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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라 고문서 『항리호적중초(項里戶籍中草)』의 특성. 마을 단위의 호적(35)>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이번 지면을 마지막으로 『거제도 구조라 고문서(巨濟島舊助羅古文書)』 소개를 마칩니다^^ 지금껏 아쉬우나마 어느 정도 구조라 고문서를 알려 드린 듯하여 자부심을 느낍니다. 이후 전체 내용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책을 <거제문화원 향토사 연구소(거제학 연구소)>에서 조만간 출간될 예정입니다. 그동안 많은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가내 두루두루 편안하시고 만사형통 하시길 바랍니다^^
이번 마지막 편에서는 고문서(古文書) 중에 마을 단위의 호적인 『항리호적중초(項里戶籍中草)』의 간략한 내용을 소개하겠습니다. 대개 「호적중초(戶籍中草)」는 마을 단위로 작성한 호적으로, ‘戶籍中草’ 혹은 ‘戶籍重草’ 등으로 일컬어지며 또한 호적대장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초초(初草) 다음의 중간적인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대개 호적중초는 마을 또는 면 단위로 작성되었으며 각 기관에 보관하면서 모든 업무에 참고하였다.
일반적인 기재양식은 지역명, 작통(作統)의 차례, 통수(統首), 통수의 직역, 편호의 차례, 주호와 협호의 차례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주호는 직역, 성명, 나이, 본관을 기입한 후 사조(四祖)의 직역, 성명 등이 열거되었다. 이어서 부인, 자식, 노비 등의 솔거인의 명단이 기록되었다. 처첩(妻妾) 혹은 며느리에 대해서도 성명, 나이, 본관, 사조(四祖)의 직역, 성명 등이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거제도 「항리호적중초(項里戶籍中草)」에선 작통을 통해 호를 편성하고 호의 구성원인 호주·배우자, 그리고 솔구(率口, 가솔)를 기재하고 있는데, 구성원의 직역·성명·나이만이 기재되어 있고, 본관·호구변동사항·노비 등은 생략되었다. 호주와 그 배우자에 대해서도 어머니와 사조(四祖)에 대한 정보도 없다. 매 식년(3년마다) 전해의 8월에 작성되었다. 중초(中草)는 마지막 손질을 거쳐 정식 호적대장으로 마무리되었다.
우리 고장 거제시 일운면 ‘구조라(舊助羅) 고문서(古文書)’ 『증빙류(證憑類)』에는 「항리호적중초(項里戶籍中草)」는 경상도 거제부에서 리(里) 단위로 작성한 중초(中草) 형태의 호적자료로, 조선시대 지방 행정의 기초 단위인 오가작통제(五家作統制)를 바탕으로 3년마다 새롭게 작성된 것이다. 작통을 통해 호를 편성하고 호의 구성원인 호주·배우자, 그리고 솔구(率口, 가솔)만 기재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구조라 호적중초가 문자 그대로 중초이기 때문일 수도 있으나, 19세기 후반 호적의 기능이 변화함에 따라 처음부터 호적의 형식을 간략하게 했을 수도 있다.
○ 재언급하건대 중초(中草)는 호적대장을 완성하기 전에 각 면리별로 작성된 초안이다. 『항리호적중초(項里戶籍中草)』는 매 식년(3년마다) 전해의 8월에 작성되었으며 6건(件)에 89면(面)이다. 그러나 계해년 1863년(철종 14) 18면(面) ·신사년 1881년(고종 18) 15면(面) ·갑신년 1884년(고종 21) 19면(面) ·정해년 1887년(고종 24) 11면(面) ·경인년 1890년(고종 27) 14면(面) ·계사년 1893년(고종 30) 12면(面)의 6개 식년 분이 남아 있는데, 리(里) 단위 중초라는 점이 특징이다. 현존하는 항리 호적 중초는 시기적으로 1863년부터 1893년까지 30년간의 호적이다. 그 가운데서도 1863년 다음으로는 1881년부터 3년 간격으로 작성된 것이 5식년 분이다.
일반적으로 호적 작성은 한성부(서울)에서 지시가 내려오면, 각 군현은 호적소(戶籍所)를 설치하고 이하 면리에 이를 내려보내면서 시작되었다. 여기에 민은 각기 호구단자를 작성하여 제출하고 이에 따라 초본격인 중초가 만들어졌다. 그 과정에서 통별(統別) 민호(民戶)의 상황을 기록한 장부인 「통기(統記)」를 비롯하여 출생 · 사망 · 이동 등과 관련된 각종 성책류(成冊類)가 작성되었다. 중초(中草)는 마지막 손질을 거쳐 정식 호적대장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항리호적중초』는 기재 상 여타 호적대장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 호적대장의 일반적인 형식을 살펴보면, 작통(作統)의 순서대로 호(戶)를 배열하고 주호(主戶)를 중심으로 배우자의 부 · 모 · 조 · 증조 · 외조 등 사조(四祖)에 대한 직역과 성명이 담겨 있다.
원래 호적중초에는 호내(戶內, 집안)에 딸린 개개인에 대해서도 직역, 성명, 연령(간지), 본관 등이 나타나고 도망 · 별호(別戶) · 사망 · 가현(加現) · 가입(加入) · 자수(自首) · 가호(加戶) · 신호(新戶) 등 호구 변동에 대한 정보가 실려 있다. 노비의 경우, 거주지, 상전의 직역 · 성명 · 거주지 등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다.
반면 『항리호적중초』의 경우에는 작통을 통해 호를 편성하고 호의 구성원인 호주 · 배우자를 비롯한 호내 구성원을 기재하고 있는데, 이들 호의 구성원에 대해서는 직역 · 성명 · 나이(간지 없음)만이 기재되었고 본관 · 호구변동사항 · 노비 등은 생략되었다. 주호(主戶, 여러 집 중에서 대표 집)와 그 배우자에 대해서도 어머니와 사조에 대한 정보가 없다.
○ 『항리호적중초』에 실린 호구의 현황은 다음 <표>와 같다.
| 연도 | 호수(戶數) | 1 | 2 | 3 | 4 | 5 | 6 | 7 | 8 | 9 | 평균가족수 |
| 1863 | 74戶(27,가솔인) 실제 주민수 247명 | · | 21 | 24 | 18 | 6 | 4 | 1 | · | · | 3.34 |
| 1881 | 68戶(7) 주민수212명 | 2 | 26 | 22 | 9 | 5 | 1 | · | 3 | · | 3.10 |
| 1884 | 67戶(10) 주민수211명 | 2 | 25 | 16 | 13 | 6 | 2 | · | 3 | · | 3.15 |
| 1887 | 43戶(2) 주민수 113명 | 5 | 20 | 9 | 6 | 1 | 1 | 1 | · | · | 2.63 |
| 1890 | 44戶(2) 주민수 122명 | 4 | 21 | 7 | 9 | 1 | · | 1 | 1 | · | 2.77 |
| 1893 | 43戶(1). 주민수 125명 | 4 | 17 | 10 | 9 | 1 | · | 1 | · | 1 | 2.91 |
○ 『항리호적중초』에서 인구변동을 살펴보면, 계해년 1863년(철종 14) 74호 247명(남141, 여 106), 신사년 1881년(고종 18) 68호 212명(남126, 여86), 갑신년 1884년(고종 21) 67호 211명(남127, 여84), 정해년 1887년(고종 24) 43호 113명, 경인년 1890년(고종 27) 44호 122명, 계사년 1893년(고종 30) 43호 125명(남83, 여42)로 정리된다. 여기서 호구상 가장 큰 변화는 1884년 67호 211명의 주민이 3년 후, 1887년에 43호 113명으로 급격히 줄어든 것은, 이즈음에 이르러 지심도(只心島)와 조라도(助羅島, 내도 외도)가 분동되어 나갔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고로 당시 지심도와 조라도(내도와 외도)에 24호 약 100명의 주민이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1863년(철종 14) 74호 247명이었던 동민이 1881년 호수 68호 남짓과 212명으로 감소한 것은, 한 세대 간의 가호 존속율이 92% 선에 이르니 호(戶)의 안정성이 대체로 컸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가족 구성에 있어서는 1가구 구성원이 3인 이하가 거의 70% 정도를 차지한다. 또한 우리나라 연해지역에는 전통 양반의 족적이 드물었기 때문인지, 항리 지역 또한 신분적 한계가 나타난다. 그리고 일단은 항리의 대성(大姓)이자, 세거족(世居族)은 강·노(姜·盧) 양성의 비중이 확인된다. 구조라 호적중초에는 노비가 단 한 명도 나타나지 않는데, 이것은 최전방 거제도(7진영+거제부 수영)에 본래 이주한 주민들의 대다수가 군역의 의무(양민, 수자리)를 진 사실에서 반영된 것이다.
참고로 『거제군읍지(巨濟郡邑誌)』 1899년, 거제군에는 가호(家戶)가 3,925호(戶)이다. 이 중에 실제 역의 의무를 지는 호수(仰役戶)는 1,174호(戶)이고, 인구가 14,203명(남자 8,518명, 여자 5,685명)이며, 시기전(時起田, 실제 경작 중인 밭)은 969結 67負 1束, 답(畓, 논) 1.369結 55負 9束, 도합 2,339結 23負로 조사되어 있다.
| 소 속 | 1863년 | 1881년 | 1884년 | 1887년 | 1890년 | 1893년 |
| 수군진(水軍鎭) | 32(33.7) | 17(26.6) | 21(21.0) | 9(24.3) | 8(19.5) | 10(22.7) |
| 기타군사 | 16(16.8) | 5(7.8) | 5(5.0) | 4(10.8) | 4(9.8) | 2(4.5) |
| 거제부(巨濟府) | 13(13.7) | 11(17.2) | 8(8.0) | 6(16.2) | 7(17.1) | 9(20.5) |
| 목장(牧場) | 4(4.2) | 2(3.1) | 1(1.0) | |||
| 기타 | 30(31.6) | 29(45.3) | 34(34.0) | 18(48.6) | 22(53.7) | 23(52.3) |
| 합계 | 95(100) | 64(100) | 69(100) | 37(100) | 41(100) | 44(100) |
○ 『항리호적중초』에 실린 항리 마을 직역자의 소속처별 추이는 다음 <표>와 같다.
○ 숙종 30년(1704) 「양남수군변통절목(兩南水軍變通節目)」에 따르면, 수군직역자의 상당수가 포를 내는 존재(납포군)가 되고 일정수의 승선원을 제외하고 나머지 인원은 진하거민(鎭下居民)으로 충원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거제도 7개 진보의 납포군은 진당(鎭當) 1,436명(防軍 1,200명, 射夫 212명, 添格射夫 24명)으로 총 10,052명, 전선 승선원은 각 진별 220명 정도씩 총 1,552명, 그리고 고립한 병력은 「양남수군변통절목(兩南水軍變通節目)」의 각진당 풍화시기(風和時, 3월~8월) 월 40명, 풍고시기(風高時, 9월~익년 2월) 월 30명으로 연간 총 420명을 급대(給代)한다는 규정에 따라 총 2,940명 정도로 추산된다. 고로 이를 통해 거제 수군 7진보의 군역자는 줄잡아 14,544명은 족히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진에 소속된 직역자는 전체 직역자의 20~30%를 오르내리고 있다. 여기에 소속이 불확실하게 나타난 ‘기타군사’나 ‘기타’ 항목에 포함된 직역자를 포함한다면 그 비율은 최소한 구조라 직역의 50% 정도는 될 것으로 생각된다. 통상 신역과 직접 연관 되지 않는 경우를 제외하고 직역의 상당부분은 지세․조라․옥포․영등 등 4개진에 소속되어 있었다. 중앙군문, 아문 소속 군역, 신역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도 중요한 특징이다. 고로 구조라 마을 주민을 ‘진하항리거민(鎭下項里居民)’이라고 지칭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사실상 진하초(鎭下村)의인 구조라 마을이 국가차원의 일반적인 조세․부역을 능가할 정도로 수군진(水軍鎭)에 의해 부과되는 각종 세역에 시달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 마지막 중초인 「계사년(1893년) 호적소(戶籍所) 항리호적중초(項里戶籍中草)」에서, 마을의 성비(性比)가 남성 83명, 여성 42명으로 호적중초 기록상 남성이 많은 것으로 보이나, 실제로는 여초 현상이 수천 년간 지속된 최전방 해안 섬마을이었다(해안가 남성들은 전쟁이나 해양 사고로 죽는 경우가 많았다). 여기서는 호적에 미혼 여성들이 대부분 기록에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1863년 3통 4호의 김작지(金作支)의 경우 1녀(당시 13세)는 기재된 반면 8살이었을 아들 지성(支成)은 빠져있다. 또한 1881년 이후 딸은 한 사람도 등재되지 않고 있다. 호의 변화가 가장 컸던 두 시기의 가족 구성원의 연령별 분포를 보아도 10대 이하는 상대적으로 적다.
○ 또한 호적중초(戶籍中草)에는, 집안을 계승할 후사가 없는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일정 친족범위 내에 있는 동성(同姓)의 인원 중에서 항렬을 고려하여 양자(養子)로 입양하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그리고 항리 마을 청년들(42건)의 혼인연령을 추정할 수 있다. 10대 남성의 경우에는 배우자 여성이 모두 연상이었다. 이때 남성 아버지의 직역, 또는 재력이 괜찮은 편으로 보여진다. 또한 부부 모두 20대 혼인은 42건 중 22쌍이 된다. 그중 6쌍은 여성이 연상(1세~5세)이며, 10쌍은 동갑으로 나타난다. 이는 벽지어촌(僻地漁村) 항리(項里) 지역의 특성이 가미된 혼인현상으로 여겨진다. 또 보통 조선사회에는 동성혼이 금지되어 있지만 항리호적에서 나타나는 당시 항리의 동성혼(同姓婚)은 4건의 사례가 발견된다. 이 중초에선 동성(同姓)이긴 하나 동본(同本)까지 같은지는 알 수 없다. 참고로 남녀를 불문하고 노인연령과 관련하여 이번 항리 호적자료에서 가장 많은 나이는 93세로 나타난다. 호수인 유학(幼學) 김흥복(金興福)이 93세이다. 아울러 처(妻) 차씨(茶氏, 齡75)와의 나이 차이는 18세이다. 아마도 후처(後妻)가 아닐까 추정된다. 그리고 6번째 아들(子)인 성윤(聖允, 年41) 부부와 호를 구성하고 있음도 특이하다. 더하여, 호수(戶首)의 사망으로 인하여 새로운 호수에게 호의 승계가 이루어지게 하는 중요 표현으로 고대자(故代子)․고대양자(故代養子)․고대손(故代孫)․노대자(老代子)․고대처(故代妻)․고대제(故代弟) 등이 사용된다. 사망한 호수의 아들, 손자, 양자, 처, 아우 등이 호를 승계했다. 노대자(老代子)의 경우는 여성이 호수가 되었다가 일정 연령에 이르면 늙은 노인임을 이유로 아들(子)에게 호를 승계하는 것이다. 고대처(故代妻)의 경우에도 남편의 사망으로 처(妻)가 일시 호수가 되었다가 일정 시간이 지나서 집안 남성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 구조라 항리호적중초(項里戶籍中草) 자료에서는 호의 구성원에 있어 미혼 여성에 대한 내용이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또한 기혼 여성의 사례도 남성의 보조 역할에만 치우쳐 있다. 고로 거제도 어촌사회에서 여성의 호수로서의 지위는 일시적이었던 것이며, 아들이 있는 여성의 경우는 50세 정도를 지나서는 연로(年老)함을 이유로 호수(戶首)를 아들에게 이양하는 모습을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다. 또한 부부만으로 호를 이루는 경우도 적지 않게 나타난다. 그리고 기타 형제 또는 남매가 한 호를 이루는 경우도 있으며, 같이하던 가족이 사망 등의 사유로 인해 결국 단독으로 호를 구성하는 경우도 있다. 결국 여성 단독호의 경우 단독으로 호를 이어가다가 나중에는 호가 단절되는 상황이 나타난다.
어찌되었건 항리 호적중초는 역사 속에 사라져간 한 지역의 가족관계에 대한 실체를 구명하는 중요 자료로써, 또는 19세기 어촌사회상에 대한 일면적 이해를 추구하는데 기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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