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을 무색하게 하는 별세계다. 눈길 가는 곳마다 짙고 선명한 색을 드러낸다. 제주도는 남쪽이라 지금쯤 한라산 아랫도리가 활활 불타고 있으리라 짐작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사시사철 법칙이 무너진 듯하다. 이미 초겨울로 접어든 듯한데 뜻밖의 풍경에 마음이 평온해지면, 머리가 맑아진다.
온통 사야를 가득히 채우는 초록 벌판이다. 검은 돌담이 둘러쳐진 밭마다 무성한 채소들, 배추며 무, 브로콜리, 양배추, 마늘과 파, 당근밭들이 봄인 양 싱그럽다. 겨울을 저만치 밀어낸 듯하다. 그뿐만 아니다. 하얀 감자꽃도 이색지다. 겨울과 봄이 한데 어우러져 여기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풍경이다. 문장을 이어가려면 쉼표가 필요하듯, 번잡한 삶을 살아내는 일상에도 휴식은 있어야 한다. 이 빛깔과 이 향기와 바람까지 낮은 오름에 사철나무도 허공을 향해 제 푸름을 거침없이 뻗어 올린다. 오늘은 자연이 펼쳐낸 곳에 방문자가 된다.
시린 계절의 시작에 묘한 분위기가 밀려온다. 언제부턴가 푸른 초록에 마음이 갔다. 녹슬어 무뎌져 버린 희망이 꿈틀댄다. 천근 같은 마음의 무게도 사르르 녹아내린다. 생기 있게 보여 좋다. 청량감이 느껴져 더욱 좋다. 칙칙한 회색빛 인생에 활기를 얻게 된다.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머릿속이 맑아지고 고요해지니 말이다.
끝없이 펼쳐 내는 초록 앞에 서니 문득 유명 스타 강사가 떠오른다. 사람들에게 행복한 삶을 사는 강의로 유명세를 탔던 작가다. 톡톡 튀고 재치 넘치는 말투로 많은 시청자의 시선을 텔레비전 앞으로 모았다. 그중에 나의 눈길을 끌게 한 것은, 그녀의 헤어 컬러였다. 이미 중년을 훌쩍 넘긴 예순에 가까운 나이에도 헤어 컬러는 특별했다. 그 시절 아무나 할 수 없었던 초록 염색 머릿결이었다. 유별했던 모습으로 웃음을 강조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밥은 굶어도 희망은 굶지 말라던 행복 전도사였다. 그녀가 한때 절망적인 삶을 견뎌내었기에 더 진실하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튀는 모습은 아마도 힘든 세상을 활기차고 독특하게 살아가는 다짐이자 표현이었던 것 같다.
많은 이들에게 삶의 희망이 되고 살아가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를 깨우치기에 노력했던 작가였다. 그랬던 그녀가 병마에 시달리는 육신의 고통은 이겨내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포기하고 말았다. 이제 그녀의 웃음도 유명세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점점 잊혀저가지만 작가만의 특이했던 머리색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되어 남겨졌다.
빛바랜 청춘의 그리움에 돌아보기도 하며 이제 갈 수도 볼 수도 없는 나의 젊음이다. 나도 분명히 그 시간을 보냈을 텐데 전혀 그 시절 풍경이 떠오르지 않는다. 속절없이 가버린 그 세월을 되돌리고 싶지는 않지만, 그 세월과 함께 가버린 푸른 젊음이 있어 안타깝긴 하다.
녹색 풍경 속을 걸어보니 더없이 마음에 풍요로움을 느낀다. 이상 무엇을 더 채워 넣을 필요가 있을까 싶다. 따뜻한 햇살이 찾아드는 샛길에는 철모르고 피어난 작은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 때맞추어 피어난 들국화와, 계절을 착각했는지 봄꽃인 노란 민들레도 길 따라 피어 있고, 보랏빛 쑥부쟁이도 길손을 반겨준다. 가지가 휘어지게 주렁주렁 달려있는 황금빛 밀감도 입맛 다시게 한다. 이 계절 오로지 남쪽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다.
누구나 삶에서 고통은 일어난다. 어차피 부대끼게 되는 마음의 관계도 아직은 무심하지 못하니 살짝 힘들다. 마음이 버거우면 몸이 아프다. 험난한 길은 걸을수록 고통은 발끝에 모인다. 돌길에 아픔을 눌러 놓는다. 상처에 아파하지 말고 실패에 실망하지 말 것이다. 잠시 아플 것이고 잠시 화가 날 것이다. 그 순간이 지나면 다시 비 온 뒤 물기 먹은 초록의 싱그러움처럼 다시 맑아질 것을.
무한한 자연의 사랑을 받으며 길을 걷는다.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며 끝없이 밀려오는 짙푸른 바닷길을 묵묵히 걷는다. 수억 년을 견뎌온 그대로의 자연 앞에서 이토록 편안한 영혼을 무엇으로 더 꾸밀 수 있을까. 길을 걷는 고통은 있어도 가슴에 번져 드는 감동은 크다. 숲 사이로 비껴드는 햇살은 천상에서 내려온 한줄기 메시지인 듯, 성스럽고 신비스럽다. 마음은 영원한 청춘이고 싶다. 아직 이루고 싶은 꿈도 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대로 더 활기차게 살아볼 일이다. 잠시 풍경에 취해 멈추었던 발길을 다시 내 딛는다.
내 영혼의 자유로움으로 걸어 낸 길 끝에 선다. 오늘도 마음속에 초록 쉼표 하나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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