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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군산시 해망로 214 (장미동 23-1번지)
관람시간 매일 하절기(3월~10월) 09:00-18:00 / 동절기(11월~2월) 09:00-17:00
매주 월요일 휴관
입장료 : 성인 500원 / 청소년 300원 / 어린이 200원
65세이상 무료관람
빈해원 길건너편 군산근대건축관이 있다.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으로 건물 전면에는 화강석으로 장식한 기단과 중앙 현관, 경사가 급한 지붕 등을 배치하여
은행 건축의 장중한 이미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곳은 군산의 근대사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건물로,
일제강점기 군산을 배경으로한 채만식의 "탁류"에 고태수가 다니던 은행으로 등장한다.
군산근대미술관도 은행건물이었는데... 군산근대건축관도 딱봐도 은행건물이다.
구(舊) 조선은행 군산지점 (국가등록문화재 제374호 2008. 2. 28.)
조선은행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중앙은행 격으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 통치와 아시아 침략을 지원하였다.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 건물은 1922년에 이왕가 미술관과 숙명여자전문학교를 건축한 나카무라 요시헤이가 준공하였다.
군산 내항에 인접한 이곳 장미동은 일제강점기 군산의 도심으로 최고의 번화가였기에 금융기관과 공공기관이 많이 모여 있었다.
조선은행의 전신은 순종3년(1909)에 통감부가 설치한 국책은행인 구(舊) 한국은행이고,
을사늑약과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에 의해 1911년 조선은행법이 반포되면서 조선은행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조선은행 군산지점은 순종3년(1909)에 구 한국은행을 설립할 때 군산출장소로 11월 24일 경성에 있던 본점과 함께 개업했다.
처음에는 기존의 제일은행 군산출장소를 인수하면서 한국은행 군산출장소로 출발하였다.
당시 위치는 현재의 군산세관 남쪽 부근이다.
군산출장소는 조선은행의 성장과 더불어 1916년 진남포, 목포, 부산 출장소와 함께 지점으로 승격되었다.
지점으로 승격되면서 1920년부터 이곳 새 건물과 사택을 짓기 시작하였고, 1922년 완공되었다.
1953년 이후에는 한일은행 군산지점으로 사용되었다.
1981년 민간에 매각된 이후 처음에는 예식장, 1984년부터는 나이트클럽, 그리고 노래방 등 상업 건축물로 사용됐고
화재가 난 이후로는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건물이었다가,
2008년 2월 28일 국가등록문화재 제374호로 지정되어 수리보수로 새롭게 단장하여 현재 군산근대건축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박물관 통합권(성인 2,000원 / 청소년, 군인 1,000원 / 어린이 500원)으로 할인된 금액으로 이용할 수 있는 곳이지만
전북투어패스를 이용해서 입장하였다.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은 붉은 벽돌로 지어진 2층 높이의 건물이다.
그 내부를 하나의 공간으로 높게 지어서 건물의 분위기가 매우 웅장하다.
경술국치 1910년 8월 29일 "나라를 잃었던 자들아 그날을 기억하라"
경술년에 일어난 치욕스러운 일이란 뜻으로 일제에게 우리나라가 주권을 완전히 빼앗긴 사건을 말한다.
순서를 기억해 두자!
1. 1905년 을사늑약(일사조약) 외교권 강탈
2. 1907년 한일 신협약 군대해산
3. 1910년 경술국치(한일합병/한일병합) 통치권(주권) 이양
흔적의 재생복원이라는 제목으로 당시에 있었던 벽체, 기둥, 천정을 과거 그대로 보존하여 투명하게 노출하는 전시물들이 있다.
구) 군산상공회의소
이 건물은 1934년 4월에 지어진 군산공회당으로 넓은 강당과 사무실, 부속 건물로 구성된 2층 건물이었다.
1930년에 소실된 중앙로 1가의 구) 군산상공회의소를 대신하여 군산상공회의소로 사용되었으며,
1977년 청구물산주식회사의 부설학교로 개교한 청구여자중학교의 교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장식 없이 곡면으로 처리된 정면에서 당시 유행하던 모더니즘 건축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이제 고등학교 2학년이 되는 막내아들 민수는 메디컬로 진로를 수정했지만 중학교때는 가우디를 존경하며 건축가가 꿈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보는 눈이 남다르다.
구) 군산역사
이 건물은 1912년 3월 6일 호남선의 지선으로 군산선이 개통될때 세워진 모습으로 2층의 일본식 목조건물 모습인데
내부는 1층과 2층이 트여있어 넓은 대합실을 갖추고 있는 큰 역이었다.
아쉽게도 1950년 7월 1일 한국전쟁 중에 소실되었다.
군산의 근대 건축물을 공공기관, 의료/금융기관, 교육기관, 일반 건축물로 구분하여 분야별로 비교하여 살펴볼 수 있다.
구) 군산부청
이 건물은 1928년 11월 준공된 구) 군산부청 건물로 본관은 적벽돌로 지은 2층건물로 남향의 일자형 건물이었다.
당시에는 공사비가 6만원이 소요되었다는데 본 건물이 457평 정도로 부청건물로는 매우 큰 규모였다고 한다.
절제 문으로 되어있는 곳은 예전 금고실이다.
조선은행 군산지점의 금고로 사용되었던 공간으로 현재는 "동아시아의 조선은행"을 보여주는 전시실이다.
조선은행은 나라의 돈을 발행하는 발권은행으로서의 역할과 함께 일반적인 은행 업무를 겸하고 있었다.
조선은행이 발행한 돈은 일본은행이 발행한 돈과 1:1로 교환이 되었으며, 통화의 발행액을 조정하는 역할을 하는 등
한 나라의 중앙은행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발권은행의 장악은 조선의 수탈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통화량이 늘어나면 물가가 올라가고 화폐의 가치가 떨어지는데...
돈을 마구 찍어내어 일본인에게 낮은 이자로 대출을 해주고 이 돈으로 조선의 농지를 사들이는 식으로 착취해 나갔다.
이와 동시에 상업은행으로서의 기능도 담당하였는데 일본, 조선, 만주, 중국간의 외환거래를 담당하는 것과 더불어
지역에서의 예금과 대출을 담당함으로써 상업, 무역은행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후 조선은행 군산지점은 상업은행으로서의 기능이 강조되었으며,
일반 예금의 입출금을 비롯하여 군산항을 통해서 반출되는 쌀의 대금자금과 농지거래를 위한 대출 등의 업무가
군산지점의 주요업무 중 하나였다.
조선은행은 조선총독부 아래에서 오직 조선의 수탈만을 위한 철저한 계산하에 움직였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은행의 대형화가 추진되고, 은행법의 개정 등으로 금융기관의 분화가 시작된다.
조선은행도 조선저축은행이 설립된 이후 일반 소액저축예금 업무를 이관하고 정책금융기관으로서의 역할에 집중하게 된다.
여기도 써있다. "이 금고가 채워지기까지 우리민족은 헐벗고 굶주려야만 했다"
100원의 가치가 이 당시에는 상당히 높았다.
기록을 보면 소 한 마리가 50~60원 가량하였다고 하며 지금으로 대략 환산하면 800만원 이상으로 짐작된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서 나타난 조선은행에서 일어났던 이야기
"그걸 오늘 지금 좀. 그렇게 해주게."
"내일 해달라더니?"
"아냐. 오늘루."
태수는 전화를 끊고, 도로 제자리로 돌아와서 털신 걸터앉는다.
은행시간이 거진 촉하게 되어서, 웬 낯모를 사람이 아까 형보와 이야기를 하던 소절수를 가지고 돈을 찾으러 왔다.
형보는 태수의 이 심부름을 가끔 해주기는 해도 제 몸을 사리느라고 언제든지 한다리를 더 놓지, 제가 직접 오는 법이 없다.
작년 겨울 백석이라는 대금업자의 소절수를 만들어 쓰는 것으로부터 그는 '사기' 와 '횡령' 이라는 것의 첫 출발음 삼았다.
큰 대금업자랄지, 그밖에 예금한 금액이 많고, 은행으로 들이고 내고 하기를 자주하는 예금주들은,
그러하기 때문에 액면이 많지 않은 위조 소절수가 자기네 모르게 몇 장 은행으로 들어가서 '조오지리'가 맞지 않더라도
좀처럼 눈에 띄지를 않는다.
그러므로 그러한 위조 소절수가 은행에 들어오더라도 그게 위조인지 아닌지를 밝혀야 할 당좌계에서
그냥 씻어서 넘기기만 하면 일은 우선 무사하다.
태수는 그 묘리를 알았던 것이다.
그는 은행에서 소절수첩을 빼내오고, 백석이의 도장을 그대로 새기고 글씨를 본받아 백석이 자신이 발행한 소절수와 언뜻
달라 보이지 않는 것을 만들기에 그리 힘들지 않았다.
그 놈을 믿는 친구라는 형보더러 찾아 달라고 맡기고, 그럴라치면 형보는 다시 다른 사람을 시켜 은행으로 찾으러 보낸다.
은행에서는 태수가 그것을 어엿이 받아 장부에 기입을 해서 현금계로 넘기고, 현금계에서는 아무 의심도 없이 돈을 내주고,
그 돈이 조금 후에는 형보의 손을 거쳐 태수에게로 돌아 들어오고, 이것이다.
그가 처음 그렇게 소절수를 위조를 해서 쓸 때에는 손이 떨리고, 며칠동안은 가슴이 두근거리고 했으나,
차차 맛을 들이고 단련이 되면서부터는, 돈이 아쉰 때면 제법 제 소절수를 발행하듯 척척 서먹었다.
서설 "탁류" 중 내용 발췌
*소절수(小切手): 은행에 당좌 예금을 가진 사람이 소지인에게 일정한 금액을 줄 것을 은행 따위에 위탁하는 유가증권
물속에서 오랫동안 있어서 동전의 형태를 제대로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어마어마한 양의 동전이었다.
근대 중화민국과 홍콩 주화인데...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비슷한 방법으로 중국이나 홍콩 등에서도 수탈을 했던 모양이다.
전쟁 중인 1945년 7월 화물선 시마마루12호에 실어 일본 본국으로 이동하는 것을 미국의 폭격기가 침몰시켰고
이것이 서해바다 군산시 옥도면 선유도리 남방 5km 해상에 있던 것을
2011년 인양한 주화(동전) 106만567개, 무게 4.068kg의 일부를 전시해 놓은 것이다.
실제로 군산조선은행의 금고로 사용했던 곳을 조선은행에 대한 기록물 전시실로 꾸며놓은 곳이다.
집이나 건물을 새로 짓거나 고친 내력, 공역 일시 등을 적어둔 문서를 상량문이라고 하는데...
왼쪽은 미즈상사의 상량문이고 오른쪽은 18은행의 상량문이다.
미즈상사의 상량문에는 1936년(소화 11년) 9월 8일 상량되었다는 내용과 당시 공사관계자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구 미즈상사는 본래 박물관 바로 앞에 위치하였는데, 2011년 현재의 장소로 옮겨졌다.
18은행의 상량문은 긴 나무판 앞면과 후면에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1911년(명치 44년) 9월 3일에 상량하였다는 내용과
당시 은행지점장, 공사를 주관한 감독기사, 작업기사의 이름이 적혀있다.
미즈상사는 현재 미즈커피로 1층은 카페테리아 2층은 북카페로 사용되고 있고,
18은행은 현재 군산근대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층 전시장 가운데에는 대형 바닥스크린이 설치되어 있고...
군산근대미술관 개인전에서 먼저 만난 강용면 작가의 "민족의 함성(2021)"이 전시되어 있다.
오천년 역사에서 우리 민족을 위해 도움 주신 여러 나라의 인물 및 캐릭터와
대한민국의 건국을 위해 공헌한 독립유공자의 인물을 표현한 작품이다.
재미있는 과제도 쓰여있다. "독립운동가 12명을 찾아 보세요"
김구 / 김좌진 / 안중근 / 유관순 / 이봉창 / 신채호 / 안창호 / 윤봉길 / 이상재 / 조봉암 / 한용운 / 홍범도
찾아보고 싶었지만 찾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관람객 아무도 찾지 않는다. 너무 어렵다. 날 새것다.
실제 12명 다 찾은 사람이 있는지 궁금하다. 찾는 것이 의미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이럴바에 12군데 핀조명을 주고 근처에서 찾도록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금고실 옆 지점장실은 조선은행 군산지점의 지점장의 사무실로 사용되었던 공간으로
현재는 "유물로 보는 조선은행"을 보여주는 전시실이다.
잊지 말아야 할 역사적인 경술국치(1910)를 기억하기 위한 전시공간으로 일본제국주의 침략의 역사를 증언하는 공간이다.
"폭력과 저항의 기억" 김홍렬 독립운동가가 입었던 피가 묻어있는 의복이 전시되어 있다.
또 독립군을 처형하는 일본군의 잔인한 모습이나 일제강점기 일본의 만행과 위안부 관련 사진자료도 전시되어 있다.
지점장실 그 옆 응접실은 조선은행 군산지점의 지점장을 방문한 손님을 맞이하던 공간으로
현재는 "조선은행과 군산의 삶"을 보여주는 전시실로 사진과 영상으로 근대군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군산항이 개항되고 군산은 일본의 조선침략의 발판이 되었다. 이어서 수탈을 위한 근대화란 멍에가 자리잡았다.
여전히 아름다운 금강을 품고 있는 군산이지만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모습에서 아직도 아픈 역사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 상처와 고통을 지워서는 안 될 것이다. 더 깊숙이 뼈속 깊이 기억하고 간직해야 할 바로 우리의 역사인 것이다.
대한민국의 그야말로 눈부신 성장과 발전 그 이면에는 내나라 내민족을 위해서라는 희생정신이 깊이 자리하고 있다.
예전에 아주 친한 미국인 친구가 갸우뚱거리며 내게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었다.
한국사람들은 아무리 가족이라지만 어떻게 설날이나 추석 때 종교가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식사하고 웃을 수가 있는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외국에서는 종교 때문에 전쟁도 하고 나라가 찢어지기도 하니... 한국인들의 명절날 모습이 진풍경이 될 수도 있겠다 싶다.
우린 나라를 잃어본 적이 있어서 그것을 되찾기 위해서는 모두가 한마음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항상 나보다 우리가 앞섰다.
재미있는 전시물도 있다. 옛날 군산부청과 군산감리교회의 창문도 전시해 놓았고 당시 사용하던 변기도 전시해 놓았다.
사실 근대건축(Modern Architecture) 혹은 모더니즘 건축은 19세기 이전의 전통적인 건축 양식을 비판하고
시민 혁명과 산업 혁명 이후 사회의 현실에 맞는 건축을 만들려는 근대 건축 운동이다.
일제에 의해 조선 수탈의 목적으로 각종 근대건축물들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졌던 것이지
1차대전 이후 유럽의 건축물과 모더니즘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후 모더니즘에 대한 반동으로 포스트모던 사조가 탄생하였으며,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반동으로 네오모더니즘이 태어났다.
도시가옥 주거형태
일제강점기 군산 일본인 거류지에 발달하였던 도시형 가옥형태로 도로가에 상점을 겸하는 구조로 건축되었다.
장옥(주거형) : 여러 채의 주택이 나란히 한 통으로 건축되어있는 구조
정옥(상가형) : 도로에 면한 주거형식으로 보통 점포가 있고 점포 옆은 전정이라고 하는 공터가 있어 전면 3칸의 구조
독립가옥 : 여러개의 방과 화장실, 부엌 등이 있었으며 내부로의 연결은 마루가 깔린 복도가 그 역할을 하였다.
불이 농촌 가옥
이 가옥의 형태는 논 한가운데 집단으로 거주하는 방식으로,
명목상으로는 한국인을 위하여 쌀 생산량증대를 위한 방침이었지만,
실상은 조선의 농토와 인력을 최대한 생산성 있게 활용하려 했던 일제의 농촌침탈의 일면을 보여주는 구조이다.
군산세관 / 감시탑
군산항을 개항한 대한제국은 1906년 인천세관 군산지사를 설립하고, 1908년 이 건물을 준공했다.
붉은 벽돌 등 건축자재를 수입하여 유럽 양식으로 건축하였으며, 본관 이외에도 많은 창고들과 부속건물들이 있었다.
이관은 붉은 벽돌이지만 내부는 목조로 지어졌으며, 슬레이트와 동판으로 지붕을 올리고 그 위에 세개의 뾰족한 탑을 세웠다.
이제 1층의 관람을 마치고 계단으로 2층으로 올라간다.
"터의 기억을 살피다" 조선은행이 관망하던 그때의 군산이야기
군산에 조선수탈의 목적이지만 많은 근대화 시설이 들어서고 일본인도 조선인도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몰려들었다.
의도야 어찌 되었든 친일이라고 부르든 아니든 많은 이들이 일본인의 앞잡이가 되고 부역자가 되어 군산에서 살아갔다.
그런데 군산은 수탈의 현장이었지만 저항의 도시였기도 했다.
군산이 사실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다.
군산에 3.1운동 100주년 기념관이 있는 이유가 있다.
사실 3.5운동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긴한데... 전북에서는 거의 압도적인 스케일을 자랑한다.
이에대한 군산시민의 자부심도 크다.
이영춘 가옥
이 집은 구) 개정병원 본관 동쪽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는데 1920년대 일본인 대 지주 구마모토가 지은 개인별장으로
외부형태는 유럽의 주거형식을 따르며 평면의 구조는 일식의 중복도형 바닥을 바탕으로
서양식의 응접실과 한식 온돌방이 결합된 절충식 구조를 보여준다. 지금은 군산간호대학 내에 있다.
구마모토 리헤이(熊本利平, 1879~1968)는 군산 최고의 농장주로
1932년의 경우 농장 소유 논이 3천5백정보로 여의도의 10배가 넘는 규모였다.
당시 조선의 논은 일본의 십분의일도 안되는 가격으로 거래되어 4배가 넘는 높은 토지 이윤율을 보장해주었다.
저렴한 지가와 높은 토지이윤율로 인해 군산지역은 일본인의 토지 침탈이 집중되었다.
1935년부터 한국의 슈바이처 쌍천 이영춘 박사가 이 건물을 위탁 관리하고 거주하면서 이영춘 가옥이라 불리게 되었다.
빼앗긴 땀과 빈 들판
정조(正祖)는 백만석이 부두에 쌓였더니
여름도 나기 전에 다 어디로 가았느뇨
산머리 움막 집에선 배고프다 울어라... <이병기 - 군산항 중에서>
정조: 물때와 관련된 용어로 물이 다 차서 만조가 되면 물의 흐름이 멈추는 시간을 정조시간이라 부른다.
동국사 대웅전
이 건물은 개항 후 일본인과 함께 들어온 일본 조동종 사찰인 금강사의 불전으로 건립하였으나,
광복 후 조계종 사찰 동국사로 변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과 승려들이 거처하는 요사채는 복도로 연결되어 있고 지붕 물매는 급경사를 이루며,
건물 외벽에 미서기문이 설치되어 있는 등 일본 사찰 건축양식을 따랐다.
법당 내부가 일부 변경되었지만 대체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구) 조선미곡신탁 주식회사 사택
이 건물은 1935년 당시 미루보시 통운 지점장 사택으로 지은 것으로 전형적인 일본식 주택구조이다.
정원이 잘 가꾸어져 있고 일본 건축양식인 겹처마를 이루며 현관과 복도를 따라 방과 욕실, 창고, 화장실을 갖추고 있다.
신흥동 일본식 가옥 (히로쓰 가옥)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군산에서 포목점과 소규모 농장을 운영하며 부협의회 회원을 지낸 일본인 히로쓰가 건립한
일본식 2층 목조가옥이다.
'ㄱ'자 모양으로 붙은 건물이 두 채 있고 두 건물 사이에 꾸며놓은 일본식 정원에는 큼직한 석등이 있다.
1층에는 온돌방, 부엌, 식당, 화장실 등이 있고 2층에는 일식 다다미방과 도코노마 등이 있어 일제강점기 일본인 지주의 생활양식을 엿볼 수 있으며 아울러 이들의 농촌 수탈 역사를 알 수 있다.
영화 "장군의 아들"과 "타짜"를 촬영하기도 하였다.
조선은행 군산지점은 1922년에 건설된 것으로 벽돌조 은행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건물은 지방의 다른 은행들과 비교해 볼 때 매우 큰 규모이며 건립 당시에는 군산에서 가장 높은 건물 중 하나였다.
2층의 기능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건물을 2층으로 계획한 것과 층고를 높게 하고,
지붕층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지붕부를 높게 구성한 것 등을 볼 때
기능을 고려하기보다는 건물을 과시하고자 했던 의도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인 외관은 사각형 평면에 우진각 지붕을 올린 단순한 형태로서 서양식 고전적 건축의 모습을 취하면서도
장식을 절제하는 등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였던 근대분리파 양식을 따르고 있다.
기초부, 축부, 지붕부의 높이와 구성은 안정적인 비례감을 보여주고 있다.
정면 중앙부에 포치를 돌출시키고 지붕 중심에는 커다란 반원형 도머창을 계획하였으며,
양끝의 벽체를 다른 벽체보다 약간 튀어 나오게 함으로써
중심성을 강조하여 건물의 수직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리듬감을 부여하였으며,
창호부분은 수평 돌림띠를 여러 겹으로 돌려 부분적으로 장식하였다.
건물 외관에 사용된 화강석, 타일, 테라조, 함석 등은 재료적 대비를 이루며 일부에는 붉은 벽돌을 사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보편적이지 않았던 자기타일을 ㅂ붙여 마감하였다.
구조는 벽돌조로서 하부에는 콘크리트로 줄기초를 쳤으며 2층 지붕부는 목조트러스로 구성하고,
금고, 지점장실, 부속공간의 지붕은 평슬래브로 처리하였다.
목조트러스의 형태와 구성 방법은 국내 근대건축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희소성을 지니고 있다.
바로 옆에는 1920년대의 조선은행 군산지점과 비교하여
1980년대 나이트클럽 "플레이 보이" 록카페 "뉴욕뉴욕" 그리고 노래연습장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의 외관을 비교해 놓았다.
군산근대건축관은 조선은행 군산지점의 건축물 뿐만 아니라
군산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근대건축물들의 모습을 아주 높은 싱크로율의 미니어져로 미리 만나볼 수 있다.
군산시간여행을 본격적으로 떠나기전 먼저 방문해서 미니어쳐로 근대건축물의 외관과 중요한 특징 등을 미리 알고 간다면
찾기도 수월하고 특징을 찾아가는 재미도 함께 느껴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처럼 시간적 제약으로 군산의 근대건축물들을 모두 돌아볼 여유가 없다면 더더욱 꼭 방문해서 미니어쳐라도 만나보길...
군산에는 생각보다 방문해야 할 근대건축물들이 꽤 많이 있다.
건물마다 아픈 기억, 수탈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지만
당시의 치열했던 시간들 너머로 이제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다.
군산시간여행은 오늘을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많은 생각의 물음표를 던져준다.
그런 의미에서 군산근대건축관에서 만나는 군산시간여행은 한 장소에서 만나는 과거와 현재의 진솔한 만남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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