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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敬睦會 원문보기 글쓴이: 玉泉
율곤 이중재 저 <불교는 인도에서 발생하지 않았다> 127쪽 부터 소개함...
실달다(悉達多)는 주(周)나라가 건국된 후 121년 후 5대 목왕(穆王B.C.1001∼947년) 때 태어났다. 석가가 태어난 서역 지역인 신강성(新疆省) 일대와 감숙성(甘肅省) 일부 지역, 서장성(西藏省) 남부인 지금의 인도 동북부에 있는 항하(恒河) 북부 지역과 청해성(靑海省), 그리고 사천성(四川省)과 광서성(廣西省) 광동성(廣東省) 일부 지역까지 다섯의 천축국(天竺國)의 강역이었음을 사서(史書)에는 기록되어 있다. 석가(釋迦)는 마야부인이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는 과정에서 꿈속에 있었던 음력 4월 초 8일의 그 해가 계축년(癸丑年)이라 했으므로, 석가는 분명 기원전 968년인 계축년에 태어났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 이유는 주(周)나라 목왕(穆王) 21년이 기묘년(己卯年)이라 했는데, 이때 석가의 나이는 27세였다. 왜냐하면 을유년(乙酉年) 2월 8일 묘시(卯時:아침 5시에서 7시 사이)에 득도(得道)를 한 그때의 나이가 33세라 기록하고 있으므로, 석가는 계축생(癸丑生)이 분명해진다. 따라서 마야부인이 꿈을 꾼 해가 계축년(癸丑年)이라고 되어있기 때문에, 석가는 기원전 968년에 태어났음을 확실히 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꿈을 꿀 때의 날짜가 음력 4월 초 8일이고, 잉태한 날짜는 음력 2월 초 8일이며, 태어난 날짜는 음력 12월 8일이었다. 그리고 석가가 득도(得道)한 날짜 또한 을유년(乙酉年) 음력 2월 8일 새벽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서, 초 8일과는 매우 인연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인 연관성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특히 음력 8일과 23일은 만조(滿潮) 때다. 만조란 바다물이 꽉 차게 들어와 있을 때의 밀물이다. 이때의 달은 반달로 지구와는 약간 반대쪽에 있다. 다시말해 태양과 지구에 가려있는 상태를 뜻한다. 석가의 생년월일이 계축년(癸丑年) 음력 12월 초 8일이라면, 간지법(干支法)으로 따지면 계축년(癸丑年) 을축월(乙丑月)이 된다. 다음은 당(唐)나라 태상(太常)이었던 하성식( 成式)이 저술한 유양잡조전집(酉陽雜俎前集) 정이교론(正二敎論)에 있는 원문을 싣고 풀어보기로 한다. 論稱道經云老子入關之于天竺維衛國國王夫人名曰淸妙老子困其晝寢乘日之精入淸妙口中後年四月八日夜半時剖右腋而生墮地卽行七步擧手指天曰天上天下唯我爲尊三界皆若何可樂者於是佛道興焉. 노자(老子)가 산해관을 지나 천축유위국으로 갔을 때, 천축유위국(天竺維衛國) 국왕부인의 이름은 청묘(淸妙)였다. 노자가 곤해 낮잠을 자고 있을 때, 해의 정기가 청묘의 입속으로 들어간 후 4월 8일 밤에 청묘의 우측 겨드랑이가 갈라지더니 아이가 태어나 땅에 떨어지는 즉시 일곱 발자국을 걸어면서 손을 들어 하늘을 가르키며 말하기를, 천상천하유아위존(天上天下唯我爲尊)이라 했다.… 본문에서 노자(老子)는 기원전 661년 전 사람이다. 그러니까 공자(孔子)보다 60년이 앞서 있다. 천축국(天竺國)인 다섯 천축국이 생긴 것은 전술한바와 같이 한(漢,BC.206년)나라 때 생겼으므로 노자(老子)보다 약 4백 년 후가 된다. 본문에서 주의깊게 보아야할 것은 역시 음력 4월 초 8일은 꿈속에 있었던 날짜다. 그러기에 우측 옆구리가 갈라서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일곱 발자국을 걸어면서 손을 들어 하늘을 가르키며 말하기를, 천상천하유아위존이라 했다. …그러기에 석가(釋迦)가 어디서 태어나 어느 시대에 살았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그저 꿈속에 있었던 얘기를 듣고 음력 4월 초 8일을 석가의 탄생일로 하고 있는 것은 정말 개탄스럽지 않을 수 없다.
석가의 생일은 4월 8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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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보면 흉노(匈奴)의 거점지역과 월지국(月支國)의 거점지역은 천축국과 완전히 일치한다. 그래서 금인(金人)이 처음 만들어진 곳이 흉노(匈奴)였을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당(唐)나라의 요사겸(姚思廉)이 지은 양서(梁書) 중천축국(中天竺國)편을 일부 소개해 보기로 한다.
中天竺國在大月支東南數千里 地方三萬里 一名身毒 漢世張騫使大夏見 竹杖蜀布 國人云市之身毒 身毒天竺 蓋音字不同 其實一也 從月支高附以西南至西海 東至槃越 列國數十每國置王 其名雖異皆身毒也.
중천축국(中天竺國)은 대월지국(大月支國) 동남으로 수천리(數千里) 떨어진 곳에 있는데, 그 지역은 3만리(三萬里)이다. 일명 신독국(身毒國)이라고도 한다. 한(漢)나라 때의 장건(張騫)이 대하(大夏)의 사신으로 갔을 때, 그는 그곳에서 공( )의 죽장(竹杖)과 촉(蜀)의 포목을 보았다. 나라사람들은 신독(身毒)의 시장에서 샀다고 했다. 신독(身毒)은 천축(天竺)이다. 비록 소리와 글자는 다르지만, 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월지(月支)의 고부국(高附國)에서 서남(西南)으로 가면 서해(西海)가 있다. 그리고 동쪽으로는 반월국(槃越國)에 이른다. 수십 나라(數十國)가 있고 모두 왕을 두었는데, 그 나라 이름은 비록 다르지만 모두 신독국(身毒國)이다.
곽박(郭璞)은 산해경에 주(註)하면서 천독은 곧 천축국이고 불타가 그 나라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산해경(山海經) 주(註) 발췌
海經卷十三
山海經第十八
〔海內經〕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天毒, 其人水居, 偎人愛之.
동쪽 나라 안과 북쪽의 모퉁이에 있는 나라 이름은 조선(朝鮮)이며 조선은 천독(天毒)이며, 그 사람은 물이 있는 곳에서 살고 사람을 사랑하며 가까이 한다.
郭璞云: 「朝鮮今樂浪郡也.」 珂案: 朝鮮已見海內北經
곽박이 이르기를 「조선은 지금의 낙랑군이다」라 하였다. 원가가 생각건대 조선은 이미 <해내북경>에 보인다.
郭璞云: 「天毒卽天竺國, 貴道德, 有文書.金銀.錢貨, 浮屠出此國中也. 晉大興四年, 天竺胡王獻珍寶.」 王崇慶云: 「天毒疑別有意義, 郭以爲天竺國, 天竺在西域, 漢明帝遣使迎佛骨之地, 此未知是非也.」 珂案: 天竺卽今印度, 在我國西南, 此天毒則在東北, 方位逈異, 故王氏乃有此疑. 或者中有脫文와字, 未可知也
곽박이 이르기를 「천독은 곧 천축국이니 도덕을 귀하게 여기고 문서와 금은 돈과 재물 등이 있고 불타가 그 나라에서 나왔다. 진(晉)나라 대흥(大興, 東晉,AD.318∼321년) 4년 천축(天竺)의 호왕(胡王)이 진귀한 보물을 바쳤다.」라고 하였다. 왕숭경이 이르기를 「'천독'은 아마도 별도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곽박은 '천축국'이라 여겼으나, 천축은 서역에 있으면서 한 명제 때 사신을 보내 부처의 뼈를 맞아들여 온 곳인데,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알지 못하겠다」라고 하였다. 원가가 생각건대 천축은 곧 지금의 인도로서 우리 나라의 서남쪽에 있으며 여기서 말하는 천독은 곧 동북쪽에 있으니 방위가 사뭇 다르기에 왕숭경이 그러한 의심을 품게 되었다. 혹은 그 문귀 가운데 탈락된 문장이 있거나 잘못 전해진 글자가 있다 하는데 알 수 없는 일이다.
郭璞云: 「偎亦愛也, 音隱외反.」 王念孫云: 「宗炳明佛論<弘明集卷二―珂>引作『偎人而愛人』, 又引注文: 『古謂天毒卽天竺, 浮屠所興.』」 郝懿行云: 「愛之, 藏經本作愛人, 是也.《列子》<黃帝篇>云: 『列姑射山, 有神人, 不偎不愛, 仙聖爲之臣.』 義正與此合. 袁宏漢紀云: 『浮屠, 佛也; 天竺國有佛道, 其敎以修善慈心爲主, 不殺生.』 亦此義也, 玉篇云: 『偎, 愛也.』 本此. 又云: 『北海之偎, 有國曰偎人.』 以『偎人』爲國名, 義與此異.」 珂案: 宋本·吳寬抄本正作偎人愛人
곽박이 이르기를 「'偎' 역시 '愛'의 의미이다. 음은 隱偎反이다」라고 하였다. 왕념손이 이르기를 「종병의 명불론(홍명집 권2 ― 원가 주석)에 『偎人而愛人』으로 인용되어 있으며, 또 주석의 문장을 인용하여 『예전에 말하던 천독은 곧 천축으로 불타가 일어난 곳이다』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학의행이 이르기를 「'愛之'는《장경》에 본디 '愛人(남을 사랑한다)'으로 되어 있으니 그것이 옳다.《열자·황제편》에 이르기를 『열고사산(列姑射山)에 신인이 있어 가까이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으며, 선인과 성인들이 그에게 신하 노릇을 한다』 하였는데 그 의미가 바로 여기와 부합한다. 원굉의《한기》에 이르기를 『부도는 부처이다. 천축국에 불도가 있으니 그 가르침은 착하고 자비심 있는 마음을 닦는 것을 위주로 하며 살생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역시 여기서의 뜻과 같다.《옥편》에 『偎는 愛를 말한다』고 한 것은 여기에 근거한 것이다. 또 이르기를 『북해의 모퉁이에 외인(偎人)이라는 나라가 있다』라 하여 『偎人』을 나라의 이름으로 여겼으니 그 의미가 여기와 다르다」라고 하였다. 원가가 생각건대 송본과 오관의 필사본에는 '偎人愛人'으로 바로 되어 있다.
산해경(山海經) 주(註) 발췌 끝
곽박(郭璞)은 천독(天毒)이란 명칭이 천축(天竺)으로 발전 되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동이(東夷)의 일부 세력이 천축(天竺)으로 되었고 동이(東夷)는 구이(九夷)로 나누어져 대륙전체로 퍼져나갔다고 보아야한다.
수경주소(水經注疏)의 하수(河水)편에서는 천축제국(天竺諸國)은 은(殷)나라 백성들이 남쪽 또는 서역쪽으로 가서 천축국(天竺國)을 이루었다고 적고있다. 본래 천축국(天竺國)은 인도(印度)에 없었다는 사실을 정사(正史)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중천축국(中天竺國) 사람들은 은(殷)나라 백성들 이라고 적고있다. 그렇다면 석가(釋迦)의 선조(先祖)는 은(殷)나라 였음을 알수 있는 대목이다.
그외에 보충자료로서 천축국에 대해서 조금만 더 언급해 보기로 한다.
천축국(天竺國)의 발생 출전 : 律坤 著 " 불교의 뿌리역사 . 佛敎는 인도에서 발생하지 않았다 "
천축국(天竺國)을 살펴보기로 한다. 송(宋)나라 때 정초(鄭樵)가 지은 통지(通志)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天竺後漢通焉卽漢時捐毒國也 從月氏高附以西南至西海東至磐越國 皆天竺之地 天竺有別城數百城置長 有別國數十國置王 雖各小異而俱名天竺 都臨恒河 名迦毗梨河 本名新淘源出崑崙 分爲五派總爲恒河其水. 中略
천축국(天竺國)은 후한(後漢) 때 있었던 나라다. 한(漢)나라 때는 연독국(捐毒國)이다. 월씨(月氏)의 고부국(高附國)에서 서남(西南)으로 가면 서해(西海)에 이르고, 동쪽으로 가면 반월국(磐越國)에 이른다. 모두가 천축국 땅이다. 천축에는 독자적인 성(城)이 수백이 있는데, 각 성에는 장(長)을 두었다. 독자적인 나라도 수십이 되었는데, 왕(王)을 두었다. 비록 그 이름들이 다르기는 하지만 모두 천축(天竺)의 나라였다. 도읍지에는 항하(恒河)흐르고 있는데, 강 이름은 가비리하(迦毗梨河)였다. 본래 그 이름은 신도(新淘)로서, 원 물줄기가 나오는 곳은 곤륜산(崑崙山)이다. 이곳에서 다섯 물줄기가 내려오다가 합쳐져 항하(恒河)의 물이 된다.
天竺後漢通焉 卽前漢時身毒國 從月氏 高附國以西南至西海 東至盤起 皆身毒之地 身毒有別城數百 城置長 有別國數十 國置王 雖名小異 而俱名身毒 都臨恒河 一名迦毗梨河 靈鷲山 胡語曰耆 山 山有靑石 頭似鷲鳥 其時皆屬月氏 月氏殺其王而置將 令統其人…
천축은 후한(後漢) 때 일컬어졌고, 즉 전한(前漢) 시에는 신독국(身毒國)이다. 월씨(月氏)의 고부국(高附國)에서 서남으로 가면 서해(西海)에 이르고, 동으로는 반기(盤起) 즉 반월국(盤越國)이 있는데, 모두 신독국(身毒國)의 땅이다.
신독국(身毒國)은 독자적인 성(城)을 수백 개 가지고 있으며, 성(城)에는 장(長)을 두었다. 그리고 독자적인 나라 역시 수십 국(數十國)으로, 나라에는 왕을 두었다. 비록 그 이름들은 다르지만 모두 신독(身毒)에 속해 있었다. 도읍지에는 항하(恒河)에 흐르고 있는데, 일명 가비리하(迦毗梨河)라고도 한다.
영취산(靈鷲山)이 있는데, 몽고말로는 기도굴산(耆 山)이라 한다. 산에는 푸른 돌이 있는데, 산 정상이 흡사 독수리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 당시에는 모두 월씨(月氏)에 속해 있었다. 월씨는 천축의 왕을 죽이고, 그곳에 우두머리를 두고 그들을 다스렸다.
월씨국(月氏國) 동남(東南)에 있다고 했는데,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에서 월씨국을 찾아보았다.
月氏.
월씨(月氏)는 옛 나라 이름이다. 처음에는 감숙성(甘肅省)의 서쪽 경계에 거주했다. 한(漢)나라 때 흉노(匈奴)에게 공격을 받아 서쪽으로 도망을 간 곳이 아모하(阿母河) 강 주변이었다. 월씨(月氏)는 그곳에서 대하(大夏)라는 나라의 신하(臣下)로 복종했다. 도읍지는 아모하(阿母河)의 북쪽에 있었는데, 이들을 대월씨라고 한다. 그러나 옛 땅(감숙성의 서쪽 경계)에 계속 머물러 살고있는 이들은 소월씨라고 불렀다. 대월씨가 강성했을 때에는 인도 항하 유역, 극십미리, 아부한과 총령 동서 지역까지 점령을 했다…
晉時十六國之一. 匈奴赫連勃勃背秦稱大夏天王. 據朔方通萬城. 有今陝西西部寧夏東南部及內蒙古鄂爾多斯之地…爲吐谷渾所滅
진(晉)나라 때의 19국 중의 한 나라이다. 흉노의 혁연발이 있었는데, 그가 진(秦)나라로부터 등을 돌리고 나라를 세워 대하(大夏)의 천왕으로 칭하고, 북방 지역의 1만 성(城)을 차지했다. 지금의 섬서성 서부, 영하 동남부와 내몽고 곽이다사의 땅이다.…토곡혼에 의해 멸망되었다.
천축국(天竺國)의 발생은 전한(前漢)시 신독국(身毒國)의 후예(後裔)로서 후한(後漢) 때 천축국(天竺國)이 생겼음을 나타내고 있다.
앞에서 보는 것처럼 천축국(天竺國)은 인도(印度)가 아님을 잘 나타내고 있다. 다만 천축국이 후한(後漢) 때 와서 발생한 것으로 보아 불교는 고대로부터 곤륜산(崑崙山) 일대에서 발생하여 후한(後漢) 때의 천축국으로 이어져왔음을 알 수 있다.
천축국(天竺國)의 성(城)은 수백 군데로 되어있고 따라서 나라들도 수십 국이라고 적고있다. 이제까지 중천축국(中天竺國), 남천축국(南天竺國), 동천축국(東天竺國), 그리고 서천축국(西天竺國)과 북천축국(北天竺國) 이와같이 오천축국(五天竺國)만 있는 게 아니라 수백 곳의 성(城)과 수십 개의 나라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 지금의 인도(印度) 동북부에 있는 항하(恒河) 북쪽으로 펼쳐져 있는 천축국(天竺國)은 다섯 나라가 아닌 수십 국이 있었음을 본문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기에 후한(後漢) 초기에 천축국은 중국 대륙의 서북부와 서부, 그리고 곤륜산(崑崙山) 남부와 서장성(西藏省), 청해성(靑海省), 사천성(四川省) 서부, 운남성(雲南省) 동남까지 광범위한 지역까지 확산되어 있었다.
다섯 천축국 중 가장 불교가 성한 나라는 중천축국이다.
천축국에서는 담비(貂) 표범(豹)등의 가죽이 많이 생산되었고 물소 코끼리 등이 많았다는 기록이다.
천축국은 고원지대이므로 금 동 철 아연 주석과 바위틈에서 채취된 꿀벌 생강 옥 산초 향 산호 과일 감귤 같은 과일 종류가 많이 생산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하여 서역의 대진(大秦)과 남쪽에 있던 안식(安息:월남지방)과 부남(扶南)국간에 무역을 활발히 했다는 기록이다.
특히 천축국에서는 문자가 발달되어 천문(天文)과 역서(曆書:달력과 역술서적), 그리고 산술(算術) 서적 등이 매우 발달되었다. 또 전투용의 활, 창, 갑옷과 병법과 지리가 발달되어 고도의 문명국임을 알 수 있다.
수(隋)나라 양제(煬帝 A.D.605∼617년) 때는 서역의 토번국(吐蕃國) 외 여러 서역국들과의 교역이 활발했지만 유독 천축국과는 교역이 불통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다섯 천축국은 당(唐)나라가 들어서면서 멸망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당나라 초기부터 서역 평정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현장(玄裝) 법사가 답사할 때만 하더라도 중천축국 속에 건타라국(建馱羅國)이 있었다. 건타라국 주위에는 가엽미라국(迦葉彌羅國)이 서북으로 있었고 돌궐(突厥)도 있었다. 돌궐 주위에는 바라문(婆羅門)이 있어 계빈( 賓) 왕과 돌궐 왕들은 강한 군사를 가지고 있었다.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위서서역전(魏書西域傳)》《고승전(高僧傳)》《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의하면 서북부 주위로는 파사(波斯), 반반(盤盤), 계빈( 賓), 언기(焉耆), 구자(龜慈), 소륵(疏勒), 고묵(姑墨), 우전(于 ), 구반(句盤) 등의 강대국이 있었다. 이들 나라 남동쪽에는《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제5권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허황옥(許黃玉)의 조국인 아유타국(阿踰 國)이 있었던 곳이다.
그러니까 아유타국은 중천축국의 제후국인 셈으로 건타라국의 옛 도읍지에 인접해 있었던 나라이다. 이들 나라는 모두 중천축국의 속국이었으며 불교의 본산지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아유타국은 대승불교(大乘佛敎)를 숭앙하고 있었음을《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에서 밝히고 있다.
오천축국(五天竺國)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통전(通典)을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천축은 후한(後漢 A.D.25∼220년) 때 있었다. 전한(前漢 B.C.206∼AD.220년) 때는 신독국(身毒國)이다. 전한 초에 장건(張騫)이 대하(大夏)에 사신으로 갔는데, 그는 그곳에서 공( )의 죽장(竹杖)과 촉(蜀)의 포목을 보았다. 어떻게 이것을 얻었으냐고 대하국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말하기를, 신독국의 시장에 가서 사왔다고 했다. 신독국이 곧 천축국(天竺國)이다.
천축을 혹 마가타(摩伽 )라고도, 바라문(婆羅門)이라고도 했는데, 총령( 嶺)의 남쪽에 있었다.
즉 총령은 곤륜산맥(崑崙山脈)을 뜻한다. 이곳은 신강성(新疆省) 남부이며 서장성(西藏省) 북부지역을 말한다. 월씨국(月氏國)에서 동남으로 수천리(數千里) 떨어진 곳인데, 지역은 3만여리(三萬餘里)였다. 여기서 월씨국(月氏國)에서 동남으로 수천 리 떨어져 있고 그 강역이 3만여 리라고 한다면, 인도(印度) 항하(恒河) 북쪽으로 천축국이 걸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서장성(西藏省)에서 운남성(雲南省), 감숙성(甘肅省) 북부, 청해성(靑海省) 등지에 걸쳐 있는 거리라고 보아야한다. 한반도 전체가 3천리(三千里)임을 비교해 보면 10배가 되는 강역이라고 보아야한다.
천축(天竺)은 다섯 천축으로 나누어졌다. 첫째 중천축(中天竺), 둘째는 동천축(東天竺), 세째는 남천축(南天竺), 네째는 서천축(西天竺), 다섯째는 북천축(北天竺)인데 각각 그 지역이 수천리(數千里)였다. 그리고 성(城)과 읍(邑)은 수백(數百) 곳이었다. 남천축국은 대해(大海)와 접해 있었다. 북천축국은 설산(雪山) 가까이 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 막혀 있는데, 남쪽으로 계곡이 있어 나라의 문으로 통하고 있다. 동으로는 동천축국(東天竺國)이 있었는데 대해(大海)의 경계라고 했다.
여기서 동쪽 지경에 있는 큰 바다라면 지금의 광동성(廣東省)이나 복건성(福建省) 가까이 있었던 게 아닌가 한다. 특히 동천축국은 부남(扶南)과 임읍(林邑)과 인접해있었다고 했다. 여기서 부남(扶南)은 베트남의 접경지대까지를 말하며, 임읍(林邑)은 태국(泰國) 북부지역을 뜻한다. 그리고 부남(扶南)과 임읍(林邑)은 소해(小海)로 막혀 있다고 했다.
도호부가 있는 곳으로부터는 2,800리 떨어진 곳이다. 남쪽으로는 총령( 嶺)인 곤륜산맥과 서로 연결되어 있고, 북쪽으로는 오손(烏孫)과 접하고 있다. 오손(烏孫)은 신강성(新疆省) 천산(天山)과 알타이 산록 일대에 있었다.
연독국 사람들의 의복은 오손 사람들과 비슷했으며, 물과 풀을 따라 이동했다. 옛날의 색종(塞種)이다. 안사고(顔師古)의 말에 의하면 연독(捐毒)은 즉 신독(身毒)이며, 신독(身毒)은 천축(天竺)이라 했다.
색종(塞種)은 즉 석종(釋種)을 말한다. 말하자면 깨달은 사람들의 가문, 석씨(釋氏) 가문의 혈족이라는 말이다.
태평어람(太平御覽)·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통지(通志)·후한서(後漢書)·역대신선통감(歷代神仙通鑑)·위서(魏書)·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구당서(舊唐書)·당서(新唐書)·양서(梁書)·책부원구(冊府元龜)·송서(宋書)·법화경(法華經:일명 妙法蓮華經)·금강경(金剛經)·아함경(阿含經)·반니원경(般泥洹經)·수행본기경(修行本起經)·중본기경(中本起經)·소품반야파라밀경(小品般若波羅密經)·통전(通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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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의 서문에 서역에 있었던 대월지국(大月支國)에서 불경을 가지고 왔다고 기록하고있는데 그 이전의 기록에는 사신만 왕래했지 불경(佛經)이나 금인(金人)을 들여왔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흉노(匈奴)가 제천금인(祭天金人)하였다는 기록이 한서(漢書)에 있고 한(漢) 무제(武帝)때 장군 곽거병(藿去病)은 흉노로 부터 금인(金人)을 빼앗아 부수어버렸다고하였으니 금인은 흉노(匈奴)의 휴도왕(休屠王)이 하늘에 제사지내기 위해 천신을 형상화한 것이 분명하였을 것이다.
천신(天神)은 유목민족의 신(神)이다. 바로 단군(壇君)을 뜻한다. 단군(壇君)은 제터단자를 써야한다. 담국이 단국이고 단국(口國= 에운담 + 나라국)이며 한국(桓國)이다.
태고시대(太古時代)에 天山일대의 탑리목사하(塔里木斯河)의 유역(流域)에 한국(桓國)이었다.
단군(壇君)의 본 뜻은 봉선(封禪)을 주관하는 최고의 통치자 즉 천자(天子), 천산(天山)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땅위의 최고통치자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역대 단군들은 모두가 도통(道通)을 하였기 때문에 道를 통한민족이라고해서 배달(倍達)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요즘은 단군(壇君)하면 바로 무당이라고하는 사람도 적지않다. 틀린말은 아니라고 본다.그것은 유목민사회에서 단군의 역활이 샤머니즘화 되고 무당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그런 유습으로 인하여 월지국(月支國)에 금인(金人)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월지국(月支國)은 흉노(匈奴)에 의해서 서역으로 쫒겨나게 되지만 그 흥망사는 결코 흉노(匈奴)의 세력을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필자는 이 모두를 흉노(匈奴)로 보고있다.
이장에서 대월지, 소월지, 대하, 흉노, 천축국 등을 세분화해서 구별하면 금인(金人)의 정확한 출현을 밝히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들이 모두 흉노라는 유목민문화를 공유하고 있었다면 필자는 단연코 금인(金人)의 고향은 흉노(匈奴)라고 말할 것이다.
흉노(匈奴)는 공부 못하고 머리가 나쁘다고해서 또는 죄를 지은 사람들이 유배를 당했거나 전쟁으로인한 난리를 피해서 달아난 사람들이 중원의 북쪽 미개척지로 쫒겨나서 형성된 종족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몽골의 선조가 되기도하고 돌궐 . 부여 . 고구려 등으로 그 뿌리가 이어진다.
흉노(匈奴)가 생기기에 앞서 치우시대부터 이곳은 제철기술이 발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치우황제가 동두철액(銅頭鐵額)을 하고 황제(黃帝)를 제압했다는 기록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중원의 북쪽은 지하자원이 풍부하고 무려 1만 2천년전에 발생한 흑피옥문화에서 밝혀진것 처럼 석재를 가공하는 기술과 돌을 다루는 기술 등 막말로 공부빼고는 못하는게 없을 정도로 과학기술에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흉노(匈奴)제국은 머리대신 무력으로 일어선 나라이고 단군의 전통을 계승하였기 때문에 제천(祭天)하였으며 그 숭배의 대상으로 금인(金人)을 만들었다고 본다. 그 기술의 바탕은 바로 치우황제의 동두철액(銅頭鐵額)까지이어져있다.
첫댓글 글이 모두 훌룽하고 타당한데 ``머리 나뿌고 죄지은 사람들이 쫓겨가 흉노가 되었다``` 이 부분이 문제입니다 흉노는 한자를 그런 나쁜 이미지로 썼는데 이건 의도적으로 그런 것 입니다 한자를 보지 말고 발음만 가지고 보면 흉노는 순누= 선우라고 발음 되고 순누는 태양과 순녹 으로 사는 사람들이라는 의미 입니다 유목민일 뿐 못난 사람들이 밀려나 이룬 집단은 아닙니다 바로 잡습니다
위 본문 중 에 안식(安息)은 오늘 날 이란 이므로 바로잡으면 안식이 아니라 安南 입니다 안남이 오늘날 배엣남 (베트남)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