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갔다.
'미션컴퍼니'였다.
그 회사가 표방하는 고유한 미션을 좋아했고 그래서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거길 선택했다.
그곳에서 좋은 인연들을 많이 만났다.
모두가 착하고 순수한 사람들이었다.
입사 후 퇴직할 때까지 한 사업부에서 미더운 땀을 쏟았다.
빼를 묻고 싶었고 그런 자세로 노력했다.
다시 태어나도 그런 열정을 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열과 성을 다했다.
그러나 그 직장을 떠난지 어느새 17년째가 되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IMF 경제위기'가 터졌기 때문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동료들이 직장을 떠났고 국내,외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래도 지금까지 대부분의 동료들과 안부를 전하며 살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들이었고 귀한 인연이었기 때문이었다.
OB들을 위한 밴드도 만들었다.
내가 그곳에 짧은 글을 하나 올렸다.
이 예쁜 가을에 사람 냄새가 그리워서 였다.
우리들 서로에게 풋풋하고 싱그런 의미이자 행사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글의 내용은 이랬다.
아내 없이 세 자녀를 잘 키워낸 남자가 있었다.
'태준 형'이었다.
어느 때엔 형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해 지곤 했다.
늘 애틋함이 묻어나는 형이었다.
그래서 삼양동의 형네 집을 가끔씩 방문했었다.
빈대떡이나 파전을 부쳐 막걸리도 같이 마시곤 했다.
호박과 상추 등 싱싱한 채소는 형네 집 담장을 따라 작은 채전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직접 기른 푸성귀를 사용했다.
형네 집에 필요한 것들이 내 눈에 띄면 다음 방문 때 그 물품을 사갔다.
그런 세월도 뒤돌아 보면 금방이었다.
어느새 13-4년이 흘렀으니 말이다.
누구 보다도 내실 있고 멋진 인생을 산 형에게 이 자리를 빌려 진심어린 존경과 감사의 박수를 보낸다.
태준 형은 애틋하게 1남2녀를 키웠다.
형에겐 '금지옥엽'의 자녀들이었다.
이번 가을에 둘째 딸 '옥희'가 시집을 간다.
만사를 제쳐두고 식장으로 달려가서 축하의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홀로 사시는 내 어머니께 어떤 위중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 나는 꼭 축복의 웨딩 현장으로 가려 한다.
'옥희'에 대한 축하도 축하지만 고생 많았던 태준 형의 그 질박하고 따스한 손을 다시 한번 꼬옥 잡아주고 싶다.
형의 눈물과 노고를 잘 알고 있기에 더욱 그런 마음이 들었다.
사는 게 별건가?
서로 들여다 보고, 시시때때로 웃고 떠들며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이 인생 여정일 테지.
혼사는 10월 11일, 일요일이다.
장소는 의정부역 3번 출구 앞 '낙원 웨딩홀' 3층이다.
젊어서는 많은 연봉과 높은 직위가 최고인 줄 알았다.
지금 내 나이 쉰둘.
살아보니 재물과 권세보다 다른 가치들이 우리네 삶에 더 필요함을 절감했다.
그건 '사람'이었다.
또한 '사랑'이었고 '배려'였으며 '관심'이었다.
우리 '블루진 사업부' 형제들도 바쁜 일상에 분주하겠지만 11일은 시간을 할애해 태준 형의 손길을 맞잡아 주었으면 좋겠다.
상호간에 풋풋한 격려와 축하를 건네는 것이 우리 모두를 위한 바람직한 삶의 모습이 아닐까 한다.
형수님은 아침에 출근하다가 뇌출혈로 대문 앞에서 쓰러졌다.
그렇게 황망하게 하늘나라로 떠난 뒤로 홀로 된 형이 눈물로 키워 낸 딸이었다.
두 딸들 중 동생이 이 멋진 시월에 시집을 간다.
생각만 해도 내 마음이 울컥하고 뜨거워 진다.
인생은 환희와 기쁨의 여정이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엔 오랜 기다림이자 고행의 과정이기도 했다.
그래서 옥희의 결혼을 생각하니 내 가슴이 더 벅차오르는 것 같다.
시월이다.
날씨가 제법 쌀쌀해 졌다.
사랑하는 형제들 모두 건강관리 잘 하시고 건승하시길 빈다.
그리운 형제들에게 깊은 감사를 전한다.
JEANS TEAM.
브라보.
2015년 10월 2일.
태준 형의 둘째 딸, 옥희의 결혼을 생각하며 뭉클한 가슴으로 쓰다.
사랑하는 옥희야.
네 결혼식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영원토록 행복하게 잘 살아라.
너를 위해 늘 기도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