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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존경하는 스펄전 목사님은 창세기 43장과 44장은 단 한 차례도 설교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장은 그냥 읽기만 해도 은혜가 되는 요셉의 형들이 두 번째로 애굽을 여행하는 이야기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첫 번째 여행에서 양곡을 얻어갔는데 요셉이 정탐꾼이라고 모함해서 둘째인 시므온을 인질로 잡고 나머지는 양곡과 함께 자루에 돈까지 넣어서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면서 요셉은 분명하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너희가 정탐꾼이 아니라면 너희가 말대로 다음에 올 때 말째 아들을 데리고 오너라. 그래야 시므온도 놓일 것이고 너희가 정탐꾼이 아님을 내가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형들은 두 번째로 오게 될 때에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오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여행에서 요셉의 형제들은 서로 화목하게 되고 요셉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무궁무진한 축복들을 누리게 되는 해피엔딩의 이야기입니다.
요셉의 인생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신학적인 주제는 압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 사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와 인생을 통치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구덩이에 빠진 것도 형들이 한 일인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에 노예로 팔린 것도 미디안 상인들이 판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요셉이 감옥에 갇힌 것도 보디발 장군이 한 일인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요셉이 총리가 된 것도 애굽 왕 바로가 시킨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두 번의 애굽 여행을 통해서 양곡도 얻고, 요셉과의 화해를 통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된 것도 모두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생과 역사는 마치 연극과 비슷합니다. 연극배우들이 무대에서 각자 맡은 연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 배우들의 배후에는 연극을 연출하는 연출가가 있어서 모두 지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사상은 바로 이것입니다.
인류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더라도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더라도 나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셉의 생애를 공부하게 되면 요셉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형제의 구원을 위해서 고난을 받은 것이나, 은 20냥에 팔린 것 등을 통해서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요셉은 어떤 면으로 보면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모형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양곡을 얻으러 왔을 때 문제가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곡식 자루에 돈이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짐승을 잡고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동안 형들은 겁에 질려 있었습니다. “우리가 처음에 왔을 때 양곡을 얻어 갔는데 그 자루 속에 돈이 들어 있는 것 때문에 우리를 억류하고, 노예 삼고, 우리 나귀를 빼앗으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먼저 해결하기 위해 형들이 요셉의 집에 들어가기 전에 청지기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누가 집어넣었는지 모르는 이 돈을 그대로 가지고 왔습니다. 또한 양식을 살 다른 돈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자 요셉의 청지기가 뭐라고 말합니까? 23절입니다. “그가 이르되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요셉이 하나님을 믿으니까 그의 청지기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요셉이 자루에 돈을 넣은 것인데 청지기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23절을 통해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일 뿐만 아니라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모형이 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1. 모든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
첫째, 우리 인생의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목적이 있다는 말입니다. 창세기 43장을 보면 요셉의 형제들의 심한 감정의 기복을 볼 수 있습니다.
18절을 봅시다. “그 사람들이 요셉의 집으로 인도되매 두려워하여 이르되 전일 우리 자루에 넣여 있던 돈의 일로 우리가 끌려드도다” 두려워합니다. 그러다 23절에 요셉의 청지기가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말라”라고 하니까 안심하고 있습니다.
또 33절을 보니 점심 식사를 할 때 “그들이 요셉의 앞에 앉되 그 장유의 차서대로 앉히운 바 되니” 그들이 서로 이상히 여깁니다. 그리고 34절에 “요셉이 자기 식물로 그들에게 주되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오배나 주매 그들이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이 짧은 구절에, 짧은 시간에 요셉의 형제들은 두려워하다가 안심하다가, 이상히 여기다가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어느 본문도 이렇게 감정의 기복이 심하게 나타난 부분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 형제들이 울거나 웃거나 슬퍼하거나 즐거워하거나 간에 요셉의 계획과 의도는 언제나 동일한 것입니다. 형제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서로 화목해서 요셉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무궁무진한 축복을 내려주고자 하는 것이 요셉의 의도인 것입니다.
요셉은 어떤 상황에서도 이들에게 유익을 주고자 하는 한 가지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을 통한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배후에는 변함없이 동일한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백성들에게 언제나 유익과 축복을 주시려고 하는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섭리 신앙이 주는 큰 위안입니다. 요셉은 이 신앙을 가지고 어떤 역경에도 잘 참고 이겨냈습니다.
창세기 50장 20절에 섭리 신앙에 대한 요셉의 분명한 표현이 나와 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17세기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청교도이면서 웨스트민스트 종교회의에 참석했던 사무엘 러더포드(Samuel Rutherford)라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분이 요셉의 생애에 관해 책을 썼습니다. 「신앙의 시험과 승리(The trial and triumph of Faith)」라는 이책에서 하나님의 섭리의 두 가지 측면에 대해 ‘하나는 검고 슬픈 것이며 다른 하나는 희고 기쁜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희고 기쁜 섭리가 올 때, 하나님은 참 좋은 분이시라고 찬양하며 힘있게 신앙생활을 하지만 검고 슬픈 것이 올 때는 예수님을 믿어도 소용이 없다는등 불평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희고 기쁜 섭리가 올 때에도 하나님은 좋은 분이시고, 검고 슬픈 섭리가 올 때에
도 하나님은 동일하게 좋은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유익을 위해서 동일하게 일하고 계신 분이심을 우리는 확신해야 되겠습니다.
2. 하나님의 계획과 어느 시점까지는 숨겨져 있다.
둘째,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어느 시점까지는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내 계획은 이런 것이다!” 하시면서 다 보여주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들에게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이 섭리를 다 알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섭리의 목적은 영원한 것이고 유익한 것이다”라는 정도만 알려주실 뿐입니다.
29절을 보겠습니다. “요셉이 눈을 들어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 가로되 너희가 내게 말하던 너희 작은 동생이 이냐 그가 또 가로되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 동생 베냐민을 몇 년 만에 만난 것입니까?
22년만에 만났습니다. 30절에 보니까 “마음이 타는 듯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방으로 들어가서 실컷 울었습니다. 그리고 31절을 보니 “얼굴을 씻고, 그 정을 억제하고, 음식을 차리라!” 명령하고 나옵니다. 우리는 요셉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내면의 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 숭배를 하니까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게 하시고 70년 동안 어마어마한 고통을 주시면서도 하나님의 속마음은 ‘너희가 우상 숭배를 하면 영원히 망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고치기 위해서 잠시 고통을 주지만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평안이요 소망을 주려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요셉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형제들의 영적인 각성이요, 형제들끼리의 화목이요, 나아가 가족 전체의 구원이요, 자기를 통해서 가족에서 수없이 많은 축복을 부어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이 회개하는 모습을 보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해야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복 받기를 원하시면 죄를 숨기지 마시고 하나님께 털어 놓으시고 축복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화목하시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계획을 미리 알아보려고 하는 유혹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시대나 성업하는 비즈니스가 있는데 그것은 ‘점’입니다. 사람들이 예언의 은사가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것도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서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내 미래에는 무엇이 일어날까를 알아보고 싶어서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 듯이 하나님은 어느 때까지는 그분의 계획과 섭리를 숨겨 두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다 알면 무슨 재미와 유익이 있겠습니까? 영화를 봐도 옆에 앉은 사람이 스토리를 다 이야기해 주면 얼마나 재미가 없습니까?
우리는 미래를 알고 싶어 하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그저 현재 충실하게 살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으로 이끌어 가신다는 섭리 신앙을 가지고 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
다.
3. 하나님의 계획은 이따금 힌트처럼 드러난다.
셋째, 하나님은 이따금 섭리의 힌트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그 섭리의 커튼을 잠깐 열어서 잠깐잠깐 보여주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33절을 보면 요셉이 점심 초대를 해 놓고 형제들을 장유의 차서대로 앉혔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들이 열둘이 있다면 가끔 그 아들들의 순서가 헷갈리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처음 보는 애굽의 총리가 자신들을 장유의 차서대로 앉혔다는 것은 요셉이 힌트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눈치를 챌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장유의 순서를 알고 있고 허구한 날 하나님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을 보니 이 사람은 우리와 신앙도 같고 우리의 집안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구나. 우리의 아버지에 대해서도 자꾸 묻고 하니 우리를 해치지는 않겠구나.’라고 말이죠.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계획을 가지고 계시고 그것을 숨겨 놓으셨지만 가끔은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어떤 경우에는 죽기 전에 평소에 하지 않던 행동을 한 후에 돌아가시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하나님께서 힌트를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미국 유학을 가기 위해 비자를 발급받는데 3번이나 떨어졌습니다. 이때마다 비행기가 우리 가족을 남겨놓고 떠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4번째 꿈은 비행기가 우리 가족을 태우고 가는 꿈이었습니다. 그 꿈을 꾸고 대사관에서 인터뷰를 하는데 별 질문도 하지 않고 비자를 발급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알았습니다. ‘비자 발급은 영사관 마음대로구나. 그러나 이 영사관의 마음을 주장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구나.’
2세기에 유명한 순교자 폴리갑(Polycarpus) 은 그가 순교 당하기 이틀 전에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베고 있던 베개가 불에 타는 꿈이었습니다. 그 꿈대로 그는 순교를 당했습니다.
19세기 초에 영국의 유명한 설교자들 가운데 캠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교회에 찰스 시므온(Charles Simeon)이란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이 47세에 하나님께 이런 약속을 했습니다. “주님, 나는 건강이 나빠서 목회하기도 힘들고 설교하기도 힘드니 60세까지만 목회를 하고 그 이후부터는 안식년으로 쉬겠습니다.”
이 분은 평소에 몸이 약하고 특히 목이 약해서 설교하다가 목이 막혀서 잠깐씩 쉬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60세가 되던 날 생일 파티를 하면서 “나는 은퇴다!”라고하는 순간 성령의 능력이 임해서 목이 아픈것도 낫고 몸도 건강해지는 신유의 역사가 임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께서 “너는 60세에 은퇴하려고 하지만 나는 아니니라. 더 할 일이 남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힌트인 것입니다. 그래서 70세가 넘기까지 캠브리지 대학의 학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고 지금까지 좋은 설교를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오늘 한 가지를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 가운데 다양한 사건 가운데에서도 변치 않는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으로 이끄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인생에는 검은 면도 있고 흰 면도 있으며, 악한 면도 있고 좋은 면도 있습니다. 굽은 면도 있고 곧은 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가면 모두 좋은 재료가 되는 것이요, 아름다움이 되는 것이요, 질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유익의 섭리요, 축복의 섭리요, 구원의 섭리요, 영생의 섭리요, 부활의 섭리인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런 축복의 섭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국한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분이 계시다면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시고 아름답고 복된 섭리의 물결 안으로 들어오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이 섭리 신앙을 가지고 어떤 사건에도 감정에 휘말리지 말고 초연히 살아야 되겠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인생에 초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