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공화국의 서부지역은 전통적으로 중부 유럽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슬라브 민족의 거주지역이었다. 체코인은 전체 인구의 90% 이상을 차지하나 모라비아인들은 이들 내에서 자신들을 별개의 집단으로 의식하고 있다. 소수민족으로는 슬로바키아인들이 가장 큰 집단이며 이들 외에 모라비아 북동부의 폴란드인, 보헤미아 북서부의 독일인, 유동적이긴 하지만 로마인과 집시 등이 있다. 2024년 기준 인구는 1,050만 3,734명이며, 면적은 7.8만 평방키로 미터로 한국에 비해 약간 작은 나라이다.국민의 약 15%가 15세 이하이고, 19%는 65세 이상이다. 도시로의 국내이동량이 증가하고 있으며 인구의 73%가 도시에 거주한다.
체코는 1948∼89년 기간 동안에 모든 주요기업들을 정부가 소유했으며 소규모 수공업 분야만 자유기업활동이 허용되었다. 농경지 대부분이 국영집단농장 또는 협동농장으로 편성되고 모든 경제지역에 할당량이 책정되는 중앙정부의 5개년계획을 통해 생산과 개발이 통제되었다. 그러나 1993년 체코슬로바키아가 분할되면서 체코 경제는 대체로 시장 지향 체제로 바뀌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이었을 당시 체코는 공산당의 일당 지배하에 놓여 있었고 당 지도자들이 공직을 독점했다. 그러나 1989년 후반에 공산당은 권력에 대한 독점을 포기하고, 반공산당 조직인 시민 포럼과 연립정부를 이루었다. 이후 슬로바키아와 분리, 독립하여 1992년 12월 16일에 채택한 헌법에 체코 공화국은 주권을 가진 민주주의 법치국가로서 개인과 시민의 권리 및 자유에 기초하여 수립된 국가라고 명시되어 있다.
체코는 전통적으로 예술이 매우 발달한 나라이다. 문학은 18세기 후반부터 활발해졌다. 널리 알려진 시인인 카를 히네크 마하의 작품에 19세기초의 낭만주의가 잘 나타나 있으며, 카렐 차페크의 희곡과 소설, 프란티셰크 랑게르의 희곡들은 서방 세계에서도 널리 읽혔다. 체코인들은 예로부터 음악에 뛰어난 재질을 보여왔고 이들이 창작한 오페라·교향곡·합창곡 등은 여전히 인기 있다. 체코인 작곡가 가운데 베드르지흐 스메타나, 안토닌 드보르자크, 레오슈 야나체크, 보후슬라프 마르티누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한편 영화는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섬세하게 다루는 것으로 유명하다.
1918년 슬로바키아와 연방을 이룰 때까지 체코의 역사는 보헤미아 역사와 거의 다름없다.
이 지역에 최초로 정착한 사람들은 켈트계의 보이족으로 알려져 있고 이들로부터 보헤미아라는 지명이 비롯되었다. 서력 기원이 시작될 무렵 게르만계 마르코만니족이 보이족의 뒤를 이어 이 지역을 차지했으며, 5∼7세기에는 슬라브족이 이 지역을 휩쓸었다. 슬라브족의 일파인 체코인들은 9세기경 보헤미아 중부지역에서 세력을 떨쳤다. 슬라브족이 도착하기 이전부터 켈트족·게르만족·아바르족이 연속적으로 몰려들어와 모라비아와 슬로바키아에도 이미 사람이 살고 있었다.
1306년 프르셰미슬 왕가가 막을 내린 뒤 보헤미아의 왕권은 룩셈부르크로 넘어갔다. 1346년 카렐 1세가 왕위에 올랐고, 1355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카를 5세)가 되었다. 그는 프라하를 행정중심지로 삼았으며 보헤미아는 황금시대를 맞이했다.
15세기에는 체코의 성직자이자 학자인 얀 후스가 주도한 종교개혁운동이 보헤미아 전역을 휩쓸었다. 이 종교운동은 얀 후스가 체코어를 사용하는 대중에게만 지지를 호소하고 독일어를 사용하는 로마 가톨릭교도들과 유리되면서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으며, 그의 추종자들인 후스파 교도들은 그후 여러 세기에 걸쳐 정치적·종교적 권리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분괴되고, 토마슈 마사리크와 에드바르트 베네슈의 지도하에 보헤미아·모라비아·슬로바키아가 연방을 이룬 체코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이 탄생했다.
이후 70년 동안 체코의 역사는 체코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의 역사로 대치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중인 1944년 체코슬로바키아는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소련으로부터 교묘한 작전행동을 하달받고 끊임없이 지원을 받던 공산당원들은 1948년에 쿠데타를 일으키고 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소련의 감독하에서 체코의 공산당은 반대세력을 탄압하는 한편 산업을 국유화하고 농업집산화 정책을 추진했다. 1970, 1980년대에 체코슬로바키아는 동유럽의 국가들 가운데 경제적으로는 번영하면서 정치적으로는 매우 억압받은 국가로 꼽혔다.
1989년 후반 소련의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개혁과 개방 정책에 따른 민주화 물결이 동유럽 전역을 휩쓸면서 체코슬로바키아 역시 급변화했다. 1989년 11월 시민 포럼이 주도한 시민혁명으로 공산정권이 무너진 후 1989년 12월 29일 바츨라프 하벨이 새 정부의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개혁을 주도했다.
이때부터 경제 개혁에서 상대적인 소외감을 느끼게 된 슬로바키아에서 민족주의가 싹텄으며, 독립에 대한 요구가 일기 시작했다. 1992년 6월 5∼6일에 실시된 총선 결과 체코에서는 보수주의적 우익세력인 시민민주당(CDP)이, 슬로바키아에서는 좌익민족주의 성향의 민주 슬로바키아 운동(HZDS)이 각각 승리를 거두어 연방해체의 가능성이 높아졌다.
결국 양측 당수는 같은 해 6월 20일 분리독립에 합의했다. 1992년 7월 17일 하벨은 연방대통령직을 사임하고 1993년 1월 1일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독립했다. 1993년 1월 26일 바츨라프 하벨이 신생국 체코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체코와 한국은 1990년 3월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공식 수교 이전인 1934년 체코의 반추라(Z. Vancura) 교수가 한국계 미국인 작가 강용흘의 소설 <초당>을 체코어로 번역하여 소개한 바 있으며, 1987년에는 한국외국어대학교에 체코어학과가 설립되었다. 1990년에는 프라하에 코트라(KOTRA) 무역관이 개설되었다. 정상외교로는 1994년 체코의 바츨라프 클라우스(Vaclav Klaus) 총리 내외의 방한을 시작으로, 이듬해에는 김영삼 대통령이 체코를 방문했다. 2007년에는 체코 국립미술관 산하 아시아미술관에 한국실이 개관했다.
프라하는 블타바 강 유역에 있다. 9세기부터 세워진 건축물 유산이 풍부한 도시이다. 작은 정착촌들에서 비롯되었으며, 점차 확장되어 지금은 시가지가 구릉지대, 블타바 강 지류의 유역들, 강 연안의 계단식 대지까지 펼쳐져 있다. 19세기에 직물과 기계류 제조업 분야가 급속도로 발전한 이래 프라하는 체크의 경제를 주도하는 도시가 되었다.
제조업 분야에 가장 많은 노동력이 종사하고 있으며, 상업·건설업·교육·문화·행정·교통·통신·과학연구 분야가 그뒤를 잇고 있다. 주요공업은 중기계 및 정밀기계 제조업과 유명한 프라하 맥주를 비롯한 식품류 및 전자제품·화학제품 제조업이다. 블타바 강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면서 프라하 중앙을 가로지른다. 강의 서쪽 기슭에는 왕립 정원, 흐라트차니(프라하의 성), 정원과 공원으로 이루어진 말라스트라나[小地域] 등이 있다.
강의 동쪽 기슭은 주로 12세기에 조성된 스타레메스토(구시가지)와 14세기의 노베메스토(신시가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두 구역 모두에 역사적 기념물들과 교회들이 많이 있다. 특히 노베메스트의 건축물들로 인해 프라하는 '100개의 뾰족탑을 가진 도시'로 묘사되기도 한다. 오래된 구역들의 좁은 거리들, 작은 선술집들, 식당들과 넓게 트인 바츨레프스케 광장 및 현대적인 공원, 주택단지들이 대조적인 모습을 연출하고 있으며, 주택난의 해소를 위해 시의 변두리 지역에 신주택촌이 계속 조성되고 있다.
10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세워진 스바티이르지 교회를 비롯하여 고딕 양식의 성 비투스 대성당과 틴 교회, 바로크 양식의 발트슈테인 궁과 츨람갈라스 궁, 로코코 양식의 골스킨스키 궁, 고전주의 양식의 베드르지흐스메타나 박물관과 벨베데레 궁, 신고전주의 양식의 국립박물관과 국립극장 등에 이르기까지 프라하에는 갖가지 양식으로 세워진 훌륭한 건축물들이 많다. 유대인들이 오래전부터 프라하에 깊이 뿌리를 내렸는데, 이는 구예배당, 신예배당과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구유대인 묘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945년 이후의 도시계획에 의해 옛 도심지가 보존되는 한편 새 건축물들의 건립이 규제되면서 프라하는 건축면에서 더욱더 조화로운 도시로 가꾸어졌다. 프라하는 문화의 도시로 유명하며 특히 음악과 문학 분야에서 훌륭한 전통을 지니고 있다. 체크의 위대한 작곡가인 베드르지흐 스메타나, 안토닌 드보르자크, 레오슈 야나체크를 기념하는 음악제가 매년 봄축제 때 개최되며, 프라하가 자랑하는 관현악단인 프라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다. 한편 프라하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로는 프란츠 카프카, 라이너 마리아 릴케, 야로슬라프 하셰크 등이 있다.
★ 카를교는 구시가지와 말라스트라나를 이어주는, 체코에서는 가장 처음 만들어진 돌(석조) 다리다. 블타바 강 위에 세워진 다리 중 유일하게 보행자 전용 다리이면서 프라하 성, 천문 시계와 함께 프라하를 대표하는 관광의 중심이다. 전체 길이는 약 520m, 폭은 약 10m이며 30개의 성상들이 좌우 난간에 각각 마주보며 서 있다. 말라스트라나쪽과 구시가지쪽으로 양끝으로는 고딕 양식의 교탑이 각각 서 있다. 카를교 위의 성상들은 원본도 있지만 복제품도 마치 원본처럼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으며 복제품의 원본은 국립 박물관과 비셰흐라드 포대에 보관 중이다.
카를교 위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드는데 초상화와 캐리커처를 그리는 화가들, 아기자기한 기념품을 파는 노점상, 발길을 멈추게 하는 거리의 음악가들이 관광객들을 즐겁게 해준다. 또한 얀 네포무츠키 성상 앞에서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 때문에 얀 네포무츠키 성상 앞은 늘 소원을 비는 관광객들로 붐빈다.
심 산
까를교▼
프라하 구 시가 광장 틴 성당▼
얀후스 동상 ▼
구 시청사 ▼
프라하 구시가 가는 길 ▼
까를교 입구 ▼
카를 4세 동상 ▼
후면 프라하 성 ▼
까를교 ▼
니콜라스 성당 ▼
까를 4세 동상 ▼
루돌피 돔(콘서트홀) ▼
블바타강 까를교▼
까를교 입구 ▼
까를교 ▼
블타바강 ▼
네포무츠노 신부 상▼
네포무츠노 신부 동상 ▼
프라하 공예품 ▼
카를4세 동상▼
카를 4세는 당대의 가장 교양 있고 외교술에 뛰어난 군주로 알려진 인물이다. 무력사용보다는 외교로 원하는 바를 얻었다. 그의 재위 때 프라하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의 치세 이후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독일 제국의 제위는 보헤미아 왕에게 귀속하는 것이 거의 관례가 되었다. 1341년 보헤미아 왕국의 후계자로 지명되었고, 1346년 왕위에 올랐다. 또한 같은 해 교황으로부터 파문당한 루트비히 4세를 대신해 독일 왕위에 올랐으나, 루트비히 4세의 저항으로 2명의 독일 왕 중의 하나에 머물렀다. 루트비히가 죽고, 남부 독일의 여러 도시에 특권을 주는 등의 외교적 수완을 발휘해 독일의 유일 왕으로 인정받았다. 재위시절에 신성로마제국의 법령의 일종인 금인칙서를 공표했고, 예술과 과학의 관대한 후원자로서 특히 프라하의 예술을 후원했다.
바츨라프 광장 ▼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