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첩보가 방아쇠 당겼다…시위대 해산 아닌 ‘섬멸’ 작전
3부 금남로의 총소리
5회 공수부대 과잉진압의 원인
5·18 비극의 첫 원인으로 꼽히는 것이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이다.
당시 현장투입됐던 한 장교는 “진압봉으로 때리면 도망갈 줄 알았다”고 말했다.
공수부대원들은 그렇게 교육받았고, 그렇게 행동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과잉진압의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은 잘못된 기억 때문이다.
부마항쟁 ‘과잉진압’ 성공사례
1979년 10월 부산, 마산 민주화운동 당시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은 군부 내에서 성공사례로 평가됐다. 항쟁 당시 부산시내에 등장한 탱크와 일상을 되찾아 가는 시내 모습. 사진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군의 과잉진압은 1979년 10월 부마사태(부산·마산지역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과잉진압 성공’이란 기억에서 출발했다.
당시 부산시내 파출소를 불태우는 등 격렬했던 시위는 공수부대원들이 투입돼 강경진압하면서 조용해졌다. 이와 관련해 당시 보안사령부(사령관 전두환)에서 작성한 결과평가서 ‘부마지역 학생소요사태 교훈’은 ‘시위 발생 시 초동단계에서 강경하게 진압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구체적으로 ‘군이 진압을 위해 투입되면 인명을 상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과감하고 무자비할 정도로 타격, 시위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함으로써 군대만 보면 겁이 나서 데모 의지를 상실토록 위력을 보여야 함’이라고 기록했다(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2007년).
1980년 3월 4일부터 6일 사이 서울 수도경비사령부(사령관 노태우)에서 열린 ‘충정훈련’과 ‘충정회의’는 이 같은 군부의 과잉진압 의지를 확인한 자리였다.
3월 초 개학에 따라 대학가 시위가 본격화될 것이라 판단하고, 군 투입이 필요한 상황이 될 경우 ‘강경 조치’가 필요하다는 방침을 확인했다.
이후 공수부대마다 시위진압 훈련인 충정훈련이 대폭 강화됐다.
신군부는 부산·마산에서의 성공 경험에 따라 계엄 확대에 따른 공수부대 출동으로 학생시위를 조기진압할 것이라 낙관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대학을 점거하러 떠나는 일부 공수부대원들이 장시간 대기 상황에서 지루함을 달래줄 바둑판과 TV까지 챙겼다고 한다.
그러나 광주는 달랐다. 5·17 다음 날인 일요일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전남대 정문 앞에 모여들었다.
학교를 못 들어가게 하자 돌을 던졌다. 전남대를 담당한 7공수 부대원들은 처음에 ‘부동자세로 위엄을 과시하라’는 지시를 받고 가만히 서 있었다.
돌멩이에 피투성이가 되면서 공수부대원들이 흥분했다.
어느 순간 ‘돌격 앞으로’와 함께 시위대로 달려나와 진압봉을 마구 휘둘렀다.
부산·마산처럼 몽둥이를 휘둘렀는데도 시위대는 물러서지 않았다.
점점 늘어났다. 도심으로 진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