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개요
바라건대 고려에서 태어나 한번만이라도 금강산을 보고 싶구나.
송나라 시인 소동파
우리 나라에 명산(名山)이 있어서 금강산(金剛山)이라 하는데, 동쪽으로 큰 바다에 임하여 우뚝하게 깎여서 희고, 금(金)이 구름 밖에 솟아올라 높고 넓어서 이수(里數)가 얼마인지를 알지 못하니, 《화엄경(華嚴經)》에 이른 바, 담무갈 보살(曇無竭菩薩)이 그 1만 2천 보살의 권속(眷屬)과 더불어 상시로 머물면서 설법(說法)한다는 것이 바로 이 산입니다. 요즘 내가 지방을 순행하고 인하여 이 산에 나아가서 삼보(三寶)에 첨례(瞻禮)하였는데, 산기슭에 이르지 못하여 땅이 진동하고, 동문(洞門)에 들어가자 서기(瑞氣)가 뻗치고 상서로운 구름이 둘렸으며, 하늘에서 사화(四花)가 내려서 크기가 오동잎과 같고, 감로(甘露)가 뿌려서 초목(草木)이 목욕한 것 같았으며, 햇빛이 누래서 눈에 보이는 곳이 모두 금빛을 이루었는데, 이상한 향기가 퍼지고 큰 광명한 빛이 발하여 산과 골짜기가 빛나며, 선학(仙鶴)이 쌍으로 날아 구름 가에 돌고 산중의 여러 절에 사리(舍利)가 분신(分身)하여 오색 빛을 모두 갖추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할 때, 하루는 금강산을 만드는 데에 썼을 것이다.
스웨덴 황태자 구스타프 6세 아돌프, 1926년에 조선을 방문했을 당시
북한 강원도 금강군·고성군·통천군과 대한민국 강원특별자치도 고성군 거진읍·현내면·수동면에 걸쳐 있는 산이다. 향로봉 일대 포함시 인제군도 포함한다. 한 때는 영어로 의역하여 '다이아몬드 마운틴(Diamond Mountain)'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금강산은 백두산, 한라산과 더불어 한민족을 대표하는 명산으로도 매우 유명하다. 지금도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금강산을 한반도에서 가장 유명하고 아름다운 관광지 중의 하나로 높게 평가한다. 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일제강점기, 8.15 광복 이후 현재까지 시대를 막론하고 수많은 문학과 예술의 배경으로도 인기가 많았던 관광지였다. 그래서, 남북분단 이전의 옛날 사람들은 동해안으로 놀러간다고 하면 으레 경원선을 타고 원산이나 금강산으로 놀러간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한반도의 대표적인 휴양지로 명성이 높았다.
하지만, 지금은 남북분단으로 인해 금강산을 비롯한 주요 지역은 북한령에 편입되면서 찾아가기가 매우 힘들어졌고 남한에 있던 금강산으로도 간주되던 지역은 상당수가 남북분단으로 인하여 금강산과 별개로 인식되었다. 햇볕정책의 일환으로 1998년 말 - 2008년까지는 남한 사람들도 북한을 방문하여 일부 구역을 관광할 수 있었지만,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을 계기로 남북관계가 경색되자 중단되었다. 물론 지금도 방문증명서를 받으면 누구든 갈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높은 비용과 신변 안전이 문제이고 추후 미국 무비자 입국을 위한 ESTA 발급 자격도 영구적으로 박탈된다.
2. 지리
높이 1,638m에 태백산맥 북부에 있다. 금강산 하면 떠올리는 것은 역시 금강산과 그 일대 산을 모조리 묶어 관용적 표현으로 굳은 '1만 2천 봉우리'고 그 중에서 최고봉인 비로봉이 가장 눈에 띈다. 금강산을 주제로 한 동요와 가곡이 있을 정도다.
흔히 안쪽 내금강과 바깥쪽 외금강으로 나눈다. 남북으로 이어지는 오봉산ㆍ상등봉ㆍ옥녀봉ㆍ비로봉ㆍ월출봉ㆍ차일봉 줄기를 경계선으로 해서 내륙을 향한 서쪽이 내금강, 동해 바다를 향한 동쪽이 외금강이다. 대체로 내금강은 상대적으로 완만하고 외금강은 경사가 가파르다.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에는 금강산 여행이라고 하면 주로 내금강 쪽을 보는 것을 말했지만, 남북분단 이후 금강산 관광 때는 전방 군사 지역이 많은 내금강은 북한에서 거의 공개하지 않았기에 주로 외금강 코스를 돌았다. 이 외에도 외금강의 남쪽 부분을 신금강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금강산에 속하지는 않지만 강원도 고성 바닷가에 위치한 여러 기암괴석군들을 해금강이라고 부른다.
계절별로 이름이 따로 있기로도 유명하다. 각 계절마다 금강산이 보여주는 풍경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봄에는 금강산(金剛山), 여름에는 봉래산(蓬萊山), 가을에는 풍악산(楓嶽山), 겨울에는 개골산(皆骨山), 그리고 눈이 내렸을 땐 설봉산(雪峰山), 묏부리가 서릿발 같다고 상악산(霜嶽山), 신선이 산다고 하여 선산(仙山) 등으로도 불린다.
가을 단풍의 풍악산이다. 그리고, 금강산 경치를 링크에서 볼 수 있다.
이처럼 금강산은 한민족을 대표하는 명산으로 이름이 잘 알려져있으며, 수려하고 빼어난 경관으로 유명한 명승지로도 손꼽히기 때문에, 다른 명승지 중에서도 금강산의 이름을 따온 곳들이 많다. 경상북도 경주시의 소금강산(작은 금강산)이나 경상남도 거제시의 해금강(바다의 금강산), 전라남도 해남군의 금강산이 대표적인 예시다. 이외에도 전국 각지의 아름다운 산들은 고래로부터 '**의 금강산'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함경북도의 금강산이라고 불리는 칠보산, 황해도의 금강산이라고 불리었던 장수산, 평안북도 의주군의 금강산이라는 석승산(일명 석숭산, 금강산, 525m) 등이 있다.
3. 역사
금강산은 고대 중국의 역사서에서도 기록이 자주 등장할 정도로 이름이 잘 알려져 있으며, 한반도를 대표하는 관광지로도 명성이 높다. 삼국시대부터 신라의 화랑들이 금강산을 유람했고 지금도 영랑봉 등 지명에 흔적이 남았다. 영험한 산이라는 믿음이 있어, 신라 중심지에서 거리가 먼 데도 불구하고 사찰 백수십여 곳이 창건되었다. 신라가 멸망할 때에도 신라의 마지막 태자이던 마의태자가 고려에 투항한 아버지 경순왕을 따라가지 않고 동생과 함께 금강산에 남아서 여생을 보내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고려시대에도 금강산의 명성은 이어져서 11세기 중국 북송의 시인 소동파가 "고려국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 번 보는 것이 소원이다(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을 소동파가 직접 하지는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일단 조선왕조실록 태종 4년(1404년) 9월 21일자 1번째 기사에 "중국의 사신이 오면 꼭 금강산을 보고 싶어하며, 고려에서 태어나 친히 금강산을 보는 것이 소원이다(願生高麗國, 親見金剛山)라는 말이 중국에 있을 정도이다"라는 기록이 있으므로, 굳이 소동파가 언급한 게 아니더라도 금강산의 명성이 중국에서도 알려졌음은 분명하다.
대저 중국에서도 금강산을 보고 싶어 한다는 아이디어는, 중국의 문화적 수세에 밀린 조선에서도 "금강산만큼은 우리가 중국에 비견될 수 있다"라는 문화적 자신감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수궁가의 일개한퇴(별주부가 토끼를 유인하는 대목)에서, 토끼가 나열하는 유수의 명산 이름 중에 유일하게 한반도에 있는 산이 바로 금강산이다.
조선시대의 수많은 문인들도 금강산을 읊은 작품들이 셀 수 없이 많다. 신정왕후 조씨의 조카 조성하(趙成夏)가 고종 2년(1865년) 43일간 금강산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는데, 그는 《금강산기(金剛山記)》라는 책을 지어 자기 여정과 당시 금강산에 있던 고적들에 얽힌 이야기를 적었다. 이 책은 상당히 널리 퍼져서 1931년 경성 주재 영국인 외교관 아처(C.H.Archer)가 금강산 비로봉을 등산한 뒤 남긴 기록에서 영어로 번역하여 인용했을 정도였다.
일찍이 금강산의 빼어난 경관은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다른 국가에서도 명성이 잘 알려졌다. 조선시대에는 태종이 명나라 사신이 올 때마다 자꾸 금강산 타령을 해서 귀찮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지리학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도 백두산과 함께 금강산을 화려하게 그려놓았고,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한반도 최초의 전기철도인 금강산선을 직접 부설하고, 일본 본토에 살고 있는 일본인들이 일부러 서울까지 찾아와서 관광열차를 타고 금강산을 여행했을 정도로 금강산 관광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하였다. 대표적인 예시로, 일본의 국민적 가인 와카야마 보쿠스이도 금강산을 여행한 뒤의 소감을 노래로 남겼다.
영국의 여행가이자 작가로서 아시아 각국을 여행하고 조선에 대해서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을 쓴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세계 어느 명산의 아름다움도 초월한다"며 금강산을 극찬했으며,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6세 아돌프는 왕세자 시절에 한국에 방문해 1926년에 금강산을 방문하여 아름다운 경치에 감탄한 적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시절인데도 금강산 관광객의 출입관문격이었던 장전항은 관광도시가 되어 읍으로 승격하였으며, 여관이 가득했다고 한다. 그러나 장전항은 6.25 전쟁 이후 북한 치하에서 쇠퇴했다.
북한 치하에서 금강산은 여전히 휴양지로 이름이 높기는 하다. 문제는 북한에서 여유있게 관광을 할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애초부터 북한은 여행의 자유가 없는 곳이기도 하거니와, 금강산의 바로 밑에 남한령 강원도 고성군이 위치하기 때문이다.
4. 불교의 성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동아시아 불교계는 금강산을 성지로 여겼다. 법기보살(法起菩薩), 또는 담무갈보살(曇無竭菩薩)이 금강산에 거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오대산에 문수보살이, 인도의 보타락가산[보타산(普陀山)]에 관세음보살이 머물듯, 우리나라의 금강산에도 법기보살이 거한다고 여겼다. 아마도 원래부터 금강산을 영험한 산으로 여겼을 텐데, 불교가 전래된 뒤 금강산을 불교적 성지로 윤색한 결과일 것이다.
애초에 금강산의 '금강(金剛)'이라는 말은 불교 경전인 『화엄경』에 “해동에 보살이 사는 금강산이 있다.”고 적힌 데서 연유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위 설명에 덧대어 "풍악(楓嶽)이라는 속칭이 있으나, 승려들이 『화엄경』에 근거하여 금강산이라 불렀기 때문에 이 이름이 고정된 것 같다"라고 추측한다.
화엄경에는 바다 가운데 산이 있는데 여기에 법기보살이 거한다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바다 가운데 있는 산'을 금강산이라고 여긴 것이다. 현대의 지리관으로는 납득이 안 되지만, 과거에는 중국에서 신라를 갈 때 배를 타고 당항포에 닿거나 청해진을 거쳐 울산광역시로 도착했기 때문에 중국 쪽에는 이런 인식이 붙었다. 심지어 이 시기 아랍 지도에는 신라가 섬으로 나온다(...).
아무튼 이 내용을 근거로 금강산은 점점 불교의 성지가 되었다. 금강산 봉우리가 1만 2천이라고 말하는 것도, 법기보살의 권속 1만 2천이 있어 저마다 봉우리 하나씩에 거한다고 여긴 데서 나왔다. 여러 봉우리들 중에서도 특히 담무갈봉은 그 자체로 법기보살이라고 여겨 나옹화상(懶翁和尙, 1320~1376) 등 고려의 고승들이 예경을 올리기도 하였다.
중국에까지 금강산의 명성이 퍼진 데에도 이런 믿음이 영향을 끼쳤다. 승려나 불자들은 법기보살의 성지를 순례하고자 찾아왔고, 그래서 절도 많이 들어섰다. 금강산에 법기보살이 있다는 믿음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늦어도 12세기 말에는 분명히 있었다. 고려 신종 2년(1199) 건립된 '발연사진표율사장골탑비'에 화엄경의 내용을 근거로 금강산이 법기보살의 성지라고 썼기 때문이다. 충렬왕 33년(1307)에는 고려 태조 왕건이 금강산에서 법기보살에게 예경하는 모습을 묘사한 불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금강산을 법기보살과 연결짓는 인식은 고려 초에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이 불화는 후대의 금강산 - 법기보살 신앙을 고려 초까지 소급하여 그린 것이다.
원나라 황실도 금강산에 법기보살이 거처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사자를 보내어 금강산에 있는 사찰과 승려들에게 시주하고 예배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유점사에 있는 53불도 금강산이 불교적 성지가 되는 한 가지 요인이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인도에서 문수보살이 사람들에게 지시하여 여러 불상을 만들게 했다고 한다. 그 중 형상이 온전한 불상 53좌를 골라 큰 종(鐘)에 넣어 바다로 띄웠는데, 종이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니다가 금강산 근처까지 도착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유점사 자리에 절을 세워 불상을 안치했다는 것이다. 불이 나서 사찰이 소실되기도 했지만, 사람들이 불상만큼은 따로 빼내어 보존될 수 있었다 한다.
이에 따라 "도사" 하면 "계룡산 도사"를 꼽듯이, 조선의 승려는 금강산에서 수련하는 것을 제일로 여겨 스스로를 '금강산인', '금강상승'이라고 칭했다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표훈사 주지가 주도하는 '금강산불교회'도 존재했다고 한다. # 표훈사 주지 최원허(崔圓虛)는 1935년 9월 5일 불교잡지 《금강산(金剛山)》을 간행하기도 했다.
4.1. 팔만구암자
금강산은 한민족의 신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영산이자 명승이기 때문에, "일만이천봉 팔만구암자"라는 말과 같이 사찰 또한 많이 자리했다. 다만 6.25 전쟁 도중에 금강산의 많은 상징적 산사가 소실되었다. 표훈사와 함께 금강산 4대 사찰로 꼽히던 장안사, 석왕사, 유점사나 정양사, 마하연사, 장연사, 문수사, 발연사, 송림사, 도산사, 금장사, 삼장사, 건봉사 등 수 많은 암자와 사찰이 그렇게 사라졌다.
2022년 현재 북한 측이 관리하는 금강산 내 사찰들은 문화유적지로 건물만 복원해둔 것이거나, 남북 교류 차원에서 남측과 협력해 새로 지은 것들이다. 그 외 대형 사찰 외의 작은 암자들은 6.25 전쟁 때 소실되었거나 아예 철거된 것들이 많다.
표훈사: 남아있는 유일한 4대 사찰.
신계사: 복원되었다.
보덕암
정양사: 폭격으로 파괴되고 일부만 남았다. 일제강점기 흑백사진이 남아있기 때문에 복원 떡밥이 있다.
장안사: 폭격으로 파괴되고 터만 남았다. 여기도 복원 떡밥이 있다.
건봉사: 남쪽에 있는 유일한 금강산 절이며 한국전쟁 때 문 하나를 빼고 모두 불탔다. 현재 일부 건물을 복원했으며 복원 중에 있다.
5. 대한민국 땅이었다면?
휴전선과 약 20km 떨어져 있고, 삼일포 등의 권역까지 합하면 고작 7km밖에 안 떨어져 있다. 그래서 1951년 4월 ~ 5월경에 조금만 더 북진을 했다면 금강산을 점령할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밀리터리 계에서는 1970년대부터 있었던 꽤나 오래된 떡밥이다. 백선엽의 회고 즉 통천군 이남은 모두 금강산 권역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지역을 다 점령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므로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다만 지금의 동해안 방면 휴전선은 거의 자연 계곡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군사적으로는 일단 이 지역을 차지했다면 그 다음으로 원산시까지도 바라볼 수 있다는 의미라 6.25 전쟁에서 휴전 때까지도 혈전이 거듭되었다. 특히 정전 협정 체결 직전인 1953년 7월에는 동부전선의 전략적 요충지인 금강산 일대를 두고 한미연합군과 중공군 간에 일진일퇴의 공방이 벌어졌는데, 중공군의 최후의 대공세 직후 정전 협정이 체결되어 휴전선이 그어지는 바람에 현재 휴전선 동쪽을 보면 남쪽으로 우묵하게 내려온 모양이 되었다. 이 시절 전투 이야기들은 1980년대 정부나 관변단체에서 간행하는 반공물 교재 시리즈의 단골 소재이기도 했다. 그런데 진짜 군사적으로 원산까지 바라볼 수 있었을 정도였다면 서부 전선도 훨씬 북상해서 남한이 대동강 이남까지 진출해서 황해도를 전부 먹고 대동강 근처에서 휴전선이 그어졌을 수도 있다.
만약에 대한민국이 금강산을 실효 지배하고 있는 영토였다면 금강산은 한라산(1,950m), 지리산(1,915m), 설악산(1,708m)과 함께 대한민국의 4대 명산으로서 으뜸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아래 문단의 내용들처럼 과거에는 금강산과 설악산은 같은 산이나 마찬가지였기에 휴전선이 금강산의 핵심 부분 위로 그어졌다면 금강산 아래에 설악산이 들어가 한라산, 지리산과 함께 금강산이 3대 명산으로 인식했을 수도 있다.
사실 북한뿐만 아니라 남한에도 금강산의 영역이 있다. 휴전선 부근의 양구군의 가칠봉, 고성군의 향로봉은 전통적으로 금강산의 영역이었고, 설악산의 신선대 또한 금강산의 최남단 영역으로 통했다. 또한 남한 최북단 사찰인 고성군의 건봉사 역시 원래는 금강산의 사찰이다. 다만 금강산의 핵심 부분들이 남북분단으로 인해 모조리 북한 영토로 들어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금강산=북한, 설악산=남한이라는 인식 하에 금강산의 남한 영역들이 설악산으로 새로이 구분되어 인식된 것일 뿐이다. 그래도 남한령 고성군에서는 금강산의 상징성이 매우 높았음을 감안하여 지자체 로고에 금강산을 그렸고, 북한에 가까운 한 도로에 금강산로라는 이름을 붙였다. 건봉사 등의 관광자원을 금강산과 연계시켜 홍보하기도 한다. 물론, 설악산 자체도 남한의 그 어느 산과 비교해도 뒤쳐지지 않을 정도로 경치가 굉장히 수려하기로 유명하다.
'금강산의 일부 영역이 남한에도 있다'는 것은 이제 알고 있는 사람이 극소수에 불과한 상황이 되자, 1박 2일 시즌 4에서는 이를 역이용해 출연자들을 겁먹게 만들기도 했다. 2024 파리 올림픽 직전인 2024년 7월 초에 벌칙으로 금강산 등산을 하라는 미션을 주자 멤버들이 "북한에 가라고?"라며 겁을 먹었던 것. 그렇게 도착한 곳은 금강산의 제1봉우리인 신선봉이었고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 금강산이 맞다면서 일부 지역은 남한 실효라는 것을 알려주기도 했다.관련 기사
6. 관광
국가보안법 [시행 2017.7.7.] [법률 제13722호, 2016.1.6., 타법개정]
제6조(잠입, 탈출)
①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점을 알면서 반국가단체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부터 잠입하거나 그 지역으로 탈출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개정 1991·5·31>
②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의 지령을 받거나 받기 위하여 또는 그 목적수행을 협의하거나 협의하기 위하여 잠입하거나 탈출한 자는 사형·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③삭제<1991·5·31>
④제1항 및 제2항의 미수범은 처벌한다.<개정 1991·5·31>
⑤제1항의 죄를 범할 목적으로 예비 또는 음모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⑥제2항의 죄를 범할 목적으로 예비 또는 음모한 자는 2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개정 1991·5·31>
예전부터 그 명성은 대단했지만 그 수려한 경관은 여전해서, 지금도 금강산을 한 번 다녀온 사람들은 그야말로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1998년 11월 18일부터 현대아산을 통해 남한에서도 직접 금강산 관광이 가능하였으나, 2008년도에 발생한 박왕자 씨 피살사건 이후 16년째 대한민국 관광객 단 1명도 금강산 관광지구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다만 금강산의 진면목이 모든 관광객에게 개방된 건 아니었다. 초창기에는 북한의 군사지역이 많은 내금강이 개방이 안 되었는데, 문제는 조선시대, 일제강점기까지 금강산 여행 하면 내금강을 말하는 것일 정도로 비중이 높은 곳이었다. 내금강은 2007년 5월부터 제한적으로 열렸지만, 정상 비로봉 코스는 결국 금강산 관광이 폐지되는 날까지 일반 관광객에게는 개방되지 않았다. 즉 2000년대에 금강산을 가본 사람이라고 해도 금강산의 핵심을 제대로 봤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금강산 관광의 시초는 1988년에도 정주영 회장이 추진하였으나 남북고위당국자 예비1차회담에서 북한이 팀 스피리트 훈련의 무조건적인 중단을 주장하는 어거지를 써서 실패하였다. 지금이야 이야기거리지만 북한이 군사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본격적인 금강산 관광을 시작하지 않을 거라는 우려는 1999년에도 있긴 했다. 그러나 결론은 그나마 10년간 관광.
당시 금강산 관광의 대상자는 대한민국 내국인에게 국한되었고, 외국인은 내국인의 관광상품을 이용하는 것으로 한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금강산을 관광하는 도중에 외국인을 만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다. 홍보가 덜 되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일 홍보를 제대로 하고 외국인 관광코스도 마련한다면 아마 외국에서도 반할 것이다. 그 정도로 경관이 빼어나다.
문제는 가격이었다. 2007년을 기준으로 1박 2일, 즉 호텔 1박은 최성수기 + 주말에 인당 금강산 호텔 34만 원, 해금강 호텔 29만 원이었다. 물론 비수기 평일로 하면 이 가격은 28만 원, 23만 원까지 낮아지지만 결코 싼 가격은 아닌 것은 분명했다. (2박은 초기에 인당 80만 원 정도였다고 한다. 그나마 육로 관광으로 낮아진 가격이 인당 35만 원.) 덤으로 점심, 저녁식대(각각 10달러)와 온천욕(12달러), 교예공연관람(25달러), 삼일포관람(1만 원)이 옵션이었다. 게다가 새벽 6시까지 강원도 고성군에 알아서 도착해야 한다는 문제도 있었다. 그래서 금강산 관광 인원의 상당수는 정부 보조를 받아야 했다. 이는 현대아산이 50년 동안 독점하고자 6년 3개월 동안 9억 4200만 달러, 실제로는 4억 9천만 달러이라는 어마어마한 비용을 내야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만약 5천억 원을 50년으로 나누어 계산하면 10년에 1천억 원 꼴인데, 이건 실제 관광객 10만 명으로 나누면 인당 100만 원씩 부담한 셈이다.
다만 당시 현대아산 임직원 및 가족은 사원복지 차원에서 금강산 관광을 갈 수 있었고, 전국 사회(역사 포함) 교사들을 차례로 선발하여 금강산 관광을 보내 주기도 했다. 이 사람들은 대체로 편하게 그나마 덜 비싸게 갈 수 있었다.
대북경색 이후에는 중국으로 금강산 관광 사업이 넘어가기도 했다. 30여 명이 한 팀이 되어 북중 접경 도시 지린성 룡정시 삼합에서 함경북도 회령군을 거쳐 어랑군으로 들어가 전세기로 평양국제비행장, 다시 버스로 금강산을 가는 복잡한 코스다. 4박 5일 8500위안(157만 원 상당)으로 북한의 아리랑 공연을 보는 것까지 고려하면 저렴한 편이지만 (기사에 따르면 2배로 뛴 가격으로 추정) 그럼에도 여전히 비싼 편이다.
금강산 관광 재개 가능성은 2013년 남북회담에서 점쳐졌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2015년 12월 정부 당국자는 UN의 대북제재를 무시하고 금강산 관광을 재개할 수 없다고 밝혔다. 관광 재개 수익금이 WMD(대량살상무기)와 무관하다는 보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
박근혜 탄핵 이후 정국이 조금씩 해방되면서 다시금 남북간 금강산 관광 재개가 점쳐졌으나 동일한 이유로 국제사회의 눈치가 보여 지지부진한 상황이고, 김정은은 초조해진 것인지 2019년 10월 22일에는 남측과 합의 하에 관리가 안 된 시설들을 철거하라고 지시하였다. '너절하고'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진다'는 원색적인 디스도 덤. 이후 2022년부터는 호텔해금강을 시작으로 골프장 등 남측 시설들을 무단으로 철거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2024년 4월 북한 측에서 자체적으로 새로운 금강산 관광 인프라를 만들려는 정황이 포착되었다. 코로나 봉쇄도 풀렸겠다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활성화하기 위해 하는 조치로 보인다.
일각에는 금강산의 관광가치를 두고 남한인들이 민족주의적 시각으로 과대평가한다는 지적이 꾸준히 있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경치 좋고 기암괴석이 흔한 산은 유럽, 아시아 등지에도 많다는 것이다. 정부의 관광수요 예측을 두고도 일부 언론의 비판이 있다. 다만, 금강산 관광이 햇볕정책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현재의 상황에서 금강산의 관광자원 평가는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간에 각자 정치적인 의도가 들어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적당히 걸러듣는 것이 좋다.
하지만, 고대 시대를 비롯한 옛날부터 금강산을 방문했던 수많은 외국인들도 "금강산의 경치는 정말 수려하다." 라고 여러 번 극찬하는 증언과 기록을 많이 남긴 것도 이견의 여지가 없는 분명한 사실이라 금강산의 명성이 마냥 과대평가된 것은 아닐 것이다. 당장에 한국 불교의 성지도 금강산이었을 정도로 옛날부터 명성은 아주 높았고, 금강산을 표현한 수많은 예술작품들도 그냥 나온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조선왕조실록을 포함한 국내의 역사서에서도 가장 많이 언급된 한반도의 산이 바로 금강산이다.
7. 환경 정책
제한적인 금강산 관광이 실시되던 시절, 월경하면 가장 먼저 놀라게 되는 것이 "말로만 듣던 북한의 민둥산이 사실이었구나"라는 점, 같은 한반도, 같은 강원도 땅이었음에도 70년을 넘게 분단체제 아래 다른 여건 아래 놓이면서 매우 달라져버린 풍경에 상당한 충격을 느꼈다고 한다. 동시에 또 하나 놀라는 점은 그 와중에도 금강산만큼은 대한민국의 국립공원 못지않게 삼림이 울창하고 온전하게 자연환경을 유지한다는 점이다. 금강산 관광 기간에는 그 많은 사람들이 방문했음에도 깨끗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는데, 북한에서도 특이하게 화장실을 이용하는 데에도 요금이 들고 쓰레기를 버리면 벌금을 문다. 2006년도까지는 금강산 계곡에서 아무나 물을 뜰 수 있었다. 북한의 환경정책이 딱히 우월해서라기보단, 접경지역이자 산지라 인간의 손이 잘 닿지 않아서인 측면이 크다.
이런 깨끗한 모습들로 하여금 진귀한 생명체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으며, 그것도 모자라서 금강산 계곡물을 직접 떠다 마셔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수질이 깨끗하다. 금강산 관광 중 물 담은 비닐이 나무가지에 매달려 놓은 모습도 있는데, 이것의 정체가 바로 식수다. 북한 주민들은 금강산 물을 그대로 마시는 모양인데, 실제로 마셔보면 시원하다. 단, 관광객이 직접 물을 뜨는 것은 역시 불법행위이며, 벌금이 물리나 눈치껏 하면 마셔볼 수도 있다. 깨끗하다고 해서 담그는 행위나 생명체에 해를 끼치는 등의 행위는 역시나 벌금이 상당하다.
하도 관광객이 많이 다녀서인지, 종종 보이는 다람쥐도 사람을 보고 겁을 먹지 않는다고 한다. 보통은 가까이 다가가면 후다닥 도망치는데, 금강산 다람쥐는 사람이 손을 뻗치건 말건 신경 안쓰고 자기 할 일 한다.
현재 묘향산과 함께 북한의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올라와 있다. 군사 지역 근처라 환경이 보존되었고, 아름다운 기암괴석과 비경 덕분에 북한이 의지를 갖고 등재를 추진한다면 충분히 정식으로 등재될 만하다.
7.1. 북한의 우상화 목적 자연 파괴
다만 경치가 근사한 바위에는 김씨 일가를 찬양하는 글귀를 파서 훼손한 경우가 잦다. 그렇다고 없애자니 바위 자체를 파쇄하면 또 자연 파괴이므로 비석에 새긴 문구 바꾸듯 사포질을 하거나 콘크리트로 바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니면 자연스럽게 저 부분만 떼어내거나. 아니면 그대로 보전해 독재 권력의 악독함을 교육시킬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수도 있겠지만, 워낙 흉물이라 실제로 본 사람들은 그저 없애버리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 금강산 관광이 이루어지던 시절 금강산에서 해당 만행을 본 유홍준 교수가 "정말 이래버리고 싶냐"고 자신의 저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걱정하였다. 유 교수는 옛 문인들의 낙서에 대해서는 긍정적인데 "분명한 것은 시대를 오를수록 글자에 품위가 있고, 근대로 내려올수록 낙서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옛사람이 쓴 것은 문화유적이고 현대인이 쓴 것은 자연파괴였다."라고 하였다. 즉 김일성과 민리백은 낙서다.
사실 북한의 저런 짓거리에 나름의 근거는 북한 이전에 신라 최치원의 '천장백련 만곡진주(千丈白練 萬斛眞珠)' 글씨부터 시작해서 고려~조선시대에도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금강산의 바위를 파서 자기들의 문장을 써넣었다는 것이다. 금강산은 전국에 흔한 등산목적지가 아니라 최소 신라 때부터 1천년 이상을 성지순례 대상에 가까울 정도로 모두가 가보고 싶어하는 장소였다. 제주도 사람 김만덕도 왕이 "소원 하나 들어주겠다"니 "금강산을 가보고 싶다"고 소원을 빌었을 정도였으니. 이 결과 실제로 금강산을 가보면 김일성의 낙서뿐 아니라 북한 이전 시대 수백 년간 한문으로 바위에 새긴 글씨도 금강산에는 엄청나게 많다. 옛 사람들이 바위에 새긴 글씨가 많다는 점은 중국의 상징적 제1명산인 태산과 비슷한데, 문구의 퀄리티는 제각각이라 문학을 한 사람도 많고 그냥 옛날 낙서인 것도 많다. 김일성의 흉물들은 거기에 꼽사리를 낀 것이다.
이 블로그를 보면 옛날 조선 이전의 빛바랜 한문 글씨와 북한정권의 시뻘건 한글 궁서체 글씨가 같은 바위에 새겨졌다. 이렇게 같은 바위에 왼쪽에는 옛날 문장과 그 오른쪽에 나란히 새겨놓은 것도 상당히 많아서 나중에 처리할 때 고생할 것이다. 한편, 탈북자 황장엽은 이렇게 자연 훼손을 한 것을 "고강도 시멘트로 덮어버릴 수밖에 없지 않나" 라고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다만, 약품처리로 빨간 잉크만 지워버리면 문제는 없을지도 모른다.
8. 군사 시설
볼 거리가 상당히 많은 금강산 지역이지만, 정작 금강산 지역이 군사지역이 많아서 사진 촬영은 지정된 장소에서 찍어야 하며, 그로 인하여 제한구역이 많다. 군사분계선 인근에 위치해 있어 엄청난 군 병력들이 산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광하러 들어갔다면 금강산 관광특구로 들어가기 전까진 엄청난 군사시설물들을 구경할 수가 있다. 물론, 이것들은 촬영 자체가 금지이고, 촬영했다가 걸리면 카메라를 몰수당하고 남한으로 추방된다.
만약 제22보병사단을 간다면 남한 쪽 봉우리 중 향로봉 덕분에 18개월 동안 금강산 끄트머리 정도는 볼 수 있다. 또한 백두산 부대에서도 가칠봉을 관할해서 이쪽 GOP로 근무 서러 가면 금강산 최남단에 이른다. 12사단 향로봉대대 선점중대에 배치되면 향로봉 꼭대기에서 근무도 가능하다.
다만 그러한 위협을 무릅쓰면서 북한이 관광을 했다는 건 돈벌이가 되었고, 군사지구이긴 하지만 핵심적이지 않은 평범한 군사지역이었다는 거다. 그렇지 않고서는 관광 자체가 불가능하다.
9. 예술적 영향
금강산은 오랜 세월 동안 한민족에게 수많은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한국의 산지 중에서도 특히 웅장하며 기암괴석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식생도 풍부해서 예로부터 볼거리도 매우 많았다. 더불어 고구려, 신라, 고려 등 여러 세력의 지배를 번갈아가며 받는 과정에서 다양한 이야깃거리도 품게 되었다. 그 덕분에 통시적·공시적으로, 금강산에 관련된 수많은 예술작품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즉, 금강산은 그 자체로서 우리 한민족 문화사에서 하나의 모티브로서 존재해왔으며 이러한 금강산의 특성은 일본 후지산의 예와 같이, 금강산이 단순히 유네스코 자연유산뿐 아니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혹은 둘이 합쳐진 형태로서 국내 최초의 복합유산으로 등재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9.1. 문학
금강산을 읊은 시를 다 한 자리에 모을 수 있다면 도서관을 하나 채울 수 있을 것이다.
- 최남선
금강산을 소재로 하는 문학 작품.
이곡(李穀) 「동유기」
세조 「어가동순록」
김원근(金元根) 「자경지함흥일기」
홍귀달(洪貴達) 「차고성삼일포운(次高城三日浦韻)」
이이 「풍악행(楓嶽行)」
성현 「동행기(東行記)」
성제원(成悌元) 「유금강록(遊金剛錄)」
남효온 「금강산기(金剛山記)」
이정구(李廷龜)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
정곤수(鄭崑壽) 「금강록(金剛錄)」
이경석(李景奭) 「풍악록(楓嶽錄)」
김창협 「동유기(東遊記)」
김창흡 「구룡연(九龍淵)」
김창즙 「동유기(東遊記)」
이상수(李象秀) 「동행산수기(東行山水記)」
김유(金楺) 「유풍악기(遊楓嶽記)」
법종(法宗) 「유금강록(遊金剛錄)
안축(安軸) 「금강산(金剛山)」
남효온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 」
정철 「관동별곡」
이병렬 「금강일기」
이은상 「금강행(金剛行)」
최남선 「금강예찬(金剛禮讚)」
이광수 「금강산유기(金剛山遊記)」
정비석 「산정무한(山情無限)」
문일평 「동해유기(東海遊記)」
송시열 《尤庵集(우암집)》 〈금강산(金剛山)〉"山與雲俱白/雲山不辨容/雲歸山獨立/一萬二千峯"
안민영(安玟英) "금강 일만이천봉이 눈 아니면 옥이로다/헐성루 올라가니 천상인 되였거다/아마도 서부진화부득(書不盡畫不得)은 금강인가 하노라."
김병연 "松松栢栢岩岩廻/水水山山處處奇"
작자미상 「유이양문록(劉李兩門錄)
《금강산(金剛山)
이유원(李裕元) 〈봉래비서(蓬萊祕書)〉
…
이외 구한말 한반도를 방문한 서구인들은 거의 빠짐없이 금강산을 방문하였고, 많은 기록을 남겼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의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이나 지크프리드 겐테(Siegfried Genthe)의 《독일인 겐테가 본 신선한 나라 조선)》 등이 금강산 기행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기쿠치 유호(菊池幽芳)가 「금강산탐승기(金剛山探勝記)」를 통해 금강산을 ‘자연의 기형아’로 표현하는 등, 금강산의 아름다움과 명성을 폄훼하려는 시도들도 있었다. 그러나, 금강산의 수려하고 빼어난 경치의 아름다움은 결국 식민지배인이었던 일본인들까지 매료되었고, 금강산을 '조선 제일의 관광지' 로 부각하면서 관광을 위한 스키장이나 금강산선 철도까지 만들었다. 게다가, 일본 열도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금강산 관광 안내책자와 기념 스탬프까지 발행하는 등, 금강산을 국제적인 관광명소로 내세웠다.
북한에서도 우인 조규철의 「만물상(萬物相)」 등 금강산을 소재로 하는 문학전통이 이어지고 있으며, 현대 국문학에도 최해령 《그리운 금강산》, 공광규《금강산》과 같은 운문이나 정찬주 <조선에서 온 붉은 승려>, 유홍준 〈금강산〉과 같은 산문 등 금강산은 장르를 넘는 주요 모티브로 살아 숨쉬고 있다.
9.2. 미술
금강산의 경치는 전연 상상 이상의 것으로, 화가의 머리로는 도저히 구상할 수 없는 그림이다. 우리들은 이 진경에 접하면서 드디어 당황하게 되며 어찌할 줄을 모르게 된다. 오른쪽을 보아도 그림, 왼쪽을 보아도 그림, 앞도 뒤도 그림이며, 또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변하는 데 있어서 고만 붓을 던질 수밖에 없다.
- 모리타 류코(守田龍光)
회화·공예와 같은 미술의 영역에도 금강산은 오랜기간 소재로서 사랑받았다. 『동국세시기』의 기록에 의하면 오월단오 때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부채에 그리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금강산을 소재로한 공예는 국가무형문화재 입사장 이학응(李鶴應)의 1930년대 작품 금강산삼선암(金剛山三仙巖)으로 그 전통이 이어진다.
금강산은 특히 회화에서 그 영향력이 돋보이는데, 금강산을 소재로 그리는 금강산도(金剛山圖)가 한국회화에서 한 장르를 차지할 정도로 금강산은 대한민국 회화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금강산도는 고려 시대 말부터 현대까지 병풍·선면화·족자화·민화 등으로 꾸준히 제작되면서 우리나라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 전통의 성격과 특징, 화풍을 대변하는 분야로 자리 잡았다.
금강산을 소재로 한 회화
노영(魯英) 「고려 태조 담무갈보살 예배도」
정선 「금강전도」, 「정선필 풍악도첩」
정충엽(鄭忠燁) 「헐성루망만이천봉(歇惺樓望萬二千峰)」
김응환 《해악전도첩(海嶽全圖帖)》
김홍도 《금강사군첩(金剛四君帖)》
김규진 「금강산도(* 1920년 창덕궁(昌德宮) 희정당(熙政堂)의 벽화를 제작할 때, 순종이 관동의 총석정(叢石亭)과 금강산의 만물초(萬物草)를 그릴 것을 명하여, 3개월 동안 금강산에서 진경을 사생한 뒤에 이루어진 6×30자의 벽화이다.)」
변관식 「외금강삼선암추색」, 「외금강 옥류천」
이응노 「외금강」, 「금강산」, 「정양사 망금강(正陽寺望金剛)」
그외 금강산도를 남긴 화가 - 최북·이인문(李寅文,1745 ~ 1824)·김의식(金義植)·박남곡(朴南谷)·황현룡(黃見龍, 1883-1960) 등
20세기 들어 해외로 미술 소재로서의 금강산이 확산된다. 일본 유화가 가와시마 리이치로(川島 理一郞)의 「금강산 정양사(金剛山正陽寺)」나 야마우치 다몬(山內多門)의 「금강산(金剛山)」, 영국 목판화가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의 「금강산의 전설」, 「금강산 구룡폭포」, 「금강산 절의 부엌」등이 좋은 예다. 교토 료안지에도 금강산을 소재로 한 사쓰키 가쿠오(皐月鶴翁, 메이지 ~ 쇼와 중기 화가)의 장병화(障屛畵)가 확인된다.
1930년대 금강산의 명성은 일본에서도 자자해 일본 민간회사에서 사진첩 《조선금강산(朝鮮金鋼山)》을 발행했으며, 한국근현대영상아카이브에 따르면 조선여행(1931), 금강산(金剛山, 1930년대), 만선여행(滿鮮のたび, 1932) 등의 문화영화가 금강산을 배경으로 촬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외 문정웅 「금강산 만물상」이나 최인하의 「금강산의 가을」, 변월룡의 「햇빛 찬란한 금강산」 등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조선화가 주류 화풍인 북한에서도 주요 소재로 사랑받고 있다.
대한민국 현대미술에서도 금강산은 매우 주요한 모티브로 살아 숨쉰다. 백남준의 무제 작품과 신장식의 《금강산 12경 연작》 등의 작품들이 지속적으로 탄생하고 있고, 겸재 정선 등 금강산을 소재로한 고전 산수화들을 미디어 아트로 탈바꿈하는 시도가 진행 중이다.
9.3. 음악
“강원도 금강산 일만이천봉 팔만구암자 유점사 법당 뒤에 칠성당을 모아놓고…….”
- 정선 엮음아라리 中
금강산이 가진 민족적·종교적 상징성은 민중들에게 악상(樂想)으로 발현되기도 하였다. 특히 인근 지역의 민요에 상당히 많은 소재로서 등장하여 산신 숭배나 암석 숭배 같은 원시신앙의 대상으로서도 나타났다. 특히, 상기 제시한 정선 지방에서의 민요 기록에서는 민간에 퍼져있던 칠성신앙을 아주 잘 볼 수 있다.
금강산을 소재로 하는 노래
경기잡가 금강산타령
강원도민요 「회양 닐리리」
강원도민요 「지화자 좋다」
강원도민요 「정선 아리랑」
강원도민요 「통천 아리랑」
강원도민요 「고성 아리랑」
가곡 「그리운 금강산」
동요 「금강산」
한돌 「홀로 아리랑」
설봉 「한 많은 금강산」
송가인 「비 내리는 금강산」
박진도 「금강산아」
지조 「금강산(Feat. 던밀스, 자메즈)」
이 외에도 북한에서는 당 차원에서 금강산을 낙원의 모습으로 형상하여 홍보하기 때문에 금강산을 소재로 하는 악곡이 지금도 많이 권장되어 창작되고 있으며, 금강산을 소재로 한 노래들은 여타 선전가요에 비해 그 정치적 색채가 옅기 때문에 민중에게 널리 사랑받고 있다.
금강산을 소재로 하는 북한 노래
「못 잊을 삼일포의 메아리」
「매봉산의 노래」
「직동령의 승리방아」
「아름다운 금강산」
「금강산을 찾아서」
「인민의 금강산」
「금강산은 우리의 자랑이라오」
「명승의 나라 자랑하세」
합창곡「풍년든 금강마을」
혁명가극 「금강산의 노래」 - 본 가극에 일제강점하 민족의 수난과 훗날의 염원을 담은 노래인「금강산에 선녀들이 내린다 하지만」과「달빛밝은 이 밤에」가 수록돼 있다.
음악설화시극 《빛나라 만년대계의 글발이여!》
노래시이야기 《금강산과 더불어 영원할 사랑의 이야기》
가극 《금강산팔선녀》, 《남강마을녀성들》, 《고성인민유격대》, 《전사의 어머니》, 《금강산기슭에서》 등 - 위 작품들은 금강산지구 즉, 금강산 인근 주민들의 투쟁을 내용으로 하여 사상을 선전하는 이데올로기 곡이다.
가요 「금강의 방아소리 전선으로 울려가네」
이의 연장선으로서,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산하 예술단체로 '금강산가극단(金剛山歌劇團)'이 존재한다. 금강산가극단은 1955년 6월 6일에 창립된 재일조선중앙예술단을 모체로 1974년 8월 29일에 설립되었다. 북한은 김일성 탄생 60돌을 맞이하여 평양을 방문한 재일조선중앙예술단에게 가극 ‘금강산의 노래’를 전수시켜 주면서 ‘금강산가극단’으로 개칭하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