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26 방송
봉 전국 각 지역, 각 고장의 땅과 이름에 얽힌 역사와 문화 이야기 들어보는 시간입니다.
<우리땅 우리문화>
<소개>
왜 과거에는 섬이었던 곳이 개발로 인해 내륙으로 연결돼 있거나 또는 아예 내륙이 돼버린 곳들이 있죠~ 저희가 있는 이곳, 여의도도 그중 한곳이 아닐까 싶은데요.
봉 지방으로 내려가보면 간척지 개발 등으로 인해 새롭게 태어난 섬들이 더 많습니다. 가장 최근엔 새만금 간척지 개발로 육지에 완전히 편입된 전북 부안의 ‘계화도’가 대표적인 사례가 되겠죠~
<질문> 그래서 오늘 <우리땅 우리문화>에서 ‘계화도’에 얽힌 지명과 역사,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봉 함께 하실 분 소개해드리죠. 국가지명위원회 위원이십니다. 한국땅이름학회 배우리 회장 나오셨습니다. 어서오세요~
배우리 (인사)
<질문> 먼저 ‘계화도’의 정확한 위치부터 좀 알아볼까요?
전북 부안군 계화면 계화리 / 계화면의 궁안리 북쪽 약 6㎞ 갯벌 안에 있는 섬이었는데, 새만금 개발로 육지가 되었다. 본래 부안군 서도면의 지역. 갯벌 안에 있는 섬으로 지화도 또는 계화도라 하였었다. 일제 때인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상리, 중리, 하리를 병합하여 계화리라 하여 행안면에 편입되었다. 지금은 계화면. 위쪽 마을을 계상리(界上里)라 하고, 가운데 마을은 계중리(界中里), 아래쪽 마을은 계하리(界下里)라 한다. 1976년 9월 계화도(界火島)가 계화리가 되고, 행안면에 계화출장소가 설치되었다가 1983년 2월 전국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계화출장소가 계화면으로 승격하였다.
<질문> 과거 섬이었던 시절과 지금, 아무래도 주민들의 생활에 큰 차이가 있겠죠?
섬 중앙에는 해발 246.2m의 계화산이 있지만, 주민들은 바닷가에서 조개잡이를 하거나 굴을 채취하면서 생활해 왔다.
예부터 조수가 들어오면 배로서 드나들었지만, 썰물 때에 조수가 빠지면 개펄을 통해 섬과 뭍을 오갔었다. 배로 갈 때는 창북리에서 하루 한 번씩 운행하는 배를 타고 들어갔다. 만경강과 동진강이 바다와 만나는 하구에 자리잡고 있는 계화도는 그 어느 곳보다 갯벌이 잘 형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하구갯벌은 갖가지 어패류들이 알을 낳고 번식하기에 적합해 다양한 생물들이 서식했다. 바다와 갯벌의 풍부한 수산자원은 땅이 귀한 섬 마을 사람들의 주요 생계수단이었다.
<질문> 섬이 육지와 연결 되면 여러모로 편리해지긴 하겠지만 그래도 개발에 반대하는 주민들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어땠나요?
계화도는 원래 면적 2.5㎢의 작은 섬이었으나, 1963년 시작된 동진강 하구의 대규모 간척공사로 육지와 이어졌고, 지금은 새만금 개발 계획에 따라 완전히 육지 안으로 들어갔다.
1960년대 말부터 변화의 바람. 계화 간척공사로 인해 개펄이 사라진 대신 새 농토(간척지)가 생기면서 낯선 이주민들이 들어와 살게 되고, 새 마을이 여럿 생기면서 어촌 마을이 농촌 마을처럼 변해 갔다.
이 곳의 간척공사는 원래 섬진강 상류 옥정리의 댐이 완공되어 운암호의 물이 불어나면서 발생한 수몰민 2768세대를 이주하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바닷가에 새 농토를 만들기 위해 1968년부터 벌여 온 간척공사는 10년 넘는 탈염 및 개답 과정을 거쳐 총 3896ha의 갯벌을 농경지로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섬에는 이주해 온 수몰민들과 토박이 주민들이 함께 거주. 241동의 이주민 주택이 들어서면서 섬에는 5개의 원주민 마을과 4개의 이주민 마을을 합친 9개 마을이 '계화리'라는 리(里) 단위를 형성하게 되었다. 섬의 토박이들 대부분 고기를 잡거나 개펄에서 해산물을 채취하여 살아갔고, 이주해 온 이주민들은 농사를 지으며 살아갔다.
원주민들은 간척공사로 인해 삶터였던 마을 앞 갯벌이 간척지가 되어 생계에 타격을 받았지만 보상을 받지 못했다.
이로 인해 간척지 논 2필지(15마지기)와 주택을 제공받아 농사를 짓는 이주민들과 불화가 일었다. 1991년부터 새만금 간척사업이 시작되면서 원주민들과 이주민들 사이의 갈등이 더 깊어졌다. 계화리 주민들이 간척사업에 대한 찬성과 반대로 갈려 분열된 것이다.
찬성측은 농사를 짓는 이주민이었고, 반대측은 어업에 종사하는 원주민들이었다.
계화 간척공사로 고통을 겪었던 계화도는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두 번째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질문> 자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계화도’ 라는 섬이름, 또 지명에 얽힌 이야기 좀 자세히 들어보죠. 먼저 ‘계화도’ 라는 이름에는 어떤 뜻이 있는 겁니까?
개펄 속의 섬이라 하여 '갯벌섬(갯불섬, 개펄섬)'이라 불리던 곳.
'개(개펄)+불(벌)+섬'에서,
‘개'가 '계(界)'로, '불'이 '화(火)'로, '섬'이 '도(島)'로 대역되어 '계화도'란 이름을 얻었을 듯. 실제, '벌'이 '불'의 음과 유사하여 땅이름에서 한자로 '화(火)'로 된 예는 많다.
삼한시대 마한(馬韓) 소국의 하나였던 '불사분야(不斯 邪國)'의 '분야'는 평야, 읍락의 뜻으로 백제의 '부리'나 신라의 '벌', '불' 등과 같은 말. 따라서 불사분야국은 백제의 비사벌(比斯伐)로서 지금의 전북 전주시로 추정할 수 있다. (일부 학자들은 불사분야를 백제의 부사현(夫沙縣)이었던 전남 순천시 낙안으로 추정) 청동기문화와 초기 철기문화를 배경으로 성립한 이 소국은 4세기를 전후로 백제에 복속되었다.
<질문> 계화도 내에 또 땅이름이나 마을이름에 독특한 역사와 의미가 있는 곳이 있나요?
살꾸미 【마을】 계하리 서쪽 후미 마을. 전에 어살을 매고 고기를 잡았다 함.
양지너머 【마을】 계상리 북쪽 양지쪽 너머에 있는 마을.
장자울 【마을】 살꾸미 북쪽에 있는 마을. 장자가 살았었다 함.
넉바우 【바위】 양지너머 북서쪽 산 아래에 있는 넓은 바위.
소내무걸 【바위】 양지너머 북쪽 산 아래 바위. 바위 위에 소나무가 서 있음.
선바우 【바위】 분덕재 북쪽 아래 바위. 사람이 서 있는 것 같이 우뚝 서 있음.
다랭이약수터 중중다랑 아래. 큰 바위 틈에서 나오는데, 맛 좋고 속병에도 좋다고.
무지터 【터】 봉긋재에 있는, 무우제(기우제)를 지내던 터.
비석거리 【길】 양지너머 남서쪽 산 아래. 간재 전우 선생 송덕비가 있음.
양지샘 【우물】 양지너머에 있는 샘. 바위 사이에서 물이 흘러 나오는데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다 함.
중중다랑 【벼랑】장자울 북쪽 벼랑. 높이 7m.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스님이 지나다가 앵두가 많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따려고 이 벼랑을 오르다가 잘못하여 떨어져 죽었다 하여 중죽은 다랑(벼랑)이라 하다가 변하여 중중다랑이라 함.
큰매봉 [봉긋재, 계화산] 【산】/ 계화리 중심. 높이 246m. 작은매봉보다 크며 조선조 때 봉우리에 봉수대가 있어 남쪽으로 산내면 월고리 봉수와 북쪽으로 옥구군 미면 화산 봉수에 응했음. / 작은매봉 【산】 계상리 북동쪽에 있는 산. 산의 모양이 매와 같다 함.
<질문> 계화도 처럼 ‘불’ 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면서도 지명에 '화' 자가 들어간 곳이 또 있습니까?
비사벌은 낙동강 연안 하안평야가 발달한 경남 창녕 일대의 옛 이름이기도. 일찍부터 신라 비사벌의 중심지였던 이 곳의 비사벌은 문헌에 '비자화(比自火)', '비사벌(比斯伐)', '비자벌(比自伐)' 등으로 나타난다.
대구(大邱)의 옛이름이 '달구벌'임은 거의 누구나 알고 있다. 대구는 본래 신라 전기의 달구화현(達句火縣)으로, 달불성(達弗城)이라고도 했다. '달구화'는 바로 '달구벌'의 한자식 표기로, '산으로 둘러싸인 벌'의 의미로 볼 수 있다. '달'은 '산(山)'의 옛이름. 달구화는 통일신라 경덕왕 때 그 음이 비슷한 '대구(大邱)'로 바뀌었다.
<질문> 이 계화도가 새만금개발 이후 섬이 아니라 내륙이 됐잖아요~ 새만금 새만금 하는데, 새만금이란 이름에는 또 어떤 뜻이 있을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만경강의 만경과 김제가 합해서 된 이름.
만경(萬頃)은 '이랑(밭고랑)'이 일만 고랑이나 된다고 해서 붙은 이름. 즉, 농경지가 넓게 퍼져 있다고 나온 이름.
<질문> 그럼 새만금의 ‘금’자는 김제의 ‘김’자를 따서 쓴 건가요? 같은 글자가 음이 다르게 쓰인 경우인데, 이렇게 쓰는데도 법칙이 있겠죠?
--금촌, 금강산, 금오산 --김촌, 김제, 김해
조선시대의 절대 왕조가 음양 오행설에 따라 목(木)인 이씨를 이긴다는 금씨를 김씨로 읽게 하였다. 오행, 즉 금·목·수·화·토에서 목은 토를 이기고 토는 수를, 수는 화를, 화는 금을, 금은 목을 이긴다는 상극 원리가 있는데,
조선왕조를 건국한 이씨가 음양 오행설의 목에 해당하며, 이 이씨를 이기는 성이 바로 금(金)씨여서 한 시대를 이끌어갈 전제 왕조로서 자신의 성을 이기는 상극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하여 금씨가 아닌 김씨로 읽게 한 것이란다.
한강 북쪽에서는 금을 대체로 금으로 읽지만, 한강 이남에서는 김으로 읽는다. 다만, 금이 나오는 곳만은 예외적으로 금. (금오산, 금구 등)
<질문> 오늘 계화도를 시작으로, 김제 등을 거쳐 새만금지역을 한바퀴 돌고 온 느낌입니다~
봉 지형이 변하면서 그 지역의 역사와 생활문화에도 변화가 있을 수 밖에 없는데요. 이런 시간을 통해서 과거 역사를 한번쯤 되짚어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땅 우리문화>
지금까지 한국땅이름학회 배우리 회장과 함께 했습니다.
오늘 도움말씀 감사합니다.
배우리 (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