半月城
서거정(徐居正, 1420~1488)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 달성(達城). 자: 자원(子元)·강중(剛中). 호: 사가정(四佳亭)·정정정(亭亭亭). 시호: 문충(文忠). 45년간 여섯 왕을 섬겼으며,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경국대전》,《동국통감》,《동국여지승람》 편찬에 참여했으며, 또 왕명을 받고 《향약집성방》을 국역했다. 학문이 매우 넓어 천문·지리·의약·복서·성명·풍수에까지 관통하였다. 대구 귀암서원에 제향되었다.
半月城頭日月西 遠游情緖轉凄凄
반월성두일월서 원유정서전처처
靑浮楊麓雲煙老 黃落始林歲月迷
청부양록운연노 황락시림세월미
明活村南雲渺渺 興輪寺北草萋萋
명활촌남운묘묘 흥륜사북초처처
百年坎軻知何用 贏得樽前醉似泥
백년감가지하용 영득준전취사니
반월성 성 머리에 해는 서쪽으로 기울고,
객지에 떠도는 나그네의 마음은 더욱 처연하네.
푸른 빛 양산 기슭엔 노을이 저물고
낙엽 진 시림(계림)에는 아득한 세월만 미궁같구나
명활촌 남쪽에는 흰 구름이 아련하고,
흥륜사 북쪽에는 잡초만 무성하네.
백 년 만사가 뜻대로 되지 않으니 무슨 소용이 있으랴.
술단지 앞에서 진창 취해나 보리라
半月城(반월성) : 신라 왕궁이 있던 경주의 월성(月城). 성곽의 모양이 반달처럼 보여 반월성이라 불렀다.
日月西 : 해가 서쪽으로 기울다. 석양. 遠游 : 먼 곳을 여행함, 객지 생활.
情緖 : 마음, 심정. 凄凄 : 처량하고 쓸쓸한 모양.
楊麓(양록) : 경주의 양산 기슭. 黃落 : 낙엽이 떨어짐, 늦가을.
始林(시림) : 경주의 숲 이름으로 신라의 옛 궁궐 주변 숲을 가리킨다. 계림
歲月迷 : 세월이 아득하여 헤아리기 어렵다. 明活村(명활촌) : 경주 동쪽의 옛 마을.
渺渺 : 아득하고 멀다.
興輪寺(흥륜사) : 신라 최초의 국가 사찰로 전해지는 절. 흥륜사 터
萋萋 : 풀이 무성하게 우거진 모양.
坎軻(감가) : 뜻대로 되지 않는 삶, 불우하고 험난한 처지.
贏得 : 겨우 얻다, 남은 것은. 樽前 : 술동이 앞, 술자리.
醉似泥 : 진흙처럼 곯아떨어질 정도로 취하다.
반월성(月城)은 신라 천년 왕국의 정치 중심지였으며, 왕궁이 자리했던 상징적인 공간이다. 주변에는 양산, 흥륜사 터, 명활성 등 신라의 역사 유적이 집중되어 있다.
이 작품은 경주의 신라 유적을 바라보며 자신의 인생과 역사를 함께 성찰한 회고시이다.
첫 연에서는 석양이 비치는 반월성을 배경으로, 객지를 떠도는 자신의 쓸쓸한 심정을 드러낸다. '해가 서쪽으로 기운다'는 표현은 하루의 끝인 동시에 한 왕조의 황혼과 인생의 노년을 함께 상징한다.
둘째·셋째 연에서는 양산, 시림, 명활촌, 흥륜사 등 신라의 명승을 차례로 거론한다. 그러나 그곳에는 영화로운 옛 모습 대신 구름, 낙엽, 잡초만 남아 있다. 자연은 예전과 다름없이 존재하지만, 찬란했던 왕조는 이미 사라졌다는 대비가 매우 선명하다. 특히 "흥륜사 북쪽에는 잡초만 무성하다"는 구절은 불교 왕국 신라의 쇠락을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마지막 연은 역사 회고에서 자신의 삶으로 시선을 돌린다. 평생 벼슬길에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던 시인은 "험난한 백 년의 삶이 무슨 소용인가"라고 자문하며, 결국 술에 취해 시름을 잊으려는 심정을 토로한다. 이는 단순한 자포자기가 아니라 역사의 흥망과 인간 삶의 허무를 함께 응축한 결말이라 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포석정감회(鮑石亭感懷)〉와 함께 서거정의 경주 회고시 가운데 가장 깊은 역사 의식을 보여 주는 작품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