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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정의 문학사회학적 연구 4/ 임형
2) 시문(詩文)
누정에서 이루어지는 시는 제작자가 미리 해당 누정명이나 주변 경관 및 다른 사람의 원운 등 특정한 제명을 의식한 동기의 유발이라는 전단계적 과정을 거쳐 제작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한 관습 아래 제작된 일련의 누정시를 누정제영(樓亭題詠)이라 지칭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이 때 지어진 시는 대부분 풍류 정신을 읊거나 자연에 대한 완상, 과거에 대한 회고,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 등을 주제로 한다. 누정시의 주제적 양상을 자연완상(自然玩賞), 고사회고(古事懷古), 기탁풍유(寄託諷諭), 회포술의(懷抱述義), 연군송덕(戀君頌德)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예로부터 동백정에서 경승을 읊은 시는 많이 있다. 용두산록 학등에 자리잡은 정자 아래로 예양강의 상류인 호계천이 흐르고 있으니 동백정에서 바라다 보이는 경치는 계절마다 운치가 있다. 이렇듯 아름다운 자연을 눈으로만 보아 넘길 수 없던 문인들은 한 편의 시로 절경을 노래했다. 심석재 송병순(心石齋 宋秉珣)의 [차동백정운(次冬柏亭韻)], 후석 오준선의 [과동백정(過冬柏亭)], 복재 위계민의 [한장무철호창수우동백정(韓丈憮哲灝唱酬于冬栢亭)], 미천 이권전의 [호계청주김씨동백정(虎溪淸州金氏冬柏亭)], 추당 송영대(秋塘 宋榮大)의 [근차동백정원운(謹次冬栢亭原韻)], 김성채(金成采)의 차운, 김익검(金益儉)의 차운, 계암 김윤황(溪菴 金潤璜)의 차운, 이재만(李載晩)의 차운, 오익영(吳益泳)의 차운, 김윤홍(金潤鴻)의 차운, 운곡초부 김익한(雲谷樵夫 金益翰)의 차운, 김형권(金炯權)의 [동백정운], 김봉규(金奉圭)의 [봉화원운(奉和原韻)], 이상구(李相求)의 [근차동백정운(謹次冬柏亭韻)], 춘헌 위계반(春軒 魏啓泮)의 [차동백정원운(次冬柏亭原韻)], 효당 김문옥의 [동백정차판상운(冬柏亭次板上韻)], 고당 김규태의 [동백정], 금계 이수하의 [여향중노소자동백정지부춘정연일수창(與鄕中老小自冬栢亭至富春亭連日酬唱)], 소천 이인근의 [동백정운], 금강 백영윤, 만천 김진규의 시편 등 무수한 시들이 남아 있다. 최근까지도 동백정에서는 시회가 이루어졌으며 동백정에서의 감회와 주변 풍광을 노래한 시들이 생산되어 왔다.
154편의 시들은 대개 동백정의 명칭이나 자연경관을 예찬하거나, 과거의 선인들에 대한 추모의 내용을 담고 있다.
주제의식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작품들을 분석해 보면 대개 동백정의 명칭, 자연 경관의 예찬과 풍류 정신, 선인들에 대한 추모의 내용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로 동백정의 명칭에 대해 다루고 있는 것으로는 김윤현, 김이한, 송병순 등의 시가 있고, 동백정과 호계천의 자연 경관을 예찬하며 풍류 정신이 드러나 있는 작품으로는 이상구, 김봉규, 송영대, 오익영, 이재만, 김익검, 김성채, 김윤황, 김형권 등의 시가 있으며, 또한 선인들에 대한 추모의 내용은 이덕균(李德均), 이기정(李基定) 등의 시에 나타나 있다. 또한 동백정에 문우들이 모여 시회를 가지며 다투어 시를 짓는 모습이 나타나 있는 김윤홍(金潤鴻) 등의 시도 있다. 이 작품들 중에서 이같은 주제로 묶어서 몇 편을 분석해 본다.
먼저 동백정의 명칭과 유래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김윤현의 원운과 김이한의 차운이 있다.
冬柏亭原韻
惟吾事業肇基前 오직 우리 사업이 이 터전에서 비롯하니
因舊名亭以紀年 옛일 따라 정자 이름을 짓고 유래를 기록하였네.
祿相承知茂葉 복록을 서로 이어가니 자손이 번창할 것이요
焄 自 炷香煙 추모하는 마음 간절하니 향연이 영원하리.
江山管領無餘樂 강산을 즐기는 일 말고는 다른 낙이 없고
花竹經營未假眠 화죽을 경영하느라 낮잠도 못 이루네.
默坐斜陽占易罷 사양에 묵묵히 앉아 만상의 변화를 생각하니
三分是俗七分仙 몸은 비록 세속이나 마음은 곧 신선이로다.
金潤賢 謹稿 김윤현 근고
이 시는 1872년 8월 문중에서 발의를 하여 동백정을 중건하는데 앞장섰던 김윤현이 지은 동백정기의 후미에 붙어 있는 작품이다. 그는 체격이 크고 덕성이 온화하며 효성 또한 지극하였는데, 선조의 뜻을 이어받아 폐허화된 동백정을 중건하고 이 곳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100여 년간이나 돌보지 않아 퇴락해 버린 정자 옆에 선조가 심어 놓은 동백나무만 푸르게 서 있는 것을 보며 이를 중건하고옛 명칭 그대로를 살려 동백정이라 명명하였다. 그리고 난 후 선조를 추모하고 자손의 번창을 축원하고 있다.
一區冬柏護來前 한 지경 동백이 앞일을 보호하니
名命相傳未 年 정자를 앉히기 전에 동백이라 이름했네.
夜雨初收依檻月 밤비가 그치니 달이 난간을 비추고
洞雲朝散宿 烟 아침에 흩어지는 마을 구름이 처마 끝을 두르네.
常餘樂意宜觴 항상 즐거워 술잔 들고 글을 읊조리니
晩保淸閒任悟眠 늙어감에 청한하니 멋대로 잠자리에 드네.
爲聽人間行路客 길가는 나그네에게 인간사를 청해 들으니
仙非仙也是眞仙 이 곳 주인이 바로 신선이라 하더라.
壬申中秋 金履漢 謹序 1872년 중추 김이한 근서
이 시도 두련(頭聯)에서 동백정의 명명에 관해 언급을 하고 있다. 김이한의 자는 정여(偵汝)이고 호는 야은(野隱)인데 여려서 부친과 사별하고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그렇지만 예의가 바르고 법도를 어기지 않았고 모친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였다. 그는 집안의 어른인 김윤현을 존경하고 따랐으며 노년에는 그와 함께 동백정을 중건하는데 앞장섰다.
다음으로 동백정과 호계천의 자연 경관을 예찬하며 풍류를 읊고 있는 작품을 본다.
奉和原韻
碧水 廻抱檻前 푸른 물이 감돌아 정자 앞을 흐르니
斯亭卜築已多年 이 정자 지은 지 이미 오래더라.
滿庭花影三分月 뜰에 가득 찬 꽃 그림자는 삼분월이요
細雨林梢一抹烟 가랑비는 숲 끝에 한 가닥 연기더라.
翫客非徒來鶴髮 완객은 한갓 노인만이 온 것이 아니요
圖書不必借龍眠 도서는 반드시 용면만은 아니더라.
先人遺業長追慕 선조의 유업을 길이 추모하여
逐日登臨曷願仙 날로 이 정자에 오르니 어찌 신선을 원하리요.
甲申仲春 後孫 奉圭 謹稿 1932년 중춘 후손 봉규 근고
동백정 원운은 '前, 年, 烟, 眠, 仙'이기 때문에 원운과 차운으로 남겨진 작품들은 대부분 두련에서는 운자인 '前, 年'에 맞추어 동백정의 역사와 유래에 관해서 언급하고 뒤에서는 운자인 '眠, 仙' 등에 맞추어 풍류나 신선사상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후손들이나 방문객들을 막론하고 그들이 남긴 시편들의 대부분은 절경에 자리잡고 있는 동백정을 예찬하며 그 곳에서 느끼는 신선다운 흥취를 노래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바로 운자의 배치에서 기인한 것으로도 볼 수 있겠다.
이 작품은 동백정에 행초서 현판으로 걸려 있는 [봉화원운(奉和原韻)]인데 1932년 청주김씨 후손인 김봉규가 지었다. 그는 현판으로 남아 있거나 여기저기 문집이나 시축 등에 흩어져 전해지던 동백정 관련 기문과 시들을 모아서 {동백정기운집}이란 한 권의 책으로 엮어냈다.
謹次冬柏亭韻
石溪淸澈繞亭前 돌 계곡에 맑은 시내 흘러 정자 앞을 두르니
一別靈區二十年 이 좋은 곳을 한 번 이별한 지 20년이라.
絶壁雲開衡嶽雨 형악에 비가 오니 절벽에는 구름이 피어오르고
平郊日落洞庭烟 들녘의 해는 동정호 연기와 함께 지네.
居人已辦流觴樂 주인은 이미 곡수에 술잔 띄워 시를 준비하는데
遠客猶客借榻眠 원객은 오히려 자리 빌려 잠자리에 드네.
物態如今無恙否 만물의 모습이 지금 같이 병이나 없지 않을까
痴心直欲挾飛仙 어리석은 마음으로 비선이 되고자 하네.
邵城人 進士 李相求 稿 소성인 진사 이상구 고
시냇가의 정자에서 주인과 손이 술잔을 띄우고 풍류에 젖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진사 이상구가 동백정에 들러 하룻밤을 유숙할 때 주인이 술병을 들고 와 나그네인 그에게 술을 대접하자 이에 화답하여 지은 시로 현판에 걸려 있는 작품이다.
누정에서의 제영이 이루어지는 계기는 주로 누정이 건립된 후에 주인과 교유를 하는 사람들이 누정을 방문하여 풍류를 즐기며 시를 남긴 경우가 있다. 이 시는 그러한 부류로 볼 수 있겠다. 또한 현장의 왕래 없이도 누정 주인의 부탁이나 그에 대한 칭송으로 지은 누정 시문도 있으며, 그냥 나그네로서 이름 있는 누정을 유람하면서 누정제영을 남긴 경우도 있다.
次韻
龍頭在後虎溪前 용두산은 뒤에 있고 호계는 앞을 흐르니
起廢孤亭卽此年 낡은 고정을 금년에 일으켰도다.
先世遺芬 歲月 선조가 끼친 향기는 세월이 길고
主人淸賞管風烟 주인의 맑은 복은 풍연을 관리하네.
靑靑冬柏名專美 푸르고 푸른 동백은 이름이 아름답고
白白江鳩客借眠 희고 흰 갈매기는 손과 함께 졸고 있네.
一室三賢堪壽世 한 집안 세 현인이 능히 오래 사니
何須物外更求仙 어찌 모름지기 물 밖에서 다시 신선을 구하리요.
星山人 李德均 성산인 이덕균
次韻
英雄烈烈可推前 영웅이 열열하여 옛적부터 추앙하였더니
依舊靑山二百年 청산은 변함없이 이백년이 되었도다.
伊昔三賢同射地 옛날 삼현이 함께 활 쏘던 터전에
至今千樹鬱含烟 이제 많은 숲이 울창하게 우거졌네.
先生已辦龍蛇義 선생은 이미 임진란에 의를 세웠는데
吾輩堪愁 鹿眠 우리들은 짐승같이 잠만 자니 근심일러라.
域王濤無日定 우리나라 국권이 안정될 날 없으니
九原安得起公仙 저승에 가서 어떻게 돌아가신 공을 일으켜 볼까.
星州后人 李基定 성주후인 이기정
선인들에 대한 추모를 주제로 한 시들이다. 위 두 편의 시는 합천 출신의 이덕균과 성주 출신의 이기정이 지었다. 이들은 모두 성주이씨로 동백정 중건 이후에 여기에 들러 시를 남겼다. 이덕균의 차운에 나오는 '一室三賢'이나 이기정의 차운에 등장하는 '伊昔三賢'은 임진왜란 때 이 곳 출신 의병장인 김성장과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수군이 되어 왜적을 물리쳤던 김억추, 또한 임진왜란 때 순절한 김만추 등 세 사람을 가리킨다. 한 집안에서 세 명의 현인이 나와 나라에 공을 세운 유업을 추모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누정문학은 현실 생활과의 관련성 속에서 작품 활동이 이루어지고 일반 시가와는 구별되는 문학영역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리하여 누정은 한국 문학의 산실로서 역사적으로 오랜 기능을 해왔고 이를 통하여 동시대 문인의 교유는 물론 기문이나 제영시 등으로 선후대 문인들의 시적 교감도 이루어지는 통로였다고 할 수 있다.
다. 시문집
동백정과 관련이 있는 문집으로는 {동백정기운집}과 {만천시고}를 들 수 있다.
{동백정기운집}은 김봉규(金奉圭)에 의해 1932년 5월 17일에 빛을 보았다. 동백정과 연관이 있는 기문과 시편들을 모아서 엮은 책으로 황용현(黃容顯)의 [동백정기]로부터 시작하여 유상대(柳相大)의 [동백정명(冬柏亭銘)], 김봉규의 [추모재중수기(追慕齋重修記)], 성산 이기형(星山 李基馨)의 [근차운암공동백정운(謹次雲巖公冬栢亭韻)], 우선기(禹善基)의 차운, 권재춘(權載春)의 차운, 최순기(崔淳祺)의 차운 등 동백정기가 15편, 추모재중수기가 1편, 원운과 차운이 모두 81수가 실려 있다. 특히 이 문집에 실려 있는 박영수(朴泳銖)나 우하교(禹夏敎) 등의 시를 보면 전국 각지에서 문인들이 동백정을 찾았음을 보여준다.
大冬蒼柏立亭前 크고 푸른 동백이 정자 앞에 우뚝 서 있으니
勁節爲公挺萬年 공의 굳은 절개는 후세 만년 빼어나고
奮氣 磨龍岳月 용두산 아래에서 연마하여 분기를 떨치니
捨身檄渡虎溪烟 목숨을 불사른 충혼이 호계의 안개에 서려 있네.
非徒先哲芳遺跡 한갓 선인 현철의 아름다운 발자취가 아닐지라도
亦使後生覺大眠 또한 후생으로 하여금 큰 잠에서 깨어나게 하네.
함出賢珍令表蹟 솟구쳐 나온 어진 보배 유적을 더욱 빛내고
精忠亘亘不朽仙 올곧은 충성심은 불후의 신선다운 경지에 이르도다.
進士 朴泳銖 謹呈 진사 박영수 근정
이 시는 평안도가 고향인 진사 박영수가 동백정을 방문하여 남긴 차운이다. 용두산록 아래에 우뚝 서있는 동백정을 찾아 이 곳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우고 순절한 삼현을 추모하고 있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만천시고}는 금계 이수하(金溪 李洙夏)의 제자인 만천 김진규(晩川 金珍圭)가 1932년부터 1961년까지 지은 글들을 그의 사후에 엮은 책인데, 이 책에는 그가 주로 가까이 했던 삼계 김병좌(三溪 金炳佐), 연파 김병현(蓮坡 金炳玹)이나 금강, 효당, 고당 등과 어울리면서 지은 시와 그 외 만사(挽詞) 등이 실려 있다.
金岡三溪族叔蓮坡炳秋亭中聯吟
- 금강 삼계 족숙 연파 병추와 정중에서 이어 읊다
自愛幽庄買一家 스스로 깊숙한 터를 사랑하여 집 한 채 장만하니
庭梧月價夕增加 뜰 앞 오동나무에 걸린 달 저녁이면 좋아라.
早秋林露蟲鳴戶 초가을 이슬 속에 벌레는 문을 울리고
晩日 風鷺下沙 늦은 날 마름 바람에 백로는 모래사장에 내리네.
驅雀揮竿村落近 참새를 쫓느라 갈대 저으니 마을이 가까워지고
獵魚滿 市場 잡은 고기 어구에 가득하니 시장에다 내다 파네.
支離詩思 題軸 오랜 숙고 끝에 겨우 시 한 수 지은 후에
出望西天樹影斜 문에 나서 서쪽하늘 바라보니 나무그림자가 기우네.
만천은 금강 백영윤과는 동백정과 영모재를 오가며 자주 어울리는 사이였다. 또한 같은 일가인 삼계 김병추, 연파 김병현 등과도 수시로 동백정에서 만나 그들의 시심을 달래었다. {만천시고}에는 이들과 함께 운을 주고받으며 지은 시들이 여러 수가 실려 있다.
또한 이 문집 속에는 남원의 광한루나 서울의 남산공원, 부산 해운대, 평양의 부벽루, 모란봉, 연광정과 그리고 지리산, 해남 대흥사 등을 유람하면서 쓴 시들도 남아 있다. 1957년 5월 단오날에는 구례의 매월음사(梅月吟社)에 참여하여 시를 짓기도 하였다. 호계 마을에 있었던 병간정에서 시회를 가졌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시가 남아 있으며 풍영계에 참석하여 지은 시도 한 편이 실려 있다. 특히 상영계와 관계된 시가 세 편이 실려 있어서 상영계란 시계가 존재했으며 또한 시회도 가졌던 것을 어렴풋이나마 짐작을 하게 한다. 용계면의 향약회에 참여하거나, 예양서원(汭陽書院)이나 금강사(錦江祠), 만수사(萬壽祠)의 추향제에 참여하여 남긴 시편도 있다.
이상의 두 문집은 동백정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참고해야 하는 것들이다. {만천시고}는 만천의 개인문집으로서 그가 동백정에 머물면서 문인들과 교유한 내용이나 개인적으로 유람한 내용, 그의 시 등이 골고루 실려 있다. 김봉규가 엮은 {동백정기운집}은 동백정 관련 기문과 시의 상당 부분을 수집하고 정리해 놓았다. 이 두 문집의 자료적 가치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2. 동백정의 시회 활동
가. 동백정에서의 시회 양상
동백정은 부산면 지역의 많은 누정 중에서도 특별히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다. 이 곳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문학 활동과 시회 활동은 탐진강변의 문인들을 모이게 했고 이 지역 문학 활동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고도 볼 수 있다.
누정은 일반적으로 시단의 기능을 지닌 전근대 사회의 상층지배계층의 문화가 발현되는 장소였던 만큼 특이한 목적으로 창건된 누정이라 해도 거의 예외 없이 담양의 식영정이나 송강정, 면앙정 등과 같이 시단을 형성하곤 했다. 누정을 정점으로 해서 문인들이 모이고 시가의 창작과 가창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지역에서 확인된 시회는 1853년에 조직된 난정회로부터 시작해 풍영계, 상영계, 정사계 등이 있다.
난정회는 독우재주인 이권전을 주축으로 계축년(1853년)에 20여인이 모여서 창립했다. 퇴락한 정자를 1872년에야 중건한 동백정은 난정회 창계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는 누정이었기 때문에 이 시회는 주로 금장마을의 독우재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겠다.
그러나 풍영계는 1924년 영모재에서 창립한 후 얼마 뒤에 동백정에서 시회를 가졌다. 이 계는 그 동안 18곳의 장소를 돌면서 62회의 모임을 가졌는데 지금도 존속하고 있다. 자세한 계의 내력이 두 권의 풍영계책에 실려있고 매년 수계를 하여 계금을 정리한 내용과 장소, 강신일, 참가자 등을 기록하고 있다. 지금은 시를 짓는 모임은 갖지 않지만 처음에는 시회로서 출발을 하였다. 이 시회는 동백정에서 9회의 시회를 여는 등 주로 동백정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는데, 이는 여기에 만천 김진규나 삼계 김병좌, 연파 김병현 등의 문인이 있었던 때문이다.
상영계는 김진규의 시를 보면 40여 년 전까지도 시회를 갖는 모임으로 운영이 되었던 듯하다. 1957년과 1960년에 감모재와 용호정에서 상영계 시회를 가지며 남긴 시가 있다. 이 시회도 동백정의 김진규 등 작시를 할 수 있는 문인들이 작고함으로써 그 대가 끊긴 경우로 볼 수 있겠다.
정사계는 임인년(1962년)에 조직이 된 이후로 동백정에서 최초로 시회를 열었다. 동백정과 용호정, 경호정에서 가장 많은 모임(7회)을 연 것을 보면 이 시회는 동백정 등 이들 누정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뒤늦게 만들어진 시회이기는 하지만 1987년까지도 작시를 하였으며 지금은 친목적인 모임으로 변질은 되었지만 계답을 소유하고 매년 입추일에 수계를 하고 있다.
시회의 시축은 최초로 정사계를 연 동백정의 시축 외에도 동백정의 정주(亭主)인 김종근씨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두 개가 더 있는데, 작시자와 시만 적혀 있고 많이 훼손되어서 이들 시축이 어느 시회에서 남겨진 것인지는 연대와 장소를 알기가 어렵다. 다만 시축에 적힌 시인들의 면모를 보면 이는 정사계가 창설되기 바로 이전의 것으로 보인다.
정사계원인 최순섭(崔淳燮)씨에 의하면 오래 전에 어른들로부터 부산면 일대에 '팔정계(八亭契)'라는 시회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이 지역의 문인이며 소파나 만천의 스승이었던 금계 이수하의 시에도 [팔정회수창(八亭會酬唱)]이란 시가 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본다면 풍영계나 상영계의 시축일 수도 있겠고, 아니면 그 밖의 팔정회와 같은 또 다른 시회가 있었거나 또는 시회와 상관없이 문인들이 우연히 동백정에 모여 시를 지으며 작성한 시축이 아닌가 하는 추측만을 해볼 뿐이다.
시축에 시를 남긴 작가들과 작품 수는 다음과 같다. 편의상 2개의 시축을 오래된 듯한 것부터 번호를 매겼다.
- 시축Ⅰ(237cm×25cm)의 작가와 작품수(6명 참가, 31수 창작)
三溪 金炳佐(1892.4.15∼1963.6.22) 8수
克齋 金貞圭(1907.10.4∼1977.8.21) 7수
蓮坡 金炳玹(1888.9.17∼1960.4.24) 7수
晩川 金珍圭(1894.7.30∼1962.12.10) 6수
農隱 白文圭 2수
金容圭(1900.10.6∼1970.6.18) 1수
- 시축Ⅱ(190cm×25cm)의 작가와 작품수(11명 참가, 25수 창작)
晩川 金珍圭 4수
三溪 金炳佐 4수
蓮坡 金炳玹 3수
小湖 崔元杓 2수
小坡 李炳敎(1904.2.16-1982.9.23) 2수
敬軒 李洙平(1900-1980.5.15) 2수
冠山 崔炳元(1901.6.25-1980.9.8) 2수
屛溪 金容大 2수
文在榮 2수
朴景玉 1수
金漢東 1수
시축에 있는 이 시들 중에서 훼손되지 않은 몇 작품들을 옮겨본다. <시축Ⅰ>의 만천, 연파의 시와 <시축Ⅱ>의 만천과 관산, 소파의 시이다.
雨中野路半成泥 빗속에 들길이 반쯤 진흙길이 되었으니
是日登亭滑石溪 이날 정자에 오름에 돌길이 미끄럽네.
推葉題情吟各異 운 맞춰 시 지으니 특이하게들 읊고
擧杯勸席醉相偕 술잔 들어 자리 권하며 함께 취하네.
園中鑑沼看魚躍 동산 속 연못 거울 같으니 고기 뛰노는 것 보고
庭上栽梧待鳳棲 뜰에 오동 심어 봉황 깃들기를 기다리네.
雲裡茅廬何代築 구름 덮인 띠집은 어느 때나 지었는가
山之爲北水之西 북쪽은 산이요 서쪽은 물이라네.
<시축Ⅰ> 晩川 金珍圭 만천 김진규
經旬一雨洞程泥 열흘을 내린비에 마을길이 질퍽하니
月滿書 水滿溪 달은 서창에 가득하고 물은 시내에 가득하네.
年少乘時傾 共 연소한 이들도 틈을 내어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老翁無事賦時偕 늙은이는 일이 없어 함께 시를 읊네.
竹林 新禽宿 죽림은 울울한데 새로운 새가 자고
松樹陰陰白鶴樓 소나무 그늘 속엔 백학이 깃들었네.
暑退凉生霖歇際 더위 물러가고 시원한 바람 일어 장맛비 개니
雲歸東峽日斜西 구름 떠가는 동편 산에 석양이 드리웠네.
<시축Ⅰ> 蓮坡 金炳玹 연파 김병현
<시축Ⅰ>로 명명한 이 시축에 실려있는 시는 모두 6명이 참가하여 지은 31수이다. 이 들 중 만천과 연파, 삼계 등은 특히 자주 어울렸다. 모두 청주김씨이며 삼계는 만천의 족숙이 된다. 용두산 아래로 흐르는 호계천을 건너 석양녘에 돌길을 올라 솔숲 사이의 정자로 오른다는 내용을 보면 이 시축을 남긴 장소는 동백정임을 알 수 있다.
夏日登亭步不輕 여름날 정자에 오르니 걸음 가볍지 않으나
綠陰植杖聽禽聲 녹음 아래 지팡이 꼽고 새소리 듣노라.
送君街路平郊望 그대 보낸 길거리에서 넓은 들 바라보니
映水雲光繞遠城 물에 비친 구름빛이 멀리 성을 둘러 있네.
<시축Ⅱ> 晩川 金珍圭 만천 김진규
一到仙庄興不經 동백정에 한번 오름에 흥취 가볍지 아니하니
詩而兼酒又碁聲 시가 있고 술이 있으며 또 바둑이 있네.
酒翁志趣今來得 주인의 고상한 취미를 이제 와서 알겠으니
老柏蒼松繞作城 늙은 동백과 푸른 솔이 빙 둘러 성을 만들었네.
<시축Ⅱ> 冠山 崔炳元 관산 최병원
滿庭蒼翠四時佳 뜰에 가득한 푸르름 사시절 아름다우니
一抹淸風拂面斜 한줄기 맑은 바람은 낯을 비껴 스치네.
凜然爽氣灑心臆 어엿한 서늘 기운 가슴을 씻어주고
曲曲溪聲枕上加 굽이굽이 시내소리 베개 맡에 들려오네.
<시축Ⅱ> 冠山 崔炳元 관산 최병원
客去君留誼不輕 손은 가고 그대 머무르니 정의가 가볍지 않네
憑欄半日聽溪聲 한나절을 난간에 의지하여 시내소리 듣노라.
昔人已占亭名好 옛사람이 이미 좋은 정자이름 지었으니
冬柏蒼蒼作樹城 동백이 푸르고 푸르러 나무 성을 만들었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