 ‘주님’대신 ‘아빠’로 넣으니 새로운 느낌을 갖게 하는 고백이었습니다.
“아빠!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의 선물이옵니다.”
어떻게 이 고백대로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에 근거하여 구체적으로 그 방법을 소개해 드립니다.
첫째, 신뢰의 삶입니다.
주님을 참으로 깊이 신뢰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신뢰의 관계가 최고의 자산입니다.
우리의 정주서원이 궁극적으로 목표하는 바입니다.
이런 이들이 정말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의인들입니다.
오늘 지혜서 말씀처럼 이들은 내적으로 평화를 누리며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합니다.
삶의 갖가지 시련에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과 신뢰를 깊이하는 계기로 삼습니다.
오늘 지혜서 마지막 말씀이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을 신뢰하는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신다.’
(지혜3,9).
둘째, 순종의 삶입니다.
순종의 모범은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믿는 이들의 삶은 순종의 여정입니다.
산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자발적 사랑의 순종은 성덕의 잣대입니다. 일상의 크고 작은 순종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마지막 순종인 죽음도 잘 맞이 할 수 있습니다. 아름답고 행복한 선종의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로마서 말씀이 아름답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의 은혜가 참으로 놀랍고 고맙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이는 죄가 죽음으로 지배한 것처럼, 은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야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주는 의로움으로 지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닮아 순종의 여정에 항구할 때 우리 또한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주는 의로움으로 지배되는 은총의 세계 속에서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게 됩니다.
셋째, 감사의 삶입니다.
눈만 열리면 온갖 감사의 선물로 가득한 세상임을 깨닫습니다.
감사할 때 샘솟는 기쁨에 저절로 하느님 찬미입니다.
성인들은 물론 믿는 이들의 결정적 특징이 감사와 기쁨입니다.
오늘 복음중 예수님의 감사기도가 참 아름답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참으로 감사하는 순수한 자들에게 계시되는 하늘 나라의 신비임을 깨닫습니다.
기쁨과 기도, 감사의 모범인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제가 고백성사시 처방전 말씀으로 가장 많이 써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기쁨과 기도와 감사의 삶이 우리 삶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합니다.
넷째, 환대의 삶입니다.
환대의 모범이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정주 영성과 직결되는 환대의 영성입니다.
우리의 선교 역시 환대를 통한 선교입니다. 환대의 집 주님의 집 수도원에서 환대의 수도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 후반부에서 주님의 환대의 진면목이 환히 드러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신뢰와 순종, 감사와 환대의 아름답고 행복한 안식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이런 삶보다 더 좋은 죽음 준비도 없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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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첫째미사.
오늘의 묵상
“행복하여라.” 군중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은 힘들고 어려운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분명 큰 힘과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그들이 받을 상을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주어지는 행복이 꼭 미래에 있지만은 않습니다. 지금의 현실에서 이미 그 행복을 맛보며 살아가는 것이 참된 행복의 의미일 것입니다. 행복 선언의 마지막은 하느님과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 때문에 박해받고 환난을 겪는 사람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하늘에서 주어질 상과 함께 표현되는 것은 지금 여기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신앙에는 두 가지 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미래 지향적인 면입니다. 흔히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리고 오늘 우리가 죽은 이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신앙에는 현재 지향적인 면도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신앙생활을 통하여 참된 행복과 영원한 생명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이 그저 참고 견뎌야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현실의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그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명 믿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선물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것을 미리 맛보며 살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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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2일 월요일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매일미사
_김승연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2020. 11. 2.
cpbc TV_가톨릭콘텐츠의 모든것
김승연 프란치스코 신부 (의정부교구 수동 본당 주임) 집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12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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